Blind Faith, "Can't Find My Way Home"
https://www.youtube.com/watch?v=zVzLyhWRAy8
요새 블루스 록에 꽂혔다. 최근에 하헌진 씨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하헌진 씨 공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정말 좋았고 또 아무래도 내가 블루스 라이브 녹음들은 별로 들어보지 않은 것 같아서 들어보려고 결심하고 있다. 이건 라이브는 아니지만... 블라인드 페이스 곡 중에서 좋아하는 Can't Find My Way Home 일렉트릭 버전이다. 블라인드 페이스 앨범 디럭스 버전에 있다. 애플뮤직에서는 들을 수 없다.
종교적 가사가 돋보인다. wasted라는 가사에 주목해서 마약을 다룬 곡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나는 조금 넓은 맥락에서 읽고 싶다. 비슷하게 구원을 다룬 "Presence of the Lord"도 좋아하는 곡이다. 첫 시작부터 다른 곡들보다는 비교적 밝은 코드로 진행되고 있고, 도입부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라이드 심벌 소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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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탈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샹탈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2019.
목차: (1) 포퓰리즘 계기 (2) 대처리즘의 교훈 (3) 민주주의를 급진화하기 (4) 대중의 구성
“그러나 유럽에서 민주주의를 말할 때, 우리는 구체적인 모델을 언급하게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 원리를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 새겨 넣는 작업을 통해 발생하는 서구의 모델로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대의민주주의, 입헌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다원 민주주의와 같이 말이다.
이 모든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전통의 접합을 통해 특징지어지는 정치 레짐이다. 두 전통 중 하나는 법의 지배, 권력 분립, 개인의 자유 보호와 같은 정치적 자유주의 전통이고, 다른 전통은 평등과 대중주권이 중심 사상인 민주주의 전통이다. 이 두 전통 사이에는 필연 관계가 아니라, 오직 우연적인 역사적 접합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우연적인 접합은 CB 맥퍼슨이 설명하듯이, 절대주의에 맞선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의 공동 투쟁을 통해 발생했다.”(28쪽)
무페가 말하는 포퓰리즘 계기란… 민주적 자유주의 정치는 대중주권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이상과 권력 분립, 개인 자유 보호라는 자유주의적 이상의 경합과 협상 과정인데, 여기서 ‘민주주의’가 심각히 축소된 현 상황은 “포스트 민주주의”(원래는 콜린 크라우치가 제안한 용어)라고 불릴 수 있다. 대중주권이 축소된 이유는 “탈정치”(주류 정당이 인민을 대표하지 못하고, 중도적 합의에만 갇히는 현상. 무페가 보기에 이것은 정치의 경합하는 본성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 33쪽) 혹은 “지구화”와 “과두제화”(33쪽). “‘포퓰리즘 계기’가 파악되어야 하는 지점은 바로 대중주권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이 침식되고 있는 포스트 민주주의 상태이다.”(34쪽) 포퓰리즘은 우파 진영에서 먼저 발생했는데, 이런 우파 포퓰리즘에 맞서는 전략으로 무페가 제안하는 것은, 좌파가, 충동적이어 보이는 우파 포퓰리즘의 지지자들의 “수많은 요구들 한 가운데에 있는 민주적 핵심을 찾아내” 전유하는 좌파 포퓰리스트 전략이다(40).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은 대처주의로부터 찾을 수 있다(대처주의의 교훈). 무페가 보기에, “그녀는 정치의 당파적 본성과 헤게모니 투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50쪽) “사회민주주의 헤게모니에 대한 맹공을 퍼부으면서, 마거릿 대처는 ‘상식’이라 고려되는 것들을 담론적으로 재배열하고, 그 상식에 달린 사회민주주의 가치들과 싸우기 위해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전선에 개입했다. 주요 목표는 자유주의, 그리고 맥퍼슨이 말한 것처럼 자유주의를 ‘민주화’시킨 민주주의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53쪽) “이 이데올로기적 전략[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담긴 또 다른 움직임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었다.이것은 민주주의를 ‘자유’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자유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관념은 개인의 자유라는 관념보다 부차적이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와 사적 소유에 대한 방어는 특권적 가치로서의 평등에 대한 방어를 대체할 수 있었다.” (54쪽. 강조 본인) 대처가 재임 시 한 가장 훌륭한 업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한 말: “토니 블레어와 신 노동당이죠. 우리는 우리 적이 마음을 바꾸도록 힘을 썼죠.”(56쪽)
민주주의를 급진화한다는 것은? “우리[무페, 라클라우] 관점에서 볼 때,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가진 문제는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구성 원리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좌파의 임무는 이 원리들을 철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원리들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싸우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옹호하는 ‘급진 다원 민주주의’는 기존 민주주의 제도들의 급진화로 이해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자유와 평등 원리들은 점차 증가하는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효과적이게 되었다. 이 작업은 토대의 완전한 재구축을 암시하는 혁명적 형태와 급진적으로 단절할 거슬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급진 다원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전통이 가진 상징적 자원들을 끌어내 오는 내재적 비판을 통한 헤게모니적 방법으로 성취될 수 있었다.” (68쪽)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 등 광장의 구호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 기표가 정치적 상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증거이다.”(70)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 전략을 급진적 개혁주의, 혹은 혁명적 개혁주의라 이름 붙인다(76쪽). 이는 ‘극좌’의 혁명적 전략과는 다른데, 첫째로 무페의 전략은 국가를 탈취하거나 제거해야 할 억압 기구가 아닌 “세력 관계의 결정화crystallization이자 투쟁의 지형”으로 파악하고(77), 둘째로 극좌 ‘혁명’ 전략과 달리 자유민주주의의 ‘합법성 원리’를 수용한다. (자유민주주의적 원리와 단절해야 한다는 일부 극좌의 오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 제도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사이”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이론적 혼란 때문이라고 무페는 정리한다. “이 접합은 우연적인 것이다.” 79쪽; “오늘날 광범위한 민주주의 요구들을 진전시킬 수 있게 되는 곳은 바로 자유주의 국가에 있는 원리들—권력 분산, 보통 선거권, 다당제, 시민권—의 틀 안에서이다. 포스트 민주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이 원리들을 철회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고 급진화시키는 것이다.” 80쪽)
“이것이 다양한 국가 기구들을 전환시켜서 국가를 여러 민주주의 요구들을 표현하는 매개물vehicle로 만들기 위해서 헤게모니 전략이 이 기구들과 연관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중요한 것은 다원주의를 조직화해 가는 국가와 제도들이 ‘서서히 약해져 가는 것’withering away이 아니라, 이 제도들을 민주주의의 급진화 과정에 맡기기 위한 심도 깊은 전환이다. 목표는 국가 권력의 장악이아니라, 그람시가 말한 대로, ‘국가가 되는 것’이다.”(78)
“시민들의 목소리를 빼앗는 것은 대표성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 경합적 대결의 결핍인 것이다. 해결방안은 대표성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제도를 더욱 대표적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좌파 포퓰리즘 전략의 목표인 것이다.”(91쪽) 이런 맥락에서 추첨으로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려는 제안이 비판적으로 검토된다: “대의제는 이러한 갈등적 차원의 제도화를 고려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90)
대중이라는 정치적 주체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이게 4장의 질문이 될 수 있는데, 무페는 그것을 ‘시민’이라는 어휘로 정리하려고 한다. (민주주의적 의미의) 시민권이란 “일반적 이해관계에 대한 특정한 생각에 따라 정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우리’의 일부로서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된다.”(101) 여기에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은 “이 전략이 국민적 차원에 부여하는 역할에 대한 것이다.” (109) 이에 대한 응답은 민주주의적 급진화는 국민적(혹은 국민국가적) 수준에서 먼저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민적 차원의 집합 의지가 공고화된 후 다른 국민국가의 운동과 연대하는 것은 생산적일 수 있지만,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국민적 형태의 동일화 과정에서 작동하는 강력한 리비도적 투여를 무시할 수 없”다(110). 이것은 곧 샹탈 무페가 대중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감정(정동affect)적 실천을 중시하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리차드 로티가 자주 강조했듯이, 비트겐슈타인적 관점은 민주주의에 대한 충실함과 그 제도의 가치에 대한 신념이 민주주의에 대한 지적 토대의 제공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도록 한다.”(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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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inson (2016). “Intersectionality.” [상호교차성].
Robinson, Zandria F. 2016. “Intersectionality.” Pp. 477-499 in Handbook of Contemporary Sociological Theory, edited by S. Abrutyn. Springer.
요약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용어는 주로 흑인 여성들의 차별과 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사회학은, 문학이나 여성학 같은 인접 학문보다는 느리지만 1980년대 이후 꾸준히 교차성 개념을 사회학 학술 장 안으로 통합시키고 제도화해 왔다. 그런데 교차성 개념은 학술 장만이 아닌 미디어와 활동가들에게, 주류 페미니즘의 맹점을 지적하고 흑인 여성들의 생생한 삶의 경험을 전달하려는 용도로도 많이 쓰여 왔다.
교차성 개념의 기원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교차성이라는 단어만 쓰이지 않았을 뿐이지, 교차성의 기원이 되는 흑인 여성들의 경험은 자주 증언되어 왔다. 노예 흑인 여성들은 그들이 아이를 낳을 인적 자본인 동시에 집안일 등 재생산 노동을 하는 역할에 놓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이들을 보호받아야 하는 여성도 아니고 단순한 노동자도 아닌 위치로 만드는 것이었다(479). 20세기 초의 국가적 여성 투표권 운동에서 흑인 여성들은 또다시 여성 문제와 흑인 문제 사이의 복잡한 공간을 발견하였고, 흑인 여성들은 그들의 고유한 단체를 만들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480-81). 20세기 중반 이후, 흑인 민권 운동에서 여성과 교차성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과 여성 해방 운동에서 백인 여성들이 중심이 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며 CRC(Combahee River Collective)라는 흑인 여성 활동가, 사상가들의 단체가 창립되었다. GM 모터스에서 흑인 여성이 젠더에 대한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차별에 반발한 운동도 이 때 일어났으며, 교차성이라는 단어를 만든 크렌쇼(Crenshaw)는 이를 억압의 네트워크의 교점에서 발생하는 여성들의 삶을 생생히 예시하는 사례로 분석하였다(481-82).
여성들의 운동, 삶의 증언 뿐만이 아니라 흑인 사회학자들도 교차성 사상의 기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근 안나 줄리아 쿠퍼(Anna Julia Cooper), 두 보이스(W.E.B. Du Bois), 웰스-버넷(Ida B. Wells-Barnett)이라는 세 사상가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이중 19세기 후반 쿠퍼의 작업은 본격적으로 단행본 길이로 흑인 여성 삶만의 고유한 인식론적 프레임을 제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두 보이스의 작업은, 다른 두 여성보다는 계급과 구조의 문제에 천착했지만, 인종이 어떻게 경제적인 문제와 상호작용해 흑인에게 독특한 억압을 만들어내는지 보여 주었다. 웰스-버넷은 저널리스트였는데, 그녀의 작업은 당시로서는 방법론상의 혁신(내용 분석과 통계의 결합 사용)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흑인 남성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성적 담론을 해체하는 작업을 했고, 이런 방법은 이후 “복지 여왕(welfare queen)”과 같은 담론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에도 쓰였다(483-85).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운동 역시 투표권, 민권 운동 이후 교차성 개념의 맥락에서 중요한 성명서, 저작 등을 발표해 왔다. 예컨대 좌파 운동가인 클라우디아 존스는 노동 운동이 가사 노동 역시 다루라고 요구했고, 많은 흑인 여성 운동가들은 민권 운동의 한복판에서 흑인 여성의 고유한 경험들이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민권 운동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운동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적했다(485-86). 흑인 여성들은 그들이 겪는 고유한 인종과 여성에 대한 억압이 교차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성적 폭력(가정 내 폭력 혹은 동의 없는/강제적인 불임화sterilization)에 대해서도 이론화했다(487-88). 그동안 흑인 여성의 고유한 경험을, 인종에 따른 차별과 계급에 따른 차별과 비슷한 것으로 인식하는 은유들은 많아 왔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그런 식의 이론화는, 권력의 구조 속의 위치 속에서 어떻게 억압이 작동하는지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할 이론적 언어가 요청됨에 따라 인기를 잃게 된다.
흑인 여성들의 조직화는 교차성 개념이 성장하는 데에 주요한 마중물이 되었고, 흑인 여성들의 액티비즘은 1980년대에 학계가 교차성 이론을 제도화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80년대 교차성 이론이 확장되며 사회학과 인접 인문학에 있어 교차성을 연구하는 데에 인식론적, 방법론적으로 다른 관점도 드러나게 된다(491).
교차성의 여러 가지 접근으로는, 맥콜(McCall)이 다음과 같이 분류하는데[McCall, L. (2005). The complexity of intersectionality. Signs, 30(3), 1771–1800.], (1) 반-범주적 접근(차이의 수행에 방점); (2) 범주 내적 접근(카테고리 범주 내의 차이에 방점); (3) 범주 사이 접근(바운더리의 형성 자체가 어느 정도 헤게모니 구조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감안)이 있다. 한편 교차성 접근이 사회학 내에서 제도화되면서, 사회학이 기존의 계층 연구에서 쓰이던 방법론에 교차성 개념을 통합시키며 교차성 이론의 복잡한 측면을 무시하게 된 경향도 있다(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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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이 끄집어낸 고종석의 속엣말』(삼인) 독서.
『황인숙이 끄집어낸 고종석의 속엣말』(삼인) 완독. 우연히 고종석 씨가 뇌출혈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의 소식이 궁금해 신간인 인터뷰집(?)을 읽어 보았다. (요새 참 남들 안 읽는 책만 골라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런 사담(私談)을 책으로 낼 생각한 기획자는 누구였을까 하는 것. 가감과 수정이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황인숙과 고종석이 사적 자리에서 이야기 나눈 것을 그대로 옮긴 포맷을 띠고 있다.
이 책은 다음 의미에서 흥미롭다. 첫째, 신영복 씨가 돌아가고 난 후 경향신문 칼럼('연쇄편지마'라는 별명을 안겨 준) 게재를 사실상 거부당한 고종석 씨의 편지가 실려 있다. 편지에 대해 더 이야기하자면 고종석 씨가 소셜 미디어 상에서 욕을 많이 먹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엠마 왓슨에게 보내는 편지였는데 책 초반부에 이에 대한 술회도 나온다. 고종석 씨는 이게 왜 맨스플레인인지 반문한다. (그 편지는 책에 실려 있으니 굳이 경향신문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편지 이후 허핑턴포스트에 N(정황상 노정태 씨)이라는 사람이 상당한 비판을 했는데 그것에 대한 고종석 씨 개인의 생각 내지는 감정도 기술이 되어 있다.
뭐 TMI 투성이인데 그냥 인터뷰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TMI라는 점이 이 책이 흥미로운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고종석 씨가 갑자기 불어 얘기를 하다가 내 불어는 명교라는 사람의 수준에 한창 못 미치는데 트위터 상에서 명교의 오역을 재담삼아 지적했더니 친했던 사이였던 명교가 그 후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렇다면 명교는 누구인가. 여기서 독자는 각주를 통해 명교가 연세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정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아마도 편집자가 붙였을 법한 각주는 고종석 씨와 황인숙 씨의 대화에서 안주삼아 등장하는 그들의 50년대 후반생 친구들을 잘 모르는 독자에게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참여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직을 맡았던 강금실 씨도 나오고 뭐 그런다. 고종석 씨와 황인숙 씨의 사회연결망이랄지 그런 걸 책 부록의 인명색인으로 한결 편하게 살펴볼 수도 있다. 이게 책의 세 번째 흥미로운 점 같다.
고종석 씨는 뇌출혈 이후에 담배와 술을 못 하게 되었는데 담배를 못 피우니 글을 못 쓰겠다는 것을 반복해 말하고 있다. 이걸 읽고 건강관리를 잘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담배가 없으면 글을 못 쓰는 것이 참 고약한 습관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뇌출혈 이후 우리말과 외국어를 비롯하여 어휘를 자꾸자꾸 깜빡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형식이 인터뷰 대담이라 그런지 글을 못 쓰게 된 글쟁이의 비감 같은 것은 잘 느껴지지 않았고 그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것이 궁금해서 책을 빌린 것인데도 말이다.
아마도 고종석 씨가 2012년 쯤인가 경향 칼럼에서 절필을 선언했기 때문에--그리고 그 뒤로 드문드문 글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왕성하지는 않았으니--글쓰기에 큰 미련을 두지 않는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다. 이런 추측을 또 뒷받침해주고 개인적으로는 고종석 씨의 현실 감각을 약간 의심하게 한 대목이 있는데, 그는 2012년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안철수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당연해 보였으니 박-문-고 삼파전을 구상했다고. 사실 이게 책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역차별과 영남패권주의의 혁파였고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한국 사회의 정치 구조를 내각책임제로 개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책에 나온다.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 전자책으로 나온 팸플릿인 <기어가는 혁명을 위하여>일 것이다.
언어학도이자 기자였던 그가, 조직도 없고 경험도 없음에도 대선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나 그 생각의 궤적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관심을 끈 것 같다. 이 분의 현실 인식과 자아 인식이란 어떤 것이었을까...(비꼬는 것이 아니다.) 인터뷰라 뭔가 아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대선에 나가서 사회를 바꾸겠다는 그런 얼마간은 얄팍한 생각이 오랜 기간 저널리스트로 일했던 사람에게서 나왔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어쩌다보니 이번 독서는 노정태의 <논객시대>의 연장선상이 된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대담의 마지막에서 고종석 씨는 누구나 다 아는 대가의 이름을 들며 파리 유학 시절을 낭만적으로 회고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와 사적 교분도 쌓았고 당시 무슨 총리와도 만찬을 함께했다고 한다. 데리다가 살아 있을 적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회고를 보고 이런저런 감정이 들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지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기억할 만한 일이고, 유학 경험이 있는 이들은 그런 일화들을 다소간은 맥락 없이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이제 글을 쓰지 안 혹은 못 하게 된 왕년의 '논객'이 대담에서 한 회고로는 사뭇 처연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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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런 러니어, 『지금 당장 당신의 SNS 계정을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
재런 러니어, 『지금 당장 당신의 SNS 계정을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 신동숙 옮김, 글항아리, 2019.
제목 그대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 그런데 10가지 이유라고 한다면 각 장(章)들 별로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내용은 연속적이다. 따라서,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는 관심 있는 장부터 읽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이 책을 읽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의 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중간중간 내용 이해가 쉽지 않다. 재런 러니어는 실리콘 밸리의 구루라는데 아무튼 원래 글쓰기 스타일이 이런지 좀 횡설수설하고(각 장의 논점을 감잡기가 쉽지 않다. 특히 7장이 그렇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의 문제를 지적할 때 그것의 작동 원리를 다시 보충 설명하며 예시를 드는 것이 아니어서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다. 읽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참고하기 바람.
아래는 요약.
소셜 미디어가 일으키는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행동 수정을 유도한다는 것이다(논점 1).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에는 적응성이 있어서, 알고리즘은 사용자들이 더 잘 반응하는 내용을 보여 주거나 하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런 알고리즘은 중독을 일으키는데, 왜냐하면 알고리즘은 “뇌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데 가장 효과가 큰 매개변수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31쪽). 보통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두려움, 적대감, 불안, 분노, 혐오, 질투, 조롱하고 싶은 욕구”, 34쪽)이 사용자들의 관심을 끌고 행동을 수정하기에 효과적이기 때문에 페이스북 같은 회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보통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띄우는 식으로 메커니즘이 변화하기 마련이라 한다.
저자는 이런 행동 수정을 유도하는 알고리즘을 이용하는 서비스를 정리해 “버머Bummer”라고 부른다(논점 2). 버머는 Behaviors of Users Modified, and Made into an Empire for Rent의 약자이다. 버머의 작동에는 다음 여섯 가지 메커니즘이 있다: (A) Attention acquisition 즉 관심 얻기. 소셜 미디어 환경에서 평범한 이들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관심이다. 버머는 “관심 종자 근성을 유도”한다(55). (B). Butting into everyone’s lives. 모든 이들의 삶에 끼어들기. 버머는 스마트 기기로 사람들의 데이터를 스스로 혹은 앞서 말한 관심 유도를 활용해 수집한다. (C) Cramming content down your throat. 콘텐츠를 당신의 목구멍에 쑤셔넣기. 알고리즘은 각 개인에 맞춘 콘텐츠를 제공한다(=개인화). (D) Directing behaviours in the sneakiest way possible. 행동을 교묘하게 유도하기. 앞의 메커니즘들이 통합되어, 행동 수정의 장치를 구성한다. “사용자의 관심과 집중을 유도하는 데 최적화된 맞춤형 피드가 각 사용자들에게 전달되는데, 이런 맞춤형 피드는 감정에 강력한 자극을 주는 것이 많아서 중독을 유발한다”(57쪽). 사람들이 중독되면 버머는 행동을 수정하기 더 용이해진다. 예: 누군가 온라인에서 특정 종류의 글을 볼 때마다 슬퍼진다면, 알고리즘은 비슷한 글들을 제공해 그런 유형을 더 보게 한다. 이런 결과들이 통계적으로 누적되면 다음에서 설명할 것처럼 광고주 등이 자신의 이익을 얻는 데에 버머를 활용할 수 있다. (E) Earning money from letting the worst people secretly screw with everyone else. 최악의 놈들이 다른 이들을 조종하는 걸 내버려두며 돈을 벌기. 대표적인 것이 2016 미국 대선 당시의 페이스북이다. (F) Fake mobs and faker society. 가짜 군중과 가짜 사회. 행동 수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버머에는 가짜 사용자들이 많다(예: bot).
(이 부분은 다음 가디언 기사에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 https://www.theguardian.com/technology/2018/may/27/jaron-lanier-six-reasons-why-social-media-is-a-bummer)
저자가 일부러 외우기 쉽도록 특성을 A부터 E까지 적어 놓았는데, 사실 핵심적인 특성은 D와 E이다.
소셜 미디어(버머)는 사람들을 군중심리에 더욱 취약하게 만듦으로써 관심 등의 단순한 심리적 보상만을 좇는 “꼴통”이 되게 한다(논점 3). 소셜 미디어의 가짜 계정들(F)은 진실을 훼손한다(논점 4). 가짜 여성 계정으로 사이트를 홍보하고 회원제 가입을 유도한 애슐리 매디슨이 대표적이다. 소셜 미디어의 가짜 계정들이 가짜 뉴스를 만들어 증폭시킨 뒤 이런 것들이 폭스 뉴스 같은 편파적 주류 미디어에 등장해 ‘진실’이 되는 것 역시 버머의 폐해이다(97-98쪽). 소셜 미디어는 맥락이 삭제된 일화들이 왜곡되어 널리 퍼지기 좋은 환경이다(논점 5). 버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성향을 원료 삼아 작동하고 또 불쾌한 감정이나 자극적인 내용들을 더욱 잘 퍼뜨리게 만드는 알고리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언론 등 매체 역시 버머의 알고리즘에 맞춰 의도적으로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일화만 부각된 기사를 퍼뜨리기 쉽다(110쪽).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논점 5에 잘 어울리는 사례는 인터넷 언론 ‘인사이트’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글 중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통찰은 다음과 같다. 버머의 개인화 기능(C)은 “공적인 공간이라는 차원”을 사라지게 한다(논점 6). 무슨 말이냐면 이렇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경험의 기반을 공유하”는데, “동호회에 들고,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고, 예배나 미사 같은 종교 의식에 참석하는” 것이 그 예이다(123쪽). 그런데 개인화 기능은 경험의 공유를 어렵게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쉽다. “사람들이 모두 다른 자기만의 세상을 보고 있을 때는 서로 간의 이런 역할의 의미가 없어진다. 버머 플랫폼을 벗어나서 실제 현실을 자각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122쪽)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종종 더 우울해짐을 느낀다(논점 7). 버머의 전략은 “사용자들의 참여 최대화를 목표로 시스템이 자동 조절되”게끔 하는 것이므로, “분명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 방법을 찾으려 들 가능성”이 클 것이다(136쪽).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안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사용자들을 유도한 버머는 사용자들의 이용 데이터를 수집해 특정 범주로 분류하고, 그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알고리즘을 만들어 그것을 광고주들에 팔아 먹는다. 그런 알고리즘이라 함은 “가령 어떤 광고, 어떤 뉴스, 가족들에게 받는 소식에 섞여 나오는 어떤 귀여운 고양이 사진이 우리에게 특정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가를 가늠하는 것이다”(143쪽).
이런 버머의 수익 창출 전략은 논점 9(소셜미디어는 정치를 무력화한다)로 연결된다. 소셜 미디어, 버머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침식시키는데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게 제일 편할 듯하다. 바로 최근의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인데, 이 슬로건은 생기고 나서 소셜 미디어를 타고 널리 전파되었다. 처음에는 흑인 인권 운동이 힘을 얻는 듯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상에서 흑인 인권 운동 관련 콘텐츠에 반응하는 사용자들의 데이터가 수집되고 처리되었다. “무엇이 이들을 짜증나게 만드는가? 어떤 사소한 대상, 일화, 동영상 등이 이들을 버머에 묶어 두는가?” “그러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흑인 운동이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약 올리고 여타 인구 집단들을 경악시키는 능력이 있는가가 조사됐다. 다른 인구 집단들도 마찬가지로 알고리즘의 분석 대상이었다. 그러면서 알고리즘은 예전 같으면 서로 연결되어 집단적인 힘을 갖기 힘들었을 잠재적인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차별주의자 계층을 맹목적, 기계적으로 찾아 모았는데, 처음에는 그저 수익을 얻기 위해 자동적으로 시작한 활동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버머[가] 흑인 운동가들을 구조화하고 이들을 도발의 수단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알고리즘으로 계산한 바탕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188쪽). 요점은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 (수익을 얻기 위해) 흑인 인권 운동이 자극적으로 다가올 대상에게 관련 내용을 퍼뜨리거나, 혹은 광고주의 목적에 따라 특정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예: 힐러리 클린턴을 찍지 않게 하기 위해) 흑인 인권 운동의 몇몇 자극적인 순간을 유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흑인 인권 운동은 지난 미국 대선 당시 러시아에 의해 이용되었는데, 트위터의 저명한 흑인 인권 운동가가 사실 러시아에서 정보전을 위해 만든 가짜 계정이었던 것이다(190쪽).
앨런 래니어는 대안으로 돈을 내는 구독형 서비스를 제안한다(논점 8). 사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가 무료로 운영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적 기반은 ‘사이버히피’들이 추구하는 자유지상주의적 가치와 소프트웨어 무료 공개 운동이었는데(152쪽), 어쨌든 소프트웨어는 무료로 제공되어야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업가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자가당착은(156쪽) 이용자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행동을 수정하는 수단인 버머의 탄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검색이나 소셜미디어 같은 서비스가 직접 수익을 내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사용자들이 매달 약간의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 포스트나 동영상, 그 밖의 유용한 컨텐츠를 많이 올려서 기여할 경우 사용자들도 약간의 돈을 벌 수 있다. 현 시스템에서처럼 인기 있는 극소수 사용자들만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게 될 것이다”(159쪽). 이런 제안은 버머 기업(구글, 페이스북)의 서비스 생태계 속에서 활동하면서도 대부분의 이용자가 자신이 기여한 데이터에 대해 전혀 대가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역시 지적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소셜 미디어(social media)=SNS인데 번역을 할 때 아무래도 용어를 통일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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