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타키타니 (2004)

2019. 7. 8. 21:32

2019년 7월 4일 심심해서 본 영화. 학교 열람실에서 DVD 빌려 봤다. 

흥미로운 것은 토니 타키타니의 아내 에이코가 아닌 히사코가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흉내를 낸다는 점이다. 옷을 사는 것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아내의 대사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던 옷들이라고 울며 주저 앉은 히사코의 모습에서 아내의 옷 사기 습관은 사실 취미라거나 허영이 아닌 결벽증에 가까운 것임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토니 타키타니가 비로소 옷을 버리게 될 때는 이것을 자각한 이후이다. (아내가 입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내가 한 번 사서 입은 옷은 다시 잘 입지 않게 된다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아내 취미의 본질은 옷을 ‘사모으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내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에게 아내의 옷을 입힌다고 해서 아내가 재현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무엇이 부재하는지 알아차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셜 미디어를 끊기 위한 시각적 충격요법 - 소셜 딜레마 (2020)  (0) 2020.09.25
소공녀 (2017)  (0) 2020.08.10
주전장 (2018) 리뷰  (2) 2019.07.26
이른 봄 (1956)  (0) 2019.07.22
세계의 끝 여자친구: AKIRA 감상  (2) 2019.07.15

아난드 기리다리다스, 『엘리트 독식 사회』, 정인경 옮김, 생각의힘, 2019. 

굉장히 재밌게 읽은 책. 아래는 (긴) 메모들.



제1장 그러나 세상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힐러리 코헨이라는 한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빌 클린턴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인 1960년대와 70년대에 “많은 이들이 ‘시스템’, ‘권력’, ‘인류’ 등의 언어로 이루어진 사고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었다”(35). 그러나 이후 사회 변화에 대한 표준적 어휘는 상당히 바뀌었는데, “그 효과는 코헨이 발견했듯이 2010년대 초 조지타운에서도 감지되었다. … 이들은 문제를 해결할 최선의 장소로서 정부보다는 시장에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 … 예로부터 전해오는 젊은이 특유의 세계를 달리 해석하려는 충동은 이제 이 시대를 지배하는 관념에 의해 주조되고 인도되곤 했다.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본주의의 기술, 자원, 인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관념이 그것이다.”(38) 그러한 견해에 따르면, 사회 문제는 “부유한 기부자, 비정부 기구, 공공 부문 사이의 협력을 통해 해결되어야만 했다. 부자들을 공공 문제 해결의 지도적 위치에 배치한 이와 같은 방법이, 이들을 위협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저지하는 권력까지도 함께 부여한다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다.”(49)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민간 부문은 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사회 운동의 문법과는 많이 다른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새로운 센터에서 학생들은 사회적 가치 측면의 경력에 도움이 될 기금의 계획, 조직, 조성 방법을 배울 것이고, 소기업이나 비영리 기구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 육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들도 소개받게 될 것이다.”(비크 센터의 홍보물, 49쪽). “공공 행위를 통한 공공 문제의 해결, 예컨대 법을 바꾸고, 법정에 출두하고, 시민들을 조직하고, 정부에 억울함을 청원하는 일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49). 집합행위(collective action)에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ial spirit)으로의 변화. 

명문대인 조지타운의 다른 젊은이들처럼 1장의 주인공인 코헨 역시 컨설팅 회사에 취직하는데(조지타운 대학 학보사에 의하면, 조지타운 대학 졸업생 40%가 컨설팅, 금융 쪽으로 취직한다고 한다. 책 50쪽), 이것은 부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대기업들의 선전(e.g. 골드만 삭스의 “1만 명의 여성” 프로젝트, “소셜 임팩트 채권”) 때문이기도 했고, 또 비영리 부문, 비정부 기구들이 규모가 작고 체계가 없어 보이기도 해서였다. 코헨은 맥킨지에 취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로와 현실로 괴로워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대부분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조로운 업무들이었다. … 그녀가 접한 프로젝트 대부분은 여기서 비용을 깎고, 저기서 시장 진입 전략을 짜는 등 그저 보통의 기업 자문 업무였다.”(51) 

저자 기리다리다스는 “마켓월드MarketWorld”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었는데, 마켓월드는 “현 상태로부터 이익을 얻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일도 해내는 신흥 권력 엘리트의 세계다. 이 세계는 계몽된 사업가와 자선단체, 학계, 언론, 정부, 싱크탱크의 세계에 있는 그들의 동료로 구성된다. … 이들은 대중의 삶, 법, 그리고 사람들이 공유하는 시스템을 개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자유시장과 자발적 행동을 통해 사회변화가 추구되어야 한다는 생각, 자신들의 욕구에 적대적인 세력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승자와 그들의 동맹이 사회변화를 감독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현 상태의 최대 수혜자가 개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신봉하고 또 촉진한다.”(53) 마켓월드의 시장지향적 정신—주로 컨설팅 회사들의 조언과 자문에 의해 현실화되는—은 점점 많은 사회운동 부문에 침투하고 있는데(“코헨은 비즈니스 세계 외부에서는 이런 방법[컨설팅, 최적화]을 갈망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55), 예컨대 오바마는 퇴임 후 민주주의 문화 촉진을 위한 재단을 세우고 그 직원들을 매킨지의 컨설턴트들로 고용했다(57-58). 


제2장 윈윈 

이번 장에서는 마켓월드의 주요한 행동 논리 중 하나인 ‘윈윈’을 다룬다. 이는 곧 사회 변화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게임의 규칙이나 분배 룰을 개혁하는 것보다는 ‘덜 적대적인’, 모두에게 좋은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상적인 ‘윈윈’ 상황에서, “승자는 돈을 벌고, 좋은 일을 하고, 우쭐해하며, 어렵고도 자극저인 문제에 몰두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느끼고, 고통을 줄여가고, 정의를 전파하며, 국적을 넘나드는 이력서를 작성하고, 세계를 여행하고, 시선을 끄는 칵테일 파티 초대장을 얻는 등 다양한 묘미를 누릴 수 있었다.”(68)

이번 장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는 애셔로, 애셔 역시 다른 박애주의자들처럼 아프리카의 한 지역을 방문한 이후 주민들의 삶에 충격을 받고 자선 사업, 박애적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애셔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켓월드의 수많은 박애주의자들이 그렇듯이, 그녀도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소속된 기관들이 어떻게 하면 기존의 방식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기보다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이미 했을 수도 있는 것은 배제했다(예컨대 헤지펀드들이 조세 회피에 그토록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정부가 해외 원조에 쓸 수 있는 세수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64) 

윈윈의 논리는 많은 기업들에게 수사로 채택된다. 69쪽부터 잠시 소개되는 저스틴 로젠스타인은 실리콘밸리의 개발자이다. 그는 협업용 소프트웨어 판매가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젠스타인의 말: “기술의 영역에서는 수익을 좇으면서도 세상을 위해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구글 검색은 역대 가장 엄청난 사례죠.”(73) 그러나 “이러한 식의 진보에 대한 믿음 덕분에 로젠스타인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무시할 수 있었다. 예컨대 그가 신봉하는 부류의 도구를 만들 때, 당신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지 알 수 없다. … 그는 십대들이 페이스북 게시물의 ‘좋아요’ 숫자에 집착하고 안달하는 사실을 알고 있고, 자신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해한다.”(74) 

이런 윈윈의 이념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관념—시민들은 서로 상이한 이해를 가지고 시민사회에서 활동하고, 제도 안에서 다투고 조정하기 위해 정치적 권력을 위해 경쟁한다—과 다른데, 이런 낙관주의는 “중세 시대를 지배했던 진보로서의 조화라는 전망에 귀를 기울인다.”(83). “그러나 사람들의 선호와 욕구가 겹치지 않으며, 나아가 사실상 충돌하는 상황은 언제나 있다. 그렇다면 패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누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할 것인가? 예를 들어 모든 미국인이 괜찮은 공립 학교를 갖기 위해 엘리트들이 말 그대로 더 많은 돈을 내놓아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86) 


제3장 베레모를 쓴 걱정에 찬 반란군 왕들

3장의 제목은 실리콘밸리의 혁신가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자신이 현재 사회의 분배 구조에 책임이 있는 엘리트들이지만 마치 자신들이 소수파이고 혁신과 개혁을 위해 부패 내지는 기성 구조와 싸우는 것인 마냥 행동한다. “그러나 전체를 책임지지 않는 반란군은 자유롭게 자기만의 독특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반란군의 핵심이다. 자신과 다른 욕구를 지닐 수도 있는 타인에 대한 걱정은 반란군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피셔바의 관점에서 우버 같은 회사가 규제 당국이나 노조와 빚는 마찰은 상충하는 이익 때문이 아니다. 그저 반대파와 맞서 싸우는 독특한 진리, 부패한 기성 질서에 대항하여 봉기하는 반란군이 보일 뿐이다.”(112) 여기서 등장하는, 우버와 에어비앤비에 투자한 벤처 사업가 피셔바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택시 카르텔”을 독점에 책임이 있는 기성의 구조로 언급한다. “그는 노조를 “카르텔”이라고 언급했다. 매우 표준적인 노동운동의 특색을 띠었던 시위를 “전쟁 지역”으로 묘사했다.”(113) 

“문자 포스팅에 비해 더 많은 광고 수입을 가져오는 비디오 포스팅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데 혈안이 된 어느 소셜 미디어 억만장자[저커버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가 소유한 강력한 알고리즘도 고쳐가며 자신의 바람을 마치 예언인 것처럼 제시했다. “나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소비하는 콘텐츠 대부분이 비디오인 세상이 지금으로부터 몇 년 안에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크 저커버그가 이 예측을 발표한 이후에 「뉴욕」지는 “웹 콘텐츠의 대세는 비디오일 것이다, 이 같은 결정을 일방적으로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말했다”는 기사를 실으며 정곡을 찔렀다.)”(109) 

3장의 이후는 대부분 플랫폼으로 이윤을 축적하는 기업의 묘사에 할애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권력(여러 의미에서의)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에어비앤비의 경우, “흑인도 에어비앤비를 #AirbnbWhileBlack” 해시태그 운동에 대해, 자신들은 “플랫폼만 제공할 뿐, 웹사이트상의 자율적인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주장을” 편다. 택시 기사와 자신의 관계를 자유롭게 계약을 맺은 동등한 계약 당사자인양 주장하는 우버도 마찬가지이다. 

“자칭 기업가 반란군이 실제로 추진하고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마을·교회·영지의 특수주의로부터 해방시키며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규칙을 발전시키려는 계몽주의의 주요한 프로젝트를 전복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이 엘리트들이 마음속에 그린 세계는 규칙이 약화되고 기업가들이 시장을 통해 지배하는, 영주의 사적인 지배의 복귀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페이스북 백작과 구글 영주가 민주주의의 바깥에서 우리 모두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133)


제4장 비판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과 지식 소매상(thought leader)

* 지식인들이 축적한 상징자본이 어떻게 ‘마켓 월드’—컨퍼런스, TED 강연 같은 자리—에서 엘리트들이 쉽게 소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판매되는지. 학술장에서 요구되는 논리와는 전혀 다른 지식, 정보들이 ‘마켓 월드’에서 다루어지고 있음. -> 문제에 대한 쉬운 해결책 강조. 막연한 구조나 문화에 대한 비판 없는, 개개인이 받아들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해결책 제시. Incentive structure를 강조하는 메커니즘 (합리적 행위자 인간관). e.g. 맬컴 글래드웰의 1만 시간의 법칙? 
* 176쪽: 커디라는 여성학 심리학자가 TED 강연으로 유명해진 후 이런저런 경영자들을 위한 컨퍼런스에 불려가는 대목. 선진적이고자 하는 조직은 다양성 프로그램을 강조하지만… 
* 마야코프스키 시 인용: 174쪽. 좋은 글쓰기 방식. 


“지식 소매상은 주로 TED 강연을 하는데, 여기에는 비판이나 반박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시스템의 변화보다는 희망에 찬 해결책이 강조된다. 공공지식인은 승자들에게 진정한 위협감을 준다. 반면 지식 소매상은 “혼돈, 자기역량 강화, 사업가적인 능력”을 부르짖으면서 승자의 가치를 홍보한다.”(152쪽)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두히그의 말. 

“「뉴욕타임스」 탐사 시리즈는 결코 좋은 책을 만들 수 없어요. 그들은 이 세계, 아니면 특정 기업이나 어떤 상황에서 잘못된 것들은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지적하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책을 읽는다고 해 봅시다. 그 누구도 얼마나 많은 것이 엉망인지 배우기 위해서 책을 읽고 싶어 하지는 않아요. 물론 그런 책들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정말이지 매우 가치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런 책의 독자는 거의 한정되어 있어요.”(166쪽) 

“마켓월드 엘리트들은 그 어떤 것에도 도전하지는 않지만 희망을 주는,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리기 쉬운 아이디어를 사랑한다. 그들은 아무리 미약하고 논쟁적이더라도 과학적 권위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엘리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이들이 유용하고, 결과 지향적이며, 수익성 있는 아이디어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88쪽) 

197쪽 

“세상을 바꾸겠다고 애쓰며 선행을 하는 엘리트들이 너무 많다 보니 “만일 이들 모두가 한꺼번에 뛰기라도 한다면 아마도 지구의 축이 기울 것”이라고 기우사니는 농담으로 말했다. 그런데 정작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라. 들끓는 포퓰리즘, 분노, 분열, 증오, 배제 그리고 공포.”(199)


204-205쪽 스티븐 핑커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테러리즘이나 내전에 대한 미디어의 염려와는 다르게 인류의 폭력 수준이 시간이 갈수록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있음을 주장하는 책. 핑커의 강연은 “헤지펀드를 운영하는 사람들, 실리콘밸리의 사람들, 그 밖의 승자들 사이에서 ... 인기물이 되었다.” 핑커의 강연과 주장은 “시대의 불평등에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불평을 그치라고 말하는 사회적 저항감이 덜한 방법을 제공했다.” 즉 사람들에게 ‘현실은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나아지고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기우사니[TED 강연 조직자]는 ... 그 행위를 표현하는 동사를 발명했다. 인간 역사의 장기적인 방향을 이용하여 권력이 없는 사람들의 염려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정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그들은 "핑커링Pinkering"을 하고 있었다.”(205-206쪽) 예: 5억 명의 중국인들이 빈곤에서 벗어난 것은 "경제적인 핑커링." 책에서 기우사니는 이런 말을 한다. “하지만 일자리가 중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맨체스터 공장에서 해고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그는 아마도 다르게 반응하겠죠. ... 현재의 상황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는 이러한 종류의 이데올로기에는 다양한 면이 있는 겁니다.”(206쪽) 이 책은 다른 "핑커링" 전문가로는 조너선 하이트의 예시를 든다. 다음 인용문은 조너선 하이트의 글. “그래, ISIS도 있고 나쁜 일도 많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당신 같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많은 진보를 기대하는 것이다.”(206쪽)


5장
장의 제목을 내가 다시 쓰자면, 컨설턴트처럼 보기Seeing Like a Consultant 라고 쓸 것 같다. 


맥킨지 입사 면접에 자주 등장하는 문제는 “보잉 747기에는 탁구공이 몇 개나 들어 가겠는가”, “호주에는 매년 면도날이 몇 개나 팔리는가?” 따위의 질문이라고 한다(222). 이런 질문은 답을 듣기를 의도한 것이 아니고, 핵심은 “자신이 한 가정에 근거해서 추론한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추론은 “프로토콜”이라는, 컨설팅 세계의 일종의 사고방식 혹은 문제 해결 방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생각의 범위를 줄이고 참조하는 데이터의 양을 제한”하는 것이다. 

 

“프로토콜과 이를 채택한 이들은 사회문제로 가득한 세계에 제공할 다양한 무기들—예컨대 엄격함, 논리, 데이터, 신속한 의사 결정 능력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 그러나 항상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프로토콜에 의해 다시 포맷된 문제들은 승자의 시각에서 규정되었다는 사실이 그 대가의 일부였다. 말하자면 문제의 해결사들이 문제를 정의한 다음, 이것을 벗어나는 다른 시각은 배제한다.”

2부

1/ “마찬가지로 동일한 계급에 속하는 하비투스들의 구조적 친화력은 ... 서로 수렴하며 객관적으로 조율되는 실천들을 생성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것은 ... 집합 행동이나 집합 반응처럼 RAT에게 극복할 수 없는 딜레마를 제기하는 현상들을 설명한다.” 

합리적 행위 이론(RAT)의 가정을 받아들일 때 집합 행동(시위), 자발적 협력 등은 설명 불가능한 현상이 된다. 실제로 많은 합리적 행위 이론가들은 이러한 딜레마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를테면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하비투스가 장에서의 게임의 감각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하비투스는 장 내 행위자들 사이의 무의식적으로 조율되는 실천을 생성한다고 말한다. 부르디외는 합리적 선택 이론이 애초에 목적론이었기 때문에, 합리적 선택 이론의 패러다임 안에서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라며 자신의 이론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듯하다. 한데, 하비투스에 의해 실천이 거의 ‘자동적으로’ 조율되며 이것이 무임승차가 아닌 시위, 자발적 협력, 신뢰 등의 현상을 낳는 경험적인 예가 어떤 것들이 존재할까? 


2/ “하비투스의 최초 경향을 통제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성찰적 분석은 우리에 대해 상황이 행사하는 잠재적 힘의 일부를 바로 우리가 부여한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그러한 분석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변경하게 만들고 ... 반응을 변화시키도록 만들어 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위치와 성향의 즉각적인 공모 관계를 통해 작동하는 일부 결정 요인들을 어느 정도까지는 조정하게 해준다.” (232쪽) “바캉: 당신은 또한 말하기의 사회적 능력이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주어져 있다는 ‘언어적 공산주의의 환상’을 비난한다.”(245쪽)

부르디외 사회학의 비판적/해방적 측면이라고 하면 위 인용구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위의 인용한 부분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부분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은 부르디외가 내내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인식 자체가 사회학을 사회학의 분석에 놓이도록, 지식인 역시 사회학의 분석 대상이 되도록(“호모 아카데미쿠스”) 하기 때문이다. 

한편 부르디외의 해방적 기획은 하버마스의 것과 조금 다르다. 뒤의 245쪽 인용 이후에서 부르디외는 특히 오스틴이 발화행위의 사회적 성격과 제도를 분석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고 있다. 즉, 배에 이름을 붙이는 발화행위에 효과를 부여하는 ‘힘’은 사회적 실재, 즉 “발화하는 사람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창조하는 일정한 관계”(249)에 의해 주어진다. 따라서, 부르디외에게 있어 사람들이 동등한 이성을 가지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하버마스의 이론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이데올로기나 외부적 강제, 폭력 때문에 언어 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언어 행위의 불평등은 우리들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상징폭력 때문인데, 이러한 상징폭력은 누구의 말이 정당하고 귀기울여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정하기 때문이다. 

3/ “온갖 형태의 ‘은밀한 설득’ 가운데 가장 가차 없는 것은, 아주 간단히, 사물의 질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설득이다.”(279) 

위의 인용구는 상징폭력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서 가져왔다. 왜 현재의 분류 체계와 도식이 실제 피지배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피지배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루카치나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국가의 조종(manipulation)이나 국가 기구(apparatus)의 음모 때문일까? 부르디외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적 음모론(?)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상징폭력에 놓여 있고, 현재의 상징 체계=주어진 사회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세계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1부 

기억에 남는 구절들 

1/ “그에게 분화된 사회란 체계적 기능, 하나의 공통 문화, 교차하는 갈등 혹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권위에 의해 통합된, 이음매 없이 매끈한 총체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는 ‘자유로운 활동’ 영역들의 총체를 말한다.”(61쪽)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이성은 역사적 산물이지만 매우 역설적인 산물이기도 하다. 그것이 어떤 조건들, 즉 합리적 사유를 위한 제도적 토대를 보호하기 위해 아주 구체적으로 작동함으로써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만 하는 조건들 아래서는 역사를 ‘벗어날’ 수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106쪽) 
-> 이는 111쪽에서 로익 바캉이 해명하는, 부르디외가 사회에 대한 숙명론적이고 비관적인 시각(사회의 지배구조와 그 재생산의 역사에 대해 더 해명하면 해명할수록,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식)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과 공명한다. 사회는 어떤 괴물처럼 움직이는 권위 하에 복속된 공간이 아니다. 이를테면 예술 장과 과학(학문) 장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학문 장의 자율성은 과학의 성격 자체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단히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한에서만 보장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즉 이성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주의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cf. 104쪽).

2/ “저항이 소외시킬 수도 있고 순종이 해방시킬 수도 있다. 그것이 피지배자의 역설이며 그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71)
-> 부르디외가 보기에 ‘사회학의 쓸모’는 행위자들을 자유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점에서 행위자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108쪽 각주 90번). 사회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것은 아주 기가 막힌 역설이라고 항상 생각을 해왔다. 사회학이 선사하는 자유는 물론 어떤 제도적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사회학이 무엇이 사람들을 소외로 이끌고 무엇이 해방으로 이끄는지 확정적 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학은 사람들을 자유의 환상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도덕적 행위를 향해 열려 있는 공간을 규명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한다.”(107)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학은 공화주의적 덕성을 갖는 시민들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실마리를 줄 수 있다(109쪽). 

3/ “그러한 시각[사회적 행위에 대한 신비화된 시각]은 도구적 행위와 표현적 혹은 규범적 행위 사이의 인위적 경계에 집착하며, ‘무사무욕’한 듯 보이는 행위자들을 이끄는 다양한 형태의 숨겨진 비물질적 이윤을 인정하지 않는다.”(74쪽) 
-> 이는 앞선 인용 — “[장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는 ‘자유로운 활동’ 영역들의 총체를 말한다.”(61쪽) — 과 관련이 있다. 부르디외의 장 개념은 사회 세계를 정말로 다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것을 너무 복잡하지 않게, 구조주의적/구성주의적 접근의 이중주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부르디외의 접근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규범적 구조주의와 갈등주의 사이의 대립은 허상일 수 있다.

바우만, 『액체근대』.

2019. 7. 4. 00:12

63쪽 “우리 시대는 희생양을 환영한다.” 

바우만은 근대화의 충동을 “현실을 비판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 비판의 대상이 자신들의 사적 삶으로 향할 때 개인들은 “자기 책망과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공적 영역이 부재하고 사회 변화의 언어가 개인의 권리 주장으로 환원된(50쪽) “유동적 근대”에서 개인들은 책망과 자괴감을 극복하기 위해 주로 “희생양”을 택하게 된다고 바우만은 주장한다. *

이러한 시대에서 기존의 비판이론은 유효를 다했다고 바우만은 단언한다.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식의 비판이론이 향했던 시대가 이제 지나버렸다는 것은 노베르트 엘리아스 책의 제목이 개인 대 사회가 아닌 ‘개인의 사회’라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가 근대의 합리화하는 경향, 즉 도구합리성에 의해 종속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성의 정당성이 자기비판이 아닌 오직 형식적·법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인정되는 상황을 비판하고자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사회는 ‘관리자’들에 의한 통제사회로 접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개인의 권리 주장이 확대되고 이상적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부재해진 ‘액체 근대’로 접어들었다. 1) 

이러한 액체 근대에서 개인은 일견 해방된 듯하지만 바우만이 강조하는 것은 “운명으로서의 개인성과 자기주장을 위한 실제적, 현실적 능력으로서의 개인성 간에 점차로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57)는 것이다. 주류 미디어는 이러한 간격을 ‘상담자’를 내세우는 것으로 극복하고자 하지만, 사실 그 극복은 공적 공간을 복원시키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닌 상담자 개인의 극복사례를 통해 개인의 문제들(많은 이들이 그것을 겪고, 그 문제들이 카테고리화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철저히 개인적인 것만은 아닌)을 개인의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점이 또한 바우만의 비판에서 중요한 것이다. 비판이론의 과제(해방)는 완수되지 못했지만 그것의 문제의식의 출발 지점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셈이다. 2) “현 단계에서 해방이라 함은 오직 법적인 개인의 자율성을 실제적인 자율성으로 바꾸는 과업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81) 

*) 바우만의 많은 현대사회 분석들은 ‘희생양’(보통 극빈층, 이민자, 범죄자 등 = 통칭 ‘인간 쓰레기’)이 정해지는 과정, 그들이 처리되는 과정 등에 향해 있는데 이것은 ‘액체근대’의 문제의식 하에 있는 것 같다. 

1) 어떠한 요인들이 이 과정에 개입했는지 분석하고 묘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g. 탈포드주의적 생산양식, 개인의 행복 및 권리, 자유, 정체성의 인정과 같은 식으로의 정치 담론 변화(특히 68운동), 전쟁 등으로 인한 이성에 대한 회의, 정보화, 복지국가의 붕괴 및 세계화 등... 특히 서구의 ‘생활정치’ 운동이 ‘액체근대’의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이론의 소임은 절반은 완성된 것이 아닌가. ‘창조성’, ‘다양성’, 기타 이런 것들을 뒷받침하는 생활양식의 개별성과 성 해방 같은 의제들이 주류에서도 공인화된 셈이니... 사실 말들은 무성한데 아직 이런 것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하고 비판하는 글은 읽어보지 못한 듯. 

2) 텍스트를 읽으면 기존 비판이론가들이 창조성과 자율성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바우만은 이에 대비되게, ‘자율을 보장하는 사회 없이는 자율적 개인이 없다’며 대문자 정치가 수행되는 공적 영역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뒤르켐이 연상되는 주장이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 영역’과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82) 그런데 이것은 사실 하나마나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당연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걸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공적인 것/사적인 것이라는 개념쌍은 매우 다의성을 갖고 있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딱 좋다. 바우만의 글은 드는 예시들이나 은유들, 인용구들이 탁월해서 읽는 재미가 있지만 이런 점에서 엄밀한 개념 정의가 없어서 좀 힘든 것 같다. 


1장 ‘해방’에서 바우만은 ‘고체 근대’와 구분되는 ‘액체 근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 번째는 진보의 목적이 존재하고 거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붕괴한다는 것, 두 번째는 “근대화의 과제와 책임의 규칙이 폐지되고 사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점”, “전체로서의 사회가 입법적 행동을 함으로써 사회를 진보시키려는 이상”에서 강조점이 “개인의 자기 권리 주장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3장 ‘시공간’에서 바우만은 ‘액체 근대’의 “지속되는 시간의 폭을 단축시키고, ‘장기간’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고, 지속보다는 순간을 조절하는 데 집중하고, 순간적이고 즉각 써버릴 또 다른 것들을 들여오려고 기존의 모든 것을 가볍게 버리는 ...”(202) 특성을 지적한다. 

3장의 이러한 정의는 1장의 정의와는 일견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진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붕괴했다는 것은, (전기통신 등의 테크놀로지 발전에 힘입은) ‘장기간’이라는 지속적 시간을 상상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의 결과일 수 있다. 또한 ‘고체 근대’, 포드주의의 시대에 자본은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한 장소에 눌러 앉아 있었는데, 그 장소에서 자본은 노동과 결혼 서약을 맺어 자본에게는 지속적인 축적을, 노동에게는 안정과 임금 상승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미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깨져 버렸고 기업이든 국가든 ‘붙박혀 있는’ 대신 ‘군살을 빼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하청과 외주 주기, 비정규직 비율을 늘리기, 조세 피난처를 이용하기, 실물경제 노동을 희생시켜 부채비율을 줄이고 좋은 신용등급을 받기 등의 ‘군살 빼기’ 전략은 공공의 이상을 수립하고 공적 방법으로 그것을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사적 권리와 이익의 추구에 골몰하는 액체 근대의 다른 특성과 닮아 있다(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시장만능론이다).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nationalism)을 옹호하는 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보다 온건하고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애국주의(patriotism)이다. 이는 종족성(ethnicity)이나 출신 지역, 언어와 같은 태어날 때 주어진 특성에 근거한 공동체에의 애착을 강조하기보다는 어떤 정치적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다원주의적 규범이나 가치를 존중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하버마스가 이러한 입장의 옹호자이다. 둘째는 종족적 민족주의인데, 대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족주의의 상이 여기에 부합한다. 

바우만은 이 둘에 대해 이런저런 논평을 하는데, 우선은 사실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나 비슷한 정치적 이념의 다른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시선을 보낸다(278-9쪽). 그리고 많은 경우 애국주의들은 국외자에 대해 “온화하고 동정적인” 시선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사적 표현 자체에 어떤 실용적 의미가 있기도 한데, 말인즉슨 “애국심은 미완성에 대한 근대의 신조”를 표현하며, 민족주의는 “소속”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표현한다는 것이다(280). 

한편 바우만은 “일체성” 개념을 발전시킨 크릭을 소개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일체성의 공화주의적 모델,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데 참여한 주체들의 연합적 성취인 새롭게 출현한 일체성이라 할 수 있다.”(284) 그런데 액체근대에서 일체성은 공동체 내에서 공적인 방식으로, ‘연합적으로’ 성취되기 어려워 보인다. 사회적 행위자의 ‘문화적 심리적 특수성’은 개인에게서 찾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액체 근대 시대의 새로운 ‘공동체’는 “사적인 동기에 맡겨지”고, “지방 행정당국들과 지방 경찰이 바로 가까이서 조언과 지원을 해주고 있다.”(288) 여기서 바우만이 주로 지적하는 것은 이전 장에 묘사된 액체 근대의 ‘게토’와 같은, 높은 담이 쳐지고 사설 경비업체가 경계를 서는 아파트 단지 같은 공간들이다. 

이러한 공간의 특징은 무엇일까? 사실 안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대안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공간에서 일체성,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란 없는 셈이다. “‘비슷함을 나누는 공동체’에 대한 꿈은 근본적으로 자기애가 투사된 것이다.”(288) 그러한 아파트 단지에서 서로의 비슷함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사후에 확인되는 것이다.(비슷한 소득 수준, 교육 수준, 성장 환경 등.) 

그런데 안전에 대한 갈망 뿐만이 아닌 우리의 정치 담론도 많은 부분 액체 근대 식의 ‘일체성’ 발견 방식에 정향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근대 유럽에서의 민족주의가 민속 문화, 민속 음악, 민족 언어를 발견했듯이 지금의 여러 사람들도 마치 주어진 확고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 같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성적 지향/정체성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어떤 ‘짤방’을 본 적이 있는데, 외우기도 어려운 demi- poly- 등의 접두어가 붙은 성적 지향/정체성이 형형색색의 깃발과 함께 스무 개 정도 나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의 자기정체성 주장은 “주체의 기술과 결의”(284쪽) 그리고 그것을 관용해줄 무관심한 타인에 적극적으로 호소하면 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