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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오타쿠들의 의사 일본
- 오타쿠 문화에 대한 설명들이 주를 이룸. 
- 오타쿠 문화가 갖는 일본적 이미지
- 오타쿠계 문화의 원류는 미국 / 미국을 통해 받아들였으나 특유의 일본적 문화를 살린 오타쿠 문화
- 오타쿠 문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

2장 데이터베이스적 동물 
- 오타쿠계 문화의 포스트모던적 특징: 1) 2차창작의 존재 — 오타쿠들의 2차창작, 원작 소비는 시뮬라크르와 유사하다. 
2) 허구 중시의 태도 — 사회적 현실이 부여하는 가치규범과 허구가 부여하는 가치규범 중 후자가 더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타쿠들은 허구를 소비한다. 리오타르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 
“이 장에서 필자는 이 둘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문을 실마리로 오타쿠계 문화의, 더 나아가서는 거기에 응축된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에 대해 고찰해나가려 한다”: (1) 시뮬라크르는 어떻게 증가하는 것인가? 포스트모던에서 시뮬라크르를 창출하는 것은 무엇인가? (2) 커다란 이야기가 실조한, 신 사회도 쓰레기가 된 서브컬처, 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신이나 사회가 인간성을 보증하지 않는 인간의 인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 트리형 구조와 데이터베이스형 구조 / 포스트모던의 2층구조. 
인터넷: 1) 심층—부호화된 정보의 집적 2) 유저의 읽어내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개개의 웹 페이지들 -> 2층 구조. 심층은 어떻게 표층을 읽어내냐에 따라 결정됨. 

-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과 그 보충으로서의 허구 p.72
이야기 소비가 대두된 것: 포스트모던 시기로 이행하면서 큰 이야기들이 사라졌기 때문. 이것을 메우기 위해 허구를 창조하고 거기에 obsessed 됨. / “커다란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대의 등장”, “커다란 비非이야기” 

- 모에 캐릭터는 작가의 개성이 만들어낸 고유의 디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미리 등록된 요소가 조합되어 작품의 프로그램—판매전략—에 따라 생성되는 일종의 출력 결과이다. p.86 /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 
- 등장인물의 설정이 먼저 있고 그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포함한 작품이나 기획을 전개시키는 전략 p.91

- 캐릭터 모에: 캐릭터(시뮬라크르), 모에 요소(데이터베이스) 

- 종래의 오리지널과 복제의 대립 대신에 시뮬라크르와 데이터베이스의 대립. p.106
- 무라카미 타카시 비평 p.114

- 노벨 게임. 질적으로 다른 시뮬라크르. p.142
- 오타쿠들의 보수적인 섹슈얼리티 p.154

- 결론 p.164


학교를 넘어서(이한)

2016. 6. 1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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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주로 학교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폭력과 억압과 부실한 교육, 그리고 학교/공교육이 실제로 행하고 있는 사회계층의 고착화와 억압적 통제, 폭력의 양성을 다룬다.

학교 교사들은 실제로 필요한 것과는 별 상관없는 단편적 지식만을 강의를 통해 전달한다(그리고 심지어 이것들은 참고서를 훑어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실제 수업 현장을 고찰함으로써 이를 알 수 있다. 강의식 수업이 유용할 때는 1) 직접적 전달과 질문이 필요할 때 2) 체계적, 지속적 학습이 필요할 때 3) 입문 과정이 필요할 때 4) 강사의 전달력과 수업능력이 뛰어날 때 5) 강의를 통해 수강자들의 공부할 계기를 만들어야 할 때인데, 학교에서 행해지는 강의식 수업은 위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한 학교는 강의식 수업이 곧 학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신념을 주입한다. (1부 1장) 

학교는 1) 부조리한 사회적 계층화와 2) 억압적 통제기구로서의 기능을 행한다. 실업계 학교와 인문계 학교의 구분도 겉으로는 학력 인플레를 해소시키고 효율적인 직업교육을 도모하기 위한 것 같지만 실은 지위경쟁의 과정이고 계층을 나누는 제도이다(p.52). 사회계층화 작업을 해내기 위해 학교는 억압적 통제를 행하는데 그것들은 구체적으로, 1) 쓸모 없는, 획일적인 학습의 강요(등하교 시간의 획일화, 학년제 등 제도적 측면까지 포함), 2) 기본적 인권의 박탈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2장)

학교는 교사를 통해서 폭력을 낳고, 또 인간관계를 가로막거나 파괴함으로써 산업자본주의사회가 사람들에게 행하는 폭력을 증폭시킨다. 학생 간 폭력의 원인도 학교 구조로 볼 수 있다. (반학교문화)

학교교육은 여러 환상을 만든다. 첫째는 학교가 교육자금을 평등하고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기구라는 환상이다. 그런데 교육세와 같은 조세 제도의 문제, 학교 교육의 비효율성과 불필요성, 실효가 없는 저소득층에 대한 교육정책 등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는 학교교육이 효율적이라는 환상이다. 학교교육은 학습자가 필요한 것을 깊이 가르쳐줄 수 없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이다. 그 원인은 1) 학교제도로 인해 교육형태 및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막혔고 2) 교육과정 자체가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고 3) 배움이 졸업장, 자격증 등 '증' 추구에 종속됐기 때문이다. 셋째는 학교교육이 사교육을 줄일 수 있다는 환상이다. 그런데 일단 사교육비의 증가 원인은 경쟁에 있다. 그리고 학교에 예산을 쏟아부어봤자 대부분은 행정적 비용으로 소모될 것이고, 또 교사들 봉급이 많아진다고 해서 교사들이 잘 가르칠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낭비라 볼 수 있다. 저자는 사회적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교육을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교육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학교라는 비효율적이고 많은 폐단을 낳는 제도에 공적 재원이 집중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4장)

5장은 학교가 만드는 교육에 대한 이상한 신화를 비판한다. 1) 학교가 지식을 배우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화, 2) 학교가 학습동기를 불러일으키고 능력을 재는 기구라는 신화, 3) 학교는 건실한 사회화기관이라는 신화. 1)의 경우, 강제와 통제 없이도 잘 배우는 서머힐 같은 사례가 있다. 또 강제출석 제도는 비효율적이라는 증거도 있다. 2)의 경우 단편적 사실만을 암기해 시험을 보게 하는 게 적절한 능력을 재는 지표면서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교수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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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중요점: 공교육의 정상화나 학벌폐지 등의 논의가 갖는 한계는 기존의 학교교육, 학교 중심의 교육체제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지 못하고 또 그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이 지향할 점(평등, 자유,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능력 배양) 생각할 때 탈학교 논의 필요 -- 정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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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책 내용 개괄. 책 쓴 계기 소개. 젊은이들은 왜 저항하지 않는가? 실제로 그들은 행복하기 때문. 

1장, 젊은이의 탄생과 종언
- 일본의 젊은이론, 세대론 개괄. 젊은이론은 크게 이질적인 타자론, 편리한 협력자론으로 구분됨. 

2장,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
- 일본 젊은이들의 사회의식, 국가의식에 대한 통계 존재. 
- 젊은이들이 의외로 사회 지향적이라고 함 — 사회지향적, 국가에 대해 공헌하고 싶어함. 
- 젊은이들이 내향적이라는 사실 인정. 그런데 급격히 내향적이어진 것은 아님. p.128
- 젊은이들은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낌, 통계로 증명. p.130 / 자기 충족화하는 젊은이들 
- 작은 공동체에서 서로 모여서 다른 계층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덜하다. ‘섬 우주’ / ‘불끈불끈하는 젊은이들’ 

3장, 붕괴하는 일본?
-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짧은 개괄. 
- 국가에 대한 충성의식이 약해져가고 있음—통계, 전쟁이 나면 국가를 위해 싸울 것이냐, 에 대한 응답을 통해 증명. 
- 한정된 기간에 등장하는 국가: 스포츠 따위의 일들에서만 국가를 위해 응원. 그런데 공격적 내셔널리즘은 따로 엿보이지 않는다. 
- 뉴 미디어의 발달이 아래로부터의 내셔널리즘의 붕괴로 이어지는 듯이… 

4장, 일본을 위해 일어서는 젊은이들 
- 보수적 시위에 대한 내용이 있음. 몇몇 사람들의 짧은 인터뷰. 특징은 과격하지 않고, 또 즐기는 식으로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 시위 자체도 그렇게 조직화되어 진행되지 않음. 
- ‘우익’과 일반 시민을 구분하는 경향. 우익 계열의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은 우익 성향의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음. / 보수 계열의 젊은이들은 좌익 젊은이들과는 다르게 달리 모일 장소가 없다—메구미 인터뷰. p.195. 일베나 자유대학생연합, 혹은 기타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자칭 애국보수들과 겹쳐 보인다.  
- ‘우익’에 빠지는 젊은이들 
- 보수계열 웹사이트, 보수계열 sns를 통해 정보 얻는 사람들. 매스미디어는 편파적이라고 생각함.

- p.208. 마치 좌익 시위와 비슷한, 기존의 형태와는 다른 우익 시위임. 1) 민주당이라는 위험한 존재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을 통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가볍게 시위에 참가한다, 즉 느슨히 연대하고 있다. (베평련 참고) ‘각자의 특색을 살려, 할 수 있는 것부터’가 이 모임의 모토. 2) 참가자들의 의식과 행동이 매우 다양함. 

- p.210부터 기존 사회운동 이론을 바탕으로 현재 일본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지, 그리고 미래의 전망을 고찰함.
- ‘비실재청소년’, 아청법과 굉장히 유사한 법률. 청소년 건전육성조례 개정안, p.218. 이것이 젊은이들의 가치관이나 규범의식을 침해했기 때문에, 그것이 민주당 당사에 대한 항의전화, 메일,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저자는 보고 있음. 
- 친밀권과 공공권을 이어야 한다. 현재 젊은이들은 주변의 친밀한 사람들 중심으로—친밀권—묶여져 있는데, 이러다보니 거대한 사회에의 참여에 대한 욕구가 생겨남. 

5장 정리 필요


일베의 사상(박가분)

2015. 2. 2. 00:43



2013년 겨울쯤에 산 책인데, 사고 나서 절반 쯤 읽다가 바빠서인지 어쩐 이유에선지 그만뒀다. 그래서 2015년에는 읽다가 만 책들 좀 읽자는 계획에, 다시 읽게 되었다.

일베를 남 조롱이나 일삼는 걸 재미로 아는, 사회에서 도태된 히키코모리들 집단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일베에 무슨 사상이 존재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베가 남 조롱 일삼는 행위를 재미로 아는 집단은 맞지만, 일베는 뚜렷한 사상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김치녀', '홍어', '좌빨', '광주폭동' 등으로 대표되는 일베의 혐오 발언들의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일관적인 사상적 체계가 있다. 몇몇 바보 찌질이들이 일시적으로, 재미로 벌이는 분탕질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단순히 사고해서는 일베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일베를 "자율적인 사상에 입각한 존재"로 간주해야 "일베 유저들에게 윤리를 요구"할 수 있다(p.18). 왜 일베라는 존재가 출현하게 되었고, 일베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일베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일베의 사상>은 적절한 진단과 지향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책은 크게 1부(일베와 그들만의 문화), 2부(일베의 사상은 무엇인가), 3부(일베와 한국의 정치)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주로 일베의 탄생과정을 다룬다. 디시인사이드로 거슬러가는 일베의 그 탄생연원부터 시작해서, 짤방이나 논객 문화 같은 인터넷 문화를 다룬다. 이러한 일베의 탄생과정과 일베(그리고 인터넷)의 문화를 짚은 후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베의 특수한, 일베의 '사상'을 다룬다(과거 디시 정사갤이 일베 극우사상의 모태지만, 일베에는 단순 극우사상에서 더 나아간 특수한 멘탈리티와 문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베와 한국의 정치를 다룬다. 한국 정치는 어떻게 일베를 태동시켰는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3부의 골자다.

사실 인터넷 문화에 대해 평론하는 사람들 중에 나이가 많거나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직접 인터넷 공간과 잘 호흡하지는 않기 때문에 고리타분해보이거나 실제와 안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아 위화감이 들 때가 많다. 그런데 <일베의 사상>은 저자가 루리웹을 해서인지 인터넷 문화와 역사를 정확하고 밀도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런 정확한 인터넷 문화 인식(?)을 바탕으로 고찰한 일베의 문화(2부)는 상당히 통찰력있는 고찰이다. 일베의 미학을 분석하는 장(章)은 짧은 관련 지식 탓에 깊은 문맥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일베를 미시마 유키오와 관련지어 논의를 펴는 등 인상깊은 부분이 많았다.

앞에 장도 많이 유익하지만, 이 책에서 제일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마지막 부 일베와 한국의 정치라고 생각한다. 일베는 국가와 국민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시민사회의 부재로 인한 증상 같은 것이다. 시민사회라는 중간적 매개 없이 자신의 이상을 그대로 국가에 투사하는 촛불집회와 같은 일련의 정치적 이벤트가 있었다. 그것이 08년 광우병 시위로 절정을 맞고, 완벽히 파산했다. 그 폐허 속에서 일베가 자라난 것이다. 저자의 진단에 적극 동의한다. 이러한 일베라는 증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에서 일베를 경멸하거나 국가적 차원에서 일베를 규제하면 안 되고 정치적인 욕망을 정제해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시민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오래된 방법론이지만 어쨌거나 유효한 방법은 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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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란 용어를 어디선가 여러 번 들어보긴 했지만 어떤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키치를 처음 들어본 것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였다. 보통 글에서 보이는 키치의 쓰임새는 우스꽝스러운 것, 복고풍, 어설퍼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릭턴스타인의 팝아트를 가리켜 키치스럽다고 많이 하는데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키치라는 개념을 미술적 영역보다는 철학적 영역에서 인용한다. 키치는 비유컨대 '똥이 없는 것으로 처신하'는, 그러니까 대충 위선적인 느낌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키치에는 어떠한 이상이 있고 그에 반대되는 것들은 모두 삭제한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도 그러한 맥락에서 키치다. 이것이 쿤데라의 소설에서 정의된 키치다.

그런데 쿤데라의 책을 읽고 나니 전자의 키치(단순한 미술 영역에서의)와 후자의 키치(철학 영역에서의)가 아무래도 머릿속에서 잘 연결되지가 않는 것이었다. 글쎄, 나는 그냥 미술 용어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심오한 철학적 연원이 있었을 줄이야. 아니면 그냥 원래 단순한 뜻으로 쓰이는 용어인데 쿤데라가 오독한 건가? 인터넷에 찾아봐도 명쾌한 해답이 나오진 않아서 관련 서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찾은 책이 조중걸의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다. 어려운 서적은 아니고 대중을 위한 개론서다. 이 책은 키치라는 미학적 용어를 정의하고 그 키치라는 프레임으로 예술사를 설명한다.

키치란 무엇인가? 키치(kitsch)는 싸게 하다는 독일어 단어와 덤핑 판매를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가 합해져 만들어진 조어라고 한다.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키치는 좋은 의미는 아니다. 저자는 간단히 말해 키치를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정의한다. 저자―지식이 짧아서 저자만의 시각인지 미술계 전반의 시각인지는 모르겠지만―는 예술을 고급예술과 통속예술로 나눈다. 고급예술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 안에 작가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렬한 고뇌가 녹아있다. 따라서 고급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양과 긴장을 필요로 한다. 그에 반해 통속예술은 대중들의 위안을 위한 저급 예술이다. 대중들은 통속예술을 그저 소비하면 된다. 고급예술이 요하는 교양 같은 건 필요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급예술을 양으로, 통속예술을 늑대로 볼 수 있는데 키치는 이 둘 사이에서 대중들에게 고급예술의 탈을 써 뭔가 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전하는 한편 속은 싸구려 통속예술이란 게(양의 탈을 쓴 늑대)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통속예술을 '(저급하긴 하지만) 이런 값싼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예술도 필요하지' 하는 태도로, 존재론적으로는 어느정도 긍정한다. 다만 키치에 대해서는 비난 일색이다. 키치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책 뒷부분에 가서는 고급예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키치가 어느정도 필요악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지만, 키치에 대한 저자의 비난은 때때로 읽는 독자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강도가 높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을 불러 일으킨다. 예컨대 헤어진 옛 애인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 이런 이차적 눈물은 감상자를 작품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못하게 한다. 작품은 그저 개개인의 추억이나 감상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매개체로만 기능하게 된다. 작품은 그저 고상해 봬는 과시용 이미지로 소비된다. 그래서 키치는 달콤하다. 쉽고, 고상해 보이니까. 하지만 결국 키치는 위선적인 싸구려일 뿐이고, 진정한 예술 감상을 막기 때문에, 저자는 키치가 미학적으로 배격되어야 할 태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키치는 어떤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나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서양)철학사를 짚는다. 중세 시대, 세계는 요약하여 신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신 중심이었다. 그러자 근대에 있어 이성이 중요해지고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신의 존재가 부정되거나 적어도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것(불가지론)으로 설명되면서 신은 세계를 설명하는 근본 원리의 자리를 과학과 이성에 내주고야 만다. 그런데 그 과학과 이성의 자리도 흔들리고 만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인간의 이성과 과학문명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세계는 신으로 설명되는 것이거나 적어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는데 근대에 들어서며 둘 다 정답은 아니었고 더 문제는 정답이 있는지 자체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을 말하고 그려야 하는가? 예술은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 사실 알 수 없다. 정답은 없다. 정답이 없으니 대중은 우왕좌왕하기 마련인데 여기서 키치가 등장한다. 이 세계에 진리는 없는데 마치 키치는 세계에 확고부동한 진리가 있는 것처럼 위안을 주니까(신이 사라지고 과학적 이성도 믿을 수 없어진 세계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실존적으로 불안해 하고 고뇌해야 하는데 말이다. 고상한 예술은 그것을 표현해야 하고).  그래서 키치는 근대로부터 생겨난 개념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키치를 배격하기 위한 여러 예술가들의 분투를 설명한다. 다다이즘, 추상주의... 미술 사조 말고도, 연극 분야에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 문학 분야에서는 보르헤스를 위시한 메타픽션(흔히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 책의 전반부가 키치에 대한 철학적, 예술사적 설명에 가까웠다면 후반부는 키치라는 렌즈로 바라본 현대 예술사에 가깝다.

책에 대해 아쉬운 점이라면, 저자의 문체가 상당히 단정적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상당히 엘리트적인 태도는 읽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예컨대, 본문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 이념으로서는 어떠하든 간에 문화와 예술을 위해서는 비극적인 것이었다."는 문장). 키치는 미술계에서도 상당히 논쟁적인 개념일텐데, 키치를 바라보는 다층적인 시각을 소개하고 전달하기보다는 저자 한 명의 단정적인 주장이 책의 주를 이루니 저자의 키치에 대한 시각이 오히려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대상 독자가 대중들이니 키치에 대한 여러 관점을 소개하고 반박해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면 더 좋았겠다는 소리다. 아울러 보통 쓰는 키치의 용법(B급 문화나 팝아트 같은 느낌을 키치스럽다고 평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없어서 아쉬웠다. 이 책에 따르면 그런 식의 키치란 개념어 사용은 올바른 용법은 아니겠지만. 평소 궁금하던 걸 짚어주지는 못했으므로... 그럼에도 책의 서술은 크게 어렵지 않은 평이한 수준이고, 후반부에 다양한 작품과 예술적 시도들을 키치란 프레임으로 들여다보는 내용은 유익했다. 불편할 수는 있지만, 유익하고 알찬 책이다. 다만 예술은 엘리트들을 위한 것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하는 저자의 무의식에 깔린 생각에는, 잘 모르겠다. 기만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태도의 키치를 배격하기 위해서라도 예술은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상향 평준화가 되어야겠지만. 

"그녀가 5월 1일의 행진을 보았던 것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광신적이거나 또는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던 시절이었다. 행진 대열이 연단에 가까이 가면 가장 우울한 표정의 얼굴조차도 미소로 환해졌는데,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자기들이 즐기고 있다고,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이 당연히 그래야 하듯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행진 대열이 내건 묵시적 슬로건은 <공산주의 만세!>가 아니라 <인생 만세!>이었다. 공산주의 정치의 힘과 모략은 이 슬로건을 독점하는 데 있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사람들조차도 공산주의 행렬에 내모는 것은 바로 이 멍청한 동어반복 <인생 만세!>이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책을 읽고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키치는 전체주의적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공산주의(적어도 20세기의 현실 공산주의)는 키치였다. 동유럽 국가와 소련에서는 공산주의만이 유일한 세계의 진리로서 인정받았으니까. 그런데 일개 사상이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나. 결국 공산주의라는 키치 아래에서 무수한 사람이 스탈린 등에게 탄압받았고 프라하의 봄은 무참히 짓밟혔다. 사비나는 이러한 키치에 염증을 느꼈던 것이고 아마 쿤데라도 그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