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 수업 과제로 미국 인구조사국(U.S. Bureau of the Census)의 1977년 낙태율 자료[각주:1]를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통계 자료 대상인 20개 주 중에서, Roe v. Wade 판결(낙태를 비범죄화한 미국 대법원 판결) 이후 모든 주에서 낙태율이 증가하였다. 뉴욕 주만 빼고. (자료는 1973년과 1975년의 낙태율을 다룬다.) 




왜 하필 뉴욕 주만 낙태율이 큰 폭으로 감소했을까? 


New York Magazine의 기사 “The Abortion Capital of America”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절해 보인다.[각주:2]


낙태 합법화 운동을 하는 단체 NARAL(National Association for the Repeal of Abortion Laws)의 노력으로 인해, 뉴욕 주 의회에서 1970년 미국의 주들 가운데 최초로 원하는 자들에게는 모두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안 통과 후 뉴욕에서 낙태 시술이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다. (1973년에도 뉴욕 주는 20개 주 중에서 가장 높은 낙태율을 보였다.) 


 기사에 따르면, 1971년 말 무렵에 뉴욕에서 행해진 낙태 시술의 61%는 뉴욕 주민이 아닌 자(out-of-state residents)를 대상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런데 1973년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전미 모든 주에서 낙태가 합법화됐고, 여성들은 굳이 뉴욕에 가서 낙태할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뉴욕의 경우 1975년 다른 19개 주와는 상반되게 낙태율이 하락한 것이다.


  1. U.S. Bureau of the Census. 1977. Statistical Abstract of the United States: 1977. Washington, DC: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7. [본문으로]
  2. Ryan Lizza, “The Abortion Capital of America”, New York. New York Media LLC. 3 July 2013. Web. 27 Sept. 2016. URL: http://nymag.com/nymetro/news/features/15248/ [본문으로]
* 2016년 9월 26일 사회통계 수업을 들으면서...

오늘 통계 시간에, 표본의 표준편차를 구할 때 왜 분모를 n-1—표본의 크기인 n이 아닌—로 나누는가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들었다. 
사실 이는 고등학교 미적분과통계기본(문과)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기도 하다. 모집단의 표준편차를 구할 때는 (각 변량의 값 - 평균)의 제곱의 합을 n으로 나누는 반면에, 표본의 표준편차를 구할 때는 특별히 n-1로 나눈다고. 물론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편향성을 없애기 위해 이렇게 한다, 정도로만. 고등학생 때 수학 선생님이 통계 전공이어서 통계 파트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없는 이런저런 심화적 내용도 좀 알려주곤 했는데 왜 하필 표본표준편차에 대해서는 n-1로 나누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그런 줄만 알라’ 하고 넘어간 것으로 기억한다. 마치 극한을 정의할 때 엡실론-델타 정리로 엄밀하게 정의하는 대신 대충 어물쩍 넘어가는 것처럼… 

여하튼 각설하고, 교수님이 왜 n-1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유적 설명을 하기는 했는데 많은 학생들이 잘 이해를 못 했다. 왜 하필 n-1인가, 에 대해. 사실 나도 잘 이해를 못 했다. 순전히 내 개인적 이해를 돕기 위해, 왜 n-1인가에 대해 인터넷이나 서적에서 짧게 찾아본 바와 당시 수업의 설명을 토대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n-1로 나누면? 

* 불편성(unbiasedness, 비편향성)을 확보할 수 있다


n-1로 나누면 그러한 편향성이 교정된다. 그래서 n-1로 나눌 때 불편추정치(unbiased estimate)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아무런 데이터를 임의적으로 만들어서 계산해보면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통계 수업에서도 크기가 작은 임의의 데이터 셋을 만들고 그것에 대한 표본들을 뽑아서 확인해 보았다.) 

다음의 블로그 주소의 글은 n-1로 나눌 때 표본분산(표본표준편차)의 편향성이 교정되는 예를 임의의 데이터 셋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럼 왜 하필 n-1 인가?

* 자유도(degrees of freedom)

n-1로 나누면 더 좋은 추정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위의 내용으로 대충 알 수 있다. 그럼 왜 하필 n-1인가. n-2, n/2도 아닌 n-1… 

자유도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유도란 무엇인가. 

자유도는 선택권이 있는 숫자의 개수이다. (수업에서는 축구 포지션 선택의 예를 들었다. 자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쳐 보면 블로그들에 괜찮은 예시들이 많다.) 표본의 크기가 n이라고 할 때, 자유도는 n에서 1을 뺀 n-1이 된다. 

이 자유도를 이용해 비편향적인 표본분산을 계산하는 것이다.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것들… 

- 왜 하필 자유도를 사용해 표본분산을 계산하냐는 것. 자유도가 뭔지는 알겠는데… ‘왜 선택권이 있는 숫자의 개수(자유도)를 이용해 계산하면 편향성이 교정되지? 사례수(n)으로 나누는 것에 비해 어떤 매커니즘으로 차이가 생기는 것인가?’ 하는 의문인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수식에 대한 의문… (사실 이에 대해서도 교수님이 예시를 들어줬는데 잘 이해가 안 간다. 다음 수업시간에 물어봐야…) // 사실 구체적인 증명 과정은 학부 수준에서, 그것도 문과 나부랭이(;;)가 알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닥치고 외워!’야 하는 것일지도.




- 영어긴 하지만... 다음 링크의 비디오를 참고하면 꽤 직관적으로 왜 n-1로 나누면 편향성이 교정되는지를 알 수 있다.  https://www.khanacademy.org/math/statistics-probability/displaying-describing-data/sample-standard-deviation/v/review-and-intuition-why-we-divide-by-n-1-for-the-unbiased-sample-variance

고교 3학년 수준의 영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하고 밑에 자막도 있다. 다만 직관적인 이해를 도울 뿐이지, 왜 하필 자유도로 나누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답을 주는 영상은 아니다. 



// 

교수님이 주신 수업 참고자료 - 
University of Nebraska-Lincoln의 Dr. Paul Savory의 수업 자료에 따르면 표본표준편차를 구할 때 n-1로 나누는 이론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은 편차들의 합이 0이라는 사실을 계속 염두에 둬야 한다. (x bar는 sample average) 

n-1을 쓰는 이유: 자유도(degrees of freedom)이라는 개념에 기초해서 n-1을 쓰는 것이다. 자유도에 의해 n-1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표본 dataset에서 평균(mean)을 계산할 때 이미 우리는 데이터 셋의 정보 하나를 썼기 때문이다(we have already used up one piece of all the information in the dataset in calculating the mean). 편차들의 합은 0이기 때문에, 편차들의 수가 n이라고 했을 때 n-1 개의 편차들의 값을 특정한다면 나머지 하나의 편차의 값은 무조건 고정된다(e.g. 합하면 0이 되는 4개의 표본을 고른다 하자. 1, -2, -3까지 세 개의 표본을 골랐다면 마지막 표본은 무조건 4가 된다). 따라서 degrees of freedom은 n-1이다. 


- 이걸 읽어도 사실 명쾌하게 이해가 안 가는데... 관련 자료들의 댓글들을 참고해보니까 theoretical한 설명은 그냥 Bessel의 correction 을 참고하라는 것 같다. 


오찬호의 진격의 대학교(문학동네, 2015)를 읽고 고3 때 쓴 독후감. 


어쨌거나 지금은 우물쭈물하다 대학에 왔다. 일단 대학에 와서 한 학기를 보낸 후의 소감을 말하자면:


-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교양 강좌로 취업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고 리더십은 어떻고 하는 거를 별로 개설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강의를 의무적으로 들을 필요도 없다. 1학년 필수 수강 강의로 '1학년 세미나'라는 것이 있는데(인터넷에서 동영상을 보고 문제를 풀어 일정 점수가 나오면 Pass가 되는 강의이다) 거기서도 별로 취업 얘기 이런 건 없다. 아참, 새내기 대상으로 학과 행정실에서 주최한 사회학과 워크샵에선 어디어디 취업한 동문들을 연사로 불러와 취업 어쩌구 얘기하긴 했다. 뭐 이런 행사가 아니면 직접 찾아다니지 않는 이상 리더십 취업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듣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사회학과여서 별로 그런 얘기를 접할 틈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학교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취업에 목을 매야 하는 학교가 있고, 그러할 필요가 덜한 학교가 또 있기 때문에. 대학들은 절대로 균질하지 않다. 그러니까 서울대랑 비서울권 대학은 다르다는 것이다. 어디는 대학의 재원을 희귀 저널 구독이나 도서관 장서 확충이나 교수 수 늘리는 데에 쓴다면 어디는 재원을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짓는 데에 쓴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에 이 책이 크게 놓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 영어강의에 대해서는 매우 공감한다. 나는 비록 아직 교양 영어강의만 들었고 제대로 된 영강은 안 들었지만 주위 선배들 이야기하는 것 들으면 아주 영어강의라는 제도의 폐해가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대학의 글로벌 지수가 높아져 대학 평가에서 유리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영강의 장점은 이런 것 같다.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교환학생들이 쉽게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여하간 대학의 글로벌화에 영강이 기여하기는 기여하는 것 같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1) 학부 수준에서 대학이 글로벌화될 필요가 있는가? 학부 수준에서 한국어 실력이 없는 유학생들을 받는 게 과연 대학의 학문적 질 향상에 도움을 주는가? 2) 외국의 다른 대학들은 학부에서 영어강의를 얼마나 개설하고 또 영강의 질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취업률. 요새 대학들이 목매는 지표. EBS 교재만 펴봐도 우리 학교는 취업률이 몇 퍼센트고~ 하는 광고가 수두룩하다. 심지어는 자기 학교를 '취업사관학교'로 소개하는 학교도 있음. 취업률에 목매는 대학들이 상당히 늘어났는데 이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취업률 높아서 나쁠 건 없겠지만... 문제는 취업이 대학의 제1 목표가 되면서 원래의 대학의 목적이었던 배움,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취업이 잘 되는 학문, 즉 기업이 좋아하는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취업 잘 되는 학문은 정원을 늘리고 취업이 잘 안 되는 학문은 구조조정이나 통폐합을 한다. 이런 게 요새 대학의 행동강령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냥 당장 모집 요강을 봐도... 보통 인문대 학과는 20-30명 남짓 뽑는다. 근데 경영대(학과가 아니라 따로 단과대임)는 보통 200명 넘게 뽑는 것 같다. 10:1.... 저자 오찬호는 사회학 강사로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사회학을 가르치니만큼...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아도 왜 이 사람이 이런 책을 썼는지 알 것이다. 사회학은 문사철과 함께 대표적인 '잉여 학문'이니까. 


이 책은 가상의 대학교 '진격대'를 무대로, 역시 가상의 대학생 몇 명을 등장시켜 현재 대학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무대가 가상일 뿐 사례들은 모두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일화들을 좀 꼽자면...

1. 리더십 강의, 취업 강의. 요새는 교양강좌도 다 리더십 강의나 취업 강의들이라 한다. 대학에 들어가도 뭐 '현대미술사 개론' 이런 교양 강좌들 요새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다(물론 학생들이 안 듣기도 함;;). 그럼 그런 취업 리더십 강의에서는 뭘 가르치느냐? 나비넥타이 매는 법... 화장하는 법... 면접관에게 어필하는 법 이런 걸 가르쳐 준다고 한다. 아니면 성공하기 위한 마인드컨트롤 방법 이런 자기계발류 강연인데.... 실로 등록금이 아깝지 싶다. 게다가 이런 강의들은 외부 명사들을 초청해 진행하기 때문에 일회성 성격이 짙다고 한다. 그런 일회성 성격이 짙은 강연, 그렇게 전문성도 없는 명사들의 강연을 굳이 대학이 진행할 필요는 없을텐데. 

2. 영어. 영어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물론 영어에 목매다는 건 취업률 및 대학지표 때문이다(취업률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역시 대학지표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미래의 고객인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기 땜에). 한국 교수한테도 영어강의를 강요함으로써 벌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야 당연한 것이다. 모국어에 기반한 사유와 외국어에 기반한 사유는 서로 질적으로 다른 건데... 여하간 이렇게 영어를 강조함으로써 학생들끼리도 알게모를 격차가 생긴다고 한다. 그 격차는 유학파/비유학파의 격차다. 유학파인지 비유학파인지는 영어 발음으로 드러나는데... 이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거나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계층의 격차가 하나 더 생기는 것. 학생이 교수 발음 구리다고 지적하는 코미디도 일어난다고;; 

3. 여성학 가르치는 교수가 수업 시작하기 전 오리엔테이션에서 자조적으로... '이런 거 들으면 취업에 불이익 생길 텐데요' 뭐 이런다고... 실제로 기업에서 면접할 때 물어본다고도 한다. (여성학이나 사회학 등등 강의에 대해) 이런 거 왜 들으셨냐고. 그런 과목 듣거나 전공한 사람이 반골 기질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걸 기업도 아는 거겠지만. 어쨌거나 그래서 현재 한국 대학의 문사철 및 사회과학 학문은 고사 상태다. 

나는 원래부터 대학에 대한 환상은 없었으나, 이 책을 읽고나서는 대학에 갈 생각이 별로 없어졌다. 주변에서 대학 별 거 없다고 익히 듣긴 했으나, 실제적 사례를 이렇게 접해보니 확실히 체감이 됐다고 할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대학. 기업이 원하는 바에 맞춰, 사람을 찍어내는 학교. 그렇다면 과연 대학의 존재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대학의 존재 이유는 학문, 탐구라는 추상적인 대답밖에 내놓을 수 없지만 어쨌든 취업은 대학의 존재 이유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책은 이에 대해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분석의 역할에서만 그칠 뿐이다. 물론 명확한 대안을 내놓아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세태가 틀렸다는 문제제기가 우선 중요한 거니까. 하지만 내가 책을 읽고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를 생각했을 때 우선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은 어쨌거나 국가의 산업 및 경제와 분리될 수 없는 기관이다. 기업의 목적에 철저하게 복무해서도 안 되겠지만 대학은 기업이랑 분리될 수도 없다(좋고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좋은 직장이나 학위 같은 사회적 희소가치를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아울러 이러한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라 한다.

학문의 완전한 자율성 같은 목표는 거창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제쳐두면, 우선은 고사 상태에 있는 학문에 대한 제도적 보호가 우선은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문사철, 일부 사회과학 학문, 예술 학문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취업의 논리에 의해 쉽게 구조조정되지 않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게 우선인 것 같다. 

이 책에 대한 아쉬운 점은 첫째, 다양한 대학의 사례를 '진격대'라는 가상 대학교의 사례로 일원화함으로써 대학 간의 차이를 무시했다는 것이 있다. 저자는 별 생각없이, 아니면 대학 실명비판이 좀 그래서 진격대라는 픽션적 글쓰기를 시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고 몇몇 사람들이랑 간단히 얘기해보기도 하고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본바, 취업에 대해서도 인서울 명문대랑 그렇지 않은 비수도권 대학이랑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난다는 것이다. 적어도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 정도 학교는 학과가 막 통폐합되지는 않는다(중앙대는 잘 모르겠긴 함). 명문대 학생들도 취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비수도권 대학 학생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갭이 있다고 한다. 아마 입학하는 학생들의 소득과 같은 계층적 차이나, 학생들의 자신의 대학 서열 인식에 대한 불안감에 기인한 차이이리라. 이런 디테일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둘째는 현 상황에 대한 분석이 수치화, 데이터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대학 별 차이도 그렇고, 현재의 문제 상황에 대해서도 단순하게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는 사례를 나열하기보다는 대학의 기업화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다른 요인들까지 함께 고려하고 연구해서 치밀한 분석을 내놓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저자가 사회학자니 말이다. 이 부분은 좀 아쉬웠다고 할 수 있다. 


2016년 여름학기 현대사회학이론 수업에서 과제로 제출한 서평. 기존의 감정사회학 연구와 결은 좀 다르지만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이 생각났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책에 실린 감정사회학 연구는 행위의 배후감정과 감정동학을 분석하는 것이 전부인 연구가 대다수인데 히로키는 욕망(감정)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서 대중들의 (비교적) 날것의 욕망을 과감히 정치에 반영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방법론적 얘기인데, 히로키가 제시한 '데이터베이스에 집적된 일반의지'의 분석이 요새 여러 매체에서 시도되는 의미망 분석으로 어느 정도 파악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또 그런 분석으로 감정을 얼마간 계량화해서 분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해서이다. 그런데 일반의지 2.0을 꽤 오래 전에 읽었고 또 내용을 충분히 이해한 것 같지도 않고 그냥 '감정 연구'와 히로키의 논의가 맞닿아있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뿐이 든 것이고 아직 1학년이라 통계 분석 그런 것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서 글에 쓰지는 않았다. 






거시적 감정사회학의 적시성과 과제들[각주:1]

서평: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1. 들어가며: 왜 감정이 중요한가? 


2016년 5월 17일, 서울시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화장실에서 한 20대 여성이 일면식 없는 30대 남성에 의해 흉기로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불리며, 우연히 살해당한 여성에 대한 추모의 물결을 일으켰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경각심을 촉발했다. 사건 발생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5월 22일 밤까지 피해자를 추모하고 사건의 간접적 원인으로 지적된 여성혐오적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는 의미의 포스트잇이 총 1004장 부착됐다.[각주:2] 인근에서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고 이 사건의 사회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여성혐오 현상을 고발하는 의미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붙인 것이다. 이러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추모 포스트잇 부착 행위 말고도, 이 사건을 목도한 시민들의 반응은 집합행동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5월 21일 강남역 현장에서 약 400명의 시민들이 추모집회에 참석했고,[각주:3]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는 가두시위가 6월 6일 홍익대학교 인근에서 진행됐다.[각주:4]

소설가 박민규는 세월호의 침몰과 그것을 둘러싼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 “세월호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평하였다.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하고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각주:5] 이러한 사고-사건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을 해석한다면, 사건 이후 일어난 추모 물결과 집회·시위는 강남역 살인사건이 어떤 정신 이상자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단순한 ‘사고’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즉,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에 대한 사회 전반의 멸시와 혐오 감정이 그 모습을 직접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낸 ‘사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남역 살인사건은 일반적인 살인 사건처럼 사고 발생 후 경찰이 사건을 적당히 조사하고 법원이 적절한 판결을 내리고 범죄자는 처벌받는 식으로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제기될 수 있다. 일면식도 없는 한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의 동기 형성에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이해가 쉽다(실제로 가해자는 조사 과정에서 “여자들에게 항상 무시당했다”고 언급한 바 있고, 이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또한 여성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문제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인식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직접적인 행동에 동참했다는 분석 역시 납득이 간다. 의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기인한 사건들이 비록 작더라도 꾸준히 있어왔는데(예컨대 성폭력 사건과 그에 대해 ‘가해의 원인을 제공한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담론, 혹은 ‘김치녀’나 ‘김여사’ 같은 비하 용어들) 왜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사회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논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여러 시위가 발생했는가? 강남역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여성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사회적 행동에 나서게 한 동인(動因)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러한 원인을 설명하는데 감정사회학이 유용할 수 있다. 감정사회학은 “감정이 사회를 어떻게 움직여왔는지”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다(31). 조야한 분석이지만, 강남역 살인사건을 둘러싼 추모와 시위 등 집합행동의 발생 원인으로 공포 감정을 지목해볼 수 있겠다. 살인사건 발생 이전에도 한국 사회의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다양한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실제로 발생하고 형사처벌이 이뤄지고 통계적으로 집계되는 폭력 사건들 뿐만 아니라, 형사처벌도 힘든 일상에서의 성희롱 및 성추행들, ‘김치년’, ‘김여사’와 같은 편견과 언어 폭력들, 그리고 더 나아가 ‘여자기 때문에’ 강요되는 여러 보수적 규범들이 여성들의 실제적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차별과 폭력을 겪는 여성들은 일차적으로 공포라는 감정 에너지를 가진다(실제로 포스트잇에 새겨진, ‘살女주세요’로 대표되는 문구들을 살펴보면 공포 감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차별과 폭력에 대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 및 담론이 확산되면서, 여성들은 공포 감정을 사회로 외사(extroject)하고, 이는 분노의 표출—저항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공포의 감정이 체제를 개혁하려는 집합행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 현상의 발생 원인과 사회 변동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감정사회학은 구조와 행위를 매개할 수 있다. 위의 강남역 살인사건과 관련지어 풀어 쓰자면, ‘여성혐오적인 사회 구조’에 대해 왜 여성을 비롯한 시민들은 ‘집합행동(행위)을 펼치는지’ 그 구체적 동인을 설명하는 데에서 감정사회학은 그 힘을 발휘한다. 

감정사회학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사회학에서 감정은 비합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며 백안시(白眼視)되어왔다. 실제로 20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감정은 사회학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가 아니었고, 지금도 어느정도는 그렇다. 예를 들어 현재 많은 대학의 사회학과에서 개론서로 널리 쓰이는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사회학』(을유문화사, 2014; 영어 원제는 Sociology)의 목차를 보자. 이 책은, 세계화와 사회 변동(4장), 일과 경제(7장)에서부터 젠더와 섹슈얼리티(15장), 종교(16장), 미디어(17장), 민족·전쟁·테러리즘(22장)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사회학적 주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감정의 발생 원인과 표출 양태에는 사회·문화적인 요소가 깊게 관여하고, “[현대의] 사람들은 문자 메시지에 찍힌 점 하나마저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적으로 민감해져버렸”음에도 말이다(30).[각주:6] 박형신·정수남의 책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한길사, 2015)는 사회학에서 감정이 갖는 중요성과 감정 분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사회학은 ‘합리적인 것’만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을 연구하는 학문임을 강조하면서, 저자들은 사회학의 감정적 전환(emotional turn)을 시도한다. 



2. 왜 거시적 감정사회학인가?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1장과 2장에서 감정사회학의 중요성 및 거시적 감정사회학의 개념과 주요 방법론을 소개한다. 앞서 서술했듯이, 기존의 사회학 이론들과 경험적 연구들은 감정을 도외시해왔다. 물론 사회학이 감정을 아예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선 고전 사회학을 살펴보자.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배’ 개념이나 뒤르켐의 집합의식 논의, 짐멜의 ‘둔감함’ 개념은 고전 사회학자들이 감정이라는 주제를—중요하게 다루지는 않았지만—그래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감정은 사회학적 주제로 일부 다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됐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여 다룰 대상은 아닌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감정은 1) 다른 사람이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된다는 점에서, 2) 감정을 표현하는 주체가 처한 상황적 맥락에 따라 상이하게 표현된다는 점에서, 3) 행위의 속성을 지니는 점에서, 4) 사회적 규범에 대해 조정되고 규제된다는 점에서, 5) 사회에서 종종 집단적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이러한 감정의 사회적 속성에 여러 학자들이 주목한 후 1970년대 후반부터 감정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의 감정사회학은 여러 한계를 안고 있다. 요는 감정을 사회를 변화시키는 독립 변수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회학 이론의 본령 중 하나가 사회의 거시적 변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것일진데, 해당 시기의 감정사회학은 감정이 사회 구조 혹은 규범에 의해 구성되고 결정된다는 점만을 강조한 나머지 사회적 실체로서의 감정을 제대로 조망하지 못했다.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 혹은 결정되는가, 라는 문제에만 집중하다 보면 결국에 감정은 개인적 문제로만 그 중요성이 축소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던 강남역 살인사건의 문제에서도 보았듯 감정은 행위자들을 집합적으로 동원하며 특정한 사회적 현상을 낳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 따라서 기존의 감정에 대한 사회학의 논의를 넘어선 ‘거시적’인 감정사회학이 필요하다. 거시적 감정사회학은 감정이 어떻게 특정한 행위를 유발하고 그것이 거시 구조와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거시적 감정사회학의 이론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거시적 감정사회학은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감정을 다시 사회학의 무대로 끌어올려 현실 사회의 풍부한 결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맥락성, 상황성, 관계성을 강조하는 감정사회학의 특유한 개념 때문이다. ‘감정동학’(emotional dynamics)이라는 개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감정동학은 “행위자가 처한 상황적·관계적 맥락 속에서 감정적 행위의 주체로서 행위를 전개함에 따라 발생하는 역동적 과정”이다(44). 감정동학을 이끄는 감정은 ‘배후감정’(background emotion)이다. 배후감정의 양태(과거지향적인가, 현재지향적인가? 혹은 자신을 향한 감정인가, 외부를 향한 감정인가?)에 따라 감정동학은 변화한다. 이를 통해 감정사회학은 단순히 구조가 행위를 일대일로 결정한다는 단조로운 분석에서 벗어나고, 그러한 분석 방식이 담지 못하는 여러 예외적 상황들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거시적 감정사회학은 사회 변동에서 감정이 미치는 영향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이론적 의의뿐만이 아니라 실천적 의의도 가진다.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기존의 사회학은 “개별적 사례가 갖는 특수성과 구체성을 사상시킴으로써” “비현실적인 획일적 정책 대안만을 제시해”왔는데(97), 거시적 감정사회학은 행위자의 감정형성 메커니즘과 감정동학을 파악하여, 보다 세분화된 정책 입안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그간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다뤄졌다 해도 고작해서는 종속변수의 위치만을 가졌던 감정이라는 존재를 독립변수의 위치로 격상시키며, ‘거시적 감정사회학’의 필요성을 주창하고 그 관점의 틀에서 한국 사회를 분석한 저자들의 연구를 제시한다. 책의 3장에서 9장은 먹을거리 파동, 노동자의 행위양식, 신자유주의와 축소된 주체 따위의 사회적 주제를 감정사회학의 틀에서 분석한 연구들이다.

책의 8장 ‘공포정치와 복지정치’의 논의 전개 방식은 감정사회학의 의의와 이론적 강점을 잘 드러낸다. 감정사회학을 통해 구조에서 원인을 찾기 어려운 불명확한 예외적 상황의 설명이 가능해진다. 흔히 사람들은 좌파 정권이 득세하면 복지 제도가 확충되고, 우파 정권이 득세하면 복지 제도가 축소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들의 복지제도 역사를 살펴보면, 복지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주요한 정책들은 주로 우파 정권에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 많은 복지정책들이 입안됐다. 왜 그러한가? 당파성 이론과 정당 간의 경쟁을 다룬 이론을 살펴보면 우파 정권의 복지 정책은 예외적 상황이다. 우파 정권은 이념상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지도 않으며, 정당 간의 표심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도 복지 정책은 좌파 정당이 보통 먼저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정치적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우파 정권이 복지 카드를 꺼내든다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지만, 사실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우파 정권은 경제적 위기 모면 등을 이유로 들어 복지 정책을 축소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구조에서 원인을 찾기 어려운 불명확한 예외적 상황을 감정사회학은 설명할 수 있다. “[우파 세력이] 처한 구조적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개인적·집합적 노력은 감정동학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320). 책에 따르면, 우파 정권의 복지정치를 촉발시키는 주요 배후감정은 ‘공포’인데, 이 공포의 책임소재를 정권이 내부로 인식하느냐 혹은 외부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정치의 양상이 공포정치인지 복지정치인지 갈린다.

또한 책의 6장 ‘고도경쟁사회 노동자의 공포 감정과 행위양식’은 IMF 이후의 치열한 고도경쟁 체제의 노동자들의 행위양식을 배후감정과 감정동학 개념을 통해 총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감정에 따른 맞춤형 정책의 개발을 도울 수 있는 감정사회학의 실천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IMF 체제 이후 보다 유연화된 고용 정책과 약화된 사회적 연대로 인해 노동자들의 공포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포 감정에 대해 노동자들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대응하지 않는다. 공포는 노동자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른 배후 감정을 낳고, 이는 상이한 행위양식으로 표출된다. 공포 감정에 노동자들이 대응하는 행위양식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1) 공포 감정을 내사하느냐 외사하느냐, 2) 공포 감정에 대응하는 행위가 미래 지향적인가 과거 지향적인가가 주요 변수이다. 첫째, 공포 감정이 외사되어 현 경쟁체제를 향하고 행위가 미래 지향적이라면 배후감정은 분노로 나타나고, 노동자들의 행위양식은 체제를 변혁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둘째, 공포 감정이 외사되나 행위가 과거 지향적이라면 배후감정은 무력감으로 나타나고, 행위양식은 체제에 수동적으로 순응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셋째, 공포 감정이 내사되어 자신을 향하고 행위가 미래 지향적이라면 배후감정은 수치심이고 노동자들은 이른바 ‘자기계발적 주체’의 행위양식을 취한다. 넷째, 공포 감정이 내사되고 행위가 과거 지향적이라면 배후감정은 체념이고, 노동자들은 개인적 태업과 같은 체제를 이탈하려는 행위양식을 보인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네 가지 행위양식의 기저에 존재하는 배후감정을 분석하면 그것에 맞춰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회정책의 개발이 가능해진다. 예컨대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새로운 환경과 기술에 대한 적응 교육을” 제공하는 식이다(262).



3. 경험적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는 아쉬움 


앞서 서술한 것처럼 감정사회학은, 그간의 사회학이 도외시했던 감정이라는 인간 행위의 주요한 동기를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복권시킴으로써 사회의 정치(精緻)한 이해에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이론적 차원의 의의와, 그럼으로써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입안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실천적 차원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책에 실린 감정사회학의 방법론을 활용한 몇몇 연구들은 아쉬운 점을 남긴다. 

지적할 것은 책에 실린 몇몇 연구들에서 행위자들의 특정한 배후감정이 어떠한 감정동학을 통해 실천으로 옮겨지는지에 대한 실증적, 경험적 근거와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갖는 배후감정과 그것의 감정동학을 경험적 근거들의 뒷받침 없이 추상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몇몇 장의 논의들은 ‘생각해보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가설적인 수준의 설득력이 약한 논의로 비친다. 

예를 들어 4장 ‘‘부자 되기’ 열풍의 감정동학’을 살펴보자. 이 장에서는 먼저 한국 사회의 부자 되기 열풍을 발생시킨 두 가지 사회적 원인—경제적 공포와 사회적 위험의 개인화—을 지적한다. 그 뒤 사회의 직접적인 행위자인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의 열망 뒤에 숨어있는 감정동학이 어떻게 부자 되기 열풍을 촉발시켰는지 분석한다. 책에 따르면 ‘부자 되기’ 열풍의 감정동학은 ‘공포-환멸-선망’의 세 단계를 거친다. 위험 부담의 개인화를 추동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포의 감정을 우선 불러일으키는데, 정부가 그러한 위험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사회 구성원들이 인식하며 그들은 환멸의 감정을 가진다. 그러나 환멸의 감정은 대개 내사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사회적 열풍을 촉발시키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환멸의 감정이 선망의 감정으로 변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자기계발적 담론과 ‘누구나 할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에토스의 확산 때문에 결국 사회 구성원(대중)들은 자신도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즉 선망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대중들은 공포, 환멸, 선망의 감정을 가졌는가? 위의 설명은 논리적으로는 수긍이 가나 현실 사회를 살아가는 대중들이 실제로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부자 되기 열풍에 동참하는가는 양적 통계 자료와 질적 연구 자료를 통해 경험적으로 밝혀야 할 문제이다. 본 책의 2장에서는 거시적 감정사회학의 방법론을 제시하는데, 감정을 양적으로 조작해 통계적으로 검증하는 방법은 유용하나 한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타인과의 권력 관계나 사회적 구조 및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표출되는 감정 특유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면 1) 역사적 텍스트 자료 등을 통해 문헌 연구를 해야 하고 2) 인터뷰나 관찰 등의 질적 연구방법을 써야 한다. 그런데 1)의 경우, 감정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정서적 경험이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역사적 텍스트만을 연구하는 것은 미시적인 관점에서 개인들이 어떻게 감정을 발현하고 표출하고 또 통제하는지의 감정동학을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를 위해 2)의 질적 연구방법이 중요하다. 

그러한 거시적 감정사회학의 방법론을 살펴볼 때 4장은 어떻게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가? 4장은 ‘공포-환멸-선망’의 감정동학이 부자 열풍의 원인이 된다는 가설의 적실성을 외환위기 이후 10년 동안 현격히 감소한 공적 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양적 신뢰도 조사나(155쪽), 매스미디어의 성공 신화를 전파하는 프로그램들(156-158쪽) 혹은 자기계발 담론을 유포하는 많은 출간물들(163쪽) 등의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뒷받침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텍스트 분석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존재한다. 실제로 살아가는 대중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면밀히 분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공포 감정이 정부에 대한 환멸 감정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은 어떠한가? 다음과 같은 다른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각자도생의 사회였다. 6.25 전쟁 초기, 당시 정부는 서울이 안전하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지만 정작 자신들은 부산으로 철수했다. 성수대교 붕괴나 삼풍백화점 사건은 또 어떤가. 개개인이 잘 사는 길은 당장의 욕망을 억누른 채 ‘열심히 노력’하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길이었다. 국가의 성장은 국민 개개인 차원의 ‘노력’이 이룩했고, 사실상 정부 차원에서 낮은 생활 수준이나 특별히 발생하는 사회적 위난에 대해 이렇다 할 대책을 세우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감안하면 사회 구성원들이 2000년대에 들어 정부에 특별히 환멸의 감정을 가졌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할 수 있다. 또한 매스미디어가 ‘당신도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선망의 감정을 유포하지 않았냐는 것에 대해서도, 과연 매스미디어가 겨냥한 ‘대중’은 어떤 대중인지(비교적 소수의 교육받은 중산층들이 주로 그러한 정보를 수용하지 않았을까?), 비교적 교육받지 못한 계층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심리학적 자기계발 담론이 실제로 선망의 감정을 가지게 한 사회적 원인인지(당시 ‘부자 되기’ 열풍과는 시간적 거리가 존재하지만, 최근의 ‘노오력’과 같은 자기계발 담론에 대한 인터넷 상의 조소들을 상기해보자)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정리하자면,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배후감정과 그것의 감정동학을 설명할 때 치밀한 경험적 자료들이 동원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몇몇 장은 그렇지 못하다. 위에는 주로 4장을 예로 들어 설명했는데, 6장의 경우도 공포 감정이 어떻게 분노 등의 배후감정으로 변모하는지 인과적 설명이 부족하다. 물론 6장 후반부에는 체념의 배후감정을 통해 체제 이탈적 행위양식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구술 자료가 설명력 있는 근거로 제시되나, 노동자들의 처지(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 직장의 노조 조직률은 어떠한가? 관리직인가, 생산직인가?)에 따라, 그리고 특정한 노동자 집단의 공통의 사회적 경험들에 따라 이들이 어떤 배후감정을 갖게 되는지의 설명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특유의 통치성으로 인한 공포 감정의 사사화와 그로 인해 만들어진 축소된 주체(혹은 자기계발적 주체)를 다룬 3장의 경우도 비슷하다. 물론 ‘왜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고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계발을 통해 위난을 벗어나는 것에 골몰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할 때 인간의 미시적 행위와 구조적 사회 원인을 잇는 가교로서 감정사회학을 활용한 책의 3장은 충분한 논리적 설득력을 가지나, 다만 경험적 근거의 부족으로 논문의 현실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4. 마치며: 감정사회학의 과제들


지금까지 감정사회학의 유용성과 그 의의를 살펴봤고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실린 연구들의 아쉬운 점을 짚어보았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런 지점들을 감정사회학이 논의한다면 적절할 주제들을 두 가지 정도 제시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1) 촛불집회와 대항감정


9장 「먹을거리, 공포, 가족 동원」은 가족 단위에서 모성이라는 감정이 1) 무너진 신뢰(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소고기 파동에 대한 무책임한 대응), 2) 소고기 파동에 대한 공포, 3) 분노(경찰의 폭력 진압과 버시바우 미 대사의 국민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 등), 4) 미래의 불확실성에 의한 감정의 증폭이라는 네 가지 감정의 메커니즘을 거쳐 가족 단위의 촛불집회가 발생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장의 말미에서 저자들은 “그 격렬하고 열정적이었던 촛불집회 이후 우리 사회에서 그 촛불의 의미를 찾아보기 힘들다”(383)며, 감정사회학의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우리는 이제 이 책을 마무리하며 또 다른 감정사회학적 과제들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촛불을 더 이상 켜지 않게 한 감정동학은 무엇인가? 또 어떠한 감정동학이 당시의 열정의 에너지를 무력화했는가? 그렇다면 그곳에는 또 다른 대항감정들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이는 우리가 제기했던 전제, 즉 감정은 사회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변화를 지체시킬 수도 있다는 전제 중 후자에 대한 연구를 더욱 진척시킬 것을 요구한다. (383, 강조는 인용자)


2016년 현재를 생각해볼 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촛불의 감정은 상당 부분 무력화됐을 뿐더러, (여성에 대한 극단적 멸시나 지역 및 외국인 차별과 같은) 극우주의적 담론이 그 세를 점점 키워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한 극우주의적 담론 확장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이 웹사이트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박가분의 분석이다. 그는 저서 『일베의 사상』(오월의봄, 2013)에서 일베가 촛불시위의 쌍생아라는 도발적인 견해를 제기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쇠고기 추가 협상을 약속한 이후”의 2008년 촛불집회는 “현실의 맥락에서 검열되지 않은 온갖 정념과 분노, 그리고 공포가 여과 없이 표현되는 장”이 되었는데, 이러한 “몰이상적 측면에 대한 반동”으로 일베가 생겨나지 않았냐는 것이다.[각주:7] 그는 인터뷰에서 “다소 무리한 주장일 수는 있”다는 것을 인정하나, 2008년 이후 한국 사회의 역사는 “촛불시위의 환상이 깨져가는 과정”으로 전개됐으며 “촛불집회의 이상은 사라지고 [보수 정치인들을 욕하고 조롱하는 식의] 카니발적인 위반만 남은 것이 바로 일베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각주:8]

실제로 일베 유저들이 종종 자신이 어떻게 ‘우파 청년’(?)이 되었나를 회고할 때 자주 드는 서사가 촛불집회 당시의 ‘선동’과 우파 정치인들에 대한 조롱에 반발하여 일종의 전향(?)을 겪었다는 것이다. 물론 검토해야 할 측면이 많은 주장이긴 하지만, 촛불집회의 정념적인 정치적 수사들 및 분노 감정과 촛불집회의 미진한 끝맺음이 환멸이라는 대항감정, 그리고 그것이 환멸-전향의 감정동학을 낳은 게 아닐까? 



2) 선망의 감정과 자기계발 열풍이 지나간 자리: ‘헬조선’과 ‘노오력’ 


“1997년 이후로 지속된 경기침체와 노동시장의 유연화”(105)로 인해 노동자들의 일상생활은 매우 불안정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 그러한 “단기적 사회” 속에서 “장기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과 “지속적인 사회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정체성과 평생의 역사를 담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려워진다.[각주:9] 즉,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장기적으로 조직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공포 감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공포 감정과 그 원인들을 정부가 해결해줄 수 없다는(혹은 해결하지 않는다는) 현실과,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거대서사)이 사라진 상황 속에서 공포는 개인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로 간주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포는 개인에게 자기계발을 압박하는 감정적 에너지로 작용한다.”(125) 

그런데 2016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자기계발 담론은 파산한 것처럼(적어도 파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헬조선’과 ‘노오력’이라는 두 인터넷 신조어를 보자. 우선 헬조선은 지옥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헬(Hell)과 조선(朝鮮)의 합성어로, 지금 한국의 상황이 지옥같음을 뜻한다.[각주:1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이다. 기성 사회의 청년 착취(‘열정 페이’, ‘무급 인턴’)나 부족한 사회 안전망, 한국의 엄청난 노동 강도를 조롱하고 그것들을 ‘미개’하다고 지적하는 맥락에서 주로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노오력’은 ‘노력하면 될 수 있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해라(주로 ‘열정 페이’와 관련된 논란에서)’ 등의 기성 사회의 청년 착취와 자기계발 담론, 상당히 많은 한국의 노동 시간을 조롱하고 비꼬는 데 쓰이는 용어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분명 ‘헬조선’, ‘노오력’과 같은 신조어는 적어도 ‘끊임없이 경쟁(노력)하고 살아남으라!’는 무한경쟁체제의 명령에 대한 반발로 읽힌다. 그러나 이것은 저항으로 이어지는 적극적인 분노 감정을 나타내는가? 분노긴 분노이나, 그것은 적극적인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개 그러한 반응들은 조소, 냉소, 비웃음의 형태를 띠며, 6장의 노동자들의 행위양식 도식을 참고하자면, 그것은 환멸이나 체념의 배후감정을 낳는 것처럼 보인다.

무한경쟁 체제와 자기계발 담론에 분노를 보내는 젊은이들. 그러나 체념으로 이어지는 분노의 감정들. 칼럼니스트 박권일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혐오[즉, 체제 개혁을 고민하기보다는 원래 헬조선은 미개하다고 냉소하는 현상—인용자]라는 ‘증상’이 아니라 체념이라는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체들의 변화한 행위양식의 배후에 있는 감정을 분석하고, “주체가 정치적 무력감을 극복하고 세계 속에 의미 있게 개입할 좌표를 찾아내는”[각주:11] 시도에 감정사회학 연구가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각주:12]





  1. 인용구의 출처는 각주에 표기하나, 본 글이 다루는 책 박형신·정수남의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경기도: 한길사, 2015)에서 가져온 인용의 출처는 따로 각주를 달지 않고 괄호 안에 페이지 수를 표기한다. [본문으로]
  2.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강남역 10번 출구 포스트잇]경향신문이 1004건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경향신문』, 2016년 5월 23일. [본문으로]
  3. 박현철, “[한겨레 라이브] 이 시각 ‘강남 살인사건’ 추모집회 현장”, 『한겨레』, 2016년 5월 21일. [본문으로]
  4. 최성욱, “20일 넘게 이어지는 '여성 혐오' 반대 집회…홍대 앞 가두행진”, 『뉴시스』, 2016년 6월 6일. [본문으로]
  5.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눈먼 자들의 국가』(경기도: 문학동네, 2014). [본문으로]
  6.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2010년대에 들어 미국의 십대들은 문자 메시지에 찍힌 마침표(period)를 화났거나 언짢다는 표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가 있다. Guo, Jeff. “Stop. Using. Periods. Period.” The Washington Post. The Washington Post. 13 June 2016. Web. 11 July 2016. [본문으로]
  7. 박가분, 『일베의 사상』(서울: 오월의봄, 2013), p.215. [본문으로]
  8. 선민서, “[저자와의 대화] 박가분, 『일베의 사상』 / 나는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 『고대대학원신문』, 2013년 12월 26일. [본문으로]
  9. 리처드 세넷, 조용 역,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서울: 문예출판사, 2002), p.33. [본문으로]
  10. 본래 헬조선은 한국을 특히 비하하기 위해 ‘헬조센’(Hell + ちょせん)의 형태로 쓰였는데, 이것이 조금 더 순화(?)되어 ‘헬조선’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1. 박권일, “[세상 읽기] 왜 분노하는 대신 혐오하는가”, 『한겨레』, 2016년 2월 11일. [본문으로]
  12. 그런데 2010년 들어 생겨난 ‘과잠 현상’을 생각해보면 꼭 모든 20대들이 자기계발적 담론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소위 ‘명문대생’들 가운데에 자신의 학교 문양이 그려진 야구잠바를 입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문화가 새로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계발 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자기표출적 문화’를 철저히 내면화한 주체들이고, 이들 행위의 배후감정은 공포나 환멸보다는 자랑스러움(pride)으로 보인다. “최소한 몇 년 전까지 서울대라는 학벌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선 부끄러운 ‘주홍글자’였고, 그래서 학생들은 내심 학벌경쟁의 승자임을 자랑하고 싶더라도 서울대를 드러내는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을 어색해했다. (…) 그러나 몇 년 사이, 대학이 세계화되어서인지 미국 대학의 캠퍼스처럼 이제 국내 대학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학 이니셜이 박힌 옷을 입는 대학문화가 정착됐다.”(김도민, “자퇴하는 대학생 김예슬과 학교점퍼를 입는 대학문화”, 『인물과사상』 2010년 5월호, p.158.) 이는 감정사회학 연구에 있어 계층 등에 따라 달라지는 배후감정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준다. [본문으로]

대학 1학년 1학기 때 과제로 제출한 서평. 책은 잭 골드스톤의 "왜 유럽인가?"(조지형, 김서형 옮김, 서해문집, 2011)이다.  


유럽이라는 신화 깨기

— 『왜 유럽인가?』서평



책을 읽게 된 이유: 매력적인 주제


신문 기사나 인터넷의 글들을 읽다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접한 적이 있었다.  유럽은 과연 정말로 우월하고, 그것이 전 세계가 따라야 할 표준인가. 유럽, 혹은 서구의 문화와 문명이 우월하다는 관점은 현재 서구가 쥐고 있는 패권에 의해 형성된 잘못된 편견이 아닌가.[각주:1] 이런 주장은 신선했고, 나는 동의했다. 역사란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유럽중심 역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현재 서구를 설명하는 데 있어 오리엔탈리즘에 오염된 담론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곱씹어볼수록 내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간에 지금 서구는 세계를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 경제, 문화의 측면에서 역시 서구는 중심부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인터넷의 기사와 글들은, ‘비서구 세계나 서구나 서로 평등하다’는 정치적 올바름, 혹은 규범적 올바름에만 초점을 맞춘 것 같았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현재 서구가 어떻게 패권을 잡게 됐는지 그 원인과, 배격되어야 할 유럽중심주의적 담론은 무엇인지를 서술한 연구를 읽고 싶었다.  

  그런 내게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문제의식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왜 밤하늘에서 지구를 볼 때 특정 지역(유럽, 북미, 동아시아 일부)은 밝지만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책의 초점은, 왜 유럽이 잘나게 되었는가, 유럽과 비유럽의 ‘분기’를 유발한 원인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여러 편견과 왜곡에 찌든 기존의 잘못된 설명들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최신 연구 성과를 종합하고, 비교론적인 방법론으로 분기의 원인을 단계적으로 설명한다. 


유럽 분기의 원인: 산업 혁명 


저자인 골드스톤은 유럽이 결정적으로 산업혁명 때문에 부흥했다고 주장한다. 여섯 가지 요소들이 조합돼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했고 이것들이 유럽으로 확산돼 분기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골드스톤이 이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사유의 궤적을 살펴보자.[각주:2]

골드스톤은 우선 유럽이 1700년 이전부터 계속 진보하였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을 일축한다. 18세기 이전까지 인간 모든 문명은 마치 사인 함수처럼 진보와 후퇴를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기술적 진보는 물론 이루어졌으나 이것이 결정적인 분기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여러 영역에서의 진보들이 시공간적으로 흩어지고 고립돼 있어 이것이 결합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기술적 진보가 꾸준히 발생하고, 경제적 수준과 생활 수준이 지수 함수처럼 급격히 성장하는 근대와 대비된다. 그렇다면 분기를 형성한 원인은 무엇일까. 골드스톤은 종교적 차이를 검토한다.  

유럽과 비유럽의 종교적 차이가 분기를 형성한 것일까? 골드스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유럽의 종교(기독교)는 진취적이고 자연을 대상으로 바라봐 물질적 진보에 적극적이었고, 동양의 종교는 안정을 중시하는 정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양 종교와 서양 종교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개념화다. 이슬람교라는 예외 사례가 있다. 또한 16세기까지는 서양보다 동양에서 무역이 더 활발했다. 베버 식의 주장,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자본주의 발달과 경쟁, 과학적 접근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골드스톤은 반박한다. 경쟁 체제는 동양에도 있었고, 경쟁을 한다 해서 꼭 번영하는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 폴란드, 동유럽 국가들은 타국과 활발한 경쟁을 펼쳤는데 영국만큼 성장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항상 가톨릭 국가보다 번영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가톨릭은 16-18세기까지 과학에 개방적이었고 과학 연구들을 종종 지지했다. 

종교가 원인이 아니라면, 골드스톤은 다음으로 제국주의와 노예제도가 분기를 유발했는지 검토한다. 골드스톤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다. 유럽이 16세기부터 세계를 차례차례 정복해오지는 않았다. 예컨대 포르투갈은 압도적인 힘으로 인도를 정복시키지 않았다. 이들은 인도 중앙과 멀리 떨어진 작은 섬에서부터 교역과 정복을 시작했다. 바로 인도를 접수하기에는 군사력이 뒤처졌기 때문이다. 사실 정복 대상국의 정치적 불안정이나 역병과 같은, 시기나 운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유럽이 정복에 성공한 경우가 많다. 16-17세기 초기, 유럽인들이 우월한 힘으로 교역과 정복에 성공했다는 것은 신화이다. 노예제 또한 유럽의 부흥에 기여를 별로 하지 않았다. 많은 식민지 인민들을 노예 상태로 유지시키고 교육하지 않은 것은 부 창출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 비교해볼 때, 노예제도를 많이 활용하지 않은 영국, 스위스, 벨기에, 미국의 뉴잉글랜드가 근대 세계의 선구자였다.  

근대적 발전 이전에 유럽과 아시아는 큰 차이가 없었다. 앞서서 보았듯이 유럽만이 유별나게 진보한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종교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교역과 약탈로 엄청난 이득을 본 것도 아니었다. 유럽이 근대적 발전, 산업 혁명을 겪기까지 유럽과 아시아에는 생활수준에 크게 다른 차이가 없었다. 골드스톤은 기대 수명과 실질임금, 평균 신장을 비교해 이를 뒷받침한다. 19세기 이전까지 아시아와 유럽에는 실질임금과 기대수명, 신장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물론 짧은 기간동안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에서 실질임금이 증가하고 감소하기는 했겠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실질임금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런데 1850년과 1900년까지 유럽 내에서 급격한 분기가 발생한다. 1900년부터 유럽의 가장 부유한 국가는 아시아 국가를 능가하게 된다. 산업화되어 대량 고용이 발생하고,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식량을 구매하고, 생산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부흥을 만든 것은 산업화로 볼 수 있다. 


영국에서 발전한 산업 혁명과 그것을 가능케 한 요인들


유럽의 분기를 유발한 결정적 요인은 산업화와 기술적 혁신들이고, 그것은 주로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영국에서 이뤄진 혁신들이 유럽 대륙으로 확산돼 지금과 같이 패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한 요인은 바로 새로운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과거에는 새로운 사상이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져 억압되었다. 오스만 제국도 그랬고 17세기 이후의 가톨릭도 그랬고 명과 청조의 중국도 그러하였다. 다만 영국이 그렇지 않았다. 영국은 법 체계가 관습법 체계였는데 이는 통치자의 바람대로 악용되지 않아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600년대 이후 유럽에서는 기존의 종교적 해석이나 그리스의 사유 체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상적 패러다임들이 생겨났다. 데카르트가 대표적이다. 영국은 왕립 학회를 중심으로, 이러한 논리, 연역, 추론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 체계에 덧붙여, 측정과 실험, 관찰을 통한 경험적 방법을 크게 발달시켰다. 

이러한 원인들을 여섯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련의 새로운 발견으로 기존 교회, 그리스 문헌의 권위를 의문시하고 부정하게 됨, 2) 자연 세계에 대한 실험 연구와 수학적 연구를 결합한 과학을 발전시킴, 3) 증거, 논증, 과학의 탐구 목적에 대한 영국 대법관 프란시스 베이컨의 관점이 주입됨, 4) 기구에 기반한 실험과 관찰의 접근 방법 개발, 5) 관용과 다원주의의 풍토, 새로운 과학에 대한 영국국교회의 지원, 6) 기업가 정신에 대한 관대한 지원, 기업 과학자 기술자 장인 사이의 긴밀한 사회관계.  

물론 이런 요소들은 유럽, 혹은 영국 사람들이 특별히 잘나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15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이나 인도, 이슬람의 과학 및 수학 수준이 유럽보다 깊었다. 기존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그것들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유럽의 사상들 또한 영국이 아닌 곳에서 먼저 생겼다. 위와 같은 조건들은 우연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골드스톤은 주장한다. 위 요소들이 영국이라는 국한된 장소에서 동시에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영국은 산업혁명과 일련의 혁신들을 이룰 수 없을 터인데, 그렇게 되어야 할 어떤 필연적 이유가 있지는 않다.


책에 대한 비판적 평가: 유럽 패권의 형성 원인과 이후 전망에 대한 좋은 개론서


저자인 잭 골드스톤은 이른바 캘리포니아 학파(California School)로 불린다. 캘리포니아 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서양의 등장이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며 서양의 경제적 우월성이 곧 중국을 위시한 비서양 국가에 따라잡힐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 책은 유럽 패권의 형성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책의 후반부에서 잭 골드스톤은 앞선 논증을 바탕으로 비유럽권의 부상 가능성을 점친다. 비유럽 국가들이 유럽이 성공하게 된 요인들을 갖추게 된다면 이들 역시 선진 국가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캘리포니아 학파가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근거들을 이 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서양 패권과 이후 중국의 부상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볼 때 이 책은 좋은 개론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이 책은 읽기가 쉽다. 페이지 수는 300쪽 정도로 읽기에 부담이 없다. 서술 또한 평이하다. 현학적이거나 난해한 문장이 없다. 구성 또한 이러한 역사 논의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친절하다. 각 장 별로 유럽이 부흥하게 된 원인들을 지목하는 기존의 논의를 검토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단계적 서술 방식은 독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도 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기존의 유럽중심적인 주장들을 실증적 증거로 하나하나씩 파헤쳐 간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단계적 서술로 유럽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통념들을 이해하기 쉽게 반박한다. 골드스톤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 책을 통해 충실히 전달했다. 1) 이해하기 쉬운 평이한 문장과 단계적 서술로 2) 유럽의 부흥 원인을 면밀히 밝히고 앞으로의 비유럽 국가들의 전망 또한 짧게나마 밝혔으며 3) 이러한 논증들을 진행해가는 과정에서 또한 기존의 유럽중심주의적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해부하였다. 

물론 책의 분량이 방대하지 않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만큼 그 깊이에서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 저자가 드는 다양한 논거들을 보자면 상당히 방대한 양의 주석이 실려야 할 텐데, 2장을 제외하고는 한 장당 주석이 대여섯 개도 채 달려있지 않다. 대중서임을 의식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의 근거들을 검토할 때 각각의 출처를 명확히 찾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이 책의 단점이다. 다만 각 장의 말미에 더 읽어보면 좋은 책들이 소개되고 있으니 열성적인 독자는 이를 길라잡이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저자가 드는 논거들이 경제학, 생물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에 바탕을 두고 있다보니 일부 논거들의 신뢰성이나 설득력이 약해지는 측면도 있다. 예컨대 책의 157쪽에서 저자는 “키에 관련된 연구를 통해 장기적인 안정성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중략) 100년부터 1800년 사이 평균 신장은 큰 차이가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의문점이 들기 마련이다. 키는 한 세기 정도의 기간 안에 빠르게 변화하는 것일까? 키는 영양 상태 말고도 인종적 차이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닐까? 이런 부분까지 책은 설명하지 않는다. 전체적인 책의 논지의 설득력을 약화시키진 않지만, 비약이나 부적절한 증거 동원으로 볼 수 있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이 책의 핵심 논지인 ‘영국에서 과학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활발했고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이 확산됐다’ 또한 더 많은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영국의 분위기가 그랬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확산된 데에는 영국 시민이나 과학자들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같은 실체가 있는 인프라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왕립 협회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해 기술자와 자본가들이 새로운 기술들을 채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혁신 기술들을 집약적으로 관리하고 연구하는 네트워크가 있었지 않을까? 대학이 그 역할을 담당했을 수도 있겠고 관료 기구가 담당했을 수도 있겠다. 더 많은 연구들로 보충되어야 할 부분이다.


아쉬운 번역


한국어판 번역에서는 곳곳에 오역들이 눈에 띈다. 글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는 않은 꽤 어색한 표현들이 더러 있고, 원문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하는 오역 또한 존재한다. 책의 57쪽을 보자. “유럽의 경미한 질병 사망률은 유럽 질병이 아메리카에 전해졌을 때 유럽 질병이 유발한 황폐화 효과에 의해 상쇄된 것 그 이상이었다.”라는 표현이 있다.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However, the lightness of disease mortality in Europe was more than offset by the devastating effects that European diseases had when they were introduced into the Americas.”[각주:3] 우선 ‘황폐화 효과’라는 표현은 오역이다. devastate라는 단어는 황폐화시킨다는 뜻을 가지지만, 이것의 형용사형인 devastating은 ‘대단히 파괴적인’이라는 조금 더 관용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effect 또한 효과라기보다는 결과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 더 맞다.[각주:4]

그런 사소한 표현의 문제는 의미 자체를 크게 왜곡하지 않으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 문장에는 결정적 오역이 있다. 우선 ‘황폐화 효과에 의해 상쇄된 것 그 이상’이라는 표현은 한국어에서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에 문장 자체를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황폐화 효과에 의해 뭐가 상쇄된다는 건가? ‘상쇄된 것 그 이상’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건가? 추측하건대 역자는 more than이라는 표현을 비교급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이런 오역을 범한 것 같다. 그런데 more than은 비교급이 아니라 ‘매우(to a great degree)’를 뜻하는 부사 표현으로 여기서 쓰였다. ‘A is more than offset by B’이면 A는 B에 의해 매우 상쇄된다, 한국어답게 풀이하면 B가 A보다 더 정도가 깊거나 크다는 의미이다. 기계적 번역이 낳은 오류라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 다시 번역하자면 “그러나, 유럽의 경미한 질병 사망률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옮긴 질병의 대단히 파괴적인 결과에 비해서는 보잘것없었다.” 정도가 된다. 이렇게 해석해야 앞뒤 문단의 문맥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앞뒤 문단은 유럽 인구의 10-15%를 감소시킨 유럽 역병과 원주민 인구의 90%를 감소시킨 역병을 대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유럽중심적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상술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기존의 유럽중심주의적 역사관에 대한 대안으로 좋은 책이다.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기존 유럽중심주의 담론에 저항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기도 하지만,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최신 연구 결과들을 상세히 반영했다는 것도 중요하다.

지역학 연구 성과와 구미 학계에서의 유럽중심주의 혹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면 이 책은 없었을 것이다. 유럽의 진보에 대한 많은 잘못된 생각들은 “유럽의 변화에 대한 충분히 자세하고 학문적인 이해와 아시아의 변화에 대한 다소 모호하고 극히 단순화시킨 이해를 비교한 것에서 유래한다”.[각주:5] 비유럽권 지역에 대한 체계적 연구와 축적된 지식들을 통해 한층 더 객관적인—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은 없겠지만 말하자면—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 주로 중국과 유럽을 대비하여 서술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아닌 다른 지역들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다. 아마 현재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아닌 다른 국가들, 혹은 아프리카나 남미, 오세아니아에 대한 지역학 연구가 미비하고 관심이 덜할 까닭일 터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반도 지역에 대한 역사 또한 깊게 연구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과 같은 비교적 중립적인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책에서도 한반도나 기타 지역은 여전히 주변부 같다. 어떻게 보면 탈유럽중심적인 역사 서술을 주도적으로 해 나가는 쪽이 구미 학계라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한국에서도 역사 연구에 충분한 지원을 하여, 양질의 결과물들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갈 길이 먼데, 각 대학의 역사학과를 통폐합하거나 역사콘텐츠학과와 같은 이상한 학제를 만들어 당장 돈이 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국의 현재 상황이 자못 안타깝다. 내실 있는 기초학문의 발달을 바라며, 구미 뿐만이 아닌 한국, 아프리카, 남미 학계에서도 탈유럽중심주의적 연구가 많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1. 강철구,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누가 만들었나」,『프레시안』, 2007.10.25. [본문으로]
  2. 이하의 내용은 잭 골드스톤, 조지형· 김서형 옮김, 『왜 유럽인가?』(경기도 파주: 서해문집, 2011)을 요약한 것. [본문으로]
  3. Jack A. Goldstone, Why Europe? (New York: McGraw-Hill, 2009), p.22 [본문으로]
  4. New Oxford American Dictionary는 devastating의 뜻을 “highly destructive or damaging”로 풀이한다. Merriam-Webster's Learner's Dictionary는 more than을 “to a great degree: very, extremely”로 풀이한다. [본문으로]
  5. 잭 골드스톤, 조지형· 김서형 옮김, 『왜 유럽인가?』(경기도 파주: 서해문집, 2011), p.5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