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2장 ‘문화적 기원’ 발제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2장 ‘문화적 기원’ 발제
민족(nation)
- 앤더슨의 민족에 대한 핵심적 명제: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이다(it is an imagined political community—and imagined as both inherently limited and sovereign).”(서장, 25쪽)
- 중요한 단어들: (1) 상상: 민족은 상상되는 것이다. 알지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을 같은 공동체의 성원으로 생각한다. (2) 제한: 민족은 구별-한정된다. A민족의 영토 너머에는 B민족이 산다. (3) 주권: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4) 공동체: 한 민족국가 내에 계층이 존재할 수 있지만, 한 민족 내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수평적 동료의식”이 있다. 이러한 수평적 동료의식은 계층/계급간 적대를 압도하기도 한다.
- 앤더슨은 위에 나열한, 민족의 정의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들의 문화적 기원을 2장에서 추적한다.
세속화
- 앤더슨은 “민족주의는 의식적으로 주장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주의 이전에 있었던 더 큰 문화체계와의 결합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33)고 제안한다. 앤더슨은 왜 민족의 기원을 문화적인 요소들로부터 추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민족주의의 출발은 근대적 합리주의와 세속화의 시작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근대 이전질병과 죽음 같은 고통들은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라고 서술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종교체계는 우연한 고난과 고통, 죽음과 그 너머의 삶의 이해를 돕기 위한 통합적인 체계를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도래와 과학의 발전은 “그 자신의 근대적 어둠도 동반”하였다. 존재의 덧없음과 무상한 인생의 고통에 진정제를 놓아줄 수 있는 적절한 것이 ‘민족’이었던 것이다. (기능적으로 봤을 때 민족이 종교의 역할을 얼마간 대체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기원은 전근대적, 종교적 문화체계와 근대적, 세속적 문화체계의 요소들을 나란히 놓고 그 상호작용과 길항을 밝혀냄으로써 추적할 수 있다. 앤더슨은 2장에서 다음과 같은 문화적 요소들을 분석한다: 종교 공동체, 왕조국가(이 둘은 제한limited, 영토 개념과 관련됨), 시간의 이해(공동체와 상상에 관련됨). (우리는 이러한 접근을 홉스봄과 대조해볼 수 있다. 홉스봄은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종족이나 언어적인 동일성이 민족주의 운동의 주요 호소 전략(?)이 된 이유를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찾는다. 앤더슨 또한 민족국가의 주권적 영토 내에서의 의식적인 사회공학적 작업—이를테면 언어의 동질화—이 있었다는 것을 언 급하지만, 요점은 왜 하필 ‘민족’이 발흥하였는지 그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종교 공동체, 왕조국가 — 제한된 영토라는 개념의 기원
- 종교 공동체와 왕조국가라는, 근대 이전에는 ‘자명해’ 보였던 것들이 쇠퇴하면서 ‘영토적 개념’, ‘제한된limited 공동체’의 개념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앤더슨은 이야기한다.
- 우선 종교 공동체를 살펴보자. “신성한 언어에 의해 연결된 고전적 공동체는 근대 민족들의 상상된 공동체 와 구별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34) 어떠한 특성인가? 바로 누구를 구성원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 별다른 경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고전적 공동체들은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으로서 신성한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초현세적 힘의 질서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틴문자나 중국 문자는 유럽 지역민들이나 동아시아 지역민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어떤 야만인이 그러한 ‘신성한 언어(문자)’를 배운다면, 그는 고전적 종교 공동체의 성원이 될 수 있다. 또한 그들 종교들은 그들이 “세상의 중심”인 것으로 상상했다(“존재론적 실재는 재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 진리언어truth-language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36쪽). 이러한 고대-중세의 우주관에서 비롯한 비-배타성과 비-상대주의적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은 “중세 말기 이후 점점 쇠퇴해갔다.” 그 이유는 크게 둘이다. 1) 유럽에서 비유럽 세계로의 탐험을 통하여 다른 문명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나 문화 체계를 인지한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종교 체계들은 서로 경합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신앙의 영토화territorialization of faith”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2) 신성한 언어(앞서 쓴 진리언어)의 퇴조이다. 인쇄자본주의의 공헌으로 라틴어는 퇴조하고 토착어(vernacular language)가 부흥한다. 1 이를 통해 “신성한 공동체들이 점차 분해되고, ... 영토화되는”(41) 것이다.
- 근대의 제한된 공동체에 대비되는 왕조국가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왕조국가는 영토적이지 않다. 왕권은 모든 것을 “중앙 중심적으로 조직한다.”(41) 근대 국가는 국경 내의 영토에 그 주권이 구석구석 미친다. 실제로 주권이 닿지 않는 영역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론적으로는 그렇고, 또 국가는 그렇게 노력한다. 그러나 “국가가 중심부에 의해 정의된 옛 상상체에서 국가간의 경계는 구멍이 뚫리고 불분명하”(41)다.
- “17세기 동안 신성 군주제의 자동적 합법성은 서유럽에서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44) “많은 왕조들은 정통성의 원칙이 조용히 시들어 갈 때 ‘민족’이라는 표어에 손을 뻗고 있었다.”(45)
보다 근본적인 인식론적 변화: 시간의 이해
- 일련의 세속적인 변화(종교국가·공동체의 퇴조,지방언어의 발달) 외에도 “세계를 이해하는 양식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남으로써”(46) 민족을 ‘확인’하게 될 수 있었다고 앤더슨은 말한다. 그것은 시간의 이해이다.
- 전근대적 시간 개념과 근대적 시간 개념은 다르다. 앞의 시간 개념은 ‘구세주적시간(Messianic time)’으로, 뒤의 시간 개념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homogenous and empty time)’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구세주적 시간에서의 동시성(simultaneity)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에서의 동시성과 구별된다. 47페이지의 아우얼바흐의 인용문을 보자. 구세주적 시간 개념에서 “지금 여기는 ... 과거에 언제나 있어왔고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어떤 것이다.”(47) 모종의 종교적, 신화적 세계관 안에서 사건들은 과거, 현재 구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채 그 나름의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에서의 동시성은 “예언과 완성에 의해 표시되는 것”이 아니다. 사건들이 종교적 체계 내에서 예언의 담지자로서 의미를 얻었던 구세주적 시간에 반해,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에 서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건들일지라도, 그것이 같은 날 같은 시—시계와 달력이 그것을 측정한다—에 일어났다면 동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meanwhile’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것이 다. “A사건이 일어나는 한편, B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이 두 사건들을 ‘한편’이라는 접속사로 연결할 수 있는 근거는 그냥 같은 시간대에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 “사회적 유기체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통해 달력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따라 앞으로(혹은 뒤로) 꾸준히 움직이는 견실한 공동체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비유가 된다.”(50) “영혼의 구원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면 다른 형태의 연속성만큼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숙명을 연속성으로, 우연을 의미 있는 일로 전환시키는 세속적인 작업이 필요하였다. ... 이러한 목적에 민족이라는 개념보다 적합한 것은 별로 없었으며 현재도 별로 없다.”(32)
소설과 신문
- 신문과 소설은 말하자면 위의 근대적 시간 개념을 체현한 것들이다. 앤더슨은 4편의,서로 다른 국적과 시대의 소설을 예시로 든다. 독자들이 이들 소설을 읽음으로써 ‘상상의 공동체’가 확인된다. «놀리 메 탕헤레»는 연대기적 시간 순서를 따른다.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 특정한 달에 만찬이 행해지는 것을 놓고 ... 수백의 이름 모를 사람들이 화제를 삼고 있다는 이미지는 즉시 상상의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52) «가려운앵무새»의 예시를 보면 소설이 어떻게 상상의 공동체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지 알 수 있다. «가려운앵무새»에서 1) 주인공이 전전하는 병원이나 감옥 같은 사회적 제도, 기관들은 식민지 멕시코라는 경계 안의 것들이고 2) 그 기관들은 굉장히 전형적인데(“그 자체로는 특별한 중요성이 없”다), 그러한 기관들은 감옥 같은 식민지 환경을 독자들이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게 돕는다.
- 신문을 보자. 신문은 매일 인쇄되고, (같은 언어 공동체 내의) 사람들은 매일(동일한) 그 날짜의 신문을 읽는다. 앤더슨은 이를 “하루 한나절의 간격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대중의례(mass ceremony)라고 말했다. “신문 독자는 자신이 보는 신문과 똑같은 복사품을 ... 이웃들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상상의 세계가 눈으로 볼 수 있게 일상생활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계속 확신하게 된다.”(61-2)
민족 너머를 상상하기 - 새로운 상상의 공동체
- “면대면의 원초적 마을보다 큰 공동체는 (그리고 아마 이 마을조차도) 상상의 산물이다. 공동체들은 그들의 거짓됨이나 참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상상되는 방식에 의해서 구별되어야 한다.”(26)
- 앤더슨에 의하면 결국 거의 모든 공동체는 상상의 산물이다. 한윤형은 그의 저서«뉴라이트 사용후기» 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운동 비스무리한 걸 하는 이들을 만나보니, 특히나 좌파 운동권들은 ‘민족, 그딴 건 없다’는 걸 아예 교리처럼 외우고 있더란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이 ‘민족’이란 것에 애착을 가진다면 이를 존중하고 거기서부터 평론을 시작하는 것이 또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한윤형, «뉴라이트 사용후기», 개마고원, 2009. 12쪽.) 결국 아주 작은 단위의, 면대면으로 만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닌 이상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논의가 짚어야 할 지점은 민족의 기원이 ‘허위날조’와 ‘거짓’임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민족 공동체의 역사적 과오를 정리하고 공존과 화합의 공동체의 가능성을 궁리하는 것일 테다.
- 앤더슨이 지적한 것처럼 민족은 “수평적 동료의식”을 낳고 이는 이타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대량의 희생”을 낳기도 한다. 민족 자체가 ‘제한된 공동체’인 이상, 민족은 필연적으로 그 안과 바깥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 «상상의 공동체»에서 근대의 민족 개념을 배태한 문화적 요소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현대의 문화적 요소들은 민족을 낳은 근대적 문화적 요소들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인터넷, 유엔, 지역 블록별 공동체...)
- 민족주의, 민족국가는 그 자신의 배타성을 개량할 수 있을까? 칸트가 말한 맥락에서의 ‘환대’는 과연 충분한가? 그것을 넘어선 인류애적 ‘세계공동체’의 구상과 실현은 가능할까?
- 앤더슨은 앞으로 3장에서 인쇄 자본주의의 역할과 중요성을 주되게 논의할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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