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2문화적 기원발제


민족(nation)


- 앤더슨의 민족에 대한 핵심적 명제: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이다(it is an imagined political community—and imagined as both inherently limited and sovereign).”(서장, 25)

- 중요한 단어들: (1) 상상: 민족은 상상되는 것이다. 알지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을 같은 공동체의 성원으로 생각한다. (2) 제한: 민족은 구별-한정된다. A민족의 영토 너머에는 B민족이 산다. (3) 주권: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4) 공동체: 민족국가 내에 계층이 존재할 있지만, 민족 내의 사람들에게는 어떤수평적 동료의식 있다. 이러한 수평적 동료의식은 계층/계급간 적대를 압도하기도 한다.

- 앤더슨은 위에 나열한, 민족의 정의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들의 문화적 기원을 2장에서 추적한다.


세속화


- 앤더슨은민족주의는 의식적으로 주장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주의 이전에 있었던 문화체계와의 결합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33) 제안한다. 앤더슨은 민족의 기원을 문화적인 요소들로부터 추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민족주의의 출발은 근대적 합리주의와 세속화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한다. 근대 이전질병과 죽음 같은 고통들은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은그렇게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라고 서술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종교체계는 우연한 고난과 고통, 죽음과 너머의 삶의 이해를 돕기 위한 통합적인 체계를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도래와 과학의 발전은 자신의 근대적 어둠도 동반하였다. 존재의 덧없음과 무상한 인생의 고통에 진정제를 놓아줄 있는 적절한 것이민족이었던 것이다. (기능적으로 봤을 민족이 종교의 역할을 얼마간 대체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 기원은 전근대적, 종교적 문화체계와 근대적, 세속적 문화체계의 요소들을 나란히 놓고 상호작용과 길항을 밝혀냄으로써 추적할 있다. 앤더슨은 2장에서 다음과 같은 문화적 요소들을 분석한다: 종교 공동체, 왕조국가( 둘은 제한limited, 영토 개념과 관련됨), 시간의 이해(공동체와 상상에 관련됨). (우리는 이러한 접근을 홉스봄과 대조해볼 있다. 홉스봄은 «1780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종족이나 언어적인 동일성이 민족주의 운동의 주요 호소 전략(?) 이유를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찾는다. 앤더슨 또한 민족국가의 주권적 영토 내에서의 의식적인 사회공학적 작업이를테면 언어의 동질화 있었다는 것을 급하지만, 요점은 하필민족 발흥하였는지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종교 공동체, 왕조국가제한된 영토라는 개념의 기원


- 종교 공동체와 왕조국가라는, 근대 이전에는자명해보였던 것들이 쇠퇴하면서영토적 개념’, ‘제한된limited 공동체 개념이 생겨날 있었다고 앤더슨은 이야기한다. 

- 우선 종교 공동체를 살펴보자. “신성한 언어에 의해 연결된 고전적 공동체는 근대 민족들의 상상된 공동체 구별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34) 어떠한 특성인가? 바로 누구를 구성원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 별다른 경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고전적 공동체들은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으로서 신성한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초현세적 힘의 질서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틴문자나 중국 문자는 유럽 지역민들이나 동아시아 지역민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어떤 야만인이 그러한신성한 언어(문자)’ 배운다면, 그는 고전적 종교 공동체의 성원이 있다. 또한 그들 종교들은 그들이세상의 중심 것으로 상상했다(“존재론적 실재는 재현할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 진리언어truth-language 의해서만 이해될 있다.” 36). 이러한 고대-중세의 우주관에서 비롯한 -배타성과 -상대주의적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은중세 말기 이후 점점 쇠퇴해갔다.” 이유는 크게 둘이다. 1) 유럽에서 비유럽 세계로의 탐험을 통하여 다른 문명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나 문화 체계를 인지한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종교 체계들은 서로 경합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신앙의 영토화territorialization of faith” 씨앗이 되는 것이다. 2) 신성한 언어(앞서 진리언어) 퇴조이다. 인쇄자본주의의 공헌으로 라틴어는 퇴조하고 토착어(vernacular language) 부흥한다.[각주:1] 이를 통해신성한 공동체들이 점차 분해되고, ... 영토화되는”(41) 것이다. 



 



- 근대의 제한된 공동체에 대비되는 왕조국가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왕조국가는 영토적이지 않다. 왕권은 모든 것을중앙 중심적으로 조직한다.”(41) 근대 국가는 국경 내의 영토에 주권이 구석구석 미친다. 실제로 주권이 닿지 않는 영역이 있을 있겠으나 이론적으로는 그렇고, 국가는 그렇게 노력한다. 그러나국가가 중심부에 의해 정의된 상상체에서 국가간의 경계는 구멍이 뚫리고 불분명하”(41).

- “17세기 동안 신성 군주제의 자동적 합법성은 서유럽에서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44) “많은 왕조들은 정통성의 원칙이 조용히 시들어 민족이라는 표어에 손을 뻗고 있었다.”(45) 


보다 근본적인 인식론적 변화: 시간의 이해


- 일련의 세속적인 변화(종교국가·공동체의 퇴조,지방언어의 발달) 외에도세계를 이해하는 양식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남으로써”(46) 민족을확인하게 있었다고 앤더슨은 말한다. 그것은 시간의 이해이다.

- 전근대적 시간 개념과 근대적 시간 개념은 다르다. 앞의 시간 개념은구세주적시간(Messianic time)’으로, 뒤의 시간 개념은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homogenous and empty time)’으로 요약될 있다. 구세주적 시간에서의 동시성(simultaneity)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에서의 동시성과 구별된다. 47페이지의 아우얼바흐의 인용문을 보자. 구세주적 시간 개념에서지금 여기는 ... 과거에 언제나 있어왔고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어떤 것이다.”(47) 모종의 종교적, 신화적 세계관 안에서 사건들은 과거, 현재 구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나름의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에서의 동시성은예언과 완성에 의해 표시되는 아니다. 사건들이 종교적 체계 내에서 예언의 담지자로서 의미를 얻었던 구세주적 시간에 반해,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에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없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건들일지라도, 그것이 같은 같은 시계와 달력이 그것을 측정한다 일어났다면 동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한편meanwhile’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것이 . “A사건이 일어나는 한편, B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사건들을한편이라는 접속사로 연결할 있는 근거는 그냥 같은 시간대에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 “사회적 유기체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통해 달력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따라 앞으로(혹은 뒤로) 꾸준히 움직이는 견실한 공동체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비유가 된다.”(50) “영혼의 구원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면 다른 형태의 연속성만큼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숙명을 연속성으로, 우연을 의미 있는 일로 전환시키는 세속적인 작업이 필요하였다. ... 이러한 목적에 민족이라는 개념보다 적합한 것은 별로 없었으며 현재도 별로 없다.”(32)



소설과 신문 


- 신문과 소설은 말하자면 위의 근대적 시간 개념을 체현한 것들이다. 앤더슨은 4편의,서로 다른 국적과 시대의 소설을 예시로 든다. 독자들이 이들 소설을 읽음으로써상상의 공동체 확인된다. «놀리 탕헤레» 연대기적 시간 순서를 따른다.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 특정한 달에 만찬이 행해지는 것을 놓고 ... 수백의 이름 모를 사람들이 화제를 삼고 있다는 이미지는 즉시 상상의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52) «가려운앵무새» 예시를 보면 소설이 어떻게 상상의 공동체를 확인할 있게 하는지 있다. «가려운앵무새»에서 1) 주인공이 전전하는 병원이나 감옥 같은 사회적 제도, 기관들은 식민지 멕시코라는 경계 안의 것들이고 2) 기관들은 굉장히 전형적인데(“ 자체로는 특별한 중요성이 ), 그러한 기관들은 감옥 같은 식민지 환경을 독자들이 상상하고 공감할 있게 돕는다.

- 신문을 보자. 신문은 매일 인쇄되고, (같은 언어 공동체 내의) 사람들은 매일(동일한) 날짜의 신문을 읽는다. 앤더슨은 이를하루 한나절의 간격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대중의례(mass ceremony)라고 말했다. “신문 독자는 자신이 보는 신문과 똑같은 복사품을 ... 이웃들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상상의 세계가 눈으로 있게 일상생활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계속 확신하게 된다.”(61-2)


민족 너머를 상상하기 - 새로운 상상의 공동체


- “면대면의 원초적 마을보다 공동체는 (그리고 아마 마을조차도) 상상의 산물이다. 공동체들은 그들의 거짓됨이나 참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상상되는 방식에 의해서 구별되어야 한다.”(26)

- 앤더슨에 의하면 결국 거의 모든 공동체는 상상의 산물이다. 한윤형은 그의 저서«뉴라이트 사용후기» 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운동 비스무리한 하는 이들을 만나보니, 특히나 좌파 운동권들은민족, 그딴 없다 아예 교리처럼 외우고 있더란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이민족이란 것에 애착을 가진다면 이를 존중하고 거기서부터 평론을 시작하는 것이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한윤형, «뉴라이트 사용후기», 개마고원, 2009. 12.) 결국 아주 작은 단위의, 면대면으로 만날 있는 공동체가 아닌 이상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상상의 공동체 만들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논의가 짚어야 지점은 민족의 기원이허위날조거짓임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민족 공동체의 역사적 과오를 정리하고 공존과 화합의 공동체의 가능성을 궁리하는 것일 테다.

- 앤더슨이 지적한 것처럼 민족은수평적 동료의식 낳고 이는 이타성으로 연결될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대량의 희생 낳기도 한다. 민족 자체가제한된 공동체 이상, 민족은 필연적으로 안과 바깥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 «상상의 공동체»에서 근대의 민족 개념을 배태한 문화적 요소들을 있다. 그런데 지금 현대의 문화적 요소들은 민족을 낳은 근대적 문화적 요소들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인터넷, 유엔, 지역 블록별 공동체...)

- 민족주의, 민족국가는 자신의 배타성을 개량할 있을까? 칸트가 말한 맥락에서의환대 과연 충분한가? 그것을 넘어선 인류애적세계공동체 구상과 실현은 가능할까?




  1. 앤더슨은 앞으로 3장에서 인쇄 자본주의의 역할과 중요성을 주되게 논의할 것이다. [본문으로]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책 읽고 나서 작은 의문점 


- 책 말미에서 김경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따라서 지금처럼 미디어, 정치,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학자들을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며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글로벌 지식장의 방관자로 남아 기꺼이 상징폭력의 희생자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행동하는 지식인들 대부분이 유학을 통해 획득한 상징자본을 가지고 자신의 사회참여를 정당화하지만, 정작 그들이 내세운 상징자본은 그들이 실천 혹은 대중과의 소통이란 미명하에 외면해버린 순수한 지식장 안에서만 생산되고 유통되는 것임을 기억하자.” 

- 그렇다면 이른바 ‘행동하는 지식인’류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일까? 
(1) 학문장 안에서 고립되어(secluded) 지식 생산과 지적 논쟁을 열심히 펼치지 않는 ‘행동하는 지식인’류는 분명히 학문장 안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다. 
(2) 그러나 우리가 사회 이론이나 그를 통한 경험적 연구결과들이 사회 문제의 해결과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행동하는 지식인’류는 진보와 발전을 위해 사회에 필요하지 않을까? 지식인들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특권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정치 영역이나 정책 결정 영역에서 그들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합리적이어 보인다. 
(* 경험적 연구가 줄 수 있는 사회공학적 방법과, 비판이론이 제공하는 사회 체제 변혁의 단초는 매우 다른 것일 수 있다. 나는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저자 김경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담론과 해방Discourses on Liberation을 읽고 싶다.) 

(3) 그렇다면, 대중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정치적 장이나 사회정책 결정의 영역에서 학문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인의 역할은 기능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물론 그들은 학문 장 안에서, 일류 생산자가 절대 될 수 없겠지만 말이다. 



김덕영, «사회의 사회학»(도서출판 길, 2016) 읽고 의문점

‹논의를 시작하면서›를 읽고 나서 든 의문점. 

1) 한국적 이론? 

- ‹논의를 시작하면서›에서, 김덕영은 서구의 종속에서 벗어난 한국형 사회학 이론을 만들려는 시도들을 비판한다. 그 비판의 내용은 «글로벌 지식장…»에서 김경만이 다룬 바와 유사하다. 
- 그런데도 김덕영은 “외국 이론에 의존해 한국의 인간, 역사, 사회, 문화 등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남의 옷을 몸에 걸치는 격이다”(39)라고 쓰고 있다. 이와 동시에 김덕영은 “서구의 이론이 따로 있고 한국의 이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정말로 따로따로 이론이 있다면, 한국 이론, 러시아 이론, 일본 이론, 중국 이론, (…) 수없이 많은 이론이 성립할 것이다”(18)라고 쓰고 있다.
- 두 주장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사회학은 “근대적 인식과 사유의 틀”을 통해, 서구로부터 시작된 근대화로 변화된 사회들을 분석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이론이란 러시아 이론, 프랑스 이론이 따로 없는 것처럼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부르디외의 이론을 이용해서든 하버마스의 이론을 이용해서든 한국의 인간, 역사, 사회 등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남의 옷을 몸에 걸치는 격으로 한국의 사회적인 것들을 분석하고 설명하지 않으려면 한국 사정에 정통한 한국인이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즉 이론의 국적(nationality)가 중요하다고. 그렇다면 이론의 국적(nationality)이 문제시되는 것인데 사실 이론의 국적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 부르디외의 이론을 프랑스 이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하나마나한 말 아닌가. (물론 한국 사정에 정통한 사회학자가 그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르디외가 프랑스의 경험자료를 분석하고 직접 연구 및 생산하여 만들어 낸 이론을 “프랑스 이론”이라고 부르며 프랑스 사회에만 적용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인식론과 방법론에 있어 “영국 사회학, 미국 사회학, 한국 사회학, 러시아 사회학”이 구분되지는 않는다. 다만 서구로부터 발생된 근대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한 “다양한 버전”의 근대 사회들이 있을 수 있다(“다중적 근대성의 원리”, 25쪽). 김덕영은 그렇다면 다양한 버전의 사회 중 하나인 한국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적합한 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것이 “한국적 사회학 이론”이라는 것인지? (이렇게 독해가 가능하긴 하지만 용어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게 필요할 듯.) 


2) 김경만 비판에 대한 의문

“그런데 내가 보기에 부르디외와 이 사회학자[김경만] 사이에는 세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첫째, 주로 서구 이론에 매달리는 이 사회학자와 달리 부르디외는 프랑스 안팎에서 발전한 다양한 지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는 프랑스 사회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경험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새로운 사회학적 인식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는 사회실천학을 구축할 수 있었다.”(42)

- 김경만은 이론사회학자이며 또한 그의 주된 연구 관심사는 지식사회학, 과학사회학에 있다. 김경만의 연구주제가 그러한 이상, 김경만이 한국 사회에 대한 경험연구를 수행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이상하다. 비판이론이나 과학철학 같은 추상적 이론에 대한 분석을 행하는 학자에게 한국의 경험적 현실에 대한 연구를 주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연구 대상이 “서구 이론”인 것을… 

덧붙여 - “부르디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영어가 아니라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담아내면서 (…) 그의 저작이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42). 프랑스어랑 한국어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고 생각. 

덧붙여 2 - “한국의 사회학은 이른바 미래 한국의 피에르 하버마스들이 영어의 ‘포로’가 되지 않고 지적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피에르를 직접 프랑스어로 읽고 하버마스를 직접 독일어로 읽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 사회학 전문 번역자나 이론 연구자가 불어, 독어를 배운다면 모를까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이 굳이 불어, 독어를 읽어야 할 필요가…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 십 년 공부해도 영어 논문 읽기 버거운데. 





밀란 쿤데라 «느림»(김병욱 옮김, 민음사, 1995) 발제문

2017.01.19. 

1. 들어가기에 앞서: 소설에 대해

쿤데라의 «느림»은 그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입니다. («우스운 사랑들»은 단편소설집입니다.) «느림»은 쿤데라의 소설 커리어 중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프랑스어로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7부로 이루어진 전작(前作)의 형식을 «느림»에서 처음으로 깼다는 것입니다. («우스운 사랑들»도 7부의 형식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이 소설집은 총 7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외는 «이별의 왈츠»입니다.) 프랑스어로 소설쓰기에 대해 쿤데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멸»을 발표하면서 나는 첫 소설 때부터 다양하게 발전시켜 온 내 소설 형식(일곱 부 구성)의 모든 가능성을 소진했다. 그러자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내가 소설가로서의 길 끝에 도달한 것이거나 아니면 앞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발견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사실이 말이다.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겠다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도 아마 거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완전히 다른 곳에,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길에 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게임의 규칙», 1995년 5월호. 김병욱, “느림, ‘검은 유머’를 숨긴 유희적 광시곡”, «밀란 쿤데라 아카이브» 티스토리 블로그, 2013년 10월 22일에서 재인용.) 

다른 소설들과 구별되는 이러한 «느림»의 특징은 우리가 쿤데라라는 ‘작가’를 읽을 때 얼마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분명 망명한/이주한 작가로서 모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자 작가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전환점이고, 또 기존에 고수했던 소설 구성의 방식을 깨뜨리는 것도 소설가의 이력에 있어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니까요. 언뜻 보기에 «불멸»에서 쿤데라가 시도한, 읽는 데에 방해마저 되는 것 같은 다성적(polyphonic) 글쓰기 방식이 «느림»과 «정체성» 등 후기 소설에서는 작품 전체로 확장된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쿤데라의 사유의 악보(樂譜)가 이전 작품에서는 론도와 같은 일정한 형식을 갖춘 클래식 음악의 그것이었다면, 지금은 재즈의 그것 같아 보인달까요. 사실 재즈에는 악보랄 게 없지요. «정체성»에서도 그렇고, «느림»에서 쿤데라는 장(章)마다 짧게 특정한 모티프를 제시한 채(이를테면 ‘느림’, ‘프라이버시’, ‘춤꾼’) 그것을 즉흥 연주[improvisation]하는 재즈 음악가들처럼 내러티브 속에서 자유롭게 풀어 놓는 것 같습니다. 


2. 소설의 구조 

«느림»은 부 없이 총 51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족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바로 뒤 발표한 소설 «정체성»도 51장 구성이라는 것입니다.) 첫 장에서 작가는 성(城)에서 아내와 하룻밤 묵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소설은 성이라는 주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성으로 가는 길에서 쿤데라는 “느림”에 대해 착상하며, 이는 이후 소설을 관통하는 주요한 모티프가 됩니다. 이 “느림”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18세기와 20세기가 대별됩니다. 18세기는—“18세기의 정신과 예술을 가장 잘 드러낸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11)라고 꼽는 ‹내일은 없다›에서 알 수 있듯—느림의 시대입니다. 반면 20세기는 느림의 가치라고는 사라져 버린 시대입니다. 

이 성 안에서 크게 세 가지의 사건이 진행됩니다. (1) 작가(밀란쿠)와 아내(베라)의 휴가. (2) 곤충학자들의 학술대회. 여기서 등장인물들은 뱅상-줄리, 베르크-임마쿨라타-카메라맨, 체호르집스키입니다. (3) ‹위험한 관계들› 소설 내용. (2)와 (3)은 모두 (1)의 작가 밀란쿠가 착상한 내용입니다. 쿤데라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우리의 등장인물들을 제시합니다. 이들은 곤충학 학술대회가 열리는 성에서 우연히 한데 만나며 기막힌 소극(笑劇)을 연출합니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철저히 작가 밀란 쿤데라의 인위적 기획에 의한 것입니다. 이는 소설 전반에 걸쳐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26장을 봅시다. 이러한 고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작가의 개입과 존재 드러내기—은 마지막 결말부에 있어서 정점을 찍는데, 바로 작가의 상상인 (2)의 뱅상과 (3)의 기사가 만나는 것입니다. 


3. 18세기의 두 가지 가능성: ‹내일은 없다›, ‹위험한 관계들›

쿤데라는 «느림»에서 18세기의 두 가지 소설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내일은 없다›입니다. 소설의 젊은 기사는 T부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자신이 부인의 외도를 숨기는 도구로 이용됐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쿤데라는 T부인의 “연출 예술”에 감탄하며, “그녀야말로 에피쿠로스의 참 제자”(165)라며 감탄합니다. (9장-12장). 이러한 T부인의 치밀성이 가져다준 쾌락은 18세기가 대변하는 느림의 미학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위험한 관계들›인데, 사실 이 소설은 3장에서 짧게 언급되며 그렇게 중요한 비중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18세기의 이 소설은 앞의 ‹내일은 없다›에 맞서 부정적인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관계들›은 18세기가 프라이버시가 전무해졌으며, 쾌락을 경쟁적으로 좇는 것만이 중요한 20세기의 맹아임을 보여주는 듯한 소설입니다. 라클로의 이 소설에서 “발설된 모든 말이 언제까지나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남”(15)으며, 소설 속에서 쾌락을 경쟁적으로 좇는 등장인물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 철학에 정면으로 반합니다. 

이러한 18세기가 배태한 두 모순적인 가능성들—‹내일은 없다›의 ‘느림’ 지향적, 에피쿠로스적 쾌락, 그리고 ‹위험한 관계들›의 디스토피아적 가능성—중에서 20세기는 후자의 것만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쿤데라가 ‹위험한 관계들›을 두고 표현한 “거대한 하나의 소리나는 조개껍질”(15)은 20세기 이후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무엇도 두 사람만의 비밀로 남지 않”(15)습니다. 20세기 이후 사람들은 숨어 살지 않습니다. 언제나 카메라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뱅상이 정확히 지적하듯, 소설 속 (20세기의)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모두 “존재의 행복한 춤꾼”입니다. 퐁트벵이 지적한 대로 도덕성을 무기로 하여 덩어리진 익명의 대중들 앞에서 춤을 추느냐, 혹은 주변 친구들—대중들의 표본—앞에서 섹스 무용담 따위를 무기로 하여 춤을 추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베르크는 전자 부류의 춤꾼이며 뱅상과 퐁트벵은 후자 부류의 춤꾼입니다.) 

후자 부류의 춤꾼 또한 ‹위험한 관계들›이 암시한 암울한 20세기의 시대상입니다. 사드를 위시한 18세기의 탕아들은 쾌락을 도덕적 금기로 해방시켰는데, 사실 쾌락에의 추구가 알고 보니까 정복에의 욕망이었던 것입니다. (가설이지만 이것이 ‹느림›이 우엘벡과 공명하는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벵상은 베르크와의 논쟁에서 정장 입은 남자에게 반론을 한 방 먹자, 어쩔 수 없이 샴페인 병을 들고 행사장에서 퇴장하여 쥴리를 꼬시려 합니다. 쥴리를 꼬심으로써, 베르크에게 한 방 먹어 깎였던 자신의 자존감을 벌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끝에 벵상은 발기도 안 된 채 섹스 흉내를 내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만, 친구들 앞에서 떠벌릴 무용담을 애써 꾸며내며 스스로 행복해 합니다. 통렬한 풍자이지요.) 결국에 현대인들은 고상한 도덕을 무기로 춤을 추거나 건장한 섹슈얼리티를 무기로 춤을 추거나 하는 불쌍한 춤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4. 이미지의 폭정 아래 춤추는 춤꾼들

“아마 폴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들은 역사에 속하지만, 
이마골로기의 통치는 역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말이다.” 
— 밀란 쿤데라, «불멸», 김병욱 옮김, 민음사, 2010. 191쪽.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스운 지점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베르크: (퐁트벵이 지적한) 진정한 춤꾼. 에이즈와 관련된 일화도 아주 우습지만, 체호르집스키와의 대화(프랑스-체코 곤충학회를 설립하자)가 백미입니다. 
- 체호르집스키: 이 사람도 진정한 춤꾼이라 할 만합니다. 체코에 대한 소련의 억압에서 얼떨결에 억압받는 위치에 선 후, 그 억압받았던 자로서의 이미지 자체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또한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 몸이 별로인 사람들을 상상하고 비교하며 뜬금없이 운동을 하는 것이 벵상과 비슷한 지점인데 이것도 우습지요.
- 벵상: 학회장에서 베르크에게 한 방 먹이려다가 도리어 반격당하자, 여자를 꼬셔 그걸 무용담으로 삼을 요량으로 퇴각합니다. 
- 임마쿨라타: «불멸»에서 괴테에게 치근덕거리던 여인 베티나가 생각나는 인물입니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거대한 카메라 앞에 선 자들처럼, 어떤 이미지에 자신을 끼워맞추고 자존감 투쟁을 하는 춤꾼이라는 점에서 우습습니다. 

이는 곧 역사가 끝난 자리, 즉 이마골로기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전형적인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 스카르페타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행동이 ‘액션’이라기보다는 ‘리액션’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합니다(김병욱, “느림, ‘검은 유머’를 숨긴 유희적 광시곡”, «밀란 쿤데라 아카이브» 티스토리 블로그, 2013년 10월 22일). 이들의 행동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이념에의 지향이랄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상정한 이미지에 자신들을 구속하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이상화된 이미지가 그들을 원격 조종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리액션으로 만들고,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삶을 향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예정된 어떤 이미지를 흉내 내는 시뮬라크르로 만드는 것”입니다(앞의 글). 

이러한 행동양식은 T부인 혹은 이념이나 대의 따위를 위해 헌신한 18-20세기의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앞의 인물들은 실패하더라도 비극으로 남는 데 반해 쿤데라 소설의 인물들은 어찌됐건 희극이나 소극으로 귀결될 뿐입니다. 시끄럽고 혼잡한 각축장 속에서 인간들은 훌륭한 도덕적 인물로 비치기를 노력하거나 혹은 쿨한 쾌락주의자로 비치기 위해 몸싸움을 벌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무엇을 지향하건간에 그러한 몸싸움은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찬 의미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마치 강박에 가까운 것이며 아무런 진실성도 없는 키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쿤데라는 역사의 종언이 선언된 시기에 서서 마치 현대의 이 인간상을 조소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쿤데라가 탈근대가 아닌 근대에 묶여있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결국에 이러한 풍자나 조소는 탈근대 이전의 시기, 즉 근대에 대한 애정 혹은 미련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후일담 문학이 1980년대 운동에 대한 공통의 기억과 회상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듯 말입니다. 쿤데라는 쿨싴하게 본인의 작업이 “거대한 장난질”이며 “무의미의 축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인양 굴지만, 그가 어쩐지 느림이라는 구시대적 가치를 예찬하며 “진실된 것”을 희구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요. 


«소리와 분노»를 쉽게 읽기 위해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The Sound and the Fury)는 어려운 소설이다. 여러 실험적인 글쓰기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고, 소설의 시간 순도 직선적이지 않아 처음 읽는 독자들은 내용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포크너는 “이 책을 세 번 읽었는데도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독자에게 “그러면 네 번 읽으라”고 응수했다고 한다(«소리와 분노»의 역자 해설. 윌리엄 포크너, 공진호 옮김, «소리와 분노», 파주:문학동네, 2013, 443쪽). 물론 여러 번 읽는 게 소설을 깊이 음미하고 첫 번째, 두 번째 읽었을 때 몰랐던 부분들을 파악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겠으나, 이 책을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 역시 처음 책의 미로 속에서 헤맸던 독자로서 읽기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정보를 글에 정리해 놓는다. 


(0) 번역본

소리와 분노의 번역본은 공진호 씨가 번역한 문학동네 판본이 제일 좋다. (다른 판본들은 제목을 ‘음향과 분노’라고도 번역했다.) 번역자가 세심하게 신경을 쓴 구석이 굉장히 많이 보이며,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유희나 상징 등에 대한 설명도 간간히 각주로 표시되어 있다. 

번역자는 소리와 분노에 관련된 내용을 올린 블로그도 운영 중이다: http://soriwabunno.blogspot.kr 깊은 이해를 위해서 들르면 좋다. 


(1) 등장인물 


[콤슨Compson 가家]

- 제이슨 콤슨(Jason Compson III): 퀜틴, 캐디, 제이슨, 벤지의 아버지, 1912년에 사망. 죽기 전에 알콜중독이었음. 
- 캐롤라인 배스콤(Caroline Bascomb): 퀜틴, 캐디, 제이슨, 벤지의 어머니. 
- 퀜틴(Quentin Compson III): 장남, 1890년생, 캐디 소유의 목초지(pasture)를 판 돈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 1910년에 자살. 
- 캐디(Candace, 애칭은 캐디Caddy): 장녀, 1892년생, 1910년 4월 25일에 결혼, 출가. 
- 제이슨(Jason Compson IV): 차남. 1894년생. 
- 벤지(Benjamin. 애칭은 벤지Benjy): 삼남. 발달 장애 백치. 1895년생. 본명은 모리(Maury)이나 개명함. 개명의 이유는 소설 속에 제시됨. 
- 모리(Maury): 캐롤라인의 오빠. 아이들의 외삼촌. 
- 미스 퀜틴(Miss Quentin Compson): 캐디의 딸. 1911년생. 콤슨 가에서 제이슨, 벤지, 캐롤라인 등과 함께 지냄. 

[콤슨 가의 흑인 하인들]

- 딜지(Dilsey Gibson): 하인 가족의 여성 가장. 로스커스의 아내. 1장에서 4장까지 중요하게 등장하며, 소설의 이해에 있어 역시 중요한 인물. 
- 로스커스(Roskus): 딜지의 남편. 류마티즘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음. 
- 티피(T.P.): 딜지의 아들. 
- 버시(Versh): 딜지의 아들. 
- 프로니(Frony): 딜지의 딸이며, 후에 출가하여 러스터(Luster)를 낳음. 
- 러스터(Luster): 프로니의 아들·딜지의 손자. 

* T.P., 버시, 러스터는 모두 집에서 벤지를 돌보는 역할을 맡았음. 벤지 섹션을 읽을 때, 벤지를 누가 돌보는지를 파악하면 서술의 시간대를 대충 파악할 수 있음. 

프린스, 퀴니, 팬시, 낸시는 콤슨 가의 말[馬] 이름. 댄은 개[犬] 이름. 

[퀜틴의 하버드 친구들]

- 슈리브(Shreve): 퀜틴의 하버드 기숙사 룸메. 
- 스포드(Spoade): 하버드생. 퀜틴 친구. 
- 제럴드(Gerald): 하버드생. 


(2) 벤지 섹션(1장)

벤지 섹션에서 어려운 점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벤지의 시선(視線)이며 둘째는 서술의 시간대 변동. 
백치인 벤지의 독특한 표현 방식과 시선은 처음에는 좀 어이가 없지만 그런대로 읽을 만하다. 그런데 서술의 시간대 변동은 곧 독자들을 지치게 한다. 
앞서 쓴 대로 벤지가 어떤 흑인 하인과 있느냐로 시간대를 대충 구분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시간대를 구분하려면 다음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그런데 미처 다 읽기 전에 주요 내용을 다 알아버리는 일종의 스포일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일러둔다. 그리고 어차피 시간대 꼼꼼히 구분해 읽어도 첫 독서에서 텍스트를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앞에 읽은 부분을 계속 왔다갔다하지 않는 이상…). http://soriwabunno.blogspot.kr/2013/02/blog-post_4839.html


(3) 제이슨 섹션(3장)

제이슨 섹션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마지막 4장이 제일 이해하기 쉽다.) 
제이슨은 사기를 치고 있는데 이 점만 이해하면 3장은 쉽다. 

캐디가 그의 남편과 이혼한 후, 캐디의 딸 미스 퀜틴은 콤슨 가에서 살게 된다. 캐디는 딸 퀜틴의 양육비 명목으로 매달 캐롤라인 앞으로 수표를 부친다. 제이슨은 어머니 캐롤라인을 설득해 “타락한 여자”(291쪽)의 돈을 받을 수는 없다고 어머니더러 캐디의 수표를 불태우게 한다. 그런데 사실 제이슨이 캐롤라인에게 준 수표는 가짜로 만든 수표이고, 캐롤라인은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 가짜 진짜 수표를 분간을 못 하는 것이다. 제이슨은 캐디의 진짜 수표를 가로채고 창녀를 사거나(소설 중 나오는 로레인이 그의 정부이다), 주식시장에서 돈놀이를 한다. 제이슨은 캐롤라인에게 자신의 임금을 어머니의 통장에 부쳐준다고 캐롤라인의 위임장(power of attorney)을 가져가는데 사실 통장에 부쳐주는 월급은 캐디가 보내준 돈이며 제이슨은 그의 월급을 다른 곳에 꽁친 것이다. (그래서 캐디의 수표가 늦게 도착했을 때, 제이슨은 캐롤라인에게 가게 사정이 안 좋아 월급이 늦게 도착한다는 뻥을 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