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의 시학

— 제임스 테이트 시 읽기 



우리는 누군가가 우스꽝스럽게 되고, 조롱받거나, 심지어 치욕스러운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웃지 않는다. 


대신에, 한 현실이 느닷없이 모호한 상태로 드러나고, 사물이 자기 본연의 명백한 의미를 잃으며,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웃는다. 자, 이게 유머다. 

— 밀란 쿤데라[각주:1]



1


제임스 테이트(James Tate)의 시를 읽는 것은 약간의 당혹감을 동반한다. 그 당혹감은 내용과 형식 둘 다에서 발생한다. 우선 형식에 대해 말해보자. 테이트의 시를 읽을 때 설핏 느껴지는 당혹감은 우선은 형식에서 비롯한다. 테이트의 시들은 아주 파격적이고 대담한 형식을 시도하지는 않지만, 간단히 말해 테이트 시의 형식은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산문시. 테이트의 시는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내용에 대해서는? 테이트의 시는 우리들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 일상이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식으로 전개된다. 이는 첫 번째로 우리 주변의 일상도 그것이 곧바로 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옴과 동시에 두 번째로 그 일상이 갑자기 초현실적인 것이 되거나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을 담고자 하는 것인지 이상하고 모호한 느낌을 자아낸다. 

테이트의 시가 산문시라는 형식상의 문제에서 출발해 그의 시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산문시라는 형식 자체는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으며, 여러 시인들의 산문시들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감각의 질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읽을 때, 최정례의 「있음과 있었음의 사이에서」를 읽을 때,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을 읽을 때 다가오는 느낌은 모두 다르다. 위의 시(집)들은 모두 산문시라는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그 패션은 독특한 것으로도, 자연스러운 것으로도, 무언가 엉거주춤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시인은 자신이 의도한 바를 실현시키기 위해 산문시라는 형식을 채택한다. 그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는 개별 시인마다 다르지만. 시인은 자기가 쓰고자 하는 바가 있으며 그 시가 산문시냐 장시(長詩)냐 그렇지 않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테이트의 시를 읽을 때 드는 내용과 형식에 대한 당혹감은 서로 다른, 분리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둘이 긴밀하게 연합하여 테이트의 산문시가 갖고 있는 요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테이트 시의 요체는 유머이다. 산문시는 테이트 식의 유머가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이다. 운문이지 않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시 같지 않아 보이는 산문시는 테이트 식 유머를 보여주기에 훌륭한 도구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테이트의 시가 시 다워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개별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런 식의 추상적인 논의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우선 테이트의 개별 시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2


마고가 “차 좀 세워 줘. 오줌 마려워”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다. “이런,” 내가 말했다, “대체 어디서 오줌을 눈다는 거야?” “나무 뒤나,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오줌을 꼭 싸야 한단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알았어. 보는 눈이 없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하고 차를 세웠다. 그녀가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거기 있었다. 나는 걱정이 되었는데, 그때 나는 그녀를 언뜻 보았다. 날고 있었다. 나무들은 빽빽했는데 그녀는 나무들 사이를 아주 편하게 활공하고 있었다. 더 잘 보기 위해 차에서 나와 걸었다. “마고, 내려와,” 나는 소리쳤다. “못 하겠어,” 그녀도 소리질렀다. “무언가가 내 엉덩이를 물었어, 그래서 날아다니는 병에 걸렸어.” 나는 말문이 막혔고, 그녀의 우아함이 경이로웠다. 정말로 자연스럽고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어떡해야 해?” 나는 말했다. “내 생각에는 너가 나한테 화살을 쏘아야 할 것 같아,” 그녀가 대답했다. “화살이 없는걸,”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럴 수 없어, 사랑한단 말야!” “내 생각에 이 날아다니는 병은 평생을 갈 것 같아,” 내 위를 활공하며 그녀가 말했다. 그때 그녀는 흐릿한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원을 그리며 걸었고 애꿎은 나무를 걷어 찼다. 그녀는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누구에 의한 건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강력했다. 일요일의 드라이브, 숲속에서 오줌 누기, 그리고 지금 이것. 

— James Tate, 「A Sunday Drive」 전문. 이하 모든 시는 James Tate, Return to the City of White Donkeys, New York: Ecco, 2004에 수록된 것.


우선 비교적 짧은(?) 시인 「A Sunday Drive」에서 시작해보자. 내러티브—시에서 내러티브를 말할 수 있다면—는 간단하다. ‘나’는 인적 드문 곳에서 친구 마고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있다. 갑작스런 요의(尿意) 탓에 마고는 숲 속에 들어가 소변을 본다. 그런데 마고는 어떤 벌레에 물려 날아다니는 병에 걸렸다. 그 활공은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했고, 마고는 빛의 어딘가로 떠나 버린다. 나는 어이가 없어 애꿎은 나무를 걷어 찬다. 

이 시에서 우리는 크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다. 첫째, 이 시가 다루는 내용이 어쩐지 아주 일상적이고 비속해 보인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숲 속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내용은 일반적인 시에서 흔히 보기 어렵다. 쉽게 말해 ‘이런 것도 시로 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둘째, 특히 말미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유머 감각이다. 실제로 나는 애꿎은 나무를 걷어찼다는(kicked an innocent tree)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풋, 하고 웃었다. 

일단 두 번째로 지적한 것, 테이트의 이 시에서 느껴지는 어떤 유머에 대해 출발해 보자. 나는 이 시가 보통 사회적으로 약자인 대상의 어떤 특성을 부각시키거나 말장난을 해서 웃은 것이 아니다. 시가 정치인들의 어이 없는 말들을 풍자해서 웃은 것도 아니다. 이 시에는, 우리가 흔히 개그 콘서트를 보거나 농담 따먹기를 하며 웃는 것과는 궤가 다른 특정한 종류의 메커니즘이 작용한다고 말해야 좋을 성싶다. 부연하겠지만, 이 시에서 웃음은 비속함과 고상함, 그리고 현실과 초현실 사이의 균열과 간극이 자연스럽고도 우아하게 결합하는 데에서 나온다. 

숲 속에서의 노상방뇨는 고상하지 않다. 하의를 벗고 숲 속에서 소변을 보면 물론 벌레들에게 물리기 십상이다. 고상하지는 않지만 여기까지는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내러티브 상 시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회가 등장한다. 날아다니는 병을 옮기는 벌레에게 물린 것이다. 어이없게도, 날아다니는 병에 걸린 마고는, 의외로 ‘우아하게’ 날아다니고 ‘나’는 경이에 차 그것을 바라본다. 부름을 받은 것(being called)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고의 병은 신이나 종교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각주:2] 평범한 현실, 이런 걸 시로 써도 될까 싶은 현실에서 당황스러운 초현실이 출현한다. 

흔히들 비현실적인 것을 시적이거나 문학적이라고 칭한다. 그것은 일부 맞는 말이다. 테이트의 상상력이 없다면 위의 시는 한낱 꽁트나 잡문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초현실과 현실의 이상한 간극을 시가 메우는 방식이다. 테이트는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마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듯 방관의 태도를 취한다. 그의 시에서는 애당초 무엇이 현실적이고 그렇지 않은지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초현실적인 상황을 계속 밀고 간다.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마고의 비행이 이어지다가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수순인 듯 흐릿한 불빛 속으로 사라질 때 유머의 기반이 마련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 속 상황에 대한 당황과 함께 ‘대체 이게 다 무어냐’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날아다니는 병에 걸렸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휩쓸고 지나간 현실의 폐허이다. 그러나 그 폐허는 비통하지 않다. 현실이 폐허가 된 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어떤 초현실적인 상황의 등장으로 그 당연함의 기반인 의미를 잃었기 때문인데, 현실은 초현실의 등장에 책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테이트의 시는 비극이 아니라 하나의 소극(笑劇)이다. 애꿎은 나무를 걷어찼다는 센스 있고 위트 있는 구절은 화룡점정이다. 



3


「The Case of Aaron Novak」에서 ‘나’는 “아론 노박, 넌 죽었어”라는 전화를 받는다. ‘나’는 물론 아론 노박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경찰에 전화를 했고, 로텔로라는 경관이 집에 도착했다. 로텔로 경관은 ‘나’에게 당신이 아론 노박이 맞는지 자꾸 묻는다. ‘나’는 내 이름은 오웬 놀란이라고 대답하는데 경관은 “그거 참 저에겐 아론 노박과 비슷하게 들리는군요”라고 응수한다. 어쨌든 전혀 관련 없는 이에 대한 협박 전화가 나에게 오는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나’와 경관은 전화번호부에서 아론 노박의 이름을 찾는다. 그런데 전화를 거니 받는 것은 노박의 어머니이며, 경관은 당황하고 ‘나’는 그에게 그가 노박인 척하고, 데이트가 있어서 집에 늦게 올 거라고 둘러댈 것을 주문한다. 어이 없게도 경관은 그렇게 하고 잠시동안 아론 노박이 된 듯이 노박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다.  


“썅, 엄마. 당신이 할 줄 아는 거라곤 훌쩍이고 흐느끼는 것밖에 없군요. 무료 급식소나 가서 당신 한심한 자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돕는 건 어때요,” 그리고 나는 전화기를 쾅 내리쳐 껐다. 로텔로 경관이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에 느리게 미소가 피었다. “굉장했어요,” 그가 말했다. “저라면 절대 못 했을 겁니다. 그 년이 계속 전화를 하게 냅뒀을 거예요.” “이제 아론 노박에 관련해 뭘 하실 거죠?” 나는 말했다. “잠시동안, 저는 제가 아론 노박이 된 줄 알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이제 심각한 문제에 처하겠군요,” 내가 말했다. “아마 그는 그래도 싸요,” 그가 말했다. “커피 드실래요?” 내가 말했다. 

— James Tate, 「The Case of Aaron Novak」 부분.


오웬 놀란과 아론 노박의 이름이 비슷하다는 것에서도 테이트의 기발한 위트가 드러나고, 노박의 엄마가 전화를 받자 당황하며 노박인 척하는 그 상황도 웃음을 자아내지만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부분이다. 경관과 노박의 어머니가 쓸데없는 대화를 하자 ‘나’는 전화기를 낚아채 다짜고짜 욕을 한다. 경관은 잠시동안 내가 아론 노박이 된 것 같다며, ‘나’의 대응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커피를 제안한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커피를 제안하는 것. 우리는 일이 지나갔을 때 한숨 돌리기 위해 커피나 차를 마신다. 또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음료를 제안하는 것은 예의기도 하다. 바로 이 커피 제안에서 테이트 시의 진정한 유머가 발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론 노박에 대한 살인 협박 전화로 시작된 비일상은 노박의 엄마에 대한 ‘나’의 욕설로 절정을 찍는데, ‘나’는 커피를 제안하며 그 비일상에 대한 마침표를 찍는다. 일상과 비일상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고 긴장이 이완된다. 이 이완의 자리에 서서야 독자는 마침내 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재고한다. 생각해보면 앞선 일련의 일들은 한 편의 소극이다. 아무 관련 없는 사람한테 살인 협박 전화가 온 것도 웃기는 일이고, 또 아무 관련 없는 노박의 엄마한테 노박인 척하며 욕설을 하는 것도 어이 없는 일이 아닌가. 살인 협박이 장난 전화든 아니든 애꿎은 아론 노박은 집에 가서 엄마한테 혼이 날 것이다. 그런데 경관은 “그는 그래도 싸”다고 말한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집에 경찰까지 온 이 급박한 상황은 그 긴장을 한순간에 잃어버린다. 긴장의 안개가 걷히고—덧붙이자면, 독자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빠르게 시를 읽어내려갈 수 있는 것도 산문의 리듬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시가 묘사하는 현실은 놀란의 집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우스운 에피소드는 시적 공간을 무의미로 가득 채운다.

바로 이 무의미로 가득 찬 자리에서 유머가 발생하고 나는 웃는다. 



4


나는 앞서 테이트의 시에서 유머가 느껴지고, 그 유머는 시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과 초현실, 일상과 비일상, 혹은 비속함과 고상함의 경계가 무너지고 현실이 그 의미를 잃는 데서 나온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만약 「A Sunday Drive」나 「The Case of Aaron Novak」이 산문이 아닌 운문으로 적혀 있다면 어땠을까? 운문을 사용할 경우 테이트의 시는 좀 더 시다워질 수 있을 것인가? 테이트 시의 유머와 산문, 운문 형식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시의 유머는 산문을 통해서만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내 결론은 이렇다. 산문시 형식과 테이트가 노리는 유머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 

문학 연구자 이언 와트(Ian Watt)는 그의 저서 『소설의 발생』에서 소설의 문체인 산문과 리얼리즘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고 지적한다. 근대는 플라톤이나 중세 철학(실재론)이 상정한 원형이나 이데아, 신과 같은 보편자에 대한 탐구를 거부하고 개별성과 현실에 주목하기 시작한 시대다. 이러한 인식관심에 걸맞는 글쓰기 양식은 단순 명료한 산문이다. 소설은 산문을 통해 실제 삶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산문은 삶을 “정황적으로 바라”본다.[각주:3]

물론 테이트의 시는 소설이 아니다. 그렇지만 테이트 시가 묘사하는 일상은 산문적이고, 산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산문을 사용해 우리들의 평범한(때로는 굳이 문학작품으로 쓸 필요가 있나 싶기까지 한) 일상을 일상답게 묘사하고, 또 그것을 위화감 없이 초현실이나 상상으로 발돋움시키는 목적을 적절히 수행한다. 그러고서는 그걸 자연스럽게 뒤섞어 버린다. 그리고 운문으로 썼다면 운신의 폭이 제한됐을 법한 위트 있는 문장을 잘도 날려 댄다. 

산문으로 시를 씀으로써 테이트는 일상을 정밀하게 재현하는 한편 그것을 확실하게 ‘낯설게’ 만드는 기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브레히트가 극에서 갑자기 방백을 사용하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쓰는 방법 등으로 ‘낯설게 하기’를 훌륭하게 수행했다면 테이트는 구체적인 삶의 국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다가 갑자기 초월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아니면 일어나지 않을 법한 상황들을 묘사하다 급작스레 국면을 전환시키고 또 제동을 거는 방식으로 그만의 ‘낯설게 하기’를 수행한다. 산문이 이러한 의도에 제일 적합한 것인 듯하며, 그러한 ‘낯설게 하기’의 결과는 유머이다.



5


한편 현실의 무의미성을 드러내는 유머 전략 말고도 테이트는 사회 비판의 요소가 있는 풍자적인 유머를 시에서 구현하기도 한다. 비현실적이거나 느닷없는 상황, 혹은 화자의 상상을 가정하고 그것을 현실(일상)과 맞닿게 해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에 도달한다는 점에서는 앞서 인용한 시들과 유사하지만, 아래의 시들은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나 부정적인 국면들을 블랙 유머로 폭로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특별한 듯하다. 


나는 개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만약 다른 개미 식민지를 공격하는 와중에 개미 하나가 사로잡힌다면, 그 개미는 그 개미를 잡은 전사 개미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그 개미는 전사 개미의 모든 욕구를 처리하는 데에 남은 일생을 쓸 것인데, 그러면서 전사 개미는 점점 뚱뚱해지고 약해지며 결국에는 완전히 무력해져 일찍 죽을 것이다. 그리고 개미들은, 음, 말하자면 소떼 농장과 똑같은 것을 갖고 있는데, 그들의 경우 소가 진딧물일 뿐이다. 개미들은 그들을 목초지로 데려가고 젖을 짜고 그들에게 깨끗한 잠자리를 제공한다. 몇몇 개미들은 오직 환기를 위해서만 일한다. 집 짓는 개미들은 새 세대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식민지를 계속 늘린다. 그리고 인생에 한번 사용하는 날개를 가진 여왕은 그녀의 알을 낳고, 헌신적인 수행원들이 그 알을 돌본다. 여기에는 무언가 가슴이 찢어지는 것이 있다. 진딧물들을 해 지기 전 목초지에서 몰아 오고, 젖을 짜는 것, 낙농원 농부의 삶이란! 나는 책을 덮었다. (…) 나는 부엌 출입문에 서 있었는데 그때 어떤 차가 내 집 앞에 차를 댔다. 누가 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그것은 방역 차였다. 그는 차에서 나와 집 주변 온 곳에 스프레이를 뿌려 댔다. 몇 년 전에 계약한 것인데 지금은 내가 왜 그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는 이 분 정도 있다가 가 버렸고, 광대한 문명은 폐허가 되어버렸다.

— James Tate, 「The Aphid Farmers」 부분.


「The Aphid Farmers」의 뒷부분 역시 자세히 논의할 가치가 있지만, 일단은 앞 부분을 보자. 뜬금없이 테이트는 개미가 일구고 있는 문명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실로 개미는 훌륭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노예 개미와 진딧물 농장은 인간 사회의 그것들과 대응된다. 노예를 보유한 전사 개미가 일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다가 결국 일찍 죽어 버린다는 내용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한다. 여왕 개미의 일생에 화자는 가슴이 찢어지는(heartbreaking) 비애를 느끼고, 진딧물 농부 개미들의 목가적 삶에 깊이 공감한다. 여기에는 무언가 서정적인 것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개미와 인간 사회, 주변 자연 환경에 대한 화자의 명상은 몇 년 전에 계약했지만 왜 그랬는지 이유를 이제는 잊어버린 방역 차 때문에 끝이 난다. 시의 전개에서 방역차는 불쑥 튀어나온 것으로, 독자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이상하게도 불쑥 튀어나온 방역차는 역시 불쑥 자기 할 일만 하고 2분 뒤에 떠나 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화자의 건조한 논평이 압권이다.

식민지 개미집에 대한 전쟁, 주인과 노예의 투쟁, 진딧물 농부의 목가, 여왕개미의 실존적 비애. 결코 인간에 비해 못나다 할 수 없는, 작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개미들의 삶은 자기 일만 휙 하고 가버리는 관료적인 방역 업자에 의해 파괴되었다. “광대한 문명은 폐허가 되어버렸다”는 짧은 논평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날리는 조소(嘲笑)이다. 허탈한 웃음이 입가에 감돈다. 이 시를 읽었을 때 테이트에게 갑작스러운 훅(hook)을 얻어맞은 듯했다. 이런 식으로 테이트는 능숙하게 상상과 현실 사이의 결락을 (경우에 따라서는 블랙) 유머로 채우고,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한다. 일견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의 결합은 사실 독특한 시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마찬가지의 블랙 유머를 「The Promotion」에서도 엿볼 수 있다. 화자는 전생(前生)에 개였고, 주인을 보필하는 데에 충실해 인간으로 승진한다. 화자는 고층 빌딩에서 예전에 그러했듯이 개처럼 일한다. 아무와도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며. “이것이 착한 개로서의 내 삶에 대한 보상이다. 인간 늑대들은 나를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나를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목적 없이 일에만 몰두하는 자신에 대한 냉소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The Aphid Farmers」의 사회 비판적인 유머와 조응한다. 



6


산문시를 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문(愚問) 같아 보이지만,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문제다. 시는 운문으로 쓰여야 한다, 행과 연 사이 고유의 리듬이 있어야 한다, 하는 관념은 문학 작품을 읽는 우리들에게 일종의 관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테이트의 시는 산문으로 쓰여졌다는 사실 이외에도 우리가 시에 대해 보통 기대하는 것들을 배반한다. 보통 시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시인의 서정이 깃들어 있을 법한데 그렇지도 않다. 테이트 시의 대부분은 상황의 묘사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시인 특유의 아름답고 독특한 은유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테이트의 시를 읽어본다면 ‘그의 시는 확실히 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는 산문을 씀으로써 보통 사람들이 시에 기대하는 고정관념들을 대부분 파괴했다. 그러나 그가 산문들을 엮어내 시를 만드는 방식은 확실히 ‘시적’이다. 그는 산문을 사용해 현실과 초현실, 혹은 현실과 상상 사이를 자유자재로 활강한다. 산문은 본래 건조할 수밖에 없고, 시 속 상황과 정경에 대한 그의 묘사와 문장은 밋밋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산문은 상상력으로 즙이 가득 차 있다. 그는 뛰어난 권투선수처럼 파고 들어오는 위트를 날리며 우리들의 일상을 낯설게 만든다. 그 결과로 발생하는 것은 유머이다. 우리의 일상이 갑자기 의미를 잃게 되어 소탈한 웃음이 날 수도 있고(「A Sunday Drive」, 「The Case of Aaron Novak」), 현대 문명을 기존대로와는 다른 시각으로 마주치게 되어 씁쓸한 조소가 입가에 맴돌게 될 수도 있다(「The Aphid Farmers」, 「The Promotion」). 

테이트는 기존의 관습적인 서정시에서 탈피하고 대신 자유로운 산문을 사용해 시적 상황들과 상상력을 충돌시켜가며 유머를 창출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일상을 우리가 종래에 보던 방식대로 볼 수만은 없게 된다. 그의 산문시 스타일은, 기존의 형식을 고수했다면 도달하기 어려웠을 시 쓰기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 듯하다. 이러한 그의 시 쓰기 방식을 ‘유머의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1. 밀란 쿤데라, 『커튼』, 박성창 옮김, 민음사, 2012, 195쪽. [본문으로]
  2. ‘Call’이라는 영어 단어는 단순히 누군가를 부른다는 의미 뿐만이 아닌 종교적인 뉘앙스도 포함하고 있다. 서구 기독교 문화에서 천직, 소명(calling)이라는 단어는 신의 부름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본문으로]
  3. 이언 와트, 『소설의 발생』, 강유나·고경하 옮김, 강, 2009, 46-7쪽. [본문으로]
아래는 세미나에서 쓴 쪽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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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만, «담론과 해방»(궁리, 2005) 3장 쪽글 

요약

«담론과 해방» 3장에서, 김경만은 부르디외의 비판이론이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참여자들이 그의 과학적 분석을 수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분석을 … 일종의 주제넘은 참견으로 생각”(117)하는 사태에 대한 부르디외의 정신분석학적 돌파가 그르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성찰적 사회학을 통해 장 내 참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일루지오를 폭로할 수 있으며, 이것이 참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오인(misrecognition)”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역시 참여자들이 그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으로 보답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었다. 역설적이게도 부르디외는 그러한 저항이 부르디외 분석의 “진리성”을 강화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참여자들의 저항은 “집단방어기제”(프로이트)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김경만은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오로지 일종의 해석 체계를 제공해주는 것일 뿐 결코 진리의 입증 혹은 “과학적 발견”(131)이 될 수 없기에 이러한 부르디외의 돌파가 잘못된 것이라 주장한다.
    둘째는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 체계에서 일루지오 개념이 가지고 있는 모순성이다. 즉 부르디외가 자신을 ‘일루지오’에서 벗어난 인식론적 객관성을 확보한 학자라고 상정하지 않는다면, 부르디외 역시 일루지오에 사로잡혔고 또한 자신이 참여하는 (사회학 학술) 장 속에서 경쟁을 통해 상징자본을 확보하며 “사회적 일루지오를 생산하는 사회학자들 중 한 명이기 때문에” 그의 인식론적 객관성은 흔들리게 된다. 그렇다고 부르디외는 자신의 이론의 객관성을 입증할 독립적인 근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루지오 개념의 모순과 관련해 김경만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일루지오의 상호 불침투성은 부르디외의 사회학이 사회적 지배의 억압으로부터 일상인들을 해방하는 데 요구되는 환류회로의 설정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배제한다.”(128) 풀어서 말하자면 이렇다. 부르디외 이론에 따르면 A장의 참여자는 B장에서의 고유한 목표와 상징투쟁에 관심이 없다(B장 및 그곳의 아비투스에 의해 만들어진 일루지오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학적 아비투스를 체화하지 않고, 사회학에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르디외 이론에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논증이다. 
    
Topic: ‘일루지오’ 개념이 모순적이라는 김경만의 비판에 맞선 부르디외 변호

    정신분석학이 객관성을 결여한 비과학임을 받아들인다면, 김경만의 첫 번째 비판은 수긍할 만하다. “집단방어기제”를 운운한 부르디외의 논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찰적 사회학에 대한 행위자들의 부정적 반응이 집단방어기제 때문이라는 근거는 타당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의 성찰성, 그리고 실천성을 생각해 볼 때, 김경만의 두 번째 비판은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김경만의 두 번째 비판에서, (1) 부르디외가 “자신의 발목을 죄고 있는 일루지오의 족쇠를 깨는 방법을 알지 못”(132)했다는 것은 부르디외 이론 체계—적어도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에서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 사회학 장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 혹은 비판이론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지점이 있다. 우리는 ‘학위를 받고 학술적 활동에 참여하는,’ 즉 아카데미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사회학 장의 참여자로 상정할 수 있을까? 학술적 비판을 제기하거나 논문을 출판하지 못한다는 이유 등으로 일반인들이 사회학 장의 참여자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일반인들은 비판적 사회학의 일루지오를 일부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학교에서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하는 동아리가 있다고 해보자. 여기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심층에 어떤 공모와 권력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파헤쳐 보려는 ‘일루지오’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실제로 부르디외를 위시한 학자들의 비판이론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7-80년대 대학에서 이뤄졌던 맑시즘에 대한 관심과 탐독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 청중에 대한 부르디외의 답변 내용 중에서 “친근하고 우호적인 방법”(130)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물론 “친근하고 우호적”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소박하다. 하지만 요는, 일반인들도 충분히 사회학자들의 일루지오를 일부 공유할 수 있으며, 결국 그렇게 일루지오의 공유를 확산시키는 것은 구체적인 운동 방법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문제를 우회한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난점은 여전히 존재한다(아마 김경만도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1) 일반인들이 어떻게 부르디외의 난해한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어차피 일반인들에게 전달되는 사회학 이론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된 것이다. 일반인이 어떻게 복잡한 사회학 이론을 이해하는가? (2) 일반인들은 ‘정식적인’—굳이 말하자면—학술적 장의 참여자가 아니므로, 사회학계 내에서 부르디외 이론에 대해 “인식론적 권위를 부여”(128)할 수 없다. 결국 부르디외 이론에 인식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카데미 장 내의 참여자들이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암시한다. 왜냐하면 결국 일반인들이 부르디외 이론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 타당성과 권위를 존중해서가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타 

119쪽에서, 김경만은 “부르디외가 설정한 개념들의 연결망 밖으로 나오면 상징자본의 증대를 위해 투쟁하는 개인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찰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그의 이론은 개념들의 연결망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실재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구성한 이론적 세계와 조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비단 부르디외 뿐이 아닌 모든 사회학 이론에 적용되는 것 아닐까? 이런 식의 비판에 따르면 모든 추상적 개념을 활용한 이론들은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규명하는 데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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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만, «담론과 해방»(궁리, 2005) 4장 쪽글 

1. 기든스 비판에 대한 의문들

    1) “따라서 자기준거적인 사회적 실천이 변하는 과정에는 두 가지 요소가 내재한다. 첫째는 특정한 이해관계에 부합하도록 현재의 개념적용 방법을 변화시키려는 행위자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요구 또는 관심이 존재해야 하고, 둘째는 이전의 개념적용 방법을 변화시키려는 일련의 투쟁이 결과적으로 새로운 개념적용 방법의 제도화로 귀결되어야 한다.”(164) 
    2) “… 우리를 ‘더 옳은’ 혹은 ‘더 합리적’인 결혼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가정되는 외적 준거를 우리가 수용했기 때문이[sic] 결혼관행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 관행의 변화는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형성된, 현재의 관행을 바꾸려는 압력에 의해 촉발되는데, 현재의 관행이 도전받는 이유는 그런 관행이 (인식론적으로)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169) 

    위의 인용구를 토대로 볼 때, 김경만은 행위자들이 어떠한 관행을 고치려는 노력의 기저에는 ‘인식론적으로 옳은 것을 추구하려는 동기’가 아닌 ‘도덕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을 고치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행위자들이 언어게임 혹은 사회적 관행의 변화를 추구할 때 도덕적 불만족만을 동기로만 하여 움직이는 것일까.
    ‘사회(제도)가 어떠어떠한 식으로 변해야 한다’는 발화는, 하버마스를 빌려서 말하자면 규범적 측면의 타당성을 요구하는 규제적 발화이다. 그런데 규범적 측면의 타당성은 특정한 종류의 논증을 전제로 한다. 즉 규범은 개인의 취미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규제적 발화를 한 후 대화의 참여자들에게 그 타당성의 승인을 요구할 때, 우리는 특정한 윤리적 체계를 설정하며 우리의 당위적 주장이 그 윤리적 체계에 부합함을 논증할 것이다. 물론 다른 대화의 참여자들도 우리의 당위적 주장이 우리가 설정한 특정한 윤리적 체계에 부합하는지 부합하지 않는지를 꼼꼼히 가려가며 우리의 주장을 판단할 것이다.[각주:1]
    이를테면 (전통적인) ‘여성성’이라는 사회적 규범(혹은 제도)을 생각해 보자. (내재론적 관점에서) 한국 사람들은 여성성, 여성적인 행동이라는 것의 객관적 개념을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공감하며 배려할 줄 알고, 주체적으로 나서지 않고 성적(性的)으로 정절을 지키는 따위의 행동을 ‘여성적인 행동’, 혹은 여성이 실천해야 할 행동이라고 “실천감각을 체화”(162)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여성성 관념은 물론 도전받고 있는데, 과연 글에서 제시된대로 “‘좀 더 나은’”(169) 여성성을 위해 사람들이 투쟁하고 있다고만 정리할 수 있을까? 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페미니즘 인식론에 준거해 그러한 여성성 관념이 왜 억압적인지를 논증하고, 사회 구성원들은 그러한 논증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고 변화에 동참한다. 여성주의자들은 나름대로 ‘더 옳은’, 혹은 ‘더 합리적’인 여성성에 대한 외적 준거들을 제시하고 우리들은 그것을 수용한다. 


기타 


* 사회학이 다루고 있는 쟁점들—주로 빈곤, 불평등, 젠더 부문의—은 대개 역사적으로 언제나 규범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폭풍우치는 사회변화의 격랑 속에서 방향을 정해야만 할 때 (실제로 그게 가능하든 아니든) 어떤 편에 서는 것이 인식론적으로 옳은 것인지를 우선 가늠하게 된다. 보통은 규범적 문제에 대해 “좀 더 옳은” 것을 추구하지 “좀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이데올로기는 인식론적 우월성을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 

* 자잘한 의문: 도덕적으로 ‘불만족스럽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일까? 도덕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규범의 총체이다. 도덕은 개인의 미적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불/만족스럽다’는 술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단 문맥상으로 볼 때, 행위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규범에 사회적 관행이 맞지 않다고 생각할 때를 “도덕적으로 불만족스럽다’”고 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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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만, «담론과 해방»(궁리, 2005) 7장 쪽글 


1. 낸시 프레이저(7장 말미)에 대하여 

    1) 낸시 프레이저의 지식인 역할론 논평

낸시 프레이저는 지식인의 역할을 레닌주의적이고 전위주의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레닌주의·전위주의적 관점은 지식인을 “초연한 과학적 관찰자”로 보며, 비레닌주의적이고 비전위주의적 관점은 지식인을 “사회집단의 성원으로 급진적인 정치에 참여하게 한다.”(277) 하지만 역시 낸시 프레이저는 “지식인들을 사회적 노동분업 속에서 정치적으로 유용한 직업적 기술을 획득한 사람들, 따라서 문화변동을 위한 투쟁에 그러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로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277) 
    그러나 위의 구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낸시 프레이저 역시 레닌주의-전위주의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낸시 프레이저는 지식인들이 인식론적 우월함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는 듯하다. 물론 그러한 인식론적 우월함은,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과학적 방법이나 지식인들이 속한 공동체가 “자유롭게 떠다니는”(277; 이는 칼 만하임의 용어를 빌린 것 같다) 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식인들이 사회 분업 속에서 유용한 기술을 획득했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지식인의 자유부동(自由浮動)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업 속에서 지식인이 일상적 행위자들보다 더 나은 “문화변동을 위한 투쟁”에 사용할 기술 즉 이론적 자원을 확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이는 당연히 직업적 활동가 즉 전위당의 필요를 역설한 레닌을 떠올리게 한다. 요컨대 사회과학 이론의 오류성과 비토대주의를 전제한다 하더라도 프레이저의 지식인 역할론의 전위주의는 온존한다는 것이다.


    2) 지식인=활동가? 낸시 프레이저의 딜레마 

프레이저의 이론은 정확히 하버마스가 범하고 있는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프레이저에게 사회과학, 여성학 이론은 비토대주의적이며 오류성을 전제한다. 그는 여성주의 이론이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본다면 여성이론은 그것이 고통을 겪는 여성들로 하여금 사회의 위계 속에서 자신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지금까지 당연시해온 믿음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279) 하지만 프레이저의 여성주의는 반증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생활세계 내에서 이론가들이 이른바 여성억압이라든가 가부장주의라고 칭하는 것들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문제라고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프레이저의 이론은 하버마스의 공언(公言)—자신의 합리적 재구성이 반증을 허용하며 변증법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이 공언(空言)이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낸시 프레이저에게 지식인은 활동가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문화변동 투쟁에 유용한 기술을 가지고 있고, 또 사회집단의 성원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에 앞서 말한 것처럼 여성 집단들이 여성주의가 가지고 있는 기존 전제들을 거부할 때, 혹은 그와 상반되는 생활세계를 이루고 살아갈 때를 생각해 보자. 실용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면 여성주의 이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화변동 투쟁에 유용한 기술을 가진 활동가로서의 지식인들은 변증법을 통해 이론을 폐기하거나 이론에 전면적 수정을 가할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사회적 분업을 통해 다른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이론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든스와 같이 일방적인 ‘설득’밖에 없다. 그들은 그들의 이론을 재조정할 수가 없다. 전위적 활동가로서 운동할 수밖에 없다(설령 설득한다 하더라도 이는 활동가의 입장을 종국에는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적 설득이다). 이때 지식인은 활동가의 역할을 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목표를 위해 투쟁하는 비성찰적) 활동가가 되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정확히 이 지점에서 여성주의 이론의 비토대주의는 공수표가 되어 버린다.

    3) 프레이저에게 여성 집단은 단일한가?

“이런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본다면 여성이론은 그것이 고통을 겪는 여성들로 하여금 사회의 위계 속에서 자신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지금까지 당연시해온 믿음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277)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여성들은 단일한 집단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전선 속에 살고 있다. 사회 성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취향이나 가치관에 맞추어 그것을 정당화할 이데올로기적 자원을 끌어온다(혹은 취사선택한다고 하는 편이 더 명확할 수도). 여성주의 이론은, 모두 알고 있듯이, 이념의 전선 속에서 좌파의 편에 속해 있다. 우파적, 보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여성은 물론 여성주의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속에서 여성주의 이론은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가? (이는 비단 여성주의 뿐만 아니라 맑시즘 등 다른 이론체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파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여성들이 여성주의를 거부한다면 프레이저는 그것을 여성주의 이론의 실패로 받아들일 것인가? 


2. ‘이론적 각성’과 합리적 행위자(rational actor) 모델

‘이론 → 행위자의 수용 → 인식의 해방(이론적 각성)’ 따위의 모델은 합리적 행위자의 가정에 기반해 있는 듯하다. 김경만은 이론적 각성은 “억압받는 여성이 현재 거론되는 다양한 여성주의 이론들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쟁하는 이론들 각각의 상대적인 장점을 평가할 능력이 있음을 전제해야만 한다”(278)고 말한다. 이는 물론 프레이저의 여성주의 이론 뿐만이 아닌 기든스의 ‘설득’ 따위에도 모두 적용된다.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행위자 모델은 행위자들의 비합리적인 행위나 행위자들 사이의 정보의 불평등(well-informed and poorly informed)으로 인한 현상들을 설명하기 어려운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에 기반한 비판이론들의 ‘이론적 각성’에 대한 기대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 아닐까. 대안적 이론들은, 김경만이 부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첫째 “‘이론적 이해를 하기 전에’ 사회가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고 어떤 개혁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306)에게 수용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둘째, 이론이 ‘힙’하기 때문에 유행에 따라 소비되는 측면도 있다. 이렇게 이론이 이론가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행위자들에게 소비·수용되는 것을 연구한 경험연구가 있는지 궁금하다. 


  1. 다른 생각: 하지만 166쪽의 각주1번을 주의깊게 봐야 한다. 우리가 특정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그 특정한 판단이 객관적인 윤리적 이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소박하고 순진한 것일 수 있다. 두 가지 이상의 경쟁하는 이론적 설명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옳은’ 것을 제시하는 외적 준거를 수용해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우리가 두 가지 이상의 경쟁하는 이론 중 상대적으로 더 타당한 이론을 확증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본문으로]

Hans Joas and Wolfgang Knöbl, Social Theory, Trans. by Alex Skinn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7장 “Interpretive approaches (2): ethnomethodology(해석적 접근 (2): 민속방법론).” 민속방법론의 경험적 분야로의 적용 부분 요약번역. pp.171-3. 


요아스와 뇌블의 사회학 교과서 Social Theory의 장점은 각 이론들이 영향을 준 경험적 연구 분야들을 정리해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리처의 『사회학이론』이나 기든스의 『현대사회학』 같은 다른 교과서들은 그런 점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거나 그런다한들 사회학 세부 분야들의 성과를 각 이론 학파들의 특징들과 잘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7장 “해석적 접근 (2): 민속방법론”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민속방법론이 다섯 가지 경험적 연구 영역에서 행사한 이론적 영향력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있다.


1) 민속방법론의 전통적 행위이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일상 언어의 문맥의존성에 대한 자각은, 전반적인 사회학 방법론 분야에서의 세심한 주의를 환기시켰다. 민속방법론의 공로로 사회학자들은 데이터가 만들어지고 얻어지는 방식에 대해 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중요한 저서로는 아론 시쿠렐(A. Cicourel)의 Method and Measurement in Sociology와 잭 더글라스(J. Douglas)의 The Social Meanings of Suicide가 있다. 후자의 책에서 더글라스는 뒤르켐의 기획과는 다르게 자살 데이터가 어떻게 국가나 지방정부에 의해 모아지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편견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정들이 자살의 정의를 구성하는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정부의 공식 통계는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비슷한 의구심은 범죄 데이터 수집 방식에 대해서도 이뤄졌다. 왜 경찰이 많다는 사실이 범죄율의 상승을 불러오는가? 경찰이 많은 지역에서 범죄가 많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경찰이 많으면 그 경찰들이 범죄를 더 많이 기록하기 때문이다. 


2) 민속방법론은 일탈행동의 사회학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에곤 비트너(Egon Bittner)의 “Police Discretion in Emergency Apprehension of Mentally Ill Persons”와 하비 색스(Harvey Sacks)의 “Notes on Police Assessment of Moral Character”는 경찰의 일상적 업무와, 특정 상황에서의 행동을 유발하는 법 조문과는 별 관련이 없는 그들의 매우 우연적인 업무 원리(highly contingent criteria), 그리고 어떻게 그들의 일상생활의 사건에 대한 인식들이 보통의 일상적 행위자들로부터 구성된 것과 다른지에 대해 매우 많은 생각의 여지를 제공한다. 


3) 지식사회학(sociology of knowledge). 여기서는 가핑클에 의해 세워진 민속방법론보다는, 알프레드 슈츠(A. Schütz)의 연구의 특정한 측면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실재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by Luckmann and Berger)은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연구로, 저자들은 만하임이나 셸러의 전통적 지식사회학을 수정하고 보완한다. 이 책은 맑스의 특정 저작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졌다. 이 책은 이데올로기의 내용과 본성에 대해 마음의 양식을 제공한다. 


4) 세 번째 측면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과학사회학(sociology of science)이 있다. 가핑클 역시 연구실에서의 실재, 연구실의 환경에서 사실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해석되는지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린치, 리빙스턴, 가핑클의 “Temporal Order in Laboratory Work”). 민속방법론적 개념을 적용해, 과학사회학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보여준다. 어떻게 합리적인 연구 절차가 일상생활의 행위 구조에 의해 주조되는지, 어떻게 임의적인 결정이 이러한 절차를 결정하는지, 어떻게 우발적 사건(chance occurrences)들이 연구가 진행되는 데에 영향을 끼치는지, 어떻게 연구자들이 지속적인 실천/관습(practice)을 통해 ‘사실facts’들을 보는 능력을 기르는지, 어떻게 겉보기에 명백한 연구 절차들이 거부되고 기각되는지, 판사들의 경우와 같이 어떻게 연구 보고서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절차들을 회고적 시각에서 형성하는지(stylize), 그리고 아무리 테크니컬한 실험일지라도 그것들이 얼마나 과학자들—데이터가 분석되는 방식을 결정적으로 정하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의존적인지. (see for Karin Knorr-Cetina, The Manufacture of Knowledge: An Essay on the Constructivist and Contextual Nature of Science.)[각주:1]


5) 민속방법론은 페미니스트 이론의 구성에도 강력한 영향을 행사했다. 



  1. 민속방법론의 실천적 행위에 대한 역사적·이론적 재구성 기획을 비판한 책으로는 김경만의 『담론과 해방』(궁리, 2005) 1장을 참고할 것. [본문으로]
요악번역. Hans Joas and Wolfgang Knöbl, Social Theory, Trans. by Alex Skinn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8장 “Conflict sociology and conflict theory.” 갈등사회학과 갈등 이론. pp.174-198. 소제목은 임의로 붙인 것임. 


배경 및 도입 

앞선 장에서 다룬 신공리주의, 민속방법론과 상징적 상호작용주의는 1950-60년대의 파슨스 학파에 대한 반동이다. 그런데 앞선 세 개의 학파는 파슨스 학파의 행위 개념을 주로 다루었고, 사회 질서나 변동의 문제에는 주의를 깊게 기울이지 않았다. 

앞선 배경 하에서 소위 갈등사회학은 1950년대 중반부터 부상하게 된다. 파슨스는 사회적 실재의 규범적 요소들을 너무 강조했고, 그럼으로써 단순히 정적인 사회 질서만을 가정하게 된 것이다. 갈등 사회학은 사회적 삶에서 이익의 충돌과 권력 관계의 역할을 사회학 분석대상의 중심 자리로 갖다 놓고자 한다. 

갈등사회학은 1960년대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때는 학생운동의 영향력이 서구에서 강해진 시기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파슨스에 대한 갈등사회학적 비판이 좌파적인 정치스펙트럼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걸 강조한다. (174)


파슨스에 대한 해명

그런데 파슨스 자체는 사회질서가 굳건히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은 보수주의자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는 미국의 특정 사회·정치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한 적은 전혀 없다. (2장을 보면, 파슨스는 FDR와 뉴딜정책의 지지자였고 FBI의 뒷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사회 갈등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고,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선험적(칸트적 의미)으로 사회적 질서의 기본 전제가 무엇이 되는지 밝히는 것이었다. 물론 파슨스의 이론모델이 갈등을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는 있다. 그것이 사회변동을 거시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더라도 파슨스의 이론틀이 ‘조화에 대한 편향harmonious bias’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5)


갈등사회학과 갈등이론의 의미 

갈등사회학 자체에는 개념적 어려움이나 모호성이 있다. 갈등사회학은 사회학의 세부학제로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가족사회학, 종교사회학 같이). 한편 갈등사회학은 그 자체로의 특정한 이론적 접근방식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갈등이론conflict theory이라는 용어를 후자의 의미로 쓰고자 한다. (175-6)


파슨스 이론을 확장하고자 한 노력들 

파슨스의 추종자들은 갈등을 사회학의 중심주제로 위치시키는 데 실패했다. 비록 그들은 경험적 현상으로서의 갈등을 연구하긴 했으나 이것이 파슨스 규범이론의 골격에 대한 전면적 수정이나 영향력 있는 비판으로 보기는 어렵다. 단지 세부적 갈등 영역에 대한 연구의 여지만 남겨 놓았을 뿐. e.g. 로버트 머튼Merton의 역할 갈등role conflict 이론.

의미 있는 진전은 루이스 코저Lewis Coser에 의해 이뤄지게 된다. 그는 저작 사회적 갈등의 기능들The Functions of Social Conflict에서 파슨스의 이론적 접근과 맥을 같이 하는 동시에, 갈등을 병적인 것이나 개인적 일탈 같은 심리학적으로 결정된 현상으로 보는 파슨스적 시각을 비판한다. 그는 파슨스가 뒤르켐에만 너무 관심을 기울였고 베버의 갈등에 대한 통찰은 방기했다고 주장했다. (176)

코저는 짐멜Simmel에 큰 영향을 받았다. 짐멜의 에세이 ‘갈등Conflict’은 갈등적인 사회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견지했다(이는 독일적 문화 전통과는 다르다). 이를 물려받아 코저는 사회 갈등이 충족시키는 기능에 대해 집중했다. 그는 모든 갈등이 공격적인aggressive 형태를 취하지는 않고, 그렇기 때문에 갈등의 부재 자체는 곧바로 사회체계의 안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갈등의 부재는 후에 통제불가능한 분출eruption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달리 말해 열려 있는 형태로 잘 정착된 갈등은 안정성의 신호가 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갈등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기능을 가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갈등은 새 제도나 규칙의 수립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Continuities in the Study of Social Conflict, 1967). (177)


기능주의에 대항한 갈등이론 


1) 미국 - 벤딕스
 
파슨스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코저는 기능주의 내부에서의 발전을 꾀하고자 했다. 한편 그렇지 않은, 좀더 근본적인 단절radical break이 사회학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 1956년 경부터. 즉 갈등론적 접근을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발달시키려는 시도이다. 미국에서는 라인하르트 벤딕스(R. Bendix)가 주도적이다. 벤딕스는 맑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맑스의 이론적 약점 역시 염두에 뒀고, 이를 토크빌Tocqueville과 베버의 이론적 툴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맑스가 모든 갈등을 계급갈등으로 환원하려 했던 시도를 비판했다(Social Stratification and Political Power, 1952). 한편 맑스의 통찰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데 이런 식의 맑스적 통찰을 유지시키려는 모티프는 갈등론 내에서 계속 나타나게 된다. 벤딕스는 (계급)갈등이 예측 가능하다고 본 맑스의 주장을 거부하고 사회운동이 어느정도 지역 조건이나 역사적으로 물려받은 것, 위기의 강도acuteness에 따라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178)

Work and Authority in Industry라는 1956년 저작에서 그는 파슨스와는 매우 다른 관점을 취한다. 이것은 차르 러시아와 영국의 초기 산업화에 대한 역사-비교적 연구이다.  파슨스는 기본적으로 조직이 노동분업에 기반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이를 부정했다. (179-180). 그리고 그는 파슨스가 했던 방식으로는 다르게 베버를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파슨스를 비판한다(180). 


2) 유럽 - 록우드, 렉스, 다렌도르프 

아마도 파슨스 패러다임의 지대한 지배 때문에 미국 사회학에서 갈등의 주제는 (1) 코저처럼 기능주의와 조화될 수 있는 방법으로 다뤄지거나 (2) 보다 근본적 접근을 취하지만 그 이론적 야망이 모호하고 잘 정식화되지 않는 식으로 다뤄졌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후자는 좌익 사회 비평가 밀스(Mills)의 경우이다. 한편 유럽의 경우 몇몇 사회학자들은 파슨스에 대해 좀더 오픈마인드의 자세를 취한다. 1960년대 영국에서는 데이비드 록우드(Lockwood)와 존 렉스(Rex)가 있다. 

록우드는 화이트/블루칼라 노동자의 의식을 경험적으로 분석한 학자이다. 그리고 그는 파슨스의 이론에 비판을 가한 첫 영국 학자들 중 하나이다. 록우드 역시 맑스의 통찰을 수용하나 그것의 수정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록우드는 파슨스적 접근과 갈등론적 접근이 그것이 강조하는 바에 있어 서로 보충적이라고 했다(“complementary in their emphases”). (181-2)

렉스는 파슨스의 편향적 one-sided 이론을 비판했다. 파슨스의 이론은 그가 보기에 매우 이상주의적(idealistic)이며, 왜냐하면 그는 안정적 질서와 규범적 패턴이 사실은 권력구조의 표현일 수도 있음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베버를 끌어온다. 하지만 렉스 역시 파슨스를 아예 폐기하지는 않는다. (록우드와 같다). (182)

제일 근본적인 파슨스에 대한 비판과 갈등론적 접근의 empathic한 옹호를 펼친 이론가는 독일 사람이다: 랄프 다렌도르프(Darhendorf)가 그 이론가이다. 그는 렉스와 록우드 전에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사실 그의 1955년 에세이 Struktur und Funktion이 록우드에게 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는 파슨스에 대해, 특히 그 이행이 파슨스로부터 인과적 분석을 놓치게 했다는 점에서 그가 사실 행위이론에서 질서에 대한 기능주의 이론으로 이행할 필요는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역기능(dysfunction)이 체계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파슨스 이론의 정적(static) 성향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다렌도르프는 록우드와 렉스와 동일하게 파슨스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고, 그것이 수정된 맑스의 계급이론과 보충적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다렌도르프는 맑스 이론에서 그것의 형이상학적 기반과 정치경제학적 기반을 걷어내고 사회학적으로 유용한 핵심만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록우드나 렉스가 본 것처럼 생산수단의 점유는 단순히 지배의 한 가지 특별한 종류일 뿐이다. 갈등은 생산수단 유무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대신 다렌도르프는 권위/권력, 지배를 강조했다. 권력과 지배가 사회학의 기본 개념이고, 다른 현상들은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으며 그 기반 위에서 우리는 사회 동학을 분석할 수 있다. 


갈등론은 응집성 있는(coherent) 이론인가? 

이상을 살펴보면 놀라운 것은 갈등론에 그것을 주도한 대표적인 이론가가 없다는 것이다. 가핑클(민속방법론), 파슨스(기능주의), 블루머(상징적 상호작용론)과 같은 이론가가 없다. 그리고 갈등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통합된 전통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갈등론을 응집성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들은 그럴 수 있다고 답한다. 적어도 갈등론이 사회학 세부학제로 변형되기 전인 1950-60년대까지는. 어떤 지점에서 갈등 이론가들이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 (186)

1) 갈등 이론의 출발지점은 사회적 질서가 아니라, 어떻게 개인이나 집단들 사이의 사회적 불평등을 설명할 것인가, 이다. “Who gets what and why?”(Lenski) 이는 불평등에 대한 단순한 묘사와는 다른데, 왜냐하면 갈등론은 불평등의 인과에 대한 이론적 해명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2) 갈등이론가들은 앞서의 질문, who gets what and why에 대한 대답으로, 사회 불평등은 궁극적으로 지배domination에 대한 문제임을 말하고 있다. 모종의 이유로 특정 그룹은 투쟁에서 이기고, 특정 그룹은 진다. 이긴 그룹은 희소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장기간 불평등의 분배를 고착화시킨다. 
3) 갈등 이론가들은 재화(goods)나 자원(resources)을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용한다. 이런 지점에서 맑스(경제적 자원만을 강조)와 파슨스(규범적 가치만을 강조)를 비판할 수 있다. 이를테면 갈등 이론가들에게 positions of authority는 정치적 자원이 될 수 있다. 
4) 갈등 이론가들에 있어 분쟁은 인간 역사의 언제나 존재하는(constant) 특징이다. 이는 파슨스(사회의 통합을 강조)와 맑스(계급투쟁이 없는 마지막 역사단계를 상정)와도 구별된다. 물론 갈등이 끝날 때도 있으나 갈등 이론가들은 이를 일시적인 평화나 합의로 간주한다. 


갈등론이 촉진시킨 세부 분야들 

1) 교육사회학 (the sociology of education). 중요한 이론가는 랜달 콜린스(Collins)이다. 산업사회에서 교육기간과 노동자들의 전반적 교육수준이 높아지는 경향은 기능주의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콜린스는 경험적으로 반박했다. 직업에서의 성공은 사회적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콜린스는 교육수준의 향상을 지배집단이 자원을 독점하고자 한다는 갈등론적인 설명을 펼친다. 학교는 패션, 미적취향, 가치와 매너, 어휘와 억양을 가르치는 것이 주 업무이고, 이를 통해 계층구조를 재생산한다. 그리고 하층계급은 교육을 통해 사다리를 오르려 하는데, 중상층계급은 하층계급으로부터 교육적 qualifications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그들과 멀어지려고 한다. 이 때문에 하층계급의 노력은 전반적인 학력의 인플레만 강화할 뿐이다. 참고: The Credential Society(1979). 이는 부르디외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2) 전문직의 사회학(sociology of professions). 여기서의 시카고 학파가 갈등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갈등론은 전문직 정신(professional ethos)이 파슨스가 말한 것처럼 어떤 가치의 표현이 아니며, 다만 전문직의 특권과 공공영역에서 전문직의 위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강화하려는 효과적 수단일 뿐이다, 라고 주장한다. 

3) 일탈행동의 사회학(sociology of deviant behavior; 일탈사회학). 6장(상징적상호작용론)에서 다룬 낙인이론(labelling theory)이 갈등론의 접근을 수용한 것이다. 갈등론자들은 해석적 접근의 옹호자들보다 더욱 권력(power)의 역할을 강조한다. 

4) 사회 운동론. 신공리주의적 접근(자원동원이론)과 갈등이론은 사회 운동론에 있어 상호적으로 얽혀 있다. 왜냐하면 둘 모두 집단들이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cost-benefit calculation을 한다는 합리주의적 가정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매카시(John McCarthy)나 찰스 틸리(Tilly)의 저작에서 잘 드러난다. 

5) 젠더사회학(sociology of gender relations; 젠더관계에 대한 사회학). 이 영역을 관심있게 살펴본 첫 ‘남성’ 이론가 중 하나는 랜달 콜린스이다. 콜린스는 성적 행위 자체가 강압이나 폭력의 요소를 수반하고, 이것이 남녀의 사회적, 노동 분업—약한 성이 더 불리한—에 대한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갈등론의 이론적 난점들 

1) 갈등론의 ‘현실주의적’(realistic) 시각—갈등론이 던지는 개념들은 과장된 것일 수 있고, 갈등론이 참조하는 고전적 저자들의 중심 통찰을 간과했을 수도 있다. 일례로 짐멜의 경우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그것이 참여자들을 바꾸는 방식을 이야기했다.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 그 자체의 공격성을 잃어버릴 수 있고, 갈등으로부터 절충된 것(what had been a compromise)이 나중에는 가치있거나 의미있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다. 

2) 갈등론은 행위자들의 합리성을 과장한다는 위험에 빠질 수 있고, 그리하여 신공리주의 혹은 합리적 선택 이론의 스탠스를 취하게 될 수도 있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인간의 도구합리적 행위 능력을 매우 과장하고 이념(ideas)과 문화적 양식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이론적 스탠스는 꽤 부적절하다. 

이러한 이론적 난점들 때문에 갈등 이론이 제대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망하게 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앞서 짚은—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갈등 이론가들이 정치적 통합political unity을 결여했다는 것이다. 갈등 이론의 ‘끝없는 권력투쟁’ 테제는 마키아밸리적 정당화를 위해 쓰일 수도 있다. 그러한 정치적 차이 때문에 이 학파는 응집성 있고 지속적인 학파를 구성하는 데에 실패했다. “명확하고 구별되는 갈등론적 접근은 사회학 안에서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터너, The Structure of Sociological Theory, p.162) 

그리고 이러한 명확한 학파로서 남지 못한 다른 이유는 보다 다원화된 사회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다렌도르프 역시 그의 권력/권위 이론이 제한된 영역의 갈등에만 (단체 내에서의 갈등) 적용될 수 있음을 시인하고, 종족ethnic 갈등이나 국제 문제를 조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함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순수한 형태’로의 갈등론은 ‘역사사회학’ 분야에서 살아 존재하고 있다. 전근대 사회나 20세기 전 사회의 거시적 변동을 밝히는 데에 갈등론적 툴킷이 유용한 것이다. 

1970년대의 이론적 발전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의해 자극받게 된다: 권력과 문화 사이의 연결고리. 이는 파슨스 학파와 마찬가지로 갈등론도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이다. 이에 관련해 다음 장에서는 위르겐 하버마스를 다룬다. 


김경만,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 - 하버마스와 로티의 논쟁』, 아카넷, 2015. 


세미나에서 쓴 쪽글들.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김경만, 아카넷, 2016) 1-3장 쪽글. 


요약 


책은 (특히 이론가와 행위자가) 대화를 통해 생활세계나 삶의 방식의 변화가 유도될 수 있는가를 다룬 하버마스와 로티의 논쟁에 대한 것이다. 하버마스와 로티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서론에서 하버마스와 로티 논쟁의 핵심적 문제를 설명한다. 하버마스 로티 논쟁의 핵심에는, 로티의 반플라톤주의를 과연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은 유효한 세계관인가 하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1장에서는 하버마스의 대화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하버마스 이론의 원류(源流)—루카치,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로 이어지는 비판 이론—를 설명한다. 2장에서는 하버마스의 이론을 설명한다. 3장에서는 로티의 이론을 설명한다. 



토론


리처드 로티에게 있어, 새로운 언어를 통해 당연한 것을 당연시하지 않게 보게 하는 등의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업적(147쪽)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T1 시점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언어관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T1 시점에서 다양한 시인, 소설가, 언론인—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사적인 관심을 충족하기 위해 “생각하지 못했던 언어를 창조하고 제도화하는” 데에 골몰한다(147). 이들 중 일부의 언어들은 사람들에게 받아지고, T2의 시점에서 곧 우리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일부 변화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여기서 로티 이론의 난점은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T2의 시점에서, 사후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런 연유로 예술의 역사는 철저히 망각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김경만이 «담론과 해방»에서 이미 제기한 것이다. 어쨌든, 로티에게 있어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업적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될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파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과 다르게 아이러니스트 이론가는 단순히 사적 목표만이 아닌 공적 목표를 추구하는데 로티는 그 공적 목표—철학적 논증을 통한 정의 실현, 인류 해방—의 추구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세계를 변화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 쪽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의식적인 목표 추구를 통한 사회 변혁은 우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우리는 공론장에서 합리적 대화를 통해 서로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프로그램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능한 사회 변화의 힘은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길인데, 이는 그 자체가 ‘우연적’으로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회 변화를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예측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선동가들의 언어는 어떠한가? 이들의 피끓는 수사는 사람들과 세계를 변화시키지 않는가? 


한편 다른 문제로 ‘공적 목표’를 추구하는 이념들에 따라 어떤 가치를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문학가들이 존재한다. 참여 시인들을 생각해보자(일단 생각나는 것은 80년대의 박노해부터 지금의 송경동까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들은 물론 합리적 논증을 통해 세계를 바꾸기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맑스주의 사회변혁 프로그램) 문학을 한다. 말하자면 개인의 사적 관심, 최종어휘를 만들어 내는 것에만 골몰해 있지 않는 문학가들이다. 그러나 물론 이들도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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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김경만, 아카넷, 2016) 4-5장 쪽글


1. 


로티에 따르면 하버마스의 합리적 재구성을 통해 인간의 잔혹함과 고통을 줄일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 그러한 일반적인 이론적 검증—즉 화용의 보편적 구조가 충족될 수 있는 이상적 담화 상황이 현실화되고 제도화되었는가 혹은 아닌가의 검증—에 의해서는 무엇이 현재 해결되어야 할 잔인함이고 고통인가를 ‘찾아낼 수 없다.’ 둘째, 한 발 양보해서 그런 문제를 찾아내서 논쟁한다고 가정해도 논리적인 직접적 논증은 논쟁 당사자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가를 결정해줄 수 없고, 다만 서로의 주장을 재묘사하고 재분류함으로써 논쟁을 무한히 이어나가게 할 뿐이다.”(178쪽)


여기서 첫째 반박을 주목하자. 로티가 말한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하버마스는 자신이 가정한 “‘공론의 장’ 안에 “이미 토의와 논쟁의 주제가 존재하고 있을 것””(182쪽)이라고 가정하는데, 로티는 토의와 논쟁의 주제는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로티가 보기에 토의와 논쟁의 주제를 테이블에 올리는 주체는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논쟁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또한 그로써 “지엽적인 진리 기준이 더 포괄적인 진리 기준으로” 확장된다(183쪽). (물론 로티는 ‘토의와 논쟁’을 통해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버마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하버마스 논리 속에서는 토의와 논쟁의 대상인 주제를 부칠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가 토의와 논쟁의 주제를 제시한 예로 소설 ‹톰아저씨의 오두막›을 들고 있다. 흑인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라는 합리적인 주장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는 내러티브(192쪽)를 가진 소설을 통해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범위를 확장”(190쪽)한다. 이렇게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혹은 소설이 제시하는 새로운 내러티브에 동의하는—사람들의 수가 확장될 때 사회는 변화한다. 



2. 


로티의 주장은 설득력있어 보인다. 하지만 잠시 하버마스의 편을 들고 싶어진다. 로티는 ‘찾아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왜 찾아낼 수 없을까? 하버마스의 합리적 재구성은 현재 해결되어야 할 잔인함과 고통을 분별할 수 있다. (물론 그 잔인함과 고통은 일상 행위자들이 왜곡된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탓에 생긴 것이다.) ‘흑인과 백인은 다른 인간이며, 따라서 흑인들을 일부 사회의 영역에서 배제시켜야 한다’라는 명제가 있다. 하버마스의 프로그램에 따르면 비판이론가는 이 명제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타당성 주장이 제기되는 세 개의 분리된 영역을 얼마나 잘 구분하고 있는가를 따질 것이다. 그리고 분리된 세 개의 영역이 각각 요구하는 타당성 기준에 따라, 위 명제가 합리적인지를 가릴 것이다. 


다만 하버마스가 가지지 못한 것은 더듬이다. 비판이론가들은 산적한 사회 문제 가운데 어떤 것이 현재 해결되어야 할 고통인지를 특유의 감지력(더듬이)를 통해 과연 찾아낼 수 있는가? 그들은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가? 인종차별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이 대다수인 사회에서, 과연 인종차별을 해야 한다는 규범적 주장에 대한 비판이 공론의 테이블에 제기될 수 있느냐는 불투명하다. 물론 문제가 주어진다면 (하버마스적) 비판이론가들은 합리적 재구성을 통해 차별적 명제의 타당성을 가려낼 수 있다.하지만 비판이론가들이, 사회에서 뭐가 문제인지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3. 


하버마스라면 아마 이 문제를 비판이론가들이 가진 위치—‘가상적 참여자’—를 강조함으로써 돌파할 것이다. 이는 이론가들이 일상적 행위자들보다는 어느 정도 인식론적으로 특권적 위치에 있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로티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나는 로티가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을 하버마스가 상정한 이론가들의 위치와 똑같은 지점에 위치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 역시 무엇이 현재 해결되어야 할 잔인함이고 고통인가를 ‘찾아낼 수 없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이 특권적 위치를 점하지 않는 이상, 무엇이 지금-여기의 중요한 문제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무엇이 문제인지는 말할 수 있지만). 그리고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작품은 그것을 수용하는 일상적 행위자들을 전제로 한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성공 여부는 일상적 행위자들이 폭넓게 작품을 수용하고,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만약에 읽히지 않는다면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의 작품들은 망각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로티의 이론은 변화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은 세상의 고통과 차별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새로운 은유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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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김경만, 아카넷, 2016) 결론 쪽글. 


요약 


    김경만은 결론 장에서 로티와 하버마스의 논쟁 요지를 다시 요약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버마스는 행위자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을 통해 그들의 인식이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지점을 지적하고, 이론가 역시 가상적 참여자로서 행위자들과 논쟁을 통해 합의로 나아간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이러한 기획에 대해 로티는 반박한다. 무엇이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는지는 하버마스처럼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절차적 규칙”에 의해 찾아질 것이 아니라, 소설, 시, 민속지, 리포트 등에서 세계의 고통을 찾아내고 묘사하는 언어 사용을 통해 찾아지는 것이다(225-7쪽). 

    하버마스와 입장을 같이 하는 매카시(T. McCarthy)는 모든 발화에는 보편적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정향되어 있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을 들어 로티를 반박하고자 한다. 하지만 로티에게 있어 그러한 보편적 진리에의 정향은 상대적이고 특수한 문화권—서구 문화권, 그곳에서도 대학이나 세미나 실—에만 통용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상대적인 문화권들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히틀러와 같은 타자들에게 그들의 어떤 발화가 틀렸음을 최종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227-33쪽). 

    로티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편적 진리의 추구로 얻어낸 “초문화적 타당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세계의 고통에 대한 재묘사라고 주장한다. 그것이야말로 “지배에 대한 최선의 저항 전략”이 될 수 있다(233-6쪽). 김경만은 여기서 로티의 철학에 대한 사회학적 판본인 제프리 알렉산더의 연행(performance) 이론을 소개한다. 알렉산더는 문화변동이 사회적 연행을 통한 예시와 설득의 과정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문화변동은 어떤 특정한 주장의 진리치가 타당하냐 타당하지 않느냐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연행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질 만하냐 아니냐에 따라 일어난다(241-50쪽). 


논의 


1. 제프리 알렉산더의 연행 이론은 보다 넓은 문화적 변동이 아닌, 제도를 통한 사회의 변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연행 이론은 김경만이 제시한 한국 결혼 문화의 변화에 대해서도 설득력이 있고, 지금 예를 들어보자면 퀴어들의 권리 확보도 사회적 연행의 성공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이미 연구가 있을까?). 하지만 이미 제도화된 경로를 통한 사회의 변화—입법운동 등—를 과연 연행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알렉산더는 문화적 변동이 우선 선행해야 그러한 제도적 변화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돌파할까?) 


2.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로티 철학의 사회학적 버전인 연행 이론은 계급적 이해관심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 연행은 그 내러티브의 결론을 청중들이 진정성 있는 것(authentic)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고 문화적 변동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내러티브가 상층부 계급의 이해관심에 반한다면? 국가나 지배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사회적 연행은 과연 공적 영역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어느 정도 대중들에게 진정성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곧 지배계급(자본)에 의해 기획된 대항적 연행에 의해 무력화되지는 않을까? 한편 국가(상부구조)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하수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일 때 어떤 사회적 연행이 성공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제도화로 귀결되지는 않지 않을까. (앞서 말한 서구에서의 퀴어운동의 성공사례는, 퀴어들의 권리보장이 곧 자본의 이해에 상당히 발을 같이 맞춰 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퀴어퍼레이드에 가보면 구글이나 러쉬, 아메리칸어패럴 등의 쟁쟁한 기업들이 부스를 차리고 후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