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 책세상, 2001.


요약 및 정리

<목차> 
제1장 낭만주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 제2장 낭만주의자의 낭만주의는 어떤 모습인가 / 제3장 낭만주의를 정치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가 / 제4장 낭만주의의 혁명적 의의는 무엇인가


들어가는 말 및 제1장

- 초기 낭만주의와 후기 낭만주의

여기서 지칭하는 낭만주의는 ‘초기 낭만주의’이다. 사람들은 낭만주의를 이야기할 때 초기와 후기 낭만주의를 적당히 섞어 오도시키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낭만주의를 평가하고자 할 때 매우 부당한 것이다. 오로지 초기 낭만주의가 목적을 의식하는 예술 운동이다. (13) “1801년 노발리스의 죽음과 1804년 슐레겔의 가톨릭 개종을 기점으로 초기 낭만주의는 후기 낭만주의로 이행한 것으로 평가된다.”(29) 그런데 후기 낭만주의와 초기 낭만주의의 세계관 사이 유사성은 거의 없다. 벤야민은 오로지 초기 낭만주의에 대해서만 낭만주의라는 개념을 혼란 없이 쓸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제4장에서 더욱 자세히 다뤄진다.

- 슐레겔과 고대 그리스 예술

“고전문헌학자로 출발한 1796년 이전의 슐레겔은 그리스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그에게 그리스 예술은 완전성의 영원한 전범으로서 예술의 원형을 이룬다. 슐레겔은 그리스 예술의 역사를 자연스러운 것, 자발적인 것, 외부의 영향에 방해받지 않은 것, 그 자체로 완전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 예술을 ‘취미와 예술의 영원한 자연사’로 간주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그리스 예술의 독특한 완결성을 하나의 척도로써 근대 예술에 적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슐레겔의 이러한 작업은 근대 예술의 정당화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 예술의 이러한 역사적인 정당화는 낭만주의 프로그램의 정당성을 예비하는 것이었다.”(30) 

- 낭만주의와 근대성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의 대립항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사회 현실로부터 유리된 순진한 태도가 아니며, 낭만주의 예술론은 “낭만적인 꿈과 정치적인 현실 사이에 위치해” 있고, 예술을 통해 세계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야심도 갖고 있다. 또한 (저자에게 있어) 낭만주의는 근대적이다. 이는 이후에 더욱 잘 다뤄진다. (14-15)

- 낭만적이라는 말의 뜻 

이 책이 취하는 관점은, “낭만주의는 18세기 말경 유럽의 감성에서 비롯되어 현재에까지 이르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어떤 특정한 태도와 관련된 복잡한 문화적 현상”이다. (Praz, M. Paribatra, F. M. Alberes 등의 견해) 한편으로 낭만주의는 유럽 문학의 특정한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고 낭만주의를 고전주의의 대립항으로 설정한 유형론적 관점도 있다. (23)

그렇다면 낭만주의 운동이란 무엇인가? 넓은 의미에서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이다. 좁은 의미에서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예술관의 정초로서의 낭만주의”이다. (24-5)

- 계몽의 계몽으로서의 낭만주의

“이성의 능력에 대한 환상의 우위야말로 낭만주의의 구조적 원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32) “그러나 이러한 환상의 개념은 좀 더 정확하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상에 의한 단순한 자의적 유희를 넘어서 인간 정신의 한층 근원적인 능력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33) 낭만주의에서 환상은 이성과는 다르게 미적 통일성을 보증하고 이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 준다. 이성은 절대적인가? 주체가 이성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한계를 설정하고자 한 것이 칸트의 비판 작업임을 생각할 때 낭만주의의 환상은 칸트의 그러한 이성의 한계 바깥을 환상으로 넘어서고자 한다.

한데 낭만주의의 환상 개념은 반계몽주의적이고 전근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낭만주의의 환상은 매우 계몽주의적인 “지성에 대한 신뢰”에 의해 뒷받침된다(35). “말하자면 낭만주의적 환상이란 근대적 교양을 바탕으로 성숙한 정신적 소재와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진 환상이라는 것이다.”(35)

“낭만주의가 추구하는 절대적인 것이란 그 자신과 가능한 모순의 절대적인 통일을 말한다. … 환상은 이념 속에서 대상과 이념의 미적 통일성의 근거가 된다. … 환상에서 보편적인 것은 개념이 아니라 직관이다. 환상의 능력이 없다면 예술은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을 자신의 산물들 속에서 파악할 수가 없다. 환상은 객관적인 세계가 시간 속에서는 이를 수 없는 이상을 의식의 내재성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것으로 드러낼 수 있는 능력으로 유한한 것의 부정성을 극복한다.”(34)


제2장

- 낭만주의와 관념론의 긴장 관계 

낭만주의에서 낭만적 자아의 개념은 피히테로부터 출발한다. 피히테 자체가 낭만주의자는 아니지만, 그의 자아 개념이 낭만적 자아 개념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 기초를 제공했다. 낭만주의 운동은 “독일 관념론의 발생과 전개에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48)

피히테는 순수 자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순수 자아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성으로서 스스로를 정립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필연적인 대립자로서의 세계”를 정립한다(50). “피히테는 모든 인간적 지식의 무제약적이며 절대적인 제1원칙을 자아의 자기 정립적 활동성에서 발견한다.”(51) 데카르트적 자아와는 다르게 피히테의 자아는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을 행하고 스스로를 정립하는 자아이다(이는 인간 본성에 내재한다). 이러한 피히테의 자아 개념 설정 위에서, 낭만주의는 환상 내지는 성찰 등의 개념으로 “세계를 자유로운 창조적 자아와 내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한다(50-1). 

- 낭만적 주관성의 이론 

피히테의 관념론은 낭만주의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피히테의 절대 자아는 현실적으로 이를 수 없는, 주관과 객관을 완전히 결합시킬 수 없는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이러한 간극을 미적 상상력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낭만주의는 철학의 한계를 미적 상상력—예술로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낭만주의의 프로그램이 ‘예술의 철학화’(예술을 이성으로 설명하고 철학의 한 분과에 종속시키고자 했던 헤겔 등의 사상가)가 아닌 ‘철학의 예술화’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아이러니: 
“절대적 명제와 현실적 부정의 통일로부터 피히테는 보편적인 윤리적 조화의 표상을 낭만주의자들은 보편적인 미적 조화의 표상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보편적인 미적 조화의 이념은 예술의 절대성이라는 명제를 통해서 담보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예술 작품은 다만 그러한 절대성에 이르려는 동경의 흔적과 파편들로서만 현상된다. 이러한 예술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데서 낭만주의적인 유토피아의 표상이 생겨나며, 그곳을 향한 충동은 자아가 지닌 근원 충동으로 간주된다. 끊임없는 자기 정체성을 향한 이러한 욕구와 현실적인 충족 불가능성은 낭만주의의 고유한 동경이라는 욕구의 형식을 만들어내지만, 저 욕구의 무한성과 충족의 유한성 사이에서는 긴장이 생겨난다. 그 긴장의 영역을 낭만주의자들은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아이러니란 예술의 이념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예술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불화의 의식이다.”(56)

- 미적 근대성의 지평

낭만주의가 근대적이라고 할 때, 여기서 근대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낭만주의가 예술을 철저히 자율적인 영역으로 위치짓고자 한 데에 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자율성이 확보된 예술이 이성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 데에서 낭만주의의 탈근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제3장

- 전기 낭만주의와 후기 낭만주의의 정치성

“전기 낭만주의는 ‘보편적 개인주의’의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으나 후기 낭만주의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개별적 민족주의’ 입장이 득세하게 된다. 이의 배경에는 물론 나폴레옹이 예나 전투 승리 후 베를린에 입성하는,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74-5)

초기 낭만주의와 후기 낭만주의 사이에는 이론적인 연속성은 부재한다. 즉 민족혼(Volksgeist)을 강조하는 후기 낭만주의는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 상황에서 갑자기 생겨난, 전기 낭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는” 것이다. 초기 낭만주의는 현실의 정치와는 큰 관련이 없었고, 그들이 의도한 것은 “정신의 미적 혁명”이었다. 


Greenhalgh, Trisha and Wessely, Simon. 2004. “‘Health for Me’: A Sociocultural Analysis of Healthism in the Middle Class.” British Medical Bulletin 69: 197–213. 요약 


본 논문은 이른바 헬시즘(healthism; 건강제일주의. 건강, 피트니스를 최고로 여기는 삶의 방식 혹은 그런 생각들)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검토한다. 헬시즘은 중산층만의 전유물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헬시즘의 원인은 무엇일까? 헬시즘과 관련된 담론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따위의 질문을 다룬다. 

헬시즘이란 무엇인가?(What is healthism?)

헬시즘은 소비자주의(consumerism)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소비자주의에는 여러 뜻이 있지만 “과시적 소비”(베블런이 제시한)로서의 소비자주의가 “개인들의 행동 패턴 그리고 잠재적인 공공 건강의 문제”로서의 헬시즘과 상통할 것이다.

헬시즘의 인구학적, 행동 및 태도 상의 특징 (표1)
- 정보에 잘 접근할 수 있으며(information-rich) 대학 교육을 받았고, 보통 젊거나 중년층 
- 인권이나 환자의 권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목소리를 내는 경향이 있음 
- 긍정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함. 예: 술을 마시지 않고, 정기적 운동을 하는 등. 
- 대체약물, 인삼, 보충제 따위를 복용함. 이런 약물들의 특징은 ‘자연적’이며 ‘전체론적’(holistic) 특징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이어트를 통해 ‘독소를 빼는detox’ 행위를 함. 
- 자연적이지 않은 물질에 반감이 있음(화학물질, 백신, 약물). 특히 그런 것들이 사회적 이슈가 됐을 때(GM 식품, 집단예방접종, 환경오염). 
- 몸에 침투할 가능성이 있는 보이지 않은 작은 위협들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음—이것이 광우병, 첨가물에 대한 공포로 이어짐. 
- 과학/의학을 안전함보다는 위험함과 연결시킴. 
- 주로 공적 영역이 아닌 사적 영역(private sector)에서 높은 수준의 소비자로서의 선택을 함(excercises a high degree of consumer choice).

작가들은 이런 헬시즘이 가져올 효과들을 우려하고 있다. 예컨대 공중위생상 우선순위를 왜곡시킬 수 있다거나, 미디어를 통해 건강에 대한 공포를 증폭시킬 가능성이 있다거나, 의료 전문진들의 기를 꺾어놓는다거나.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한 연구나 저술은 많았지만 이 사회문화적 현상의 본질 및 성격(nature)이 어떠한가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아래는 비평적 픽션(critical fiction) 기법으로 쓴 헬시즘의 예시들이다. 

사례 1) 테일러-브라운의 아말감 이[齒] 충전재 

테일러-브라운 부부는 아이가 없는 30대 중반의 부부이다. 남편이 어느 날 GP(영국의 주치의)에게 2주가 된 힘빠짐, 머리 어지러움, 그리고 “피에 흐르는 어떤 후끈거림” 증상을 호소했다. 그는 인터넷에서 뽑은 자료를 의사에게 보여주면서 이게 아말감에 있는 수은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보험에 보험료를 청구할 수 있도록 의사에게 사인(의사 소견)을 요구했다. GP가 파악해보니 수은 충전재에 별 결함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굳이 출처와 신뢰가 불분명한 인터넷 자료를 토대로 소견을 내는 것이 불필요한 절차라고 생각해 언짢았다. 그래서 사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테일러-브라운 부부의 항의를 받았다.

사례 2) 리버의 면역예방접종

리버는 6주가 된 아기이다. 그들의 부부는 아이를 수중분만했고, 부부는 모두 채식주의자(비건)이다. 의사가 아이에게 표준 예방접종을 권했다. 그러자 아내가 거부했다. 아내는 신문 기사 오린 것을 보여줬는데, 그 내용은 돈 문제 때문에 ‘안전하지 않은’ 백신 처방을 홍보하고 촉진시키는 의사들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의사에게 아기가 잘 크고 있는데 굳이 자연적이지 않은 화학물질을 처방하면 안 되겠다고 했고, 아이의 면역을 위해 대체약품을 처방하겠다고 했다.

사례 3) 매들린의 body aches

매들린은 50대 이혼한 여성이다. 그녀는 아이를 키울 때 스트레스 때문에 수면제를 복용했다가 중독이 왔었다. 지금은 어찌어찌 극복했고, 복합비타민제를 복용하며 호르몬 재생요법을 위한 식물성 에스트로겐도 복용하고 있다. 그녀는 10년 전 가슴확대수술을 받았고 지방흡입을 했다. 그녀는 사설 체육관 멤버고, 거기서 인공 침대에서 선탠을 하고 필라테스를 한다. 
그녀는 GP에게 목과 어깨의 통증, 그리고 수면장애를 호소했다. GP는 그것이 어깨 쪽 근육이랑 어깨 조인트의 구속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실리콘 가슴확대 수술 때문에 섬유근종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의사에게 말했다. 그녀는 GP에게,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소견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헬시즘의 기원: “이렇게 좋은 것을 경험해본 적 없을 걸요!” 

헬시즘의 역사적, 인구학적 기원 (표2)
- 사망률을 급감시키고 수명을 늘린, 20세기 중후반의, 건강 테크놀로지의 진보. 
- 헬스케어 기구(예: WHO)의 야심찬 ‘강령’—이는 건강을 “질병의 부재”로만 정의하지 않고, “전체적인 몸, 사회적, 정신적 웰빙”으로 정의했다. 
- 출산율의 감소, 이로 인한 레저 시간의 증가와, 수입income의 증가—돈과 시간이 충분한 인구집단을 만들었다. 
- 60-70년대의 좌파운동, 반권위운동, 시민권운동, 그리고 8-90년대의 자유시장 우파이데올로기의 결합으로 인한 소비자주의 운동의 부상
- 성찰성과 자아인식(self-awareness)를 중시하는 서구에서의 전반적 경향(소위 ‘개인숭배cult of the individual’) 이는, 자잘한 몸의 질환이나 기형에 대한 높은 수준의 염려와 자아성취의 기대를 불러왔다.
- 헬스 토픽에 대한 거대 미디어의 깊은 관심, 그리고 널리 퍼진 헬스의 상업화. 이는 건강에 대해 우리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 먹거리선택, 레저활동, 감정의 변화, 삶의 이벤트에 대한 대응과 같은, 모든 측면에서의 일상생활에 대한 치료의 진전

하버드 정신과의사 Barsky의 책에 따르면, 미국의 역학조사와 심리측정 설문을 리뷰해보니 지난 30년간 미국 국민들의 전체적 건강수준은 매우 향상됐으나, personal health에 대한 만족감은 줄어들었다고 한다. 

맥마이클과 비글홀에 따르면, 헬시즘 추세는 경제적 세계화 때문에 크게 비롯됐다고 한다. 임금차이의 악화, 노동시장의 유동성, 세계화에 따른 환경파괴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과 관련된 질병이 영속화되고 있다. 한편 세계화와 미디어의 발달로 부유층에게는 건강, 몸 이미지,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기대와 인식이 커지고 있다. 

헬시즘의 역학: 이것은 중산층에게만 국한된 것인가?  

헬시즘의 특징과 행동양태는 계급과 관련이 매우 깊다. 하지만 헬시즘과 관련 있는 질병 자체는 계급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여피 플루’라는 신조어가 한때 널리 퍼졌는데, 이것은 장기간 일하고 스트레스받고 심한 의무감에 시달리는 전문직들에게 나타나는 힘빠짐을 일컫는 신조어다. 그런데 경험적 조사 결과 이는 중상류층 전문직(즉 여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런 증상은 ethnic minorities나 경제적 하류층에게 더 흔했다. 왜 그런 게 중산층만의 병으로 인식됐냐면, 소수자·하류층들은 의료서비스에 접근하기가 힘들고, 그들의 증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성 피로나 류머티즘’ 같은 전문용어를 잘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산층들은 정보접근권도 풍부하고, 자신의 증세를 전문용어로 풀어내고, 의료서비스 접근도 잘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산층의 질병들이 부각된다는 것. health literacy.) 

헬시즘의 행위자(agent): 성찰적이고, 합리적이고, 자아실현하는(actualizing) 자아(self)

저자들은 매슬로(Maslow)의 욕구 이론을 도입해 헬시즘의 행위자를 설명하고자 한다.

알다시피 매슬로의 욕구 이론의 단계는 이렇다. “생리학적 욕구 -> 안전의 욕구 -> 사랑의 욕구 -> 자존심(esteem)에의 욕구 (e.g. 명성, 인정 따위) -> 자아실현에의 욕구”

매슬로 욕구 이론에서는 아래에서부터 단계별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즉 기초적인 생리학적 욕구(먹고 자는 것)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사랑이나 자존심의 욕구를 느끼지는 않는다. 매슬로 욕구 이론에서 “자아실현의 경험은 더욱더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 또한 매슬로는,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은 두 가지 심화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1) 탐구enquiry와 표현의 자유 (2) 알고 이해하려는 욕구. 

매슬로 모델은 (1) 왜 헬시즘이 중산층에 국한된 현상인지 (2) 왜 개인들이 열정을 가지고 완벽한 건강(perfect health)라는 목적을 추구하는지 (3) 왜 정보와 설명의 제공이 만족을 주지 못하는지 (4) 왜 정신의 만족과 몸의 미학적 완벽에의 탐구가 자기 스스로 계속될 수 있는지 말해준다. 

합리적이고 성찰적인 자아(즉 계산적인 태도를 갖추어 자기계발에 참여하고, 그리고 전문지식에 대해 의심적인skeptical 자아)는 후기 근대성의 발명품이다. Deborah Lupton은 이러한 개념에 입각해 질적 인터뷰를 수행했다. 그녀의 논문은 합리적이고 성찰적인 자아 개념에 근거를 제공하나, 현실에서 헬시즘의 ‘pure form’은 잘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 ‘수동적인 환자’의 포지션을 자주 취한다. 따라서 스테레오타입화를 경계해야 한다. 

또한 lay expert(‘내가 해봐서 아는데’ 투의 민간 전문가. 전문적 경력을 쌓은 사람은 아닌, 일반인.)에 의해 의사의 획일적이었던 역할이 바뀌어 가고 있다. (논문에서는 이를 현상학적 자아phenomenological self라고 하는데, 아마 lay expert들의 영향이 개인 인식의 주관성에 깊이 근거하기 때문에 그런 듯해요.) lay expert들은 현대의 건강 지형에서 중요한 행위자를 맡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경험이 ‘진짜’이기 때문에 신뢰받고, 혹은 NGO와 함께했을 때 더욱 신뢰받는다. 

헬시즘과 권력

특히 의사-환자 관계에서 권력은 사회학의 주요 테마가 되어 왔다. 1950년대 초 파슨스는 상당히 고전적인 서술을 제시했다. 아픈 사람은 수동적이고 돌봄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픈 개인은 특정 종류의 특권(일에서 면제된다든가)을 누리는 동시에, 의사를 신뢰하고 치료에 순응할 의무를 진다. 의사는 전문직의 영역에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으나 환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의사로서의 관행을 따라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이러한 고전적인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존속하나, empowerment, enablement, 환자의 선택권, 환자 중심성patient-centredness, 파트너십, 상호성과 호혜성, 장애인권 활동가, 환자 중심 압력집단과 같은 현대적 개념과는 어색하게 존재하고 있다. 

푸코에게 클리닉(치료)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병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푸코에게 클리닉은, 특정한 장소(병원) 안에서 행해지는 의료와 그 관행을 뒷받침하는 관념과 의미체계를 가리킨다. 

Nick Jewson은, 18세기에서 후기 19세기까지 의사-환자 관계의 전환을 ‘소비자-상인’에서 ‘추상적이고 가부장적·온정적paternalistic 관계’로의 전환으로 본다. 이는 의료서비스 정책이 점점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헬시즘은 환자의 요구의 귀환으로 볼 수 있다. 

Eliot Mishler는 푸코의 이론을 재해석했다. 그는 진료실에 들어갈 때의 물리적 환경 셋팅이, 환자의 아픔 묘사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진료실은 전문가의 공간이며, 그 공간 안에서 의사와 환자의 권력 불균형 때문에 이야기의 주제 또한 전문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진료실에서의 상담에서, 보통 질문을 묻고 상담을 끝내는 것은 의사이지 환자가 아니다. 

Patient Empowerment는 의료 서비스 담론과 정부정책의 인기있는 테마이다. 실제로, 무작위대조시험들이 왜 페이션트 임파워먼트가 건강 상태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데에 중요한지 증명한 바 있다. 임파워먼트라는 개념은, 환자가 의사에게 질문을 묻거나 정보를 구하거나 의사 결정을 공유하는(share decision making) 등의 활동을 하기를 분명하게 격려받는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사례들(critical fictions)이 보여주듯이 patient empowerment의 어두운 면, 즉 empowerment가 평등, 공정, 시민권 따위의 개념보다 자신의 건강을 중요시하는 개인들의 무리한 요구가 될 수 있다는 측면이 존재한다. 

/ 또한, 전문적 치료에 대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혹은 information rich와 information poor)의 차이gap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 patient empowerment의 부정적 파생효과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도 있다. 


Social Theory 11장 “Niklas Luhmann’s radicalization of functionalism(니클라스 루만의 급진적 기능주의).” 요약번역. pp.249-280.

도입 및 배경 

니클라스 루만 역시 독일 사회학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그만의 방식대로 새로운 이론적 종합을 했는데, 여기서 종합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루만은 하버마스처럼 해석학을 통한 고전 이론들을 종합했다기보다는, 서로 경쟁하는 이론적 학파들의 중요한 관심들을 방기evade하거나 재정식화reformulate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애초부터 기능주의적 분석 방법을 사용했고, 점진적으로 ‘거대이론super theory’으로 변하게 된다. 


루만의 생애 

그는 중산층 가족에서 태어났고, 그의 세대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국가사회주의(나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종전과 제3제국의 붕괴에 대한 그의 경험도 사뭇 달랐다. 이런 것이 후에 사회-정치적 사건에 대한 그의 ‘거리를 두는distant’ 애티튜드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는 프라이부르크에서 법을 공부하고 처음에는 고위공무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질리기 시작했고, 하버드 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잡게 된다. 여기서 탈콧 파슨스를 만나고 제대로 아카데믹 커리어를 시작하고자 결심한다. 루만의 첫 책은 조직사회학에 대한 대규모의 연구이다. 주목할 만한 그의 저작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데, 보수적 사회학자 헬무트 셸스키(Schelsky)의 도움으로야 1966년 한 해만에 박사-포닥 자격을 받고 빌레펠트 대학에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 그가 연구 프로젝트 내용을 제출하길 요구받았을 때 그가 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회 이론; 기한: 30년; 비용: 없음. 

1960년까지 그는 조직, 법사회학자로 보였고, 1971년 하버마스와 논쟁하며 이는 바뀌게 된다. 그는 하버마스의 대항자로 이름을 날리고 1970년대 많은 독일 사회학자들이 루만 캠프나 하버마스 캠프에 합류하게 된다. 루만은 후에 독일에서 많은 영향을 확보하게 되고(아마도 사회학계에서는 하버마스보다 더?) 다른 사회학 이론가들과는 다르게, 그의 이론적 관심을 다루는 ‘Soziale Systeme’ 저널이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창간된다. 루만은 1980년대에 있어 국제적 명성을, 특히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얻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좋은 번역가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둘째로는 그의 매우 추상적 이론 빌딩이, 매우 전문화되고 경험적 경향이 있는 미국 사회학계에서 의심쩍은 눈초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80-90년대에 루만은 일종의 이론의 팝스타가 된다. 


루만의 지적 전통 

1) 탈콧 파슨스가 결정적이다. 루만은 파슨스의 초기 행위이론에는 관심이 없었고, 후기 기능주의 이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루만은 파슨스의 이론에서 하위 체계들이 존속을 위해 혹은 상위 체계를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기능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접근의 문제는 사회과학이 경험적으로 체계가 어떤 생존 요건을 가지고 있는지 검증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구조를 분석 대상의 첫 번째로 놓고, 기능을 두 번째로 놓는 이러한 구조기능주의적 접근에 불만족한 루만은 파슨스의 분석적 전략을 거꾸로 세워보게 된다. 그는 파슨스적 ‘구조기능’ 체계이론을 ‘기능구조’functional structural 이론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252) 그가 보기에 구조기능주의 이론은 구조 그 자체를 문제화하고 구조 형성의 목적을 탐구하거나 체계 형성 그 자체를 탐구할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능의 개념을 구조의 개념 앞에 놓음으로써 위와 같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Luhmann, ‘Soziologie als Theorie sozialer Systeme’, p.114) 

이로써 루만은 파슨스와 크게 세 측면에서 달라지게 된다. 첫째, 파슨스에게는 중요했던 ‘질서’의 문제가 루만에게는 더 이상 사회학의 주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파슨스 후기 이론의 규범주의적 측면은 하위 체계들이 ‘잠재적 유형 유지latent pattern maintenance’ 기능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루만은 이론적 측면에서 이와 결별하고, 또한 경험적 측면에서도 그는 현대 사회에서 가치와 규범이 더 이상 통합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결별한다. 둘째, 파슨스와 달리 체계가 체계의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구체적 요소들로 정의되지 않고 그의 규범주의적 측면도 사라졌다면 루만에게 있어 체계는 실제로 매우 추상적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루만은 생물학—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해 유기체가 자신을 적응시키는—에서 중요한 개념들을 끌어오게 된다. 그에게 있어 사회 체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다른 행위들과 경계지어진 서로 관계가 있는 행위들interrelated actions delimited from other actions”로 정의한다. 체계—사회 체계를 포함한—는 환경과 구분되는데, 여기서 환경environment이란 단순히 생태학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체계의 부분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킨다. (253) 이런 관점에서 체계의 안정성stability은 변하지 않는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체계와 환경과의 관계로, 그리고 변하는 환경에 관한 체계 구조와 체계가 가진 경계의 상대적인 불변성을 가리키게 된다(Luhmann, ‘Funktionale Methode und Systemtheorie’, p.39). 이로써 루만은 조직의 내부 목표나 내부적 가치가 조직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한다는 전통적인 조직 이론의 가정과 결별할 수 있게 된다. 

셋째로 루만은 사회 체계들의 기본적 문제들은 존재하는 구조들에 의해 완전히once and for all 해결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기본적 문제들은 언제나 임시적으로 어느 정도만 성공적으로 해결될 뿐이고, 그런 문제들은 아주 다양한 형식과 구조들에 의해 임시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루만은 체계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식별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파슨스와 결별한다. 루만은 그의 기능주의를 ‘등가기능주의equivalence functionalism’라고 이름 붙인다. 즉 체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동등한(등가적인) 해결책은 언제나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일한 조건은, 체계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정도로 요구되는 자기변이를 허용할 수 있게 조직되고 제도화institutionalized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54)

이런 식으로의 전통적 기능주의와의 결별—그리고 등가기능주의로의 이행은 전통적 기능주의에 가해진 비판의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 기능주의가 인과를 설명할 수 없으며 어떤 가설이나 묘사만을 할 수 있다는 비판. 루만은 기능주의가 실제적 인과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즉각 인정한다. 루만은 기능주의가 인과적 설명을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가 아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만은 등가기능주의가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등가기능주의는 실제로 일어난 특정한 기능적 성취보다는, 체계가 그 가능성을 통해 환경에 대한 외부적 경계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매우 많은 가능성들—즉 등가적 성취들—을 지목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기능주의의 인과적 설명을 할 수 없음은 약점이라기보다는 강점이 되고, 휴리스틱heuristic 모델이 된다. 

2) 루만은 역시 생물학적 연구에 영향받았으나, 루만이 생물학 개념을 자주 끌어오게 되는 건 그의 후기 저작에서이다. 루만이 영향받은 중요한 다른 지적 전통은, 매우 독일적인 학제인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이다. 20세기에 이와 관련한 중요한 사상가는 막스 셸러와 헬무트 플레스너(Helmuth Plessner)가 있다. 그리고 아놀드 겔렌(Arnold Gehlen)도 언급되어야 한다. 그의 저작 Man: His nature and place in the world는 1940년에 쓰여졌는데, 여기서 인간은 Mängelwessen, 즉 결함(lack)이 있는 존재로 이해된다. (256) 겔렌은 인간이 동물과는 다르게 본능과 충동을 결여(lack)했다고 본다. 이러한 본능과 충동의 결여로, 인간은 단순히 환경에 대해 생존만을 위한 활동을 하지 않고, 세계를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행동’을 취하게 된다. 즉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겔렌이 보기에 이러한 특징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매우 큰 부담을 준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인간은 습관과 루틴을 이용한다(=Entlastung). 이러한 부담을 줄인다(Entlastung)는 개념이 루만의 이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간만이 부담을 줄이기 위해 루틴과 습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전통 또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257)

Entlastung을 루만의 체계 이론의 어휘로 번안하자면 그것은 ‘복잡성의 최소화reduction of complexity’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번안은 겔런의 개념과는 조금 달라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겔런에게 있어 분석의 출발은 인간 존재, 그리고 인간 존재의 행위였다. 그러나 루만은 행위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루만은 체계의 목적, 체계의 자기생산의 목적이 바로 복잡성의 최소화라고 본다. 제도, 안정적 구조나 체계는, 특정한 상호작용의 형식을 제공하며, 상호작용하는 당사자집단들에게 열려 있는 옵션의 폭을 제한한다. 그리고 이로써 개인의 행동의 안정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의 질서 잡힌 행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효율성을 늘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복잡성의 최소화는 체계를 환경으로부터 구분지어준다. (258) 

3) 마지막으로 루만이 영향받은 것은 후설Husserl의 현상학이다. 루만은 그의 지가그이 심리학에 대한 연구를 끌어들인다. 후설은 지각이 의식의 능동적인 성취achievement에 의존적임을 밝혔다. 후설의 현상학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지향성’, ‘지평선’, ‘세계’, ‘의미’인데, 루만은 이러한 개념들을 사회 체계로 적용시킨다. 체계 혹은 사회 체계는 세계의 무한한 복잡성을 감소시킨다; 기능적 분석에서 매우 중요한 준거점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복잡성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종류의 환원으로야 의미가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체계는 후설에게 있어 개인을 지각하는 것처럼 구조화된다. 후설에게 있어 지각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으며, 개인은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고 어떻게 의미가 생성되는지 파악할 때에만 그들의 내적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루만에게 있어 체계도 그렇다. (259) 


우연성

루만의 위와 같은 종합은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첫 커리어인 관료조직에서의 경험을 활용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공식적 조직이나 행정조직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문제들이 그의 다양한 경험적 분야에 대한 이론적 분석에 영향을 많이 끼쳤기 때문이다. 이는 하버마스와 루만의 다른 차이점을 보여준다. 루만은 하버마스와는 다르게 비-규범적이다. 사실, 루만은 지극히 반-규범적이다. 루만은 사회비판에 전혀 연루되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 1945년의 그의 경험에 관련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연성contingency'에 대한 그의 개념이다. 루만에게 있어 우연성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불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제임스는 모든 정치적 행동은 예측하기 어려운 우연적인 결과를 불러오며, 그러므로 반유토피아적인 개혁주의를 주창했다. (260) 이러한 우연성의 개념은, 루만이 명확한 인과적 명제를 주장하는 것을 삼가고 등가기능주의적 방법을 쓰는 것을 정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루만의 논의 ‘스타일’에마저 영향을 주었다. 사회적 질서란 언제나 우연적인 것—필연적이지도 않고 불가능하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성이란 언제나 특정한 효과를 필연적으로 불러 일으키는 특정한 행동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루만의 논의 스타일은 ‘낯설게 하는’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물론 정치성을 의도한 브레히트의 희곡과 루만은 다르다). 루만은 규범, 가치, 종교 등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마치 카메라 바깥에 있는 것처럼 말을 한다. 이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태도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261)


루만 이론의 발전 단계 

루만의 저서가 매우 많기 때문에, 그의 작업 전체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종합적으로 여기서 모두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본서에서는 중요한 저서 중심으로 루만의 사상을 간략하게 개관하고자 한다. 

A) 1960년대 루만의 저서는 대부분 조직, 법, 정치사회학 주제에 관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초기 작에서도 그의 이론적 관점이 드러나 있다. 나중의 거대이론을 만들기 위한 발판이 된 셈이다. (262)

Funktionen und Folgen formaler Organisation은 기존 전통적 조직사회학의 핵심 가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이다. 베버와 미헬스Michels는, 조직의 목적과 도구합리적 해위모델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고 가정했다. 루만은 이러한 가정에 의문을 표한다. 루만의 경험적 연구는 관료제 조직 안에서의 비공식적인 관계가 상당한 역할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런 것들은 보스와 비서 간 신뢰 있고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시킬 수 있다. (263) 베버의 관료적 이념형에 있어, 공식적 조직과 관료제에서의 비공식 채널 내지는 비공식 절차는 장애물밖에 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이런 통찰은 상징적 상호작용론적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루만은 한발짝 더 나아가, 조직의 분석에서 ‘목적’이란 역할을 행사하지 않거나, 아니면 미미한 역할을 행사할 뿐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9장에서 본, 하버마스가 루만의 논의 중에서 중요하다고 간주한 것과 같다.) 루만에게 있어 조직이나 체계의 유지에는, 공식 목표의 설정보다 더 나아간 것이 요구된다. 조직이나 체계가 하위 단위로 분화되는 것은 오로지 최상위 목적에서 파생된 것은 아니다. 모든 체계는 그것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 말고도, (환경에 대한) 자기보존을 위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즉 체계는, 목적의 달성과 같은 단일한 기준 하에서 합리화될 수는 없다. 체계는 다기능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루만은 그의 첫 번째 중요한 저서에서 행위 이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조직이나 관료제의 영역에서만 수단-목적 카테고리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행위자의 수준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겔렌을 인용하며, 행동은 목적의 실현으로 이해되는 것보다는, 특정 목적이 없는—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는 베버나 미헬 류의 관료제 모델에 대한 비판을 열어 준다. (265) 베버와 미헬스는 거시수준에서의 관료조직의 이념형에서 도구합리적 행위를 중심에 놓았고, 이는 루만이 보기에 관료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실재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들었다. 루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곧바로 체계이론으로 ‘개종convert’한다. 

루만은 그의 저서 Zweckbegriff und Systemrationalität에서 듀이와 같은 미국 실용주의자들을 인용하며, 그들의 목적론적 행위 모델에 대한 비판을 흡수한다. 듀이는 인간 행위의 흐름을 인과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즉 어떤 특정한 원인이 행위를 유발시킨다는 관점을 버린 것이다. 루만도 이에 동의하나 그는 수정된 목적론적이지 않은 행위이론을 전개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는 곧장,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목적이나 가치가 충족시키는 기능이 뭔지 묻는다. (266) 루만은 그것을 묻는 것이 인과를 명확하게 식별할 수 없는 사회과학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이 행위에 대해 목적이나 가치를 자꾸 참조하는 것은, 그 목적과 가치가 단순히 행위자에게 있어 복잡성을 감소시켜주기 때문이라고 루만은 대답한다. (267)

만약 목적이나 가치 같은 개념이 행위를 구조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다양한 논의들이 우리에게 기존의 행위 이론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제시한다면,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개념적 도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Zweckbegriff und Systemrationalität (The concept of ends and system rationality)이라는 제목을 우리는 도구적 합리성 vs. 체계합리성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도구합리적 행위이론을 극복하기 위해, 곧장 행위를 체계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행위와 행위자의 준거점은 그저 커뮤니케이션을 구조화하는 것이며, 커뮤니케이션을 특정한 인성적 체계나 사회 체계의 것으로 귀착시키는 것이다. 즉 루만은,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계이론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파슨스의 경우 그의 체계이론에서 컨트롤 센터의 위치(위계적으로 상위)에 있는 것은 Latent Pattern Maintenance 체계이다. 왜냐하면 파슨스의 후기 체계이론은 사회가 가치에 의해 통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만은 이와 전혀 다르다. 그가 생각하기에 현대 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이는 위계적으로 상위에 있는 어떤 체계나 가치를 가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민주정치나 법 체계에 대한 분석에서 명확히 논증하고자 한다. 루만에 따르면, 민주선거나 사법절차는, 정의나 진실과 같은 어떤 궁극적인 가치에 매여 있지 않다. (268) 정의나 진실이니 하는 담론은, 루만이 보기에 그저 복잡성을 감소시키는 특정 기능을 충족시킬 뿐이다. 정당성(legitimacy)이란 정치나 사법 체계 그 자체 안에서 생산된다. 선거나 사법 같은 절차들은, 정의나 진실 같은 이슈들을, 그 절차에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학적 승인’에 관한 것으로 변형시킨다. (269) 체계의 안정성과 동학을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하위체계의 특정 절차나 로직이다. 

B) 1970-80년대, 루만은 매우 다양한 이론적/경험적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펴낸다. 원래 관심사인 법과 조직에 대한 책을 펴내는데, 1981년의 연구 “Political Theory in the Welfare State”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때 루만이 지식사회학의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의 중요한 연구는 1982년의 낭만적 사랑의 의미에 대해 논한 저서 열정으로서의 사랑(Love as Passion: The Codification of Intimacy)이다. 루만이 처음으로 이론적인 혁신을 꾀한 건 1980년 초이고, 이는 저서 Social Systems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루만은 여기서 체계이론을 더욱 급진화한다. (270) 루만은, 파슨스 등의 저서에서 드러나는 ‘체계’란 오직 실재에 더욱 잘 접근하기 위한 분석적이고 이론적인 도구라는 관념을 버리게 된다. 그는 체계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이해한다. 체계는 실재적이며, 즉, 사회 현상들은 실제로 특징상 체계적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체계이론에서는, 체계이론에 관한 진술은 실제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다.”(Luhmann, Social Systems) 여기서 루만은 체계이론이 보편성을 담지한 ‘거대 이론supertheory’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루만은 그의 체계이론을 새롭게 정초한다. 그는 자신의 체계이론이 세 가지 단계를 거쳐왔다고 적고 있다. 첫째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로, 체계를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부정확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증명됐다. (271) 둘째는 체계를 부분-전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체계-환경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루만이 1960-70년대에 견지했던 입장이다. 그런데 이제는(셋째 단계), 루만이 주장하기에, 생물학과 신경생리학에서의 발전이 체계이론 안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는 체계-환경 모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하며, 체계를 ‘자기준거적 체계’로 이해해야 함을 가리킨다고 한다. 

즉 생물체를 그것이 대하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operational autonomy를 중심 문제로 둘 때 그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체는 환경으로부터 특정 물질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물리적으로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생물체들이 그런 물질을 처리하는 방식은, 완전히 체계 내적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논리는 환경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는 두 칠레 신경생리학자 마투라나Maturana와 바렐라Varela의 개념을 가져온 것이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그들 자신만을 준거로 삼는 자기생산적 체계로서 기능한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를 자기생산적(autopoietic) 체계라고 불렀다. 자기생산적 체계는 조직적으로 닫혀 있는 체계이며, 체계 내의 성분들이 체계 자체 안에서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자율적인autonomous 것이다. (272) 

루만은 이러한 생물학에서의 발견을 사회 체계에 적용한다. 물론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그들의 이론이 사회과학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에 회의를 표했다. 루만은, 심리학적/사회적 체계를 자기생산적 체계로 간주한다. 그는 이를 체계이론에서의 ‘두 번째 패러다임 전환’으로 부른다. 루만이 보기에 기능적으로 분화된 하위 체계는, 그들의 내적 논리만을 따른다. 그러한 하위 체계는 외부로부터 방해받기만 할 따름인데, 하위 체계들이 그러한 방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는 그 체계들의 특정한 프로그램에 달려 있다. 따라서 루만에게 있어, 사회를 전체로 간주하고 계획하는 개념은 불필요하다. 루만은 경제에 개입하려는 정치적 시도들을 비웃는다. (273) 다른 체계를 계획하거나 통제하려는 개념은 루만에게 있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위)체계는 진화evolve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기능적 분화의 우위에 대한 루만의 접근은 소위 ‘자기생산적 전환 autopoietic turn’ 이후 더욱 급진적이어졌다. 물론 자기생산적 전환은 루만의 체계이론의 단순한 급진화 말고도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루만은 자기생산적 전환의 흥미로운 이론적 결과로, “성분elements의 개념에 대한 급진적 시간적 한정화radical temporalization”을 든다. 즉 체계를 구성하는 성분들은 지속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것을 담고 있는 체계에 의해 꾸준히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Luhmann, Social Systems). 이러한 자기생산적 모델을 사회적 문맥에 적용함에 따라, 루만은 체계이론이 주체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인 유럽적인 관념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274) 이는 즉 사회 체계는 인간이나 행위에 기초해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사회 체계는 커뮤니케이션에 기초해 구성된다. 루만은 인간이 사회 체계의 구성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에 이른다. 사회 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하는 인간이 아닌,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이다(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이로서 사회의 개념은 확장될 수 있다. 사회적 체계—가장 확장적인 사회 체계는 사회들societies인데—는 멈추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으로 정의될 수 있다.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이 끝나는 곳에서 끝난다. (275) 즉 현대 시대의 사회를 민족국가에 국한해 보는 것은 루만에게 있어 완전히 오도된 것이다.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범위가 확장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사회global society’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C) 이미 논의했듯이 루만은 사회 현안에 대해 아이러닉한 태도를 견지한다. 루만은 사회 현안에 대해 진단하는 글을 매우 제한적으로 썼을 뿐이다. 예외라 하면 Ecological Communication이라는 저서이다. 이 책은 1970년대 이후로 매우 중요해진 환경운동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루만의 논의는 매우 도발적이다. (276) 루만은 현대사회의 기능적 분화를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현대사회의 하위체계들은, 말하자면 ‘이진법’을 사용하여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예컨대 과학이라는 하부체계에서는 진실/거짓이라는 이항대립이, 정치라는 하부체계에서는 정부/야당이라는 이항대립이라는 식이다. 여기 중에서 어떤 하위체계도 다른 것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없고, 다른 것을 조종할 수도 없다. 여기에 더해 각 하위체계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코드code들이 다른 체계로 쉽게 번역될 수도 없음은 물론이다. 

사회체계가 자기생산적이며 언제나 내적 논리를 따라 기능하고 환경에 의해서는 방해받을irritated 따름이라는 루만의 논리는, 체계에 대한 계획이나 규제가 가능하리라는 전망을 애당초부터 배제한다. 따라서 루만은 현대 사회가 생태학적 위협에 대해 적응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표한다. (277) 루만이 보기에,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이나 집단이 전체적인 ‘사회’에 대해 환경적 위험들을 경고할 수 있을 만한 적절한 시점은 없다. 루만이 보기에 환경주의자들이 점한 도덕적 우위는, 이민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항의에 대한 것만큼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루만에게는 두 스탠스 모두 멍청하고 거만한 것이다. 그런 식의 운동이나 저항은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기능적 분화를 해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환경운동에 대한 루만의 비판은 이론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그는 특정한 형식의 기능적 분화에 대한 생태학적 경고를, 기능적 분화 자체에 대한 경고와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 버린다. 마치 그는 생태주의자들이 근대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한다. (279) 


마치며 

지금까지 독일에서 70-80년대에 있었던 중요한 이론적 종합을 개괄했다 (루만, 하버마스). 그러나 이론적 종합의 시도는 다른 곳에서도 이뤄졌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앤서니 기든스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것이 다음 장의 주제이다. (280) 


후루이치 노리토시,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이소담 옮김, 코난북스, 2017.


단상


1. 일본에서는 루만을 많이 연구한다. ‘거대 이론’은 보통 파슨스와 루만의 이론을 의미한다. 

2.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저서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은 것이 전부. 일본에서 스타인지는 몰랐는데 확실히 그런 듯. 그럼에도 매스컴에서 소개되는 직함이 사회학자일 뿐 충분히 학계 내에서 자리잡은 이는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관련해 우려를 표하는 것이 인터뷰들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 

3. 제일 인상 깊었던 인터뷰는 가이누마 히로시(b. 1984, 도쿄대 사회학 박사과정생, 후쿠시마 연구자)와의 것. 



인용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오구마 에이지: 제 견해로는요, 사실 사회학은 잔여항의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 정치학이나 법학, 경제학 등의 대상이 되지 않는 부분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영역을 횡단하는 것이죠. ... 간단히 말해서 사회학이란, 원래는 사회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려는 학문이었지만, 점차 개별적인 잔여 영역을 실증 연구하는 학문이 되었다고 할까요. (23쪽) 


우에노 지즈코: 좀 더 엄밀하게 정의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 증거에 근거한 경험과학입니다. (65쪽) 


니헤이 노리히로: 방법론 면에서 보는 편이 사회학의 특징이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 방법론에도 종류가 다양한데, 비교적 공통적인 요소로 최소한 다음 네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 본질주의를 택하지 않고 언어적 의미에 따라 사안이 구성된다는 견해. 두 번째로 사안의 의미는 관계성의 망 안에서 정해지고 그 배치는 시대나 집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견해, 세 번째는 개인의 행위는 사회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그 개인의 행위에 따라 사회는 차이를 내포한 채로 재생산된다는 견해, 마지막으로 연구자도 사회 외부에 서지 않고 연구나 발신은 재귀적인 프로세스 안에 포함된다는 자각. (88-9쪽)


오사와 마사치: 그래도 추상적으로 정의하자면, 사회학은 ‘사회의 자기의식’입니다. 자기 자신을 의식할 때 사회는 자신이 무엇인지 생각하죠. (135쪽) 


야마다 마사히로: [저널리스트와 사회학자의 차이에 대해] 우선 현상만 보지 않고 현상 배후에 있는 사회 전체의 변화에 이론적으로 위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 여부로 나뉩니다. … 사회학자는 이를[일반 이론을] 바탕에 두고 현상을 해석하거나 평가하고요. … 이 말을 바꾸면 가족 문제를 잘 아는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조사나 연구를 사회 이론 안에서 풀어갈 수 있다면 그 저널리스트는 사회학자라 해도 좋습니다. (161-2쪽)



기타 


우에노 지즈코: 아카데믹 언어는 긴장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계속 쓰지 못해요. [후루이치: 지금은 우에노 선생도 못하시나요?] 못해요. 정년이 되어 업계에서 물러났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긴장감을 갖추고 문장을 쓰지 못하게 되었어요. (71쪽) 


[후루이치: 우에노 선생은 사회학자인 동시에 젠더 연구자이기도 한데요, 그 둘 사이에 갈등은 없나요?] 우에노: 없어요. 왜 갈등이 있다고 생각하죠? [후루이치: 사회학자는 사회학이 사회과학인 이상, 매사를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시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젠더 연구자로서 우에노 선생은 … 사회운동가의 의식도 있지 않나요?] 고리타분하네, 후루이치 씨. 사회과학자가 중립적인가요? (72쪽) 


우에노: [프로 연구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 영어로 수신하고 발신하지 못하는 연구자는 글로벌한 존재 의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 프로 연구자가 되고 싶다면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 미국 이외의 선택지는 없어요. 미국에 있으면 알아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이니까. 그곳에서 경쟁해서 글로벌하게 발신하는 실력을 닦는 거예요. (81-2쪽)


니헤이 노리히로: 최근 직접행동의 힘을 휘두르는 것은 좌파 이상으로 우파인 것 같아요. 종군위안부 세미나를 여는 공민관에 불만 민원전화를 불이 나도록 걸어대고 시위를 벌이기도 해요. 그 결과로 행사가 여러 차례 중단됐죠. 혹은 재특회 같은 활동을 우익이 펼치고 있어요. 그러면 그전까지 가장 극단적이었던 우익이었던 활동조차도 온당한 우익이나 중도쯤에 위치하게 되죠. 이것도 일종의 시위 효과입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 그렇지만 우파든 좌파든 아무리 봐도 효과가 없는 촌스러운 활동이나 운동도 있잖아요.]  그 촌스러움은 명문대 출신에 도쿄걸즈컬렉션을 즐기는 후루이치 씨 입장에서 본 촌스러움이죠? 그러나 관계론적으로 보면 절대적인 촌스러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라면 스타일의 의미나 합리성을 내부에서 관찰했으면 좋겠어요. … 다만 촌스러움이 아무리 상태라 하더라도 그 촌스러운 상태에 있는 운동이 어떤 문맥에 따라 나왔는지, 다른 어떤 가능한 조건이 있어서 그 운동이 선택되었는지를 살펴보지 않으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어요. (99-100쪽)


가이누마 히로시: … 학문의 묘미로서 자신의 가설이나 분석이 뒤집히는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 그렇게 생각했는데 3.11 [대지진] 이후로는 분석이 뒤집히면 사람이 죽어버린다고 통렬하게 느꼈습니다. 이건 베버가 말하는 책임윤리와 비슷한 것 같아요. … 사회학을 포함해서 인문사회 계열의 논자는 그런 책임윤리가 조금 부족한 것 아닐까요. … [사회학은 약자를 발견하기] 아주 좋아하죠. 발견해서 과제를 해결한다면야 좋지만, 그저 희생양을 찾아 규탄하고 대중의 불안을 선동해 적개심과 고립감을 주고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는 신뢰를 받는 쾌감을 느끼고 끝이에요. … 머리나 손발을 움직일 마음이 없다면 그냥 틈새의 것이나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약자를 발견하고 이용해서 포괄적인 척을 하다가 종료해버리는 행동만 하니까 짜증이 나요. (278-9쪽)

Hans Joas and Wolfgang Knöbl, Social Theory, Trans. by Alex Skinn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9장 “Habermas and critical theory(하버마스와 비판이론).” 요약번역. pp.199-221.


도입 및 배경

탈콧 파슨스의 지배적 패러다임과 그것에 대한 대항으로 신공리주의, 해석적 접근, 갈등론이 등장한 이후, 사회학에서의 이론적 작업은 상당히 ‘유럽화’되어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미국 사회학이 상당히 높은 정도로 전문화됐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여러 가지 이론을 검증하거나 아니면 배타적으로 경험 연구에만 집중했다. 미국의 상황에서 사회학은 다른 인문학의 주제들과 절연하게 되었다(철학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유럽에서는 그런 분화가 심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철학적-사회학적 논의들의 연결끈을 가깝게 유지시키고 새로운 이론적 종합을 시도한 학자 중 하나이다.(199) 1981년의 주저 『의사소통행위이론』은 그러한 종합 작업의 대표 격이다. 

하버마스는 1929년에 독일에서 태어났고, 히틀러 소년단 멤버였다. 제3제국의 몰락은 그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의 작업들은, 독일 역사의 암흑기를 받아들이고(coming to terms) 좌우측의 전체주의를 방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힐 수 있다. 그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이러한 활동이 그에게 사회정치적 이슈를 다룸에 있어 철학 학제 하나로는 충분하지는 않고 다른 학제들과 충분한 접점을 유지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것의 연장으로 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에서 1950년 중반 research fellow로 활동하게 된다. (200) 

하버마스는 1971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떠난다. 이는 특히 그가 급진적 학생운동—그가 좌파 파시즘이라고 비난한—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취직한다. 이 시기에 그는 magnus opus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작업한다. (201)


하버마스의 세 가지 지적 전통 

하버마스의 사상을 형성한 배경으로 세 가지의 지적 전통을 지적할 수 있다. 

1) 맑시즘. 1950-60년대 초까지—학생운동uprising 전까지—서독 학계는 맑시즘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버마스는 맑스를 다렌도르프보다는 좀더 오픈마인드로 받아들인다. 다렌도르프와는 반대로 하버마스는 맑스의 과학적, 철학적-규범적 논의, 사회를 변화시키고 인간의 잠재능력을 활용하는 이론과 실천에 관심을 가졌다. (202) 맑스의 논의에서 철학적인 것을 삭제한다면 갈등은 언제나 넘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이는 현재의 사태를 넘어서는, 다른 실재를 상상하는 이론적 자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버마스가 맑스를 무비판적으로 읽은 것은 아니다. 

(a) 그는 스탈린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포스트)스탈린 소비에트 체제가 실패한 프로젝트임을 숨김없이 인정한다. 그런 식으로 맑스를 읽는 것을 그는 비판했고, 또한 그 기반 위에서 공산당 간부들이 내놓은 정치적 결론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b) 그러나 이것이 그가 동유럽 반체제 인사dissidents들의 맑스 해석과 완전히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맑시즘은 순수한 철학으로 읽을 수 없다. 맑시즘은 반드시 정치, 사회적 분석과 같이 다뤄져야 한다. (203) 

하버마스는 맑스의 노동가치론이 “가치의 가능한 원천으로의 기술적 생산력의 과학적 발달”을 무시한 한에서 더이상 옹호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강조한 것도 더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복지국가가 시장에 강하게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의존성은 더이상 자명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버마스는 맑시즘이 자본주의에서 사회 진보의 가공할 위력을 간과했다고 봤다. 적어도 서유럽에서 물질적으로 빈곤한 계급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맑시즘에서 보이는, 어떻게 집합행동이 일어나는지 경험적 연구가 없는 어떤 거대한 주체의 존재를 상정하는 논의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인다. 즉 그는 맑시즘에서 경험적 연구를 강조한 것이다. (204)

2) 독일적 전통에서의 해석학. 해석학은 이해Verstehen의 기술이다. 하버마스의 작업은 베버나 짐멜이 이해의 문제를 다룬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행위이론을 구성함에 있어 그는 이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하버마스의 논의 스타일은 해석학적인 특징—이전의 저자들과 텍스트들과 씨름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구성하는—으로 가득 차있다. 하버마스는 서구 역사의 철학적 문젲 전영역을 이해하려고 한 해석학적 노력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3) 시작부터 그는 서구 자유민주적 사상 지향적이었다. 이는 그의 생애적 특징에 기인한다. (206) 그는 언제나 연구의 자유라는 가치를 강하게 의식했고 민주적 제도 시스템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비판이론

하버마스에 대한 이차 문헌들은 그가 다른 중요한 지적 전통—즉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의 전통에 서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에 회의적임을 밝힌다. 그렇다면 비판이론이란 무엇인가? 비판이론은 1937년 호르크하이머가 만든, 특정한 형태의 맑시즘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비판이론의 지지자들은 서구의 정치경제사회적 위기를 맑시즘의 이론적 자원을 가지고, 하지만 ‘혁명적 주체’는 상정하지 않은 채 돌파하려고 했다. 사민당의 개혁을 지지하거나 나치즘을 지지한 독일 노동자들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탈린 공산당, 소비에트 맑시즘과도 거리를 둔다. (207) 비판이론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1940년 초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공저 『계몽의 변증법』이다. 이 철학적 서적은 극한으로 합리화(베버적 의미에서)된 세계가 결국에는 폭력적 야만성에 굴복해 버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비관적 관점을 견지한다. 

하버마스는 계몽의 변증법의 비관적 특징을 공유하도 않으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초기 저작을 잘 알지도 못했다. 하버마스가 초기 비판이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어느 정도 의식하지 않은 채 초기 비판이론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옳을 듯하다. 1960년에 와서야 하버마스는 비판이론의 핵심 인물로 인식되었다. 


언어

하버마스가 영향 받은 세 가지 지적 전통은 서로 연관이 잘 안 된다고 누군가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 의사소통의 특별한 본성’이라는 전-과학적인 직관이라는 아이디어로 뭉쳐지고 결합된다. (208) 비록 전과학적인 직관으로 파악되는 것이지만 하버마스는 인간 의사소통에 관한 자신의 설명을 명확히 하고 체계화하고자 했다. 그는 왜 합리적 논증이 논쟁 당사자들에게 특유의 압력을 행사하는지, 왜 그리고 어떻게 더 좋은 논증이 합의에 이르게 하고 행위의 조화coordination—폭력이나 시장을 통한 조화보다 더 우월한—를 이루게 하는지 설명하는 데에 굉장한 노력을 기울인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기술-도구적 합리성의 폭정을 경계하고 반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판이론과는 입장을 같이 한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비관을 공유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언어에는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할 수 있는 종합적 잠재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지적 여정 

하버마스가 이론적 종합에 이르는 길은 매우 길었다. 우선 하버마스는 첫째로 여러 연구를 통해 의사소통의 사회학적 실현가능성과 생산성을 검증하고자 한다. 

1) 1962 포닥 논문 『공론장의 구조변동』. 이것은 부르주아 시대(18-19세기)의 공론장과 그 제도를 역사사회학적으로 연구한 논문이다. 오직 공론장에서만 사람들은 그들의 관심interests을 합리적 토의에 부칠 수 있다—그들의 관심이 변할 수 있고 그리고 합의에 이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 (210) 본 논문은 정치와 사회에 대한 언어의 효과와 중요성을 탐구한 그의 첫 번째 시도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역점이 하나 있다. 그가 18-19세기의 공론장을 마치 그것이 실제로 현실상에서 실천에 부쳐진 것처럼 너무 이상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2) 1963년 에세이 모음 『이론과 실천(Theory and Practice)』. 여기서의 에세이들은 맑시즘을 다루고 있고, 하버마스는 맑시즘을 “실천적 의도를 가진 경험적 역사 철학”(Between Philosophy and Science, p.212)으로 간주한다. “그가 그 자신을 이해했던 것보다 맑스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ibid.) 이 에세이 모음집에서 하버마스의 논의가 실천praxis이라는 개념에 매우 영향받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안토니오 그람시를 비롯한 동구권의 망명 학자들은 맑스의 초기 철학적-인류학적 저작과 그 속의 실천 개념에 매달렸다. 여기서 실천이란 단순히 도구합리적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집단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예술의 세계로부터 얻어진 것이나, 혹은 창조적인 자기표현, 혹은 선good의 실현과 도리에 맞는 삶을 실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버마스 역시 1960년대 초기 이러한 개념에 깊게 몰두해 있었고, 이것은 즉 이때 언어적 분석이 그의 이론적 체계 안에서 약했고 그가 실재를 분석할 적절한 도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12)

이 에세이 집에서 그는 언어적 분석이 아닌 초기 맑스의 개념으로, 자본주의에서의 기술적 합리성(technological rationality)의 증진을 비판하고자 한다. 그는 멈추지 않는 과학과 과학-기술적 합리성의 진전이 공동체 생활의 합리적 규제에 관한 정치적인 이슈들의 토대를 침식하고, 그것을 단순히 기술-합리적 문제로 바꾼다고 보았다. 이는 그에게 즉 정치적 논쟁을 전문가들의 지배로 대체시키는 것이다. 

3) 1961년 독일 사회학계에서는 실증주의 논쟁이 있었는데, 주인공들은 포퍼(K. Popper)와 아도르노였다. 저자들이 평가하기에는 이것은 실패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아도르노는 사회학의 양적 방법으로의 강한 경향을 경계했다. 그러한 경향 역시 자연에 대한 기술적 지배에 정향된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인류의 노예화를 불러온다고 본 것이다. (213) 한편 하버마스는 이러한 극단적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원칙적으로는 아도르노가 던진 해방적 과학의 이상을 그 역시 옹호하지만 하버마스 역시 특정 목적을 위한 사회과학에서의 양적 방법 사용에는 동의한다. 이 논쟁에서 혼란스러운 점은 포퍼가 전혀 실증주의자positivists가 아님에도 실증주의자로 딱지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간과된 것은 사실 (하버마스와 포퍼 사이) 의견의 불일치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던 것이다—하버마스는 몇 년 뒤 포퍼의 과학적 이념에 가깝게 이동하게 된다. 

4)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1968) 이것이 미국 실용주의 논의를 크게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과도기적 작업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증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하버마스는 여기서 과학을 포함한 어떤 지식도 현실을 완전히 진공 상태에서 재현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모든 지식은 그 뿌리에서는 인류학적 관심interest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정신분석학과 유물론적-혁명적 사상은 억압과 지배에 대해 인류를 해방시키는, 해방적-비판적 관심에 영감을 받은 지식임이 주장된다. (214) 하버마스는 포퍼의 과학관이 다른 두 가지의 인류학에 뿌리를 둔 인식관심—의미의 맥락의 설명과 관련된 것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에 관련된 것—을 무시한다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좀 더 넓은 의미의 합리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후에 하버마스는—적어도 비판적-해방적 관심의 존재에 대한 그의 테제에 관해서는—이러한 입장으로부터 벗어난다. 어떤 특정한 학문이 혁명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린 것이다. 그는 종래의 실천 개념에 작별을 고하고 “노동과 상호작용”이라는 이분법을 받아들인다. (215) 

5) 1967년의 에세이 “Labour and Interaction: Remarks on Hegel’s ‘Jena Philosophy of Mind’”에서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버마스는 유적 존재로의 인류의 형성이 왜 ‘노동과 상호작용’이라는 두 형태의 행위 사이의 불화와 interplay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아마도 아렌트(Arendt)의 『인간의 조건』(레퍼런스를 붙이지는 않았지만)과 미드의 이론을 참조한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맑스와는 전면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다; 맑스가 성급하게 노동-상호작용 행위를 뒤섞었다는 점을 하버마스는 비판한다. 무엇보다도 인류가 생산력의 발전만으로 진보한다는 특정 맑시즘을 비판한다. 명백히 그는 노동과 상호작용을 구분하고, 상호작용적/의사소통적 행위와 도구적/혹은 도구합리적 행위를 구분한 것이다. (216) 이러한 구분은 그의 지적 생애에 있어 매우 깊은 영향을 끼친다—그는 이 구분을 지금까지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문제도 있다. 맑스의 초기 노동 개념—여기서 노동은 단순한 도구합리적 행위가 아니라 표현적 행위의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은 노동과 상호작용의 이분법에서 애매한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6) 1969년의 (재판된) 에세이 “Labour and Interaction”에서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자본주의가 그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특징짓는 근본적 구조변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테크노크라틱 이데올로기가 정당화시키는 수사(legitimizing troupe)가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버마스는 여기서 맑시즘적 생산력-생산관계의 변증법과 단절하고 다른 변증법을 상정한다: 즉 체계system과 생활세계life-world 사이의 변증법. 각각의 구분은, 노동 혹은 도구합리적 행위와 상호작용 내지는 의사소통 행위와 상응한다. (217) 

하버마스는 고전적 야경국가와 복지국가를 비교한다. 후자에 와서 국가는 단순한 상부구조적 현상이 아니게 되었다. 역시 후자에 와서 자유방임에 대한 고전적 정치경제학 이론도 그 힘을 잃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정한 교환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이데올로기를 대체했는가? 하버마스는 그것이, 대중의 충성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라 보았다. 동시에 복지국가가 정치에 부정적 이미지를 가득 채워 넣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복지정책은 기능장애dysfunction만을 다루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회 관계를 다시 합리적으로 조정할 새로운 이념과 같은 정치의 실천적 내용들은 싹 씻겨 나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즉 대중들은 그 결과로 탈정치화되고 전문가들에 의해 통치되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218) 그는 1960,70년대의 ‘technocratic spirit’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맑스 역시 비판한다. 하버마스에게 있어 계급투쟁 개념은 더이상 현재 사회에 있어 더 이상 명성을 누릴 수 없다. 복지국가에서 투쟁은 끝났거나 진정되었기 때문이다. 계급적 적대의식은 잠재적 형태로만 남는다. 하버마스는 노동과 상호작용의 이분법이, 현대 사회가 직면한 위기—기술적 문제와 실천적/정치적 문제가 뒤섞이는 것—를 분석하는 데에 맑스의 변증법보다 적합한 이론적 도구임을 역설한다. (219) 

하버마스의 이러한 에세이는 두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a) 왜 테크노크라틱 이데올로기는 1970년 중반에 쇠퇴했는가? 환경, 반핵 운동의 결과로 테크노크라틱 컨센서스는 빠르게 끝이 나 버렸다. 한편으로 복지국가가 몰락하고 새로운 자유주의 체제(대처, 레이건)이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테크노크라틱 컨센서스는 끝이 났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론과 시대 진단은 이러한 예측을 수행하지는 못 했다. 
(b) 정치적 진단보다는 추상적 이론적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하버마스의 목적합리적 행위의 하위체계(subsystems of purposive-rational action) 개념은 너무 단순하다고 지목될 수 있다. (220) 과연 우리는 모든 행위가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의 영역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하버마스는 한편 경제적 하부체계 전체가 오로지 목적합리적 행위로만 형성된다고 보았다. 파슨스의 경우에도, 그는 시장이 어느 정도는 규범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이러한 난점을 잘 알고 있었고, 후에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행위의 유형과 행위체계의 유형을 구분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나가며

후기 1960년대까지 하버마스의 작업의 발전을 추적해 왔다. 그렇다면 이제 1970-80년대 그는 어떤 방향을 택할 것이고, 또 탈콧 파슨스 이후 사회학에서 중요한 이론적 종합synthesis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게 될 것인가? 1960년 후반까지 하버마스의 영향력은 사회학에만 제한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하버마스를 서구 맑스주의자—비록 매우 혁신된 것이라도—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파슨스 이후의 갈등론, 상징적 상호작용론, 신공리주의론 등의 이론적 논의들을 맑스주의적 접근으로만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다음 장에서는 무엇이 그의 이론적 종합을 이루게 만들었는지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