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패배는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루저 컬처라 부르는 현상들이 그렇다. 이 루저 컬처의 원산지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장기 호황을 누렸던 서구 자본주의다. 히피, 로큰롤, 펑크, 비트족, 반전주의, 뉴에이지, 반권위주의, 아나키즘 등등이 그 이름이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를 파괴해가면서까지 처절하게 패배했다. 그들이 대체 무엇과 어떻게 싸워서 패배했는지는 이제 와서는 불분명하다. (…) 이들의 상당수는 멀쩡한 중산층 청년들이었다. 루저 컬처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그 상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지적이고 섬세한 스타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따라서 루저 컬처는 전도된 혹은 삐뚤어진 엘리트주의라는 혐의를 받을 만한 면도 많았다. 그러나 루저들은 자신의 패배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그들의 수동성에는 역설적인 적극성이 있었다. (…) 그리고 오늘, 우리는 여전히 패배하는 중이다. 오늘의 패배자들에게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예민한 감수성이 아니라, 일상적인 패배 속에서 무던해지고 무감각해진 감수성이 남아 있다. 어떻게든 먹여주고 살려주던 호황의 시대는 속절없이 끝났고, 루저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줄 사람들의 여유도 늘어가는 빚 속에서 사라졌다.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의 집중의 산물이고, 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 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p.20-22)


과거의 희생에는 그들이 뭔가의 거대한 이념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는 가상의 만족감이라도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고달픔은 이 모든 것이 네가 선택한 것이고 너를 위한 것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p.59)


오늘날 나의 존재를 구제해줄 거대 서사나 역사적 소명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근거 없는 존재'이고, 세계는 우리에게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거대한 막연함은 우리를 ‘잉여’라는, 피할 수 없는 시작 지점으로 인도한다. (p.76)


그렇다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 프롤레타리아는 어떤가? 이 광경은 더욱 놀랍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그 누구보다 프롤레타리아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고,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라고 할 만한 것들의 자리에는 아직도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패배자인 운동권들과 노동자 문화를 '쿨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힙스터들만이 서성이고 있다. 이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탄압이 아니라 유행이 되는 것이다. (p.107)

그런데 일베의 더 중요한 작동의 논리는 '쾌락'이다. (…) 따지고 보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의제는 대체로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빌려온 것들이다. (…) 이들에게는 촛불, 노무현, 김대중, 민주화, 광주항쟁, 좌파, 민주당, 전라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한 존재이 '깨시민'이 모두 하나의 뭉뚱그려진 위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런데도 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광주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게 된 것은 이들에게 광주가 큰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광주를 욕하면 '적'들이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 68혁명이 그랬듯이 금기를 깨는 즐거움은 혁명에서 중요한 원동력이다. 그러나 양손에 불만을 잔뜩 쥐고 나타난 새로운 세대의 곤란함은, 딱히 더 이상 깨뜨릴 만한 창문이 없다는 것이다. (p.223)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생존, 살아남는 것이다. 그냥 살아남는 게 아니라 '잘'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대에서 생존이란 그 자체가 일종의 궁극적인 목표처럼 변해버렸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도움과 우정이 아니라 경쟁과 손익계산을 통해 살아남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다. 손해와 피해에 대한 강박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우리들의 머리와 마음은 황폐하고 나약하다. 시시때때로 '멘탈 붕괴'가 일어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멘탈甲'들에 대한 찬양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가 인터넷에 남기는 독한 말들은 차라리 아무런 고통이나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기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 없는 로봇이 되는 축복을 받지 못한 우리들 대부분은 고통도, 슬픔도, 어김없이 고개를 드는 자기와 타인에 대한 연민도 모조리 겪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때문에 생존을 위한 투쟁은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남는 것은 중요하다. 지탱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순결한 희생자로 사라지는 것보다 추악하지 않은 생존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다. (p.258)


고2 때 독서감상문으로 쓴 글… 




이 책은 한윤형이라는 사람이 이곳저곳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한윤형은 83년생이고, 10대 후반에 안티조선 운동에 참가하며 이른바 '인터넷 논객'으로 이름을 알렸다. 현재는 미디어스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중이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저자가 겪거나 보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가벼운 에세이다. 물론 저자의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일상적인 주제를 사회적인 큰 문제와 엮는 글들이 많다. 2부와 3부는 좀 더 무겁고 직접적인 사회적 이야기들―'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20대 세대론, 청년실업 및 노동 문제, 20대 멘토 담론, 20대 '잉여 세대'를 위한정치는 가능할지―이 주를 이룬다. 1부는 가볍게 보통 에세이처럼 읽을만 하고, 2·3부는 현 20대 담론과 관련지어 좀 더 진중하게 읽을 가치가 있다.

대한민국은 광복 이후 전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급속 성장(정치경제적 측면에서든, 문화적 측면에서든)을 한 나라다. 1부의 글들은, 이러한 고속 성장을 한 사회의 틈바구니 속에서 각박하게 살아가는 현재 청춘들의 수기 같았다. 한국의 거의 모든 세대가 그렇겠지만, 10대-20대는 물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보아 다른 세대들과 꽤 단절적인, 외로운 세대다. 문화적으로 살펴보면 60년대 생 아래부터는 상당히 전체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인 사회 아래서 자랐고 역시 그러한 사고방식을 형성했다. 반면 70년대 생 위부터는 (사회는 여전히 전체주의적인 면이 있으나) 비교적 자유적이고 개인적인 사고를 형성하며 자랐다. 물적 조건으로 본다면 차이는 좀 더 심하다. 60년대 생은 한국 사회에서 유례없는 경제 호황기를 누렸고 부동산을 바탕으로 어느정도 부를 축적했지만 80년대 이후의 세대는 이른바 '88만원 세대'로 불리며 한국 사회에서 유례없는 취업난을 겪고 있다. 어떻게 보면 세대간의 소통이 잘 안되는 우리 사회는 당연한 것이다. 

다만 저자는 지금의 세대론의 한계도 지적한다. 한윤형이 보기에 '88만 원 세대론'을 수용한 자들은 원래 88만 원만 버는 청년들이 아니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 왔는데도 88만 원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젊은이들'이었다. 요컨대 88만원 세대를 필두로 한 현재의 세대론이 간과하고 있는 계급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에서 미는 'G세대' 같은 괴상한 세대론은 담론 자체가 다분히 작위적인 것이고. 현 20대에 대한 저자, 20대 당사자 본인의 통찰과, 기존 세대론(88만원 세대 등)의 한계를 지적하는 저자의 사유가 돋보이는 책이다. 



아래는 인용.

"내가 남들보다 조금 다른 것들을 읽고, 조금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조금 다른 것들을 쓴다는 이유로 가지게 되는 자의식은 처연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사회로부터 받은 소외감을 같은 질량의 우월 의식으로 바꾸어놓기 대문이다. 그런 우월 의식을 지니게 될수록 소외감은 더 커지고 그렇게 생긴 소외감은 다시 우월 의식으로 변한다. (중략) 가령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완벽한 화장을 하고 킬힐을 신은 채 출근하는 여성을 경멸할 것이다. '나는 다르다'는 자의식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사회적인 요구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 대문이다. 하지만 화장한 그녀들이 훨씬 긴박한 삶을 살고 있고, 역시 실존적인 고민을 하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려 하지 않는다."
p.20-21


에밀 뒤르켐, «개인주의와 지성인»(Individualism and the Intellectuals) 요약

에밀 뒤르켐의 «개인주의와 지성인»(박영신 옮김, 현상과인식 3권 4호, 5-20페이지 수록. 이하 괄호의 숫자는 박영신 번역본의 페이지 수를 뜻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뒤르켐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뜻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개인주의는 허버트 스펜서나 경제학자들의 엄격한 공리주의(strict utilitarianism)나 공리주의적 이기주의(egoism)과 구별된다. 뒤르켐이 말하는 개인주의는 칸트와 루소의 개인주의에 가깝다(5-7). “칸트와 룻소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유일한 도덕적 행위 양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8)
    뒤르켐은 개인주의가 종교로 간주될 수 있다는 주장을 피력한다. 왜냐하면 “이 [개인주의의] 이상은 공리적인 목표의 수준을 너무도 크게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이상은 완전히 종교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8)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종교적이라는 것은, 개인주의가 비합리적이기에 배격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뒤르켐은 개인주의가 프랑스의 제도와 프랑스인들의 관습, 문화에 “스며 들어” 있고, 그들의 “삶 전체와 한데 어우러지고 있”(9)고, 사람들의 본성을 “뛰어 넘는 높은 이상을”(10) 제시해 준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종교라 칭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어떤 지적 및 도덕적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응집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13) “개인주의적 윤리가 이 종교[인간성의 종교]의 합리적 표현이다.”(14)
    그렇기 때문에 뒤르켐은 “개인주의적 신조를 위협하는 듯이 보이는 모든 것에” “완고한 저항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6). 한 개인의 불가침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안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사회의 결합력”이 “손상”되고, 이는 “사회적 분해”를 몰고 온다(16). 이러한 반대에 있어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지식인들이 인식론적 특권을 가지고 있어서 때문은 아니다. 지식인의 인권에 대한 옹호는 그들이 “전문적인 직업 활동 때문에 인권 문제를 더욱 마음에 크게 새겨두고 있는 까닭이다.” 지식인의 직업 특성상 대중들에 흔들리지 않으며 인권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13). 
    그렇지만 뒤르켐은 역시 개인주의에 대한 오도된 이해를 지적한다. 개인주의는 고립된 개인의 방종 상태를 지향하는 이념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합리적 권위에 의식적으로 반대해 사회를 쓸데없는 무지의 소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어떤 지성주의를 내보이고 있(it is quite true that individualism implies a certain intellectualism)”으며, 이는 “결코 무능력에게 어떠한 권리를 바치는 것은 아니다.”(12) 그리고 뒤르켐은 18세기의 개인주의 운동이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따위의 정치적 자유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보았다는 점을 지적한다(18). 뒤르켐은 선조들이 쟁취한 일련의 정치적 자유들을 수단으로 하여, 개인주의를 더욱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18-20). 
    


Gary Burton & Keith Jarrett

2017. 1. 30. 08:56



요새 듣는 음반. Gary Burton & Keith Jarrett.


키스 재럿은 다 알듯이 재즈 피아니스트다. 개리 버튼은 비브라포니스트. 


Como en Vietnam을 제외하면 모두 재럿이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그리고 색소폰 연주는 Jarrett의 것이라고. 

요약 및 발췌 번역 (오역 지적 환영) 로버트 머튼. "고전 이론의 활용과 오용"
Robert K. Merton. (1967) “The Uses and Abuses of Classical Theory.” On Social Structure and Science.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3-33. 

(23)
인문학(humanities)와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의 차이점: 전자에서는 고전들(classics)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면 뒤에서는 아니다. 좀 더 정밀한 과학(the more exact sciences)에서는 과거의 발견과 지식들이 현재의 지식들에 누적되고 통합된다. 과학자들은 논문과 실험실에서 대부분 최근의 학문적 업적들을 사용하는데 그것들은 과거의 발견들을 발전시킨 것이다. 

(24-25)
반면 위와 다르게 인문학에서는, 각각의 시·희곡·소설·에세이·역사연구 고전들이 후대 인문학자들의 직접적 경험의 일부를 이루기 마련이다. 즉 직접적 고전 공부는 물리, 생명과학자들에게는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인문학자들에게는 큰 부분을 차지한다. 
사회학의 founding father인 베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다. “과학에서는 우리 모두, 우리가 성취한 지식이 10, 20, 50년 안에 낡게 될 것을 안다. 이것이 과학의 운명이다; 그것이 바로 과학적 작업의 의미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들이 성취한 과학적 지식은 과학적 작업에 바쳐지게 되는 것이다.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도 이는 동일하다. 모든 과학적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능가되고(be surpassed) 낡은 것이 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과학을 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적 업적들은 분명 ‘만족감(gratification)’으로 남을 수 있는데, 그것의 예술적 질 때문이거나 혹은 그것이 중요한 수련의 도구(means of training)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과학적으로는 능가된다(surpassed)—그리고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게 한다—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공통된 숙명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후대의 이들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능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과학을 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이 과정은 영원히 계속된다.” 

그런데 사회학자들은 자연·생명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고전적 저작에 관한 태도에 대해 이중적인 압력(cross-pressure)을 느끼기 마련이다. 베버의 신념(commitment)을 쉽게 받아들이진 않는다. 

이른바 인용연구(citation studies)에 따르면 유명 저널에 실린 자연과학 연구의 경우 60-70퍼센트의 인용은 5년 이내의 연구에 관한 것이다. 인문학(미학, 역사)은 10-20퍼센트 정도만. 사회학, 심리학은 30-50퍼센트. 
사회학은 어떤가? 사회학은 물리과학(physical sciences)의 지향과 실천(practice)을 수입했다. 그래서 사회학은 역사적으로 근시안적이고(historically short-sighted), 지역적이고(provincial), 효과적이다(effective). 그런데 사회학은 역시 인문학과 친족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사회학자로서, 고전 저작물들을 직접 공부하지 않기가, 고전사회학(pre-sociology 포함)의 직접적 성과들을 사회학자의 필수적인 경험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기가 어렵다. 
사회학적 문해력을 가진 모든 현대 사회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founding father들과 직접적이고 반복된 조우(encounter)를 해왔다. 콩트, 맑스, 스펜서, 뒤르켐, 베버, 짐멜, 파레토, 섬너, 쿨리, 베블런 등. 

(26)
사회학자들이 그들의 선조들의 저작에 대해 친화성을 갖는 데에는 대단한 미스테리가 없다. 뛰어난 사회학자 혈통(lineage)의 최근 멤버들이 만들어낸 사회학 이론의 대부분에는 직접성이 있으며(immediacy), 최근의 이론은 어느 정도 선조들이 발견해낸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문제들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 Erudition vs. Originality (박식함 vs. 독창성) 

그런데 Merton은 사상사에 관한 사회학의 퇴행적인 경향(degenerative tendencies)에 대해 지적. 
첫째로 고전 저작의 거의 모든 statement에 대해 성서에 주해를 붙이듯이 무비판적으로 숭배하는 태도. Whitehead가 이 장에 “그들의 founder를 잊어버리기 주저하는 과학은 잊혀진다”고 제문을 쓴 것이 바로 이 관행/태도에 대한 것이다. 
둘째는 진부/평범하게 만들기(banalization).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엉성한 상을 가지고 그걸 계속 표현한다면 진리는 낡고 의문스러운 진부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27)
과학자들은 선조들의 업적(work)을 알아야 한다. 그 전에 있어왔던 것 위에 작업을 쌓고 또 마땅히 신뢰받아야 할 과학적 지식에 신뢰를 보내기 위해. 과거의 저작에 대해 무지하다면 과학자는 이미 밝혀진 것을 밝히는데 힘을 쏟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이 있다. (박식함에 대한 우려의 입장. 즉 originality를 중시하는 입장.) 

(28)
클로드 베르나르 Claude Bernard 는 이렇게 말했다. “유용한 과학적 저작을 너무 깊게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must not be carried too far). 그렇지 않는다면 과학적 독창성과 발명이 억눌려질 것이다. 벌레가 갉아먹은 이론이나 관찰을, 유용한 탐구의 수단 없이 파내기만 한다면 대체 뭣하겠는가.”

+ 비코(Vico), 스펜서, 프로이트의 사례. 

(29)
사회학의 founding father 중 하나인 콩트의 사례. “principle of cerebral hygiene.” 그의 주제와 조금이나마 관련이 있는 것들조차 읽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깨끗히 했다. 그는 오직 고대, 근대의 위대한 시poet만 읽었다. 콩트는 완벽하게 (그리고 터무니없게) 역사(history)와 사회학의 계통학(systematics of sociology) 사이의 구분을 지어버렸다. 과학사가로서 그는 상대적으로 방대한 고전읽기를 통해 과학의 발달을 재구성하려 했고, 한편 사회학이론 실증주의체계의 창시자로서 즉시 앞선 사상들을 무시했다, 심지어 그의 한때 스승이었던 생시몽조차. 그의 독창성을 성취하기 위해.

박식 vs. 독창성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다. 

그럼에도 위대한 과학자들은 독창적 탐구와 박식함을 결합할 수 있었다. 연구 주제에 관련된 최근의 연구들만 읽거나, 아니면 그들의 탐구가 머리속에 떠오른 직후 좀 외딴(remote) 소스들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그럼에도 콩트처럼 개인을 antecedent ideas로부터 해방시키려는 extreme한 노력은, (1) 과거의 적절한 이론들을 무시해버리는 식이나 (2) 이론의 역사 / 계통학(systematics)을 인공적으로 구분하는 식으로 악화될 수 있다. 

(30-32)

- 고전 이론의 기능 (the functions of classical theory)

자연과학자나 생물학자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나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는 데에 자신을 빠지게(steep oneself in)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사회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사회학자로서 베버 뒤르켐 짐멜을 읽어야 할 풍부한 이유가 있다. 때때로 그런 이유로 홉스, 루소, 콩도르세(Condorcet), 생시몽을 읽을 때도 있다.

자연과학이나 생물학은 예전 지식을 최근 지식에 통합하려는 시도가 전반적으로 퍽 성공적이었는데, 그러한 통합에 의한 망각(obliteration by incorporation)은 사회학에서는 여전히 드물다. 이전의 되찾아지지 못한 정보들(previously unretrieved information)은 여전히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채 남아있다. 과거 사회학 이론의 현재적 쓰임은, 고전 이론의 인용으로써 제공받는 여러 기능들이 증거가 되듯이, 여전히 복합적이다(complex).

1) 인용 타입: 단순히 고전에 코멘트를 다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권위를 빌려오는 것도 아니다. 대신 이 종류의 인용은, 우리의 고유한 생각과 선조들의 생각 사이의 친화의 순간들을 대표한다.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사회학자는 스스로 기가 죽는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의 독립적 탐구가 알고보니까 미처 보지 못한 재발견(unwitting rediscovery)이고, 그리고, 그 discovery가 담긴 고전에 쓰인 언어가 너무 잘 써져있고 설득력있고 crisp 해서 그의 발견을 고작 second-best뿐에 못미치게 해버릴 때. 앞선 발견의 아름다움에 기쁨을 느끼는 한편, 미리 선점당했다는 비참함이 있다는 양가적인 상태에서 사회학자는 고전의 아이디어를 인용한다.

2) 인용 타입. 앞의 것과 뉘앙스만 다르지만, 어떤 연구자, 그의 자신만의 아이디어에 가득 찬 연구자가 고전에서 그가 이미 생각해왔던 걸 발견할 때의 인용. 그 고전의 아이디어는 오직 독립적으로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마음이 맞는 연구자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다.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3) 인용 타입. 사회학자는 고전을 읽으며 자신의 formulation에 대해 성찰한다. 고전을 읽은 후 뒤따르는 성찰은 정신을 바짝 들게 한다(sobering). 

4) 인용 타입. 지적 작업의 모델을 제시한다. 베버나 뒤르켐 같은 날카롭고 예리한 사회학적 minds에 노출되는 것은 우리가, 좋은 사회학적 문제를 식별하는 데의 취향과 판단기준을 세울 수 있게 돕는다. 

마지막으로 전적으로 읽을 가치가 있는 고전 사회학 책이나 논문은 역시 주기적으로 읽을 가치가 있다. (10살 때 읽은 고전과 30살 때 읽은 고전이 다르다.)

고전을 다시 읽는 것의 잠재적으로 창의적인 기능을 체크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그냥 예전에 고전에 써 놓은 노트나 여백 메모를 몇 년 뒤 또 읽는 게 있다. 만약 달라진 게 없다면 우리가 지적 정체를 겪고 있는 것이거나, 사실 그 고전이 명성보다는 얕은 지적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님 둘 다이거나. 







이 논문의 백미는 30-32쪽이다. 
꼭 사회학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문학 고전을 읽는 사람도 참고할 만한 텍스트다. 


Vocabs

  • run-of-the-mill: ordinary, with no special or interesting features
  • commemoration
  • instructive: giving useful information
  • exasperating: If you describe someone or something as exasperating, you mean that you feel angry or frustrated by them or by what they do.
  • raise hackle: making someone or something angry
  • path-breaking: Pioneering; innovative:
  • ad infinitum: If something happens ad infinitum, it is repeated again and again in the same way.
  • qua: ~의 자격으로 (라틴어) 
  • acquaintance with: -지식
  • indelible: 지울 수 없는
  • erudition: great academic knowledge
  • affinity: 친밀감 
  • shroud: 가리다, 감추다 
  • lineage: 혈통 
  • degenerative: 퇴행성의 
  • reverence: 숭배
  • exegesis: (성서의) 주해, 해설 
  • illustrious: 걸출한, 저명한 
  • banalization: 진부하게 만들다
  • dubious: 의심스러운 미심쩍은 
  • sponge upon: ~에 기생하다 
  • deplorably: 한탄스럽게도, 비통하게도 
  • revolt: 반란, 봉기, 저항
  • clarion call: 분명한 메시지(요청)
  • stifle: 억누르다, 억압하다 
  • exhume: 파내다, 발굴하다 
  • versed: 정통한
  • recourse: 의지 
  • hampered: 방해되다 
  • inept: 솜씨 없는, 서투른
  • emancipate: 해방시키다 
  • pertinent: Something that is pertinent is relevant to a particular subject.
  • deteriorate: 나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