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이 다케시 『무명의 말들』 다 읽었다. 후지이 씨의 칼럼은 한겨레에서 연재 중일 때 간간히 챙겨 보았는데 이렇게 묶여 나온 형태로 다시 읽으니 느낌이 새롭다. 칼럼집을 챙겨 읽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한번 생각해 봤다. 이번 책처럼 비교적 동시대의 것이거나 아니면 10-15년 전의 일들.

동시대 작가의 칼럼집을 읽어본 적이 별로 없는데, 최근이라고 할 것도 아니지만 2014년에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어크로스)를 읽긴 했었다. 2014년…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후지이 씨를 처음 뵈었을 때는 대학 새내기 때 했던 세미나에서 저자 간담회 식으로 초청해 그 분의 박사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을 읽고 질의 및 토론을 했던 때. (이러면 내가 특정이 되려나?) 오래 전은 아니지만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법대로"와 같은 칼럼을 읽고 약간의 전율을 느꼈었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 다시 읽었는데도 잘 쓴 글이라 그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연유는 모르지만 일본으로 훌쩍 떠나신 듯한데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일단 다시 읽고 싶은 칼럼들

* "법대로" 

* '균형 잡힌' 역사교육이란?
* 선거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 "안보입니다"

* 명복을 빌지 마라

* 흐린 날엔

* 폐를 끼치며 살기 (“우리는 문제 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이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타협의 출발이 되는지 몸소 느껴왔다. 우리는 계속 문제제기를 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운동이라 믿고 행동한다. URL: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8901.html#csidxf92661fbb80964eb9fc990df14f964b

 

기타등등. 

 

"물에 빠진 개는 쳐라"는 생각보다 너무 비장한 어투여서 읽다가 헉, 했다. 

앤 페디먼, 『서재 결혼 시키기』, 정영목 옮김, 지호, 2001.

추천 받아서 며칠 동안 틈틈이 읽은 책. 원제는 Ex Libris로, 한국어판 책날개에 이렇게 풀이가 되어 있다: “Ex Libris는 책 소유자의 이름이나 문장(紋章)을 넣어 책표지 안쪽에 붙이는 장서표라는 뜻의 라틴어로, 그 책의 소장자를 지칭할 때 쓰기도 한다.” 책 얘기를 하는 책을 읽은지 얼마 만인지… 저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구절에서 괜스레 반갑기도 했고 또 저자의 내공에 깜짝 놀라거나 지레 질려버린 적도 때때로 있었다. 구체적인 문장들을 빌려 와 얘기를 하는 게 더 낫겠다. 재미있었던 에세이 별로 감상을 써 본다. 

(1) 책의 결혼

한국어판 제목의 모티프가 된 결정적인 에세이 같다. 제목 현지화(번역)에 별 불만은 없다. 이 책은 일차적으로 장서(藏書)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이라기보다는 저자 앤 페디먼의 지극히 사적이지만 책벌레라면 다들 공감할 법한 잡기들이 물건으로서의 책이라는 주제를 구심점으로 느슨히 묶여 있는 수필집이니까. Ex Libris (장서표)라는 제목도 에세이들을 모두 포괄하기에는 아쉬운 듯하다. 

    “마침내 우리가 장서 합병이라는 좀더 깊은 수준의 친밀함”(19)…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사회학에서 흔히 결혼은 친밀한 관계(intimate relationships)로 정의된다. 세간을 합치고 생활을 같이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친밀성을 요구하는 것이 책을 합치는 것이라는 재밌는 표현. “조지는 나와 결혼해 살면서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거의 없는데 그 때만은 달랐다고 했다”(21). 여기서 그 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구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하던 때.

    “우리의 흠 하나 없는 새로운 체계도 서로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는 엔트로피와 남편의 힘에 의해 누그러졌다”(25). 책을 질서 있게 정리하면 무질서하게 책을 정리하는 사람에게도 이득이 된다고 설득했음에도… 귀여웠던 부분. 

    “우리는 하드백이 페이퍼백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단 책 여백에 써 놓은 글이 있을 때는 예외로 하기로 했다”(24). 법적 소유권과 관계 없이, 책이 내 것이 되는 때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책이 내 책장에 배치될 때. 내 책임을 식별할 표지가 없음에도 책은 책장의 다른 책들과 함께 내 개인사의 고유한 맥락을 부여받는 동시에 그것을 구성한다(이것은 뒤에 실린 에세이 “집 없는 책”에서 더욱 깊게 다뤄지는 내용이기도 하다). 둘째, 책에 메모를 하거나 밑줄을 칠 때. 에세이의 마지막에서, 페디먼은 십대 때 읽었던 스타인벡의 책을 다시 읽다가 남편의 메모를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의 책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발견하게 되고 다음처럼 말한다. “이렇게 나의 책과 그의 책은 우리 책이 되었다. 우리는 진정으로 결혼을 한 것이다”(26). 


(2) 책벌레 이야기

이 에세이를 읽게 되면 저자 앤 페디먼이 보통 책벌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은 이 책의 영어 부제는 Confessions of a Common Reader인데, 커먼 리더라고? 아무리 봐도 앤 페디머는 커먼 리더가 아니다. 페디먼 집은 “매주 일요일 오후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G.E. 칼리지 볼”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모여앉”아 퀴즈를 맞추고 매튜 아널드 시구를 던져 놓고 “인용구 알아맞추기를 즐겨하”던 집안(33). 부제의 ‘커먼 리더’는 오히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젠체하고 싶지 않아 하는 상류층의 허영 내지는 자만의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에세이서부터 독자는 알게 된다. 

“네 목록에 있는 단어들을 한번 소리내서 읽어 봐! 우리가 잃어버린 말들은 내포적이고, 우리가 얻은 말들은 지시적이지. 나는 시에서 모뎀이란 말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어”(37-38). 이 에세이에서 가장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말. 원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내포적이라는 것은 inclusive, 지시적이라는 말은 ostensible일까?). 아무튼 예시를 들기 어렵지만 위 문장은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잃어버린 한국어 단어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월리들은 모두 자기가 아는 단어를 어디서 보았는지 정확히 기억해 냈다. … 내가 monophysite의 정의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 그 단어를 처음 본 것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였는데, …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 책을 읽었어. 봄이었기 때문에 밀 로드의 나무마다 눈이 트고 있었지.” 나는 그가 monophysite라는 단어를 처음 만나던 영광스러운 날을 기억할 때처럼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정확하게 옛 애인의 얼굴, 옷, 향수를 기억하는 남자는 이제껏 본 것이 없다”(37). 읽고 나서 잠시 생각에 깊게 잠겨 좀 길게 인용해 보았다. 우선,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한국어 단어—학적인 개념 말고 일반적 단어들—를 누군가가 나에게 떠올려 보라고 할 때 나는 선뜻 이야기를 꺼낼 것이 많지는 않다. 단어를 예시로 든다면 잘 모르겠지만. (대신 몇몇 영단어는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다. 이를테면 à la라는 단어는 2017년 여름에 세미나 했던 사회학 이론 교과서에서 알게 된 단어. 랩탑을 옆에 끼고 열심히 단어를 찾아 읽었다.) 유감스럽게도 사전에서 찾아볼 만한 단어를 사용하는 한국어 저자들은 드문 것 같다. 있어도 우리가 잘 읽지 않거나. 
    그건 그렇고 책벌레들이라면 몇몇 책들에 대해 그 책을 언제 읽었는지 순간들을 종종 정확히 기억해 내는 것 같다. 어떤 단어를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그 순간을 지목해내는 게 더 변태 같고 덕후 같나? 생각해 보면 위 인용구에서 ‘걸어가는 길에’ 기번의 그 책을 읽었다는 게 더 변태 같기는 한데 어쨌든(걸어 가면서 책 읽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 한다. 나도 종종 걸어 가면서 책을 읽기는 하지만…). 


(3) 소네트를 멸시하지 말라

“내가 자칭 시인 노릇을 하던 짧은 기간 동안 왜 나는 거의 전적으로 소네트에만 매달렸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그 형식이 나의 기질과 나의 육체적 자아 양쪽을 정당화해주는 형식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나는 몸집이 작았고 강박감에 시달렸다. 나는 서사시나 자유시에는 어울리지 않았다”(58). 

별로 할 말은 없는 에세이이긴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에세이 같고,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취미로 소네트를 쓰는 윌리엄 쿤슬러를 “동지애”(?)를 느낀다고 은근히 놀리며 (책벌레라면 대부분 공감할) 문학에 대한 학생 때 자신의 인정욕구를 은근슬쩍 전시하는 동시에 마지막에는 밀턴의 「나의 실명에 대해서 On his blindness」로. 소네트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주제를 종횡무진 옮겨가는데… 암튼 결국 페디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네트의 위로하는 힘이다. 집에 셰익스피어 소네트 집이 있어도 읽다 덮은 사람이지만 이 글을 재밌게 읽은 건 역시 잘 쓴 글이어서…


(4) 내 조상의 성 

“나는 열네 살 때 아버지의 서재 (…) 책꽂이에서 책등이 안쪽으로 들어가 꽂혀 있는 책을 발견했다. 당연히 나는 그 책을 향해 다가갔다. 그 책은 [영국 매춘부들의 생활을 다룬] <파니 힐>이었다. (…) 부모의 책장은 십대가 성애 문학과 만날 수 있는 아주 좋은 장소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173-74). 



** “컴퓨터가 아닌 뜨거운 금속으로 찍은 활자”(203) 

매슈 레이놀즈, 『번역』,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2017.

옥스포드 VSI 중 하나. 번역학… 을 다룬다기보다는 그냥 번역 실무? 일반인들이 번역에 대해 흔히 생각하는 것들을 다룸. 책은 번역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는 것부터가 어렵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재밌는 부분만 잠시 옮겨 본다. 

“번역이 문학에 위협이 된다는 말이 가끔 들린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지구화된 세계에서 우리는 번역문으로 읽는 데 익숙해질 것이고, 저자들은 자기 저술이 더 쉽게 번역될 수 있도록 쓰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문체 면에서 번역문은 결코 원문만큼 생생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 결과로 언어적·상상적 가능성이 점차 말라갈 것이다. 
    분명 번역문은 대개 원문보다 단조롭다. 때로는 번역자가 그리 훌륭한 문장가가 아니고, 때로는 번역의 언어상 난제가 너무 버겁다. 그러나 번역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새로운 복잡성과 힘을 기르는 작품들로 이루어진 번역문학—‘translaterature’라고 불러야 할까?—도 있다.” (196쪽)

-> 돌아보건대 나도 나름대로 독서가라고 생각했지만 이문구나 김소진의 소설을 읽는 것은 버겁다. 잘 쓰이지 않는 한국어, 특히 고유어 표현이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번역문의 표현의 가능성? 섣불리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어휘의 측면에서 번역문은 다소 제한적인 표현을 쓰게 되는 것 같다. 아쉽긴 한데… 뭐 어쩔 수 없다. 난 한국어 화자고 번역 문학을 읽으며 자랐으니까… (근데 사실 표현의 폭 면에서 따지자면 90년대 이후 작가들이 이전 작가들보다 덜 이채로운 표현을 활용하는 것 같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다. 잘썼다 못썼다 하는 얘기가 아니라…) 엘리트가 썼다고 느껴질 만한 한국어 문장을 읽고 싶다. 

저자는 문장에 서명을 남길 수 있지만 번역가는 그렇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그렇지만 기업 보고서는 번역 메모리와, 어쩌면 다른 컴퓨터화된 자료들과 협업하는 인간이 번역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번역자는 일부는 인간이고 일부는 기계인 사이보그 번역자인 셈이다. 요즘 전문 번역가들은 거의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작업한다.”(170)

리처드 번스타인,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18.

 

전체 170페이지 정도고 판형도 작아 읽기에 부담이 없는 책. 

앞의 악의 평범성이나 권리를 위한 권리에 대한 장들은 관련 논의에 대해 약간의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크게 새롭지 않을 수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아렌트의 시온주의 비판 장. 팔레스타인 역사를 잘 모르지만… (일란 파페,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읽긴 했는데 거의 다 까먹었다. 수업 때문에 급하게 읽은 것이라. 흑흑) 아랍-유대인 평의회를 수립하는 것을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아렌트가 제시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아래에 인용한 아렌트의 통찰—유대인들이 비록 건국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물리적 자기방어에만 몰입해 다른 모든 관심과 활동은 잠식당한 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논평—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이것은 아렌트의 행위/활동 이론과도 관련이 있다. “의견의 형성은 고립되어 있는 고독한 개인이 수행하는 사적 활동이 아니다. 관점을 달리하는 의견들과 진정으로 직면할 때 … 에만 의견은 검증될 수 있고 확대될 수 있다.”(110) 정치는 특정한 공적 공간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은 매우 현재적인 맥락에서 쓰여졌다. 아렌트의 사상이 이해하기 쉽게 다이제스트 식으로 요약되는 동시에 그것은 도널드 트럼프 현상이나 난민 현상 같은 최근의 문제들과 같이 다뤄진다. 일반 독자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인 듯…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아렌트가 “정치와 공연예술의 유사성에 대해” 강조한 부분. (132쪽) “공연예술가—무용가, 연극배우, 음악가 등—는 자신의 기교를 보여줄 관객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마치 행위자가 그 앞에 나설 수 있는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연예술가나 행위자는 모두 자신의 ‘작품’을 위해 공적으로 조직된 공간을 필요로 하며, 행위의 수행 그 자체를 위해 타인에게 의존한다.”(132쪽, 아렌트의 글, 『과거와 미래사이 Between Past and Future』 국역본 210쪽) 제프리 알렉산더 생각도 난다. 

 

또한 아렌트는 칸트의 취미판단 개념을 인용하여 정치적 사유에 본질적인 판단이 무엇인지 생각을 전개한다. “판단의 과정은 내가 최종적으로 합의에 도달해야 할 사람들과의 예상되는 의사소통 속에 늘 우선적으로 놓여 있다. 이러한 잠재적 합의에서 판단은 그의 특수한 타당성을 도출한다. … 다른 한편으로, 이 확장된 사유방식은, 판단처럼 자신의 개별적 한계를 초월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엄격한 고립과 고독 속에서 기능할 수 없다. 그것은 “그 관점을 대신해서” 사유해야 하고 그 관점을 고려해야 하며 또한 그 없이는 결코 작동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타인의 현존을 필요로 한다.”(146쪽. 아렌트의 글. 국역본 『과거와 미래사이』 294-295쪽) 

 

 

 

충성에 근거한 반대: 아렌트의 시온주의 비판 

 

“시온주의자들이 행한 선언에서 아렌트가 경각심을 느꼈던 부분은 그들이 점차로 아랍 문제, 즉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다수민이 유대인이 아니라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가능한 가장 강력한 언어로 표현하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65). 

 

“그리고 비록 유대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그 결과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의 독특한 가능성과 독특한 성취가 파괴되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존재하게 될 나라는 시온주의자와 비시온주의자 등 모든 유대인의 세계라는 꿈과는 아주 다른 무엇이 될 것이다. “승리한” 유대인들은 전적으로 적대적인 아랍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 어떤 때보다 더 위협받는 국경 내에 격리된 채, 물리적 자기방어에만 몰입해 다른 모든 관심과 활동은 잠식당한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유대인 문화의 성장은 모든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다. 사회적 실험은 비실제적 사치들로 여겨져 버려질 것이다. 정치적 사유는 군사전략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경제적 발전은 전적으로 전쟁의 필요로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 민족의 운명이 될 것이다.”(72-73쪽. 아렌트의 글. 원본은 The Jewish Writings, pp. 396-97, 강조는 본인.)

 

“그녀[아렌트]는 이것[지역 아랍-유대평의회들에 기초한 연방제 국가 제안]이 유대인 조국이라는 이상을 구현하는 “현실적” 방법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75)

 

인종주의와 분리 

 

“아렌트는 공립학교에 대한 연방정부의 통합교육 강요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간의 조건』에서 상세히 논한 범주들을 사용해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그리고 사적인 것을 예리하게 구분했다. 그녀는 사회적 차별을 정치적 수단으로 불법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가령 백인 학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을 백인 아동들만 있는 학교에 보내길 원할 때 정부는 그것을 방해할 어떠한 권리도 없다는 것이다.”(80)

 

“아렌트는 전 생애에 걸쳐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비난했다. [e.g. 「폭력론」]”(84), 그러나 “아렌트는 유럽적 맥락에서 발생한 이데올로기적 체제로서 인종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지만, 미국 흑인들의 경험에 대한 그런 통찰의 적실성을 올바로 평가하는 데 실패했다”(84-85). 

 

“아렌트는 시민권이 차별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88). 

 

악의 평범성 

 

아렌트는 “톱니바퀴 이론”, 즉 아이히만이 거대한 관료주의 기제의 한 톱니바퀴였다는 생각도 분명히 거부했다. 자신은 단지 한 체제의 톱니이거나 바퀴 중 하나라는 주장에 대응해 “그러면 왜 당신은 톱니바퀴가 되어 이런 방식으로 계속 기능했는가?”라고 법과 도덕의 관점에서 되묻는 것은 언제나 적절하다. 아렌트의 가장 중요한 지적은 악을 신화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01쪽) 

Crossley, Nick. 2016. “Social Networks and Relational Sociology.” Pp. 167-84 in Handbook of Contemporary Sociological Theory, edited by S. Abrutyn. Springer. [사회 연결망과 관계 사회학]

요약
사회학은 전체론(holism)과 개인주의(individualism) 사이 부침을 겪었다. 전체론에는 파슨스나 기능주의적 마르크스주의(e.g. 알튀세르)가 포함되는데 이런 접근들은 개인 행위자들의 존재를 지우거나, 기능적 설명과 인과적 설명을 혼동하거나, 사회적 현상들과는 달리 존재하는 어떤 실체를 상정하는 범주의 오류를 범하는 문제가 있다(168-69). 이런 전체론에 대한 반발로 사회 체계나 사회적 사실은 행위자들에 의해 생성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여기서 행위자들은 인간 뿐만이 아닌 조직적 행위자(corporate actors)까지 포함한다. 이런 접근을 옹호하는 이들은 보통 존재론적으로 사회라는 것은 없다는 존재론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채택한다. 베버 식으로 관념 같은 발현적 속성들이 개인의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거나 콜만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행위에서 어떻게 규범이 솟아오르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방법론적 개인주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169-70).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결함은 개인의 존재를 사회에 앞서서 추상(抽象)하고, 미리 상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사회적 활동 능력이 있는 개인이 미리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대신 프래그머티즘적, 발생론적으로 어떻게 사회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개인이 과정 속에서 바깥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성장하는지를 묘사한다(170). 물론 몇몇 방법론적 개인주의자들은 게임 이론이나 사회연결망분석(SNA)을 활용해 어떻게 상호작용이 발현적 속성을 만들어 내는지를 묘사하는데 이것은 사실 관계적 사회학의 이상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171). 
    문제는 어떻게 관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느냐인데, 인간의 행위는 직접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반면 관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력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끼치는 효과를 가지고 중력을 검증할 수 있듯이 관계의 효과를 검증할 수 있다면 관계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관계적 사회학은 네트워크, 상호작용, 그리고 연결(ties)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검증하고자 한다. 인간 행위자 i와 j는 서로 영향을 끼치고 변화한다는 점에서 과정적인(processual) 상호작용 관계에 있다. 대부분의 상호작용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반복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에는 기대(expectation)이나 그동안의 역사들이 퇴적되어 있다. 따라서 상호작용은 많은 경우 예측 가능한 패턴을 낳는다. 한편 상호작용을 형성하는 다른 요소들로는 관습(conventions)과 정체성(identities)도 있는데 이는 예측하기 어려운 만남에 대처하기 쉬운 역할을 제공할 수 있다(171-73). 
    크로슬리는 상호작용 중에서 재화(goods)와 자원(resources)가 오간다고 주장한다. 상호작용 시 얻어지는 물질적, 감정적 재화는 연결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make ties intelligible),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계속하기 위한 이유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편 상호작용 과정에서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로부터 기대할 재화가 없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순응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상호의존, 권력과 불균형의 기원이 될 수 있다(173). 양자관계(dyad) 이외에도 삼자관계(triad)가 중요한데, 제3자가 기존 양자관계에서 제공 가능하던 재화를 제공함으로써 의존성을 줄일 수도 있으며, 제3의 버텍스는 정보와 혁신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173). 
    관계를 분석하는 주된 방법론으로는 사회연결망분석이 있다. 인접행렬(adjency matrix)을 만들어서 행위자가 행위자와 맺는 관계를 0과 1로 표현할 수 있다(혹은 가중치를 둘 수도 있고 비대칭행렬로 undirected relation을 표현할 수 있다; 175). 행렬에서 다음과 같은 식 “(현재 edges의 수)/(가능한 edges의 수)”로 네트워크의 밀도(density)를 계산할 수 있으며, 분석 소프트웨어로 소집단(subgroups)을 찾을 수 있다. 소집단을 분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응집된 소집단 말고도, 동등한 위치(equivalent position)을 점하고 있는 노드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또 노드들의 특성과 정체성(attributes and identities)을 고려할 수 있다(177). 집단 차원 말고도 노드는 중심성(centrality)이라는 특성을 가질 수 있다. 이 아이디어에서 네트워크의 평균적인 중심 정도를 계산할 수도 있다. 네트워크의 최단 거리인 측지거리(geodesic distances) 역시 유용하다(177-78). 
    관계 사회학이 던져 주는 방법론적 함의는 구조와 행위자에 대한 것, 그리고 거시와 미시에 대한 것이다(178-81). 크로슬리는 구조와 행위자의 이분법을 완전히 기각하지는 않고, 도리어 어떤 문화—관계로부터 형성되는—가 ‘상대적으로’ 행위를 촉진하고 행위에 제약을 가하는지 경험적으로 탐구할 것을 제안한다(179). 거시-미시의 관해서도 우리는 의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조직적 행위자 내의 의사 결정 행위를 식별할 수 있다(180). 또한 유유상종(homophily)의 원리는 관계 사회학을 거시 수준에서 탐색할 단초를 제공한다(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