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 데이즈
벌써 여름이다. 최고기온이 30도... 에어컨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이 곡도 생각난다.
68년이면 벌써 51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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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나의 편?
수업 글쓰기 과제가 하나 있었다. 록의 역사 수업인데 밥 딜런에 대해 쓰고자 했다. 그냥 쓰면 심심하니까 딜런의 곡을 그것들의 커버와 같이 비교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찾아보니까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도 딜런을 커버했더라. "Just Like a Woman"은 밥 딜런의 유명한 곡이니까 알고 있었는데 "Forever Young"도 딜런의 곡인지는 몰랐다. 아무튼, 뭐라도 쓰려고 로드 스튜어트의 곡을 좀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다른 그의 히트 곡 "Young Turks"도 듣게 되었다. 영턱스 클럽 할 때 그 영 턱스(튀르크?)다.
Young Turks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이다. 뽕짝 느낌도 나고... 로드 스튜어트의 친근하면서도 남성적이고 거친 보컬이 좋다.
https://www.youtube.com/watch?v=zQ41hqlV0Kk
그런데 듣다 보니 아래 가사가 좀... 그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심금을 울리는 것 같았다. 가사는 전반적으로 가출 청소년들 얘기긴 한데...
Young hearts be free tonight. Time is on your side,
Don't let them put you down, don't let 'em push you around,
Don't let 'em ever change your point of view.
시간은 나의 편일까?
할 말은 많은데 블로그에 쓰지는 않고 회한으로 넘기겠다.
롤링 스톤즈는 그렇다고 하겠지.
https://www.youtube.com/watch?v=y_3oxD5dD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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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논객시대』, 반비, 2014.
책을 빌린 이유는 그냥 갑자기 논객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서였다. 최근에 수업 시간에서 청와대 국민청원 이야기를 하다가 08년도 안단테의 아고라 이명박 탄핵 국민청원이 생각났고 아 그때는 논객이라는 게 있었다는 사실이 퍼뜩 생각났다. 내 생각에 논객이라는 말이 공론장에 마지막으로 등장했을 때는 2015년의 이른바 ‘진보 논객 데이트 폭력’ 사건이 아니었을까. 사건들의 사실관계가 어떻든 간에 아무튼 그 뒤로 논객이라든지 청년 필자라든지 하는 말들은 쏙 들어갔던 것 같다. 청년 필자라는 말을 또 꺼냈는데… 그만 하자. 할 말도 없고 있더라도 해야 할 것 같지도 않다.
아래부터는 지극히 개인적인 맥락에서의 감상을 아무 거나 쓰겠다.
1. “논객시대의 바깥은 없다”(30쪽). 그러니까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로, 민주화에서 정권교체로 이어졌던 정치적 역동성은 이제 과열된 엔진처럼 공회전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에너지가 새로운 시대의 장막을 열어 젖히지 못한다는 것일 테다.
강준만과 진중권, 유시민, 그리고 김규항(?)을 다루는 장에서 노정태는 이런 역사의 흐름을 명시적이지는 않으나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안티조선 운동에서 시작해 노무현으로 맺은 정치적 결실로 드러난 논객들의 성취감 내지는 도취감. 노무현 탄핵 정국으로 인한 분당, 김선일 사건, 디워나 황우석 논쟁 등의 사건을 거쳤지만 조국 근대화(?) 혹은 사회 개혁(개량) 혹은 진보(?)에 대한 기획은 삐걱이나마 진전될 수 있다고 느꼈던 분위기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선은 그런 기대감을 무위로 돌리기 충분했고, 노무현의 자살은 이후의 많은 정치적 논쟁들에 상당한 경로 의존성의 제약을 부여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논객시대와는 분명히 다른 조건에 서 있지만 논객시대의 바깥에 있는, 어떤 새로운 시대로 진입해 새로운 기획을 논해야 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라는 뜻인 것 같다.
나도 내가 뭔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왜냐면 내가 정치적 의식이 있었을 때는 2012년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런 뭐… 공론장에 늦게 참여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나이를 감안하면 늦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현재까지의 한국 정치와 사회의 논쟁을 강력히 지배하고 있는 90년대 이후의 일련의 사건들(특히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을 정점으로 하는)을 ‘논객’ 인물들 별로 조명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 (영감을 많이 받았다기보다는 정보를 많이 전달받는informative 독서였던 것 같다.)
다음에는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을 전부 읽어야겠다.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 유시민은 이렇게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싸움, 논객시대를 만들어낸 갈등의 축은, 지금도 흔들리고만 있을 뿐 꺾이지는 않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문제의식과 대결 방식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125쪽).
“하지만 진중권이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최소한의 진보는 대단히 허약한 뿌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 진중권이라는 ‘진보 논객’은 결국, 본인이 비판했던 다른 논객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판단과 선택을 해야만 했다. … 그의 초창기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가장 올바르고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려 했던 진중권을 잃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촛불시위 이후 스타가 된 진중권만을 아는 이들은, ‘비판적 지지’ 논쟁을 하며 게시판에서 밤을 새우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네티즌의 속을 긁어댔던 진중권을 알지 못할 것이다”(96-97쪽).
우울하고나…
2. 재미있는 것은 김규항을 제외하고 책에서 다뤄진 논객들이 모두 유학파거나 외국 체류 경험이 길었다는 것이다. 강준만은 미국 위스콘신에서 박사를 받았고, 진중권은 독일에서 유학을 하다가 IMF 때문에 돌아왔다. 유시민 역시 독일에서 유학을. 우석훈 역시 파리에서 박사를 했다. 박노자는 박노자고, 홍세화도 빠리의 홍세화. 고종석 역시 빠리의 고종석이고… 김어준은 세계여행을 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넘겨 짚자면 적어도 진중권과 유시민, 고종석은 한국에 일찍 옴으로써 뜻하지 않게 논객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만약에 진중권이 박사 학위를 독일에서 얻었더라면 그의 삶의 궤적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약간 더 넘겨 짚어서 추론을 해 보자면 그들이 한국에 와서 우연히 논객 일을 하게 되었다기보다는 그들이 한국을 벗어나서 살 수 없음이 명백해졌기 때문에 한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참여의 가장 정교하고 품이 많이 드는 활동인 소셜 커멘터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서 고종석의 글을 잠시 인용해 보자.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겉멋에 들려 파리 사람인 양 살았지만, 내 알량한 허영심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온 것은 서울이었음을. 나는 파리에 살면서도 뿌리를 서울에 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파리에 떠 있는 서울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곧 내가 지르는 비명이었다. 몇 달을 버텨내지 못하고 나는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김대중 씨가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었다.”(고종석, 『도시의 기억』, 215쪽. 노정태, 『논객시대』, 282쪽에서 재인용.)
이렇게 보면 박노자의 “급진성의 결말이 냉소주의?”(143쪽)라는 오묘한 역설이 이해될 법도 하다. “전 지구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안에 대해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박노자는, 개별 사안으로 인해 갈등하는 이에게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라’라는 조언을 차선책으로 제시하기도 하는 사람이다.”(145쪽) 노정태는 이것을 그의 불교적 지향에서 찾기도 하지만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어쩔 수 없는 박노자의 이방인성에서 찾고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가 강요되어 한국에 입국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인데 유학을 가거나 외국에서 오래 체류한 사람들이 느끼는 어쩔 수 없는 그들의 ‘한국인성’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구미 선진국과 한국 사이의 (있다고 가정되는) 수준의 차이과 관련해, 김어준에 대한 노정태의 글은 그 주제에 대한 독립적인 텍스트로 읽히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개인주의라는 구미의 ‘선진 의식’을 설파하고자 하는 개인주의자로서의 김어준과, ‘세계와 맞짱(?)’ 뜨기 위해 디워와 황우석을 옹호하는 선동가로서의 김어준의 모습은 사실 같은 동기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이런 맥락에서 식민지성… 탈식민주의… 그런 걸 얘기하는 것인가… 모르겠다 일단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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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규, 『번역가 되는 법』, 유유, 2018.
김택규, 『번역가 되는 법』, 유유, 2018.
심심해서 알라딘 웹서핑을 하다가 이런 책이 있는 걸 발견했다. 저번에 『어린이책 읽는 법』으로 유유 출판사 땅콩문고(맞나?) 시리즈를 접한 적이 있는데 가볍게 읽기도 좋고 실용적 정보 얻기 좋겠다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렸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단숨에 읽었다.
우선 위로가 된 부분은 내가 당장 번역자가 될 것으로 지금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또 내 한국어 문장 솜씨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번역가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결코 외국어 실력이 아니라, 외국어의 간섭과 명확히 거리를 둘 수 있는 확고한 모국어 감각”이라고 하는 점(30쪽). 그리고 저자 주변에 있는 번역가 분들 중 이중언어 구사자는 없다는 것. 비록 모국어는 감옥이지만 익숙한 감옥이라도 하나 있는 게 어디야. 어정쩡하게 이중언어를 구사하면 기약 없이 자꾸만 이감하는 미결수의 느낌이겠지. 이런 정신 승리를 한다. 그래도 내가 성실하게 노력한다면 내가 속한 언어 공동체에 무언가 기여는 할 수 있겠다는 느낌에 기분은 좋고. (나는 정말로 번역가들을 존경하고, 무한한 경의를 보낸다.)
본문부터, 책의 앞 부분 30쪽 정도는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잘못된 통념에 대한 간략한 경계와 번역의 의의 내지는 윤리(로렌스 베누티)를 소개하는 내용. 그 뒤에 저자는 번역가가 되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번역서는 어떻게 내는지 하는 실용적인 정보들을 다루는데 어렴풋이 번역가라는 직역을 꿈꾸는 이들이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되겠지 싶었다. 많이들 읽어 보시길…
독서 중 기대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이것.
“저는 오랜 기간 독서를 하며 지식을 쌓아 왔습니다. 시를 쓰고 발제를 하고 에세이를 끼적이며 저만의 문체를 단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한 주체로서 굴곡진 시대를 살아오며 온갖 희로애락의 경험을 맛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번역의 창조를 통해 순간순간 그 축적된 에너지를 발현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번역을 하며] 자유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138쪽)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번역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어학 지식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콘텍스트와 견주고 행간을 음미할 줄 아는 독해 능력이라는 점(48-50쪽). 이런 능력은 단기간의 목적이 있는 계획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니까. 한 사람이 그동안 의식적인 공부로든 목적 없이 소일하는 독서로든 쌓고 축적해 온 도저한 경험이 비로소 그럴듯한 결실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서의 번역.
글을 옮긴다는 행위의 어떤 아주 중요한 측면을 이해하는 방식을 얻어간 것 같아 즐거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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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와 역사학자』. 부르디외·샤르티에 대담집
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이상길, 배세진 옮김. 킹콩북. 2019.
저번 달에 단숨에 읽은 책이지만 정리를 해 두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우선 이 대담에서 부르디외가 강조하는 말들의 많은 부분은 강연문과 대담이 있는 다른 책인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에 좀 더 정리되어 있고 풍부한 형태로 실려 있다. 만약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를 읽은 독자라면 이번 대담집을 부담 없이, 부르디외의 생각들—사회학자의 역할이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사이 대립 등 사회학의 잘못된 이분법에 대한 의견—을 다시 한번 환기하는 겸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 대담집의 제목이 왜 이렇게 붙여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을 주로 4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경험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101-6쪽, 엘리아스와 부르디외의 작업을 비교하는 부분.
“저는 (…) 더구나 거대한 경향적 법칙에 대해서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자주 권고합니다. 베버가 말하는 합리화 과정도 마찬가지고, 엘리아스가 어느 정도 발전시킨, 국가에 의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화 과정도 예외는 아니죠. 거기에는 실제로 목적론의 위험이 있으며, 단순 묘사를 설명으로 치환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저는 푸코의 ‘감금’ 개념 역시 염두에 두고 있는데요, 이런 개념들이 저를 좀 불편하게 만듭니다.”(부르디외, 102-3쪽)
사실 대담의 후반부로 갈수록 부르디외가 제기했던 사회학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언명 대신, 역사학자인 로제 샤르티에가 콕콕 찌르는 질문들에 맞춘 부르디외의 그의 경험 연구 경력에 기반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부르디외의 코멘트들이 어떤 연구에서 구체화된 것인지는 역자들이 각주에서 잘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굉장히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을 듯하다.
아래의 인용문에 관해서는 『초대』에서도 비슷한 말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부르디외의 이런 말을 들으면 주저 앉아서 울고 싶어진다.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유, 주체, 인간 등등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 사람들이 사회적 행위자를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가둔다는 점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결정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경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라는 환상입니다.”(49쪽)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그는 사회학의 객관성과 그 가능성에 대해 정말로 심지가 굳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런 활동이 저를 때때로 괴롭게 합니다. 사회학자로서 제 존재의 정당성에 대해 자문하고 과학적 작업의 기능에 관해 고민에 빠지는 것이죠. 이를테면, ‘사회세계에 관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말로 좋은 일인가? 비밀이 없는 사회세계는 정말로 살 만한 곳인가?’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문화가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노동이 무엇인지 등에 관해 우리가 좀 더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인식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수많은 종류의 고통과 비참이 언제나 마르크스주의의 거대한 탄식 아래서 잊히는 대신에, 급격히 개선되고 사라지거나 적어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56쪽)
대담자 로제 샤르티에는 이것이 유토피아에 가깝지 않냐는 말을 한다. 유토피아주의라는 딱지에 대해 부르디외는 딱히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과학 장의 규칙이 잘 작동한다면 과학은 “잠정적 진실”을 생산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바로 이 작고 보잘것없고 당연한 확신 때문에 정말로 우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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