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Love is on the Way (John Mayer)
Good Love is on the Way는 여러 버전이 있지만 오늘 우연히 듣게 된 버전은 The Village Session이라는 EP에 있는 어쿠스틱 버전이다. 예전에는 "Where the Light is" 라이브 앨범의 트리오 버전을 자주 들었었다. 그런데 어쿠스틱 버전도 상당히 좋은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존 메이어의 면모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1집에서 보여줬던 퓨전 느낌이 가미된 팝 가수로서의 존이 있고 다른 하나로는 특히 Continuum 앨범이나 Where the Light is 라이브 앨범에서 보이는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의 존이 있다. 아니면 사실 포크/컨트리 느낌이 짙은 Born and Raised 시절이나 Paradise Valley 앨범도 좋아했는데 요새는 거의 안 듣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존 메이어는 상당히 좋아했던 기타리스트 중 하나이다. 2001년에 릴리즈된 Room for Squares는 아직 들어도 세련된 인상을 준다. 2014년인가 2013년인가 삼각지 근처 모 수제버거 가게--건물이 백 년이 넘었다고 하고 목조 건물이라고 한다--에서 **와 함께 햄버거를 먹었던 적이 있었는데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존 메이어의 초기 곡이 하나 나왔고 그때 느꼈었던 것 같다. 아 그냥 블루스 잘 하는 기타 천재만은 아니었구나... 그런데 **은 잘 지내려나. (연락을 하면 좋겠지만 연락을 하기 조금 주저되는 일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연락이 주저되니까 오히려 연락하는 게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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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zer 새 앨범 (커버 앨범)
https://www.youtube.com/watch?v=JSKpsKMTxA8
유튜브 추천 영상에서 떠서 이것 봤는데 진짜 엄청나게 웃겼다. 지하철에서 본 건데 보고 바로 풉 웃었다. 스웨터 송 riff 톤도 좀 엉망으로 어설프게 치고 있고 키보드 소리도 뜬금없는데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그런데 추천 영상 보니까 Weezer의 Take on Me 커버가 있더라? 엥 신곡 나왔나? Africa 말고 또 커버를 했단 말이야? 해서 찾아봤다.
https://en.m.wikipedia.org/wiki/Weezer_(Teal_Album)
그래서 찾아보니까 올해 새 앨범이 나왔었더라. 모두 커버 송으로 채워진. 커버한 노래들은 다 유명한 것들이다.
솔직히 별로 맘에 드는 앨범도 아니고 좋아할 만한 앨범도 아니다. 독창성이 없어서... 특히 Paranoid 커버는 좀 화가 났다.
그래도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위저 커버 꽤 괜찮은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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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er (2016). “Integrating and Disintegrating Dynamics in Human Societies.”
Turner. 2016. “Integrating and Disintegrating Dynamics in Human Societies.” In Abrutyn ed. Handbook of Contemporary Sociological Theory. Springer. ch. 2.
요약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분석적 개념을 세우기 위해, 터너는 통합(integration)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통합이란 양식(modes) 혹은 메커니즘인데 그것으로서 사회적 단위나 사회적 행위가 사회적 조직의 응집적인 패턴 속으로 조정되는(coordinated) 것이다. 그리고 통합은 이후에 있을 필연적인 분열(disintegration)을 잠재적으로 촉진시키거나 막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19). 통합은 각 수준의 사회 조직들 사이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각 수준 속에서 일어나기도 한다(20).
터너는 거시, 미시, 중범위 수준에서의 통합을 개괄한다. 통합은 기본적으로 구조적인 메커니즘이어서 문화적 메커니즘은 이의 일부라고 할 수 있지만, 몇몇 중요한 문화적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거시적 수준에서 통합의 구조적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21): (1) 분할화(segmentation), (2) 분화(differentiation), (3)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ies), (4) 분리(segregation), (5) 지배 및 계층화(domination and stratification), and (6) 교차점(intersections).
미시적인 사회 조직에서는 감정(emotions)을 통해 중범위와 거시 수준 구조, 그리고 문화에 대한 헌신(commitments) 내지는 통합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감정에는 두 가지의 편향(biases)이 존재하는데, 가까움(proximal) 편향과 먼 거리(distal) 편향이 있다. 이것은 즉 긍정적 감정은 굉장히 미시적인 수준의 만남에서 공유되는 경향이 있고, 또 부정적 감정은 방어 기제 등의 영향으로 보다 먼 중범위나 거시, 문화 구조에 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향들은 여러 수준 간의 사회적 단위들의 통합을 어렵게 만든다(29). 터너는 기대의 충족과 조치(sanctions; either positive or negative)가 잘 이루어지는 몇몇 조건 하에서 가까움/먼 거리 편향이 상쇄될 수 있는 상황을 이후 다룬다(30-31).
한번 거시 수준의 제도적 영역이 만들어지고 나면, 거시 영역은 중범위 수준의 조직들에게 이데올로기, 신념 체계 등의 규범을 부과하고 중범위 수준의 조직이 갖는 그러한 규범에 따라 미시적인 기대(expectation)가 생기며 이에 따라 개인들의 행위, 만남이 이루어진다. 만약 거시 영역의 규범 등이 아래 수준의 조직들에 잘 배태되지(embedded) 못하거나, 분리(segregation)이 강하게 일어나는 환경에서는 미시 수준에서 기대가 행위자들에게 모호하게 다가올 수 있고, 기대가 잘 정의되더라도 그것은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식으로 비통합(분열)을 촉진할 수 있다(34-35).
그러나 “구조적, 문화적 장(fields)”에서 전개되는 사회 조직에 대해, ‘중범위 수준’의 포커스를 특별하게 맞출 수 있다. 이들은 거시 수준의 계층화 체계와 메타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신제도주의와 조직군 생태학은 ‘장’과 ‘니치(niche; 적소)’라는 개념을 활용해 중범위 수준의 통합에 대한 논의를 제공하였다(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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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ed (2013). “Power: Relational, Discursive, and Performative Dimensions.”
Reed, Isaac Ariail. 2013. “Power: Relational, Discursive, and Performative Dimensions.” Sociological Theory 31(3): 193-218.
권력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할 때, 다음의 전형적인 세 개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1) 관계적(relational) 개념; (2) 담론적 개념(discursive concept); (3) 수행적 개념(performative concept). (1) 관계적 개념은 사회적 자본과 지지 및 자원의 교환, 핵심적 행위자들의 위치를 강조한다. 행위의 결과로 의사결정이 바뀌는 때의 전반적인 사회 관계의 구조, 그 구조를 점한 행위자들을 연구하는 것이 관계적 개념 접근이라고 할 수 있고, 네트워크 분석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2) 담론적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식과 이득(perception and advantage)”의 교차 지점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 한 사람이 굉장히 ‘프레이밍’에 능해 행위의 결과(권력의 작용)을 바꾸어놓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개념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자면 어떤 행위자들의 특정 행동이 그들이 속해 있는 담화의 결과로서 생산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3) 수행적 개념에서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실재를 생성”하고 결과가 나온 과정 자체를 결정짓는 것이다(193-4).
그런데 글에서 설명된 전형적인 권력 개념들에는 이론적 정당화가 결여되어 있다. 저자는 권력을 “개념”이 아닌, 다양한 경험적 현실에 달려 있는 “차원(dimension)”으로 개념화하여 ‘인식론적 정당화’를 제공하고자 한다.
권력에 대한 이론적 논쟁들 우선 권력에 대한 개념화와 이론적 논쟁의 역사를 간단히 짚을 필요가 있다. (1) 베버는 권력을 누군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기회로 정의했고, 로버트 달 역시 이런 정의를 따랐다. 하지만 1950년대 탈콧 파슨스는 권력에 대한 급진적인 재정의를 내놓는데, 그것은 즉 권력이 사회가 기능하는 데에 있어 마치 화폐와 같은 일반화된 매개체(medium)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슨스에 의하면 권력을 얻고 잃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2) 기든스와 룩스(Lukes)는 파슨스의 개념화를 비판한다. 여기서 룩스는 특히 달, 파슨스의 “다원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는데, 그것이 권력의 한 가지 차원만을 다룬다는 이유에서다. 룩스의 권력 개념화는 어떻게 지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는지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람스적-마르크스적이다. (3)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말고도, 베버주의적 비판이 있었는데, 특히 역사사회학에서는 권력의 장(arena)으로서의 국가에 집중한다. 이런 맥락에서, 일종의 조직적 네트워크로서 권력을 개념화하고 권력의 여러 사회적 원천들을 밝혀낸 마이클 만의 주장이 중요해진다. (4) ‘권력의 원천’의 변종으로 ‘장(field) 분석’이 있다. (5) 보다 급진적인 관점으로 권력을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닌 확산되고(diffuse) 익명적인 것으로 보는 푸코의 관점도 있다(194-7).
권력을 둘러싼 논쟁의 세 가지 축 저자는 권력을 둘러싼 논쟁의 축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1) 권력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capacity; power to)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지배(domination; power over)로 볼 것인지. (2) 권력의 원천(sources of social power)에는 어떤 것이 있고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중요한 것은 이 두 번째 축 논쟁이 첫 번째 축과 직교(orthogonal)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권력의 원천들은 ‘능력으로서의 권력’과 ‘지배로서의 권력’ 양쪽 모두와 유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스티븐 룩스가 말한 권력의 “차원.” (198-9)
룩스의 권력 차원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권력 개념이 “인과(cause)”의 개념과 매우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마르스크의 권력 논의는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특정한 인식론적 관점을 빼놓고서는 이해되기 어렵다. 따라서 저자는 권력의 세 차원을 인식론(인과에 대한 특정한 관점)과 결부지어서 유형화하고자 한다: (1) 관계적-실재론적(relational-realist); (2) 담론적-해석학적(discursive-hermeneutic); (3) 수행적-프래그머틱(performative-pragmatist).
(1) 관계적-실재론적(relational-realist). 여기서 권력은 사회적 행위자들이 장 혹은 연결망에서 점유하는 위치와 관련되어 이해된다. 권력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서의 행위자들이 구조 또는 다른 행위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실재론적인 인식이 드러난다. 이런 개념 하의 경험 연구는, 개인이나 집단이 언제 어떻게 역사적·사회적 변화를 추동하고 그것의 사회적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될 수 있다(199-200).
(2) 담론적-해석학적(discursive-hermeneutic). 여기서 권력 연구는 어떤 메커니즘을 분석한다기 보다는 다양한 사회적 행위들의 집합이 어떤 익명적이고 규약적인 담론을 만들고 효과를 내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권력은 인과 분석이 아닌 연구자에 의해 해석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따라서 관계적-실재론적 접근과 달리 담론은 본질적으로 전체론(holistic)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전적인 예시로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연구가 있다(200-1).
(3) 수행적-프래그머틱(performative-pragmatist). 프래그머티즘적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은 위의 두 가지 권력의 개념과는 다른데, 저자는 이를 우선 오스틴 등의 화행 이론(speech act theory)에 기대 설명한다. 진수식에서 배의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은 발화 행위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름을 붙이거나 위협하는 발화행위처럼 권력이 사회적 행위를 통해 수행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202). 몇몇 사건적 행위는 이전의 과거들이 부여한 구속력과 관성적 루틴을 벗어나 새로운 힘을 얻는다는 미드와 요아스의 프래그머티즘적 사회 행위 해석은 권력에 대한 프래그머틱한 인과 관계를 보여준다(201-3).
이러한 유형화는 임시적인 것이고, 경험 연구에 있어 위 세 가지의 개념들은 공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필요는 없다(203). 개념에 대한 적용 예시는 프랑스 대혁명과 바스티유 감옥 사건에 대해 짤막히 다뤄진다(203-6).
저자는 프래그머티즘적으로 이해된 권력을 담론적, 혹은 관계적 권력과는 명확히 분리시킬 것을 제안하는데, 왜냐하면 수행적 권력은 기존의 사회적 규약이나 구조적 배열 상태를 뛰어넘어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적 행위가 역사적으로 언제, 어떤 정도로 있었는지에 대한 경험 연구는 그동안 많지 않았고, 저자는 이후 경험 연구에 있어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흔한 경우, 오랜 시간 동안의 “미시적인” 수행적 권력의 집적은 담론적 혹은 관계적 권력에서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과정이 잘 일어나도록 하는 제도적 조건은 무엇인가(207)? 둘째. 많은 경우, 거시적 행위는 관계적이고 담론적인 권력의 단순한 표현이다. 반면에 몇몇 상황에서 거시적-수행적 권력이 중요할 때가 있다. 이런 두 가지 상황을 대비시켜 차이를 부각하는 것은 경험 연구에서 중요하다(208).
더 나아가 저자는 권력의 차원과 원천을 분리시킬 것을 제안한다. 권력의 원천에 대한 경험적 연구는, 역사적으로 한 권력의 원천이 다른 원천들보다 더 독립적으로 작동할 때가 있는지, 그 원천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등이 있는데, 이런 원천들을 연구하면서 권력의 서로 다른 차원들을 혼동하거나 뒤섞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특히 문화적 영역이 원천인 권력(cultural power)과 담론적 권력(discursive)를 구별하는 것을 예시로 든다(209-10). 이를테면 관계적 차원에서 문화적 원천의 권력을 다룬다면 우리는 어떤 문화적 엘리트들이 경제적, 정치적 장의 엘리트들과 상호작용하는지를 연구 질문으로 던질 수 있다. 혹은, 다른 원천의 권력들을 문화적 차원에서(즉, 담론적 차원에서) 연구할 수 있는데 이는 정치·경제 등의 장에서 어떤 담론적 프레임워크가 형성되었는지를 다루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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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양승훈, 오월의봄, 2019)
#1.
책 내용과 크게 유기적 연관은 없지만 우선 내 경험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시작을. 내가 중학생 때 진학 관련 체험 행사로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舊 북공고, 서태지가 다녔던 그 학교)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전반적으로는 특성화고(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어떤 걸 하는지 알기 위해서 당시 담임 선생님이 기획했던 행사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교실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가 끝에는 고등학교 교장이 학생 유치를 위해 잠시 동영상과 같이 홍보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북공고가 이제 쇄신하여 이름도 바꾸었고 주목받는 신진 산업인 해양플랜트 특성화 고등학교로 방향을 정하기로 했다, 운운. 나는 플랜트라 하면 게임 플랜트 vs. 좀비밖에 몰랐었고, 그리고 이것은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해양플랜트가 뭔지에 대한 설명도 뒤따라왔다. 들으면서 음 이런 산업도 있구나. 그때는 신문도 안 보고 그랬으니까 뭐 누군가는 바다에서 원유 시추하는 그런 기계를 만들어야 하겠지 그런데 왜 이름이 플랜트일까 심는다고 해서 플랜트인가… 하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 이 고등학교는 해양플랜트 전문 마이스터고등학교로 지정된다.
이번에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양승훈, 오월의봄, 2019)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해양플랜트’라는 단어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해양플랜트 산업은 책의 전반적 내용을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2008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선박 수주가 감소하고 한국의 조선업 기업들은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으로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해양플랜트 수주를 시도했다(168-9쪽).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우선 아주 미시적으로는 현장 노동자들이 그동안 축적해온 지식이 어느 정도 쓸모없어지게 되는 문제를 낳았고(145-6쪽), 그 이외에도 생산관리, 엔지니어-현장의 관계 문제, 그리고 세계 경제의 구조 변동과 긴밀하게 엮여 있는 비정규직·하청 문제와 유럽 업체들과의 기술력 격차(3부 참고)까지 조선소 안과 밖의 맥락을 모두 아우르게 되는 복잡한 문제를 낳게 된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조선업의 위기에 대해서는 자주 듣고는 했지만, 이상하게 플랜트에 대해서는 듣거나 신문에서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읽고 나니, 그저 신문 헤드라인으로만 접했던 조선소 위기에 대해 이런 역사가 있었구나 하고 이제야. 그리고 중학생 때의 잊었던 기억이 소환되며, 사실 친구들 중에 도시과학기술고 간 친구는 없지만, 그때 학생들에게는 생소한 해양플랜트산업의 미래를 홍보했던 그 학교 교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2.
책의 프롤로그를 읽고 조금은 반가웠다. 저자 양승훈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는데, 대학원 다니는 중에 우석훈의 『조직의 재발견』을 읽으며 전통적인 사회과학에서는 잘 다루지 않지만 “기업의 이런저런 ‘실무’를 담당하는 사무직”과 “자본주의의 주요 배역 중 하나인 기업”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8쪽).(그리고 또 조주은의 『현대 가족 이야기』를 읽으며 산업 도시 가족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고 했는데, 조주은의 같은 책은 아니지만 『기획된 가족』을 읽으며 중산층 가족들의 생존 전략이랄지 그런 ‘실제적인’, 꼼꼼한 인터뷰와 민속지로 드러날 수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 관심이 생겼던 사람으로서도 반가웠다.) 나는 정치학도 문화인류학도 전공하지 않았지만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아닌 이상 비슷한가 보다.(경제학도 그런가?) 어쨌든 적어도 학부 수준에서 가르쳐지는 사회학은 기업이나 산업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다. 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고 조직, 산업 얘기를 꼭 사회학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급되어야 할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인상은 있었다. 조직사회학이나 복지사회학 수업이 갈증을 좀 채워주기는 했는데… 현대 사회의 주요 행위자인 ‘기업’의 행태와 영향을 이해할 수 있는 테마를 다루는 수업은 별로 없었고 그리고 사실 주변에 정치경제학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도 좌파 이론 같은 거나 공부하고 그랬다.(불평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산업의 흥망성쇠를 세계적 맥락과 한국 내부의 특수했던 역사적 맥락과 함께 포괄적으로 다루고 그에 덧붙여 기업 내부의 조직 문화와 숙련의 문제, 산업 도시의 가족들의 생활세계 등의 미시적인 측면까지 조망한 이 책은 참 반가웠고 도움이 많이 됐다. 아쉬운 점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인사이트가 참 많은 책이었다. 트위터에서 약간 화제가 되어 읽었는데 읽기 참 잘한 것 같다.
#3.
아쉬운 점. 저자 분도 자주 지적받았겠지 싶지만 사실 책에서 ‘가족’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지는 않다. 가족 이야기는 1부 2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그런데 95쪽에서 107쪽까지의 절 ‘직영과 외주: 외주 도입의 계보’는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될 듯하게 조선소의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다룬다. 이는 2부 2장 193쪽 이후 ‘벼랑으로 내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부분과 내용상의 연속이 있다. 아쉬운 것은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가 “배제와 포섭을 전제로 한 프로젝트”인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중공업 가족들이 어떻게 “하청 노동자들을 배제”했을까 그 구체적 과정에 대한 내용의 부족이다(113쪽). 단순히 젊은 노동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이 거제에 뿌리내린 삶보다는 보다 유동적인 삶을 선호한다는 묘사로만은 부족해 보인다. 숙련 없이 하청의 신분으로 거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존의 중산층 가족을 전제로 짜여진 거제의 생활양식과 도시 인프라에 어떻게 적응하거나 불화할까? 결혼은 어떻고? 등등의 의문이 남는다. 물론 이것에 대해 말하려면 분량 상으로는 책 하나가 더 필요할 것이고 거제 뿐만이 아닌 다른 도시의, 또 다른 산업의 청년 노동자들에 대한 비교도 필요할 것이다. 사실 연구자 한 사람의 역량으로 모두 다루기는 부족한, 거대한 주제긴 하다. 거제를 비롯해 울산 등 도시의 청년·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더 많은 관심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4.
책에서 다뤄지는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재교육, 성장의 문제. “하지만 이제는 배움과 성장의 양식이 달라졌다. 산업 보국을 위해 뛰었던 작업장 엔지니어들의 방식이 ‘현장 중심’ 기풍과 이른바 ‘쟁이 근성’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우수한 랩실 엔지니어들은 오픈소스판에서 뛰노는 해커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 일을 해내려고 한다”(152쪽; 이러한 맥락에서 해커 문화도 다뤄진다). 엔지니어들이 꾸준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적 뒷받침과 문화의 변화가 필요할까? 조선업의 문제는 단순히 구세대의 학습 문화와 신세대의 학습 문화가 충돌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리적 문제, 서울-지방의 격차까지 포괄한다(153-5쪽). 뿐만 아니라 IT 산업은 ‘현장’이 필요하지 않은데(160쪽) 제조업 분야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점도 있다.
이런 설명을 읽어 보고 의문 두 가지.
(1) 조선소 이외 산업—특히 제조업—에서는 엔지니어의 교육을 어떻게 도모할까? “사실 젊은 엔지니어들은 자비를 들여서라도 외부 세미나나 밋업 등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154쪽). 다른 산업에서라고 해봤자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질문은 아니고, 내가 너무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라 그저 궁금하다. 자기들끼리 깃헙(github) 같은 플랫폼이나 세미나 등의 오프라인 미팅을 통해 지식을 공유하고 네트워크를 쌓는 IT 분야의 문화는 익숙하다. 그런데 그런 문화의 전형이 IT 산업에 국한되어 있으니 그것은 IT 쪽에만 특유한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좀 있게 되는 것 같은데… 다른 제조업 부문에서는 어떨지 궁금하다는 지극히 순수한 궁금증.
(2) 앞의 것과 연결되는 의문? 지금은 안 하지만 중학생 때 프로그래밍도 배우며 서울 지역에서 이른바 ‘코딩’하고 ‘개발’한다는 동년배 친구들(90년대 후반생)과 짧게나마 교류했던 적이 있었다. 신기했던 것은 다들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로든 연결이 되어 있었고 스타트업 창업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이 바빠도 많은 이들은 자기가 짜 놓은 코드도 종종 공유하고(내가 중고등학생 때는 github이 대중화가 안 되어 있어서 알아서 페북 그룹이나 개인 웹사이트에 올려 놓았던 기억) 뭐 그랬다. 그러다가 Seoul Bus 같은 앱 만들면 언론에도 나와서 대박 치고… 뭐 그런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중고등학생 나이대 청소년들이 (물질적 보수 없이) 직접 기술을 배우고 커뮤니티도 이루고 직접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만한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참 별난 것이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코딩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것도 아니다. 이 원동력은 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새삼스레 궁금해진다.
이런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Kevin F. Steinmetz, Hacked: A Radical Approach to Hacker Culture and Crime. https://www.amazon.com/Hacked-Radical-Approach-Alternative-Criminology/dp/1479869716
젊은 엔지니어들의 이런 문화는 생산직들과의 감정적인 마찰로도 이어진다. 엔지니어링 센터, 즉 설계원들이 근무하는 건물은 야드 바깥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근무동이 야드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회사 ‘바깥’으로의 출입도 자유로운 편이다. 또한 엔지니어링 센터에는 카페가 있다. 엔지니어들은 여기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주문해 사무실로 가져와 마시기도 하고, 아예 카페에서 부서별 혹은 파트별로 티타임을 갖기도 한다. 이를 두고 노동조합 등에 ‘형평성’ 문제를 제기한 생산직들이 있었다. 자신들은 2시간 노동하고 10-15분 쉬고 다시 2시간을 노동하는데,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면서 근무 기강을 흐트러뜨린다는 것이다. 각기 추구하는 노동 윤리와 문화가 달라 발생하는 일이다. 회사는 이런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별별 시도를 다 해보다가 결국 몇 시부터 몇 시까지를 ‘집중 근무시간’으로 정해 엔지니어들에게 자리를 뜨지 말 것을 권고하기에 이른다. 다소 냉소적인 젊은 엔지니어들은 그래서 모든 설계원들은 생산직의 눈에 뜨지 않는 곳에서 근무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135쪽)
90% 이상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 출신으로 구성된 10%의 문과 출신 신입사원들에게 부산·경남권 공대 출신들은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였다. “내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근무하려고 그렇게 공부했나” 하는 푸념을 내뱉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부산·경남권 공대 출신들은 “와, 저 사람들이 내 동기야?”라며 감탄한다. 물론 수도권 ‘대도시’ 출신들의 ‘젠체’에 대해 빈정대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이질감은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상당 부분 완화된다. (하지만 부서 배치 이후에는 동문회를 통해 다시 ‘다른 가치’를 주입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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