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 존스의 새 앨범이 발매된다고 한다. 사실 노라 존스는 1집 빼고는 거의 듣지를 않았다. 1집은 중학생 때부터 굉장히 많이 돌려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겨울만 되면 생각이 나서 자주 듣는다.) 3집 지나고 나서는 음악이 록 지향적이어지는데 그것이 나른한 보컬과 어울리지 않는 듯해 잘 안 듣게 된 것 같다. 이번에 나오는 앨범과 바로 전 앨범은 좀 1집 느낌 나게 했다고는 하는데... 다시 듣게 될지는 모르겠다. (이런 식의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시도에 관해서는, 킨Keane도 생각난다. 4집이었나 나올 때 1집과 같은 사운드를 다시 지향했다고 한 것 같고 실제로 그래서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노라 존스 1집에서 좋아하는 곡은 여러 개가 있는데... 우선은 보너스 에디션에 있는 Cold, Cold Heart의 라이브 버전을 제일 좋아한다. 그것 다음으로는 원래 밥 딜런의 곡인 I'll be your baby tonight.(이것도 디럭스 에디션에만 있나?) Lonestar나 Turn me on도 좋아하는데 요새 종종 듣는 것은 The Nearness of You. 원래는 엘라 피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이 같이 한 버전이 유명하긴 한데, 나는 보컬 있는 버전은 노라 존스 쪽이 제일 좋다. 반주가 피아노뿐인 것이 1집의 노라 존스 드라이하고 나른하고 신비로운 보컬 톤과 제일 잘 어울린다. 사실 Cold, cold heart도 반주가 보컬을 잘 받쳐 주어서 좋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GWOHoT3Pm4

 

 

 

 

이거는 Milt Jackson Quartet의 곡. 피아노는 호레이스 실버. 밀트 잭슨의 비브라폰. 

 

https://www.youtube.com/watch?v=K943pNld75Q

 

 

 

참고로 아래는 Cold, cold heart의 live version. 디럭스 앨범에 실린 버전인지 모르겠음. 음원 파일을 유실해서 확인할 수가 없다. 애플 뮤직에 있는 디럭스 버전에는 cold cold heart의 라이브는 없음. 

 

https://www.youtube.com/watch?v=dU6rEpRis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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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utyn, Seth. “Introduction.” In Seth Abrutyn ed. Handbook of Contemporary Sociological Theory. Springer.

1.1 Orienting Ourselves 
사회학 이론은 무엇이 이론인지 아닌지,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과학철학적 질문, 중요하지 않거나 아마도 풀리지 않을 미-거시의 문제에 대한 메타이론적 문제에 골몰해 왔다. 이 에세이와 핸드북은 이러한 논쟁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고, 비교적 “응집적인 이론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사회학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연구 문제를 지도하고guide, 데이터를 이해하고make sense, 과학적 방법에 의해 검정되고, 말하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설명하는 것.” 저자는 특정한 분석적 모델만을 이론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론으로 불리는 모든 것이 이론은 아니라고 한다(e.g. 비판이론).
    이론들은 누적적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학자들이 함께 공통의 언어로 공동의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사회학자들이 공통의 이론적 기반을 가지게 된다면 지식의 차이(gaps)에 대한 더 나은 이해와, 잘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에 대한 이해와, 궁극적으로는 연구의 로드맵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희망한다. 

1.2 Three Challenges 
사회학 내의 학자들은 그 자체가 사회(society)로 응집되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르디외적(Bourdieuian) 장 내 행위자 같다. 물론 콜린스의 “작은 수의 법칙”, 스펜서의 분화 법칙, 뒤르켐의 전문화 법칙 등으로 사회학의 현 문제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우선 세 개의 상호 연관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시간 상의 문제the time crunch; 독창성 없는 집착의 원칙the slavish adherence principle; 그리고 개념 상의 문제the conceptual crunch. 

1.2.1 The Time Crunch
고전의 정전(classical canons)에 더 많은 이론가들을 채워 넣으려는 노력은 사실상 최근 군비 경쟁처럼 된 것 같은데, 이것은 “모든” 이론을 다 공부할 수 없다는 문제를 야기한다. 누구를 정전에 더 추가할지는 자의적이고, 따라서 추가하자면 무한히 추가할 수 있다. 물론 코저의 고전적 텍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사상가들의 지적 맥락을 탐구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겠지만, 만약 사상가들이 지적 맥락 속에서만 오직 이해 가능하다면 그것은 사회에 대한 과학으로서 공부가 될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학의 고전 주제들을 뒤르켐만이 아니라 이븐 할둔이나 메소포타미아의 텍스트에서까지 찾아볼 수가 있다. 즉 끊임없이 텍스트를 파헤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두 코스 안에 이론을 가르칠 수 없다는 시간의 문제를 야기하고, 시간의 문제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1.2.2 The Slavish Adherence Principle 
이는 좋아하는 이론가가 써 놓은 것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문제이다. 이런 도그마의 문제는, 첫 번째로 많은 이론가들의 책이 굉장히 다양한 논의를 담고 있고(sprawling) 또 모호하기 때문에 숭배받기 쉽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이론을 읽은 기억이 시간에 따라 왜곡되기 쉽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이론을 잘못 이해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예: 머튼, 뒤르켐의 아노미). 

1.2.3 The Conceptual Crunch 
개념 상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상호 연관된 딜레마를 의미한다. 첫째, 많은 학자들이 이미 존재하는 개념이나 과정에 대해 새로운 신조어를 발명해 낸다. 둘째,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이유로 인해—경험적 이유가 아니라—개념들이 기각된다. 셋째, 많은 좋은 개념들이 아직까지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지만 그것이 마치 우리들 사이에서 공유된 의미 같은 게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예: 제도institution, 혹은 자아self). 이런 문제 때문에 좋은 개념들이 희생되게 된다(예: 역할role). 

1.3.1 Classical Questions 
아이젠슈타트가 말한 세 가지 사회학의 근본 문제는 통합(integration), 규제(regulation), 정당화(legitimation)이다. 고전 저자들에게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어츠, 더글라스, 터너 등의 저자에서 드러나는, 파슨스식 납작한 문화 개념 비판은 사회학의 네 번째 중요한 중심 문제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챕터 2와 3은 통합과 규제의 문제를 다룬다. 챕터 4와 5는 정당화의 문제를 행위와 상호작용interaction의 관점에서 다룬다. 챕터 6에서 리자도(Lizardo)는 문화에 대해 상당히 도전적인 질문을 내 놓는다. 

1.3.2 Levels of Social Reality 
미시, 거시, 중범위 수준을 하나하나씩 뛰어 넘는 교육 방식은 각각의 수준이 발현적 속성을 갖고 있고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한다. 거시 수준에서 중범위 수준으로 내려가고, 다시 미시 수준에서 중범위 수준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이론 수업을 기획하는 것은 더 나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핸드북은 그러한 접근—거시-미시의 연결로 시작하고, 그 후 각각 수준의 중요한 사회 단위들을 다루는—을 따른다. 


Jonathan H. Turner. 2006. “Sociological Theory Today.” In Handbook of Sociological Theory.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50-60년대와 비교해 사회학은 이론의 엄청난 분화(hyperdifferentiation)를 겪고 있다. 만약 랜덜 콜린스가 말한 “작은 수의 법칙”이 옳다면 이론들을 솎아 낼 필요가 있을 텐데, 각자의 이론이 니치(niche)를 점하고 지지 기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저자는 사회학에서 어떤 이론도 헤게모니를 잡고 있지 못해왔고, 또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학이 진정으로 과학적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글에서 터너는 지난 50년 동안 이론 사회학 영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주관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1) 인식론에 관한 여러 입장 

    (1-i) 사회학 이론은 과학적이어야 하는가? 사회학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자연과학과 같은 실증적 과학이 되기를 바랐다(e.g. 콩트, 스펜서, 뒤르켐).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학이 비판적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베버는 일반 법칙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고 사회학을 경험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을 내놓는 학문으로 생각했다. 오늘날 실증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이론가는 별로 없고, 많은 이들은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거나, 사회학을 과학이 아닌 여러 현상들을 개념화하고 기술하는 해석적 학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많은 이들은 일반적 법칙을 내놓는다는 과학의 인식론에 반대하는 듯하다. 터너는 이러한 회의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인데, 사회학 이론이 과학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저널리즘, 이데올로기적 훈계(preaching), 잘못된 것에 대한 비판, 모호한 철학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학은 인문학에 물 탄 것뿐이 되지 못하며 정책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심지어는 학문적 동료에게까지 중요한 것이 못 될 것이다.

    (1-ii) 사회학 이론은 미시적이어야 하는가 거시적이어야 하는가? 모든 과학은 거시-미시의 구분을 화해시키지 못했으며, 그저 거시와 미시의 구분을 드러낼 따름인데 왜 사회학은 계속 이러한 이슈에 집착하는지 자문할 수 있다. 터너는 이 이슈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이유를, 이 이슈가 다른 인식론적 이슈와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거시-미시의 구분은 행위자-구조의 문제와 섞여 있다. 그리고 저자는 행위자-구조의 문제가 과연 사회학이 과학적 활동(scientific enterprise)인지에 대한 문제로 우리를 돌려 놓는다고 본다.(만약 행위에 우선을 둔다면 사회학은 과학이 되기 어려울 것이고, 구조에 우선을 둔다면 행위에 대한 연구는 과학적일 수 있을 것이다.) 

    미시-거시의 구분을 화해시킬 여러 시도가 있었다. (a) 베버적인, 개념 구축의 시도. 그러나 이 접근의 문제는 실재에 대한 여러 분석적 카테고리만을 갖게 될 뿐 여러 수준의 실재가 갖는 다이내믹을 잘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b) 짐멜적 시도. 사회 관계의 형식들은 실재의 여러 수준에서 동형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각 수준의 발현적인 속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c) 연역적 환원주의. 이 역시 여러 실재의 수준에 대한 설명들이 서로 차이나는 이유를 가려 버리는 문제가 있다. (d) ‘문화적 전환’. 기든스와 부르디외의 시도는 사실 임시방편으로 미시분석과 거시분석의 차이를 메워버리는 것이라고 터너는 본다. 왜냐하면 거시 수준에는 행위자들이 참고하고 동원하는 “창고”로서의 문화만이 아닌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시도 역시 터너는 비슷하게 논평한다. (e) 머튼의 중범위 이론 옹호. 하지만 이 시도는 그저 사회학이 더욱 미분화되고 합의되지 못하는 결과만을 낳았을 뿐이다. 

    터너가 제시하는 ‘당연한’ 해결책은 각각의 차원(거시, 미시, 중범위)이 각자의 발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른 과학 역시 거시-미시의 구분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오직 사회학 이론만이 이 문제에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엄청난 분화만을 낳았다고 터너는 논평한다. 


    (2) 다양한 이론적 전통 

    (2-i) 기능주의 이론. 기능주의는 어떤 현상이 더 큰 체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지를 이론화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는데, 왜냐하면 순환 논증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의 기능주의 이론가들은 분화를 사회 발전의 최상위 과정으로서 설정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피했다. 그런 설정은 적어도 검증 가능한 명제들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기능주의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파슨스의 특수한 분석 방식이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파슨스의 기능주의는 설명이라기보다는 현상을 기술하기 위한 개념적 도식이기 때문이다. 신기능주의자들은 “요구 조건(requisites)”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분화 과정과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엄밀히 따지면 신기능주의는 기능주의가 아니게 된다. 

    (2-ii) 갈등 이론. 파슨스가 헤게모니를 놓치게 된 이후 갈등 이론이 유행했는데, 터너는 이러한 경향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기능주의에 대한 갈등 이론의 비판은 그저 사회 체계 안에 통합과 갈등의 과정이 존재한다는 당연한 것을 발견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갈등 이론은 사회 이론에서의 초점을, 갈등이 일어나는 여러 조건들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전환 후에 여러 가지 접근이 발달했다. 하나는 불평등과 계층화에 대한 마르크스적, 베버적 강조이다. 다른 것은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을 발달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사회 운동의 이론화는 추진력을 얻었고, 교환 이론 역시 갈등 이론적 요소를 품었다. 갈등 이론의 전성기에 세계 체제 이론 역시 부상했다.

    (2-iii) 비판적인 이론화(Critical theorizing). 마르크스의 해방적 이상과 베버적 염세주의를 결합한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이에 해당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늘날 비판 이론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초기 사회학자들과 공명한다. 비판 이론의 문제는 그것이 비판적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 많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논평한다. 

    (2-iv) 진화 이론(Evolutionary theory). 사회학 이론에는 언제나 진화적 경향이 있었다. 진화의 단계 모델(stage models)은 20세기 초 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20세기 말에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e.g. 세계체제 이론, 하버마스, 기능주의). 진화 이론의 다른 형태로는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이 있는데 이런 이론의 문제점은 임시방편(ad hoc) 혹은 사후적(post hoc)이어서, 가설이 검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진화 이론으로는 주목을 잘 받지 못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침팬지 등의 생활 형태를 비교 연구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사회적 구성’에 대해 헌신적 믿음을 갖는 이론가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진화 생물학에서도 인사이트를 끌어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2-v) 공리주의 이론. 공리주의 이론은 마르크스와 애덤 스미스의 저작에서도 드러난다. 공리주의 이론화는 50년대 말과 60년대 초 호만스 식의 행동주의 모델이나 콜만의 모델에서 드러나는데, 공리주의 이론의 가장 중요한 진보는 짐멜에 의해 처음 제안된 교환 이론의 발달이다.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합리적 선택 이론이 유행했는데, 이러한 이론의 설명 논리(ad hoc과 post hoc)는 사회생물학과 유사하다. 그러나 사회생물학과 다르게 합리적 선택 이론은 실제로 예측(prediction)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2-vi) 상호작용적 이론화. 미드의 유산은 상징적 상호작용 이론에 남아 있는데, 상징적 상호작용 이론은 역할 이론이나 교환 이론, 행위 이론 등과 융합되기도 했다. 의례와 감정적 격정(arousal)을 강조하는 뒤르켐적 유산은 고프먼의 연극적 접근이나 콜린스의 상호작용 의례 이론에서 드러난다. 이외에도 후설과 슈츠의 영향을 받은 민속방법론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상호작용화 이론화 영역에서 가장 흥미로운 진영은 감정(emotions) 연구로, 감정 연구는 1970년대 이후 미시사회학 연구에서 선도적 위치가 되었다.

    (2-vii) 구조 및 구조주의 이론. 표면적 현상의 심층에 구조적 형식이 있다는 것은 흥미를 끈다. 하지만 부르디외, 기든스, 우스노우Wuthnow 등의 이론은 레비-스트로스나 촘스키가 주장한 것처럼 뇌(brain)를 구조를 생성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다른 구조주의 이론의 종류로는 네트워크 분석이 있다. 네트워크 이론의 관심은 연결(tie)의 다양한 형태가 만들어 내는 동학이다. 다른 형태의 구조주의로는 구조가 어떻게 상호작용의 비율에 영향을 끼치는지의 연구가 있다. 


    결론 

    사회학 이론은 상당히 분화되어 왔지만, 이들 중에서 통합의 움직임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터너는 이것이 오늘날 사회학 이론의 문제를 야기한다고 본다. 과학은 그것이 지시하는 문제와 인식론에 대해 최소한 합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본 갔을 때 심심하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책을 가져가기로 했다.


책을 가져가는 기준은? 

  • 가벼울 것. (짐을 싸야 하니까)
  • 내용이 전문적이지 않고 일상적일 것. (전공 관련한 것이면 재밌다고 읽긴 하지만... 아무래도 여행 온 느낌도 있는데 그런 거 읽기는 좀 그런 것 같아서.)
  • 평소에 읽고 싶었던 것일 것 (그래야 읽겠지?) 

그래서 고른 책.

1. The Reasons of Love (Harry Frankfurt.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으로 유명한 해리 프랭크퍼트의 책이다. 책을 알게 된 경위는 친구가 읽고 있길래. 씨아이알이라는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어 있었다. (『사랑의 이유』)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굳이 영어 판본을 가지고 갔는데 왜냐하면 솔직히 국역본은 두껍고 무겁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뭐랄까 분석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글을 쉽게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고 또 여행 가서 책을 오래 읽고 싶은데 국역본으로 가져가면 너무 빨리 읽어버릴까 싶어서 일부러 제동장치를 거는 느낌으로 영어 책 가져가기로 한 것이다. 

좀 웃긴 얘기지만 9시 출발 비행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공항에 너무 일찍 도착했고 (여섯 시 반 정도?) 체크 인을 정말 빠르게 했다. 그래서 할 일도 없으니 사람 별로 없는 김포공항 카페 티아모에서 커피 마시면서 책 읽다 보니 일본 도착하기도 전에, 책은 영어 판본으로 백 쪽 정도 되는데 30쪽까지 읽어버린 것이다. 이런 페이스로라면 며칠 안에 다 읽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서는 일본 생활이 바빠서 한 이 주일 정도 못 읽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흥미도 떨어졌다. 3부 The Dear Self까지 읽다 말았고... 나머지 3장은 한국 오면서 틈틈이 읽고 다 반납했다. 

제목은 사랑의 이유인데 연애가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냥 알랭 드 보통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보살핌(caring), 관심을 기울이기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사랑은 보살핌의 최고의 단계인데,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잘 될 수 있는 것(flourishing)을 무사(無私)하게 바랄 수 있는 것이 곧 사랑이다. 이러한 의미의 사랑이 예화되는 가장 흔한 경우로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자주 거론되고는 한다. 

암튼 사랑은 중요하다. 어떤 대상이 잘 되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바랄 때에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언적으로 바란다고 해야 할까?) 세상은 의미로 충만해지기 때문이고, 이 문제는 도덕적, 규범적 판단의 영역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숙고해야 하는 삶의 한 부분이다. 이런 사랑의 정의에 기반해 저자는 여러 가지 얘기를 하다가 종국에는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식이 자기애(self-love)라고 주장하기까지 이른다. 사실 자기애를 논하는 제3부가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으며, 저자가 일상인이 흔히 쓰는 언어 감각과 유사한 의미로 사랑을 쓰지 않고 비교적 엄격한 정의를 유지하고자 한 이유를 3부를 읽을 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3부를 읽으면 독자는 이 책이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흔히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 논하는 책은 아니라는 것을 역시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어떻게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를, 사랑이라는 개념적 스캐폴딩을 활용해 설득하고자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책 내용이 기대와 부응하든 그렇지 않든 프랭크퍼트 같은 저자의 간명한 문장을 음미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는 암시적이지만 그렇다고 헷갈리게 글을 쓰지는 않는다. 주제--사랑--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구불구불 논의를 펼치지만 글쎄 그런 논의에 이끌려 가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긴 했다.

다른 도덕철학자들이 도덕철학에서 다루지 않는 가치의 영역이라 해야 할까? 여튼 그런 것에 대해 말한 에세이가 또 있으면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프랭크퍼트가 말미에 글을 마무리하며 언급한 모 여성 비서와의 사담(私談) 내용은 쉽게 잊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독서 경험. 



Davis, Murray S. 1971. "That's Interesting! Towards a Phenomenology of Sociology and a Sociology of Phenomenology."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s 1(2): 309-44. 머레이 데이비스, "이거 흥미로운데! 사회학의 현상학과 현상학의 사회학을 향하여." 



    데이비스는 이론은 사회 세계의 행위자들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인식을 뒤흔들 때 흥미롭다고 말한다(Davis 1971, p.309). 구체적으로, 흥미로운 이론들은 다음의 조건을 만족하는 것 같다. 첫째, 흥미로운 이론은 기존의 당연하게 여겨지는(taken-for-granted) 전제를 명료화한다. 둘째, 흥미로운 이론은 그 전제들을 반박한다. 셋째, 그러한 전제를 뒷받침하는 경험적 증거를 내놓는다. 넷째, 자신의 이론이 가져올 경험적 결과 내지는 이후의 연구 방향을 제시한다(312). 


    모든 흥미로운 명제들은 현상학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 사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흥미로운’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시도한다. 처음으로는 자신이 겨냥하는 명제가 제기하는 존재론적 주장이 그저 현상학적 주장(pretence)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는 명제 자신의 고유한 존재론적 우선성(ontological priority)을 주장하며 그 현상학적 주장을 부정한다.”(313) 


    데이비스는 흥미로운 명제의 인덱스를 만든다. 

    우선 단일한 현상을 특성화하는 방식으로는 다음의 일곱 가지가 있다. 

    (i) 조직화(organization): 미조직화된 (비구조화된) 현상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조직된 (구조화된) 현상이다. (혹은 거꾸로) 

    (ii) 구성(composition): 다양하고 이질적인 현상들로 보이는 것들은 실제로는 하나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혹은 거꾸로)

    (iii) 추상화(abstraction): 개인적인 것 같은 현상이 실제로는 전체론적인(holistic) 현상이다. (혹은 거꾸로) 

    (iv) 일반화(generalization): 국지적(local) 현상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전역적인(general) 현상이다. (혹은 거꾸로)

    (v) 안정화(stabilization): 안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현상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불안정하고, 꾸준히 변하는 현상이다. (혹은 거꾸로)

    (vi) 기능(function):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는 효과적이지 않아 보이는 현상이, 실제로는 효과적인 현상이다. (혹은 거꾸로)

    (vii) 가치평가(evaluation): 나쁜 현상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좋은 현상이다. (혹은 거꾸로) 

    (vii)에 대한 코멘트: 가치평가적인 명제들은 사회 연구에서 흔하게 보이지만, 도덕적 중립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몇몇 이론가들은 그들의 가치평가를 명시적인 방식보다는 보다 암시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도덕적 판단을 명시적으로는 유보하는 대신, 자신이 평가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일반적으로 좋거나 나쁘다고 여겨지는—과 대조하여 평가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다. 예: 『수용소Asylums』에서의 고프먼: 정신병원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정신병원이 사실은 포로 수용소concentration camp와 닮은 점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보여 줌으로써 넘김. (322) 

    

    아래는 다양한 현상의 관계와 관련지어, 흥미로운 명제를 만드는 방식.

    (viii) 상관(co-relation): 서로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사실은 상관이 있는 (상호 연관된) 현상이다. (혹은 그 반대)

    (ix) 공존(co-existence): 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실제로는 같이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이다. (혹은 그 반대) 

    (ix) 코멘트: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현상이 실제로는 공존이 가능한 현상들이다’라는 명제는, 종종 인상적인 캐치프레이즈나 타이틀로 흥미를 끈다. 예컨대,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냉전The Cold War”, “풍요 속의 가난Poverty in the Midst of Plenty”은 모두, 생략법이 들어가 있지만 (ix)의 명제이다(324).

    (x) 공분산(co-variation): 양적 공분산의 관계가 있는 현상이, 사실은 음적 공분산의 관계가 있다. (혹은 그 반대) 

    (x) 코멘트: 흥미를 끌 수 있는, 다른 타입의 공분산 명제도 있다. 첫째로는 연속적인 공분산 관계에 있는 현상들이 사실은 이산적인(discrete)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양질 전화의 법칙을 논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둘째로는 선형적인 공분산의 관계 같은 현상이 실제로는 곡선적(curvilinear)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25)

    (xi) 반대(opposition): 비슷해 보이는 (거의 같은) 현상들이 사실은 정반대의 현상이다. (혹은 그 반대) 

    (xi) 코멘트: ‘상반되는 현상이 사실은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현상이다’라는 명제는, 그것이 평가적 차원을 수반하였을 때 “변증법적 사고Dialectical Thinking”를 활용해 흥미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325) 

    (xii) 인과(causation): 독립적이어 보이는 현상이 사실은 종속적인 현상이다. (혹은 그 반대). 반대의 예시로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있다. 


    흥미롭지 않은 이론은 사람들의 현상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지점(i.e. assumption-ground)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명제이다(327). 따라서 사회과학을 하는 것을 단순히 이론을 구축하고 반증하는 것만으로 이해한다면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회과학의 대가(‘stars’)들도 간혹 흥미롭지 않은 명제를 내놓을 수 있는데, 이는 이론이 말을 걸고 있는 행위자들이 단일하지 않고 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328). 이론의 청중은 “일반인(laymen)”과 “전문가(experts)”로 나눠질 수 있는데, 이러한 분화는 이론이 양자 모두에게 흥미롭게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한다(329). 그러나 이론의 독자들이 분화되어 있어도 종종 흥미로운 이론이 생산되는데, 추상화의 기술을 동원해 “컨센서스”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이론의 주제에 대해 실용적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일반인들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도 있다(332-4). 


    사회에 대한 연구, 특히 사회학 연구에 자주 제기되는 비판은 그것이 따분하고 재미 없다는 것이다. 사회학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론이 아니라 더 많은 ‘흥미로운’ 사회 이론이다”(337). 현상학은 단순히 감각적 수준에서 나타나는 것(appearances)에 대한 연구를 지칭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순한(mere)’ 감각적 수준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거나 가정하는 것을 넘어선 어떤 실재가 있다고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과 후설에 의해 발전된 “현상학”이라는 용어에는 다른, 좀 더 큰 의미가 있다. 현상학은 단순히 그럴듯해 보이는 거짓된 현상(appearances)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거짓된 현상으로부터 [주의를] 돌려 존재론적으로 진실인 것으로 향하는 ‘마음의 운동(movement of the mind)’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전체적 과정의 넓은 의미 속에서 사회학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Sociology라는 것을 풀어내고자 했다.”(341-2) 

    사회학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전제를 명료화한 후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현상학적인 과정 위에 정초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학적 과정은 역시 또한 사회학 위에 정초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사회학적 이론이 향하고 있는 독자들의 집단들(segments)이 가지고 있는 가정(assumptions)은 사회 세계 속에서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회학적 이론이 재미있는지를 탐구하는 ‘흥미로운 것의 사회학The Sociology of the Interesting’=‘사회학의 현상학Phenomenoloy of Sociology’은, 현상학적 과정 자체가 시작되는 다양한 일상적 행위자 혹은 전문가 집단의 상식적 가정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연구하는 ‘현상학의 사회학Sociology of Phenomenology’과 합쳐져야 할 것이다(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