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강의 제목들을 보면 끝에 붙은 '연습' 때문에 갸우뚱해지곤 했다. 


사회심리학연습, 조직사회학연습, 현대사회학이론연습, etc. … 


대체 무엇을 연습한다는 것일까? '연습'이란 말이 어떤 것을 배우는 과정 전체를 통칭한다 하면 학부 수업 제목에도 똑같이 연습이 붙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연습이라는 말은 대학원 강의 제목에만 보통 붙는 것 같다.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구글링을 해 보았다. 사실 명쾌한 설명은 없었다. 그런데 한국어로 된 일본 대학원 강의 관련 자료들이 딸려 검색되었고,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연습(演習)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전도 검색해보고 생각해 봤는데 다음과 같은 가설이 유력할 것 같다. 


일본에서 쓰이는 단어인 연습(演習)을 한자로 바로 직역하여 쓰다 보니 한국 강의 실라버스에도 관례적으로 연습이란 말을 써오는 것이다. 비록 한국어 사전이나 한자 사전에 등재된 '연습'이라는 말의 뜻과는 거리가 있을지라도. 


보통 한국어에서 일상적으로 연습은 '피아노를 연습하다', '내일 체육 시험을 대비해 뜀틀을 연습하다' 따위가 있다. 이것은 "학문이나 기예 따위를 익숙하도록 되풀이하여 익힘"이라는 뜻이고, 한자로는 練習이다(표준국어대사전). 그런데 다른 한자어도 있는데, 바로 演習이다. 한국어로 앞의 연습과 뒤의 연습은 모두 뜻이 비슷하고, 일상 생활에서 구분할 일은 거의 없다. 후자는 "실지로 하는 것처럼 하면서 익힘"이라는 뜻이고, 익히다(練)라는 뜻과 달리 演에는 청중에게 보여준다, 실제로 한다 같은 뜻이 있다. 그래서 '연극을 연습하다'라고 말할 때에는 演習이 더 어울릴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말할 때 어떤 한자어를 쓸지 구별하고 의식하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일본어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는 느낌이고, 실제로 음도 다르다. 연습練習은 렌슈 れんしゅう 라고 발음한다. 연습演習은 엔슈 えんしゅう라고 발음한다. 여기서 전자의 연습은 한국어와 뜻이 거의 같다. 하지만 후자의 연습에는 뜻이 더 붙어 있다. 후자의 연습 역시 전자의 연습처럼 쓰기도 한다. '익숙해지기 위해 반복해 익히는 것'이고 앞의 연습과 뜻이 같다(출전 デジタル大辞泉). 하지만 다른 뜻도 부가되어 있다. "대학, 대학원 등에서 교수의 지도 아래 학생이 연구, 발표, 토의를 하는 것을 주로 하는, 소수 인원의 수업 형태. 제미나르, 제미."(大学・大学院などで、教授の指導のもと学生が研究・発表・討議を行うことを主眼とした、少人数の授業の形式。ゼミナール。ゼミ。) 라는 것이다. 


즉 세미나(독일어로 제르미나) = 연습인 것이다. 


실제로 영일 사전을 찾아봐도 演習 = seminar로 나온다. 


의문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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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경향신문 <다시 쓰는 인구론> 특집에서 다음 책을 알게 되어서 읽고 있다: 조은주, 『가족과 통치: 인구는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나』, 창비, 2018. 어제 빌렸는데 정말 유잼인 책이라 단숨에 읽었다. 


1.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 책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가족계획사업과 인구 정책에 집중하고 있는데 푸코의 말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의 통치성(governmentality) 논의를 주요한 이론적 자원으로 쓰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의 기획은 국가와 사회가 대립한다는 개념적 경계를 넘어서고 어떻게 국가가 여러 가지 통치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구’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가족 계획과 섹슈얼리티, 재생산의 문제에 개입하고 그에 관한 사람들의 품행(conduct)을 어느 쪽으로 인도하는지 사회사적으로 밝히는 것이다(국가의 통치 과정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새로운 [인구의] 통치 과제의 조사와 확정에서 사적 개인과 조직이 행하는 주도적 역할, 전문가들과 행위자들 사이 교류로 이뤄지는 상호작용, 지방자치의 민영화, 자원활동의 동원 등. 콜린 고든, “통치합리성에 관한 소개,” 『푸코 효과』, 난장, 2014, 66-67쪽, 155쪽). 여러 주제를 넘나들기 때문에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의학자들과 사회학자들 같은 지식인들이 국가의 가족계획사업을 제안하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사실상 이런 예방의학, 보건학, 가족계획 연구가 국내 사회과학 연구 발전의 중요한 기원 중 하나였다는 내용이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 의사이자 보건사회부 차관이었던 양재모는 WHO와 유엔 원조처의 지원을 받아 유럽에 가서 사회보장제도를 연구하는데, ILO 전문위원의 ‘사회보장 시스템보다는 가족계획사업이 훨씬 더 한국에 시급하다’는 충고를 듣고 이후 가족계획 사업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게 된다(『가족과 통치』, 37-9쪽). 양재모가 주도한 대한가족계획협회는 5.16 군사쿠데타 직전에 설립되었고, 쿠데타 이후 급변하는 정치적 기회구조 속에서 양재모가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포함됨에 따라 이후 군부독재 체제에서 인구 및 가족계획의 핵심적 행위자가 된다(같은 책 3장). 세브란스 출신이라는 연줄로 긴밀히 엮여 있었던 의사나 보건 관료들은(양재모를 포함) 전후 미발전한 국가들의 근대화에 관심이 있었던 미국 정부나 여러 재단의 후원과 어드바이스를 받아 인구 및 출산 통계의 설립 같은 통치 테크놀로지를 세우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서울대 의과대 교수인 권이혁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인 이만갑과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인구학 연구를 1963년 진행했다. 이후 1965년 서울대학교에 인구연구소가 설립되는데 이는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의 전신이다. 그리고 “농촌지역 가족계획 연구사업팀의 일원이었던 서울대학교 사회학 석사 출신의 안계춘은 이후 인구협회의 지원으로 시카고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70년대 초[1973년] 연세대학교에 사회학과가 신설되면서 교수로 부임한다”(같은 책, 159쪽). 책에서 자세하게 쓰여 있지는 않지만 “가족계획연구원의 연구자들 역시 [미국의 제3세계 원조 프로그램을 통해] 1980년대 초까지 하와이대학교, 시카고대학교 등에서 경제학, 사회학, 인구학, 통계학 등을 전공하여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163쪽)는 언급을 고려할 때 박정희 시대의 가족계획 사업은 한국 사회학의 제도화에 있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2.

6장 "근대가족 만들기"는 미셸 푸코의 "성적 억압의 가설이 잘 유지되는 이유는 그것을 지지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성의 역사>, 1권)라는 말로 시작한다. 섹슈얼리티를 억압과 금지의 이분법으로 사고할 때 우리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성 담론이 "금기나 억압, 통제, 금욕적 태도나 보수적 입장"(<가족과 통치>, 184쪽)을 일관적으로 견지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그 함정이 될 수 있겠다. 책에 따르면 기존의 연구는 "가족계획이 보급한 피임의 목적은 단지 임신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출산 조절의 구체적 방법은 비가시화되었고 가족계획과 섹슈얼리티의 연관성은 회피되었으며 성관계는 오직 생식을 위한 것이었을 뿐 쾌락을 위한 성은 죄악시되었다고 주장해왔다"(192쪽).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족계획은 단순히 피임술의 안내와 보급만을 필요조건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푸코적 이론으로 생각할 때 국가권력의 통치는 각 개인들의 미시적 실천을 합리적이고 정당하다고 인식되는 지식을 활용해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동의를 얻어 특정한 방식으로 규율하고 관리한다. (책의 3장은 1960년대 가족계획 초기, 공무원이나 여성들이 문맹이어서 살정제 피임약 사용법을 인식하지 못해 경구로 복용하여 문제가 생긴 어느 마을의 일화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가족계획은 "평범한 사람들이 성행위와 임신 및 출산을 분리시켜 사고하는 태도"(178쪽)를 전제하고 그것을 확산시켜야 했다. 60-70년대 가족계획에 대한 담론은 섹슈얼리티에서 쾌락적 성행위와 생식 활동을 분리시키고자 노력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족계획 담론이 "성에 대한 억압이나 금기, 통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반대로 좀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의식과 충분한 성지식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성에 대한 보수적 태도를 문제시"했다(181쪽). 이는 대한가족계획협회의 기관지인 <가정의 벗>에서 잘 드러난다. <가정의 벗>은 거의 매호 섹슈얼리티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고, "성적 욕망을 긍정하는 것은 물론 성적 행위의 기술을 강조하고 성행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글을 끊임없이 게재했다"(184쪽). 책이 직접 인용하는 당시 가족계획과 관련된 문헌들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현재의 여성잡지나 맥심 같은 남성잡지에서 묘사되는 성생활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 상당히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흔히들 자유주의적, 쾌락적 성 담론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1948년과 1953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킨제이 보고서를 꼽곤 한다. 책이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실은 의사 등의 전문가들에 의해 그러한 쾌락주의적인 성 담론이 한국에도 그다지 긴 시차를 두지 않고 유포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킨제이 보고서가 한국에 처음 번역 소개된 것은 1950년대이고, "의과대학 교수들이 집필한 가족계획 안내서 <가족계획>은" 주부들의 성생활에 대한 미국의 통계적 연구들을 인용하고 있다(204쪽). "피임법의 대대적인 선전과 더불어 가족계획의 성 담론은 쾌락적 섹슈얼리티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여러 전문가 담론과 결합되어 유통되었고, 여성잡지를 비롯해 늘어나는 대중매체는 여성들이 새로운 정보, 특히 성생활과 임신 등 여성에게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통로이자 교양 독서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205쪽). 

물론 당시의 가족계획 성 담론은 현재의 성 담론과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여성의 성적 쾌락은 즐거운 것이고 과학 지식을 통해 면밀히 탐구되고 보다 세심한 방식으로 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긴 하지만 쾌락이 그 자체로 장려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남편과의 '정신적 애정'을 도모하고 가정의 평화를 단단히 하는 보완물의 성격으로 장려되었기 때문이다. 즉 가족계획의 성 담론은 "성의 쾌락적 차원을 혼인관계에 견고하게 위치"시켰다는 것이다(205쪽).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여기서 기든스의 논의를 끌어들인다. 즉 가족계획의 성 담론은 한국의 전통적 가족 관계를,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에 기반한 서구의 '정상적'인 가족관계로 재편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계획사업이 겨냥한 근대적 가족의 모델은 이상적인 자녀 수와 실제 출산자녀 수, 가구 구성원 수의 양적 변화를 수반하는 동시에, 이러한 양적 변화만으로 표상되지 않는 정서적 삶의 재질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216쪽).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1부 “콩브레” 감상 


 

 

1. 마들렌에 대하여

 


사람들은 흔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마들렌을 먼저 꺼낸다. 어느 하루 홍차와 마들렌을 함께 먹은 순간 그 감각 자체가 지난 시골 마을에서의 유년 기억을 솟아오르듯 불러왔으며 이것이 곧 수천 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의 시작이 되었다는 내러티브는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은 사람이나 읽지 않은 사람이나 『잃어버린 …』을 두고 관례적으로 마들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의 1권 “스완네 집 쪽으로”를 시작하는 1부‘콩브레’는 어떤 물질이 순간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향수가 아닌 잠 못 드는 어느 하룻밤의 상념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그러니까 마들렌은 (민음사 판 기준으로) 80여 쪽을 읽어야 겨우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스완네 집 쪽으로”의 1부 ‘콩브레’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는 첫문장으로 시작해 어느 잠 못드는 밤의 상황에서, 어린 시절 콩브레에서 어머니의 저녁 키스를 받기 위해 그것이 가망 없는 시도임을 알면서도 하녀 프랑수아즈를 시켜 어머니에게 쪽지를 보낸 한 일화를 기록한다. 그런데 이런 기억은 콩브레에서의 기억의 아주 작은 국면만을 재생시킬 뿐이다. 즉, “이처럼 오랫동안 한밤중에 깨어나 콩브레를 회상할 때면, 마치 벵골의 섬광 신호등이나 조명등이 건물 한 모퉁이를 선택해서 비추면 다른 부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처럼, 콩브레는 언제나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잘린 빛나는 한 조각 벽면으로만 떠올랐다”는 것이다(83쪽). 


그렇다면 위와 같은 ‘분간할 수 없는 벽면’과 대비되는 콩브레에 대한 기억들이 2장(92쪽 ~ 1권 끝)에서 나타날 것이다. 화자 마르셀의 의식이 어머니의 존재에 집착하곤 했던 여러 밤들의 경험에 비교적 집약적으로 지향되었던 1장의 서술 양식과 2장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마들렌이다. 화자는 1장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켈트족의 신앙을 인용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은 식물이나 무생물에 갇혀 있어서 “그 영혼의 감옥인 물건을 손에 넣는 날까지는 …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85쪽)는 것이다. 마르셀에게 잃어버린 영혼은 홍차와 프티마들렌 한 조각에 갇혀 있었다. 화자가 어느 정도 성장한 어느 날—시간이 지났고 상황이 변했기에 유년기의 콩브레를 더이상 찾을 수 없는—화자는 어머니가 권한 홍차와 마들렌을 우연히 마시고, 이것은 화자에게 유년기 콩브레에서 일요일마다 레오니 아주머니와 먹었던 콩브레에 대한 회상을 불현듯 이끈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한다. 우리 덕분에 해방된 영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85쪽). 


 

2. 프루스트의 글쓰기

 


2장의 서술 방식은 1장의 서술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어떤 대상이 의식의 지각에 불러일으키는 연상들을 집요하게 다방면적으로 서술하려고 하고 여러 예술 작품들을 동원해 가며 그것에 대한 묘사를 뒷받침하는 장황한 프루스트의 서술은 1장에서나 2장에서나 모두 같다. 하지만 다음의 문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뿐이었다.) …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90쪽).  


문장이 난해해 그렇게 쉽지는 않지만, 1장의 구조는 비교적 명확하다. 조금 장황하지만 프루스트는 스완 씨의 콩브레 집 방문과 어떤 날 스완 씨 때문에 저녁에 어머니의 키스를 받지 못해 안절부절했던 한 경험을 비교적 전통적인 서사 구조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위의 문장에서 말한 ‘단지 그 잘린 벽면뿐’만을 말하는 것 같다. 2장부터 콩브레의 모습은 굉장히 중층적인 시간 속에서 어떤 단일한 사건의 서술에만 얽매이지는 않은 채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으로 나타난다.


중층적인 시간 속에서 단일한 사건에 얽매이지 않고 콩브레의 모습이 펼쳐진다는 말을 조금 더 부연하자면 이렇다. 이를테면 110쪽부터 124쪽까지는 화자가 본 콩브레의 성당이 길게 묘사된다. 콩브레 성당의 묘사는 프랑수아즈와 레오니 아주머니(=옥타브 할머니)에 대한 회상 이후, “아주머니가 프랑수아즈와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부모님을 따라 미사에 갔다”(110쪽)는 일과 속에서 시간의 연결고리에 따라 이어진다. 하지만 약 14쪽 정도 성당에 대한 긴 설명을 하는 동안 화자는 콩브레 성당에 얽힌 일화나 자신의 인상들을 자유롭게 오가고, 심지어 묘사의 마지막 부분에는 현재 글을 쓰는 화자의 시간까지를 불러들이고 있다(“오늘도 지방 대도시나 파리의 잘 모르는 거리에서 길을 묻는 나에게, 한 행인이 … 수도원 종탑이나 병원 탑을 마치 무슨 표지처럼 가리켜 보일 때, … 나는 하던 산책이나 해야 할 심부름을 잊어버린 채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서서는 …” 123-4쪽). 


다른 예를 들어보자. 130쪽부터 가족의 점심 식사를 묘사하고 프루스트는 콩브레에서 점심을 먹은 후 으레 어머니가 관습적으로 식사를 다 했으면 밖에 나가거나 방으로 올라가서 책을 읽으라고 말한 어느 날을 회상한다. 소설 서사는, 일과 속의 시간의 연결고리(점심을 먹는다 -> 산책을 가거나 책을 읽는다)를 순순히 따르는 듯하면서도 콩브레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뒤섞여 있는 화자의 기억 속에서 잠깐 길을 잃는다. 그 어느 날에서 화자는 “정원 한구석 라일락 그늘 아래 등받이 없는 벤치”(130쪽)에 가서 앉았는데, 예전에는 사실 밥을 먹고 나서 정원에서 머무르기보다는 아돌프 작은할아버지의 휴게실로 들어갔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아돌프 할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146쪽까지 이어지고 그 뒤로는 프랑수아즈와 부엌 하녀, 스완 씨와 지오토 그림에 대한 생각이 이어진다. 


화자 마르셀과 그의 가족들이 콩브레에서 자주 산책을 하는 것처럼 2장에서 소설은 마치 산책하듯이 서술한다. 그것도 무정형으로. 화자의 회상은 어느 특정한 날(d1)의 일과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책을 읽다 보면 화자가 이야기하는 어떤 날이 과연 특정될 수 있는 것인지 알기는 어렵다. 화자의 기억은 여러 날들(d1, d2, d3 …)을 종합한 일반적인 나날들의 국면들을 이것저것 종횡무진 서술하고 있다. 2장에서의 기억들은 그 공간적 배경이나 다루는 인물들, 사건들이 모두 다르고 오직 콩브레에서의 유년기라는 느슨한 구심점만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3. 소재의 종합, 순환적 구조

 


그러나 2장을 다 읽으면, 비록 소설이 종잡을 수 없는 유년기의 이런저런 단상들을 이리저리 모아놓은 것 같아도, 진행이 무르익으면 게르망트 부인과 스완 양에 대한 사랑, 그리고 화자의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라는 소설의 핵심 주제가 아름답고 탁월한 방식으로 정리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237쪽부터 화자는 콩브레 주변의 두 산책길 즉 ‘메제글리즈라비뇌즈’(스완네 집 쪽)와 ‘게르망트 쪽’을 묘사한다. 스완네 집 쪽으로 산책을 나간 어떤 날 화자는 스완 양을 마주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 경험을 회상한다. 256쪽부터는 우연히 목격한 뱅퇴유 양의 레즈비언적 관계에 대한 회상을 한다. 286쪽부터 본격적으로 게르망트 쪽과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묘사가 시작된다.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화자의 사랑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화자는 게르망트 집안으로부터 어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풍취, 무언가 전설과 같은 느낌(주느비에브 드 브라방)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게르망트 부인이 “내가 쓰고 싶어 하는 시의 주제에 대해서도 말하”는 몽상을 한다(299쪽). 게르망트 쪽은 화자의 글쓰기에 대한 꿈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날 이후 내가 게르망트 쪽으로 산책을 갈 때면 내겐 문학적인 재능이 없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유명한 작가가 되기를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나는 예전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307쪽).


화자가 작가가 되기를 단념한 것은 철학에 대한 소질이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절대적이고 무한한 의미를 지닌 주제를 찾으려고만 하면, 금세 내 머리는 작동하기를 멈추고 내 주의력 앞에는 허공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내게 재능이 없거나, 뭔가 뇌에 병이 생겨 재능이 가로막혔다는 생각이 들었다”(299쪽). 화자는 베르고트라는 작가의 철학을 좋아했다. 베르고트를 읽으며, “그때 갑자기 나는 내 소박한 삶과 진실의 왕국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어떤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기조차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치 되찾은 아버지 품에 안기듯이 작가가 쓴 페이지 위에 신뢰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173-4쪽). 재미있는 것은 스완 씨가 베르고트와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화자에게 충격을 안겨주며 스완 양(=질베르트)에 대한 동경과 사랑으로도 이어진다(179쪽). 


그런데 게르망트 쪽을 지나며 화자는 어떤 강렬한 인상을 받고, 이것은 그가 마차에서 마르탱빌의 종탑을 보며 그 인상을 기록하는 행위로까지 이어진다. 이 인상이 전해주는 희망은 화자가 “장차 소설가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돌려줄 수 있는 그런 인상은 아니었다. 그러한 인상들은 항상 지적인 가치가 없고 추상적인 진리와도 관계 없는 어떤 특정 대상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308쪽). 즉, 도식적으로 따지면 화자는 베르고트가 표상하는 것처럼 ‘진리의 거울’이 되어 사물의 본질을 비출 수 있는 추상적 글쓰기와, 지적인 가치가 없고 추상적인 진리와 관계 없는 특정 대상에 대한 인식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현상학적 글쓰기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지 긴장하고 있다. 어느 날 게르망트 쪽에서의 마르탱빌 종탑 관찰은 마르셀이 후자 방식의 글쓰기에 전념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글이 나를 종탑과 종탑 이면에 숨겨진 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해준 것 같아, 마치 나 자신이 암탉이 되어 이제 막 알을 낳기라도 한 것처럼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313쪽). 결국 1부의 마지막에 가서, 마르탱빌의 종탑을 등지고 프루스트는 자신이 왜 이렇게 전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한 셈이다. 


콩브레의 유년 기억에 대한 화자의 종합적인 묘사는 해가 질 무렵의 아름다운 종탑 묘사로 끝을 맺는다. 종탑은 “서로 바짝 붙어 하나씩 미끄러지면서 아직 분홍빛을 띤 하늘에 매력적이지만 체념한 듯한 검은 형체 단 하나를 남기고는 마침내는 어둠 속으로”(312쪽) 사라지는데, 이 어둠은 2장의 시작 부분에서 낮이었던 콩브레가 시간이 흐른 후 저녁과 밤을 맞이한다는 당연한 수순을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시간적 측면 외에도 어둠이란 공간적으로 화자에게 침실과 어머니의 부재를 의미한다. “우리가 게르망트 쪽으로 산책을 하러 가는 날이면 보통은 저녁 식사가 늦어지므로 … 어머니는 손님이 있을 때처럼 식탁에 붙잡혀서는 내 침대로 저녁 인사를 하러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내가 이제 막 들어선 이 슬픔의 지대는, 마치 하늘의 분홍빛 띠가 초록빛이나 검정 빛 띠에 갈라지듯 조금 전에 내가 기쁨으로 뛰어 들어갔던 지대와는 너무도 달랐다”(313쪽). 이러한 방식으로 2장은, 아침(낮) - 저녁(밤)의 순서를 거쳐 1장의 배경과 상황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다. 작가의 의식은 유년기 속 다양한 나날들의 여러 의식과 기억들을 콜라주하는 식으로 배치하지만 소설 구조상으로 볼 때 그 기억들은 콩브레 마을의 여러 공간들을 경유하며, 낮에서 밤으로, 다시 1장의 첫 장면이라는 순환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장에서 마들렌의 감각으로 촉발된, 물에 풀어지면 펼쳐지는 일본 사람의 종잇조각 같은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90쪽)은 다시 화자가 잠드는 방으로 축소된다. 

2018년 12월 말의 독서들

2019. 1. 5. 00:54

(2018년 12월 28일) 


로버트 프랭크의 『사치 열병(Luxury Fever)』(이한 옮김, 미지북스, 2011)을 읽었다. 사치재에 대한 소비를 제한하는 것을 옹호하는 논변을 펼치는 게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사치재가 왜 문제인지 맥락 의존적 소비의 특성을 조목조목 잘 요약한다. 저자가 경제학자니 경제학은 물론이고 심리학이나 사회생물학, 진화론 연구도 과하지 않게 간간이 이용하며 과시적 소비에 적응하게 되고 만족감을 잃는 것이 왜 비과시적 소비보다 빠른지를 잘 설명한다. 500쪽 정도라 약간 볼륨이 있지만 아는 내용들은 빨리빨리 건너뛰며 읽어서 재밌게 읽었다.


(2018년 12월 30일) 


우연히 접한 책인데 김용학의 『사회구조와 행위: 거시적 현상의 미시적 기초를 찾아서』(나남출판, 2003)을 거의 다 읽었다. 여담이지만 저자는 지금 연세대 총장을 지내고 있다. 아무튼 일찍 알았다면 공부하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되었을 텐데 아쉽다. 사회학과에서 커리큘럼 따라 공부하다 보면 설명의 논리를 익히고 체득할 기회가 딱히 없는 것 같다. 이론 수업들도 대부분 사상사적 측면에서 이런저런 이론들 조명하는 데에 그친 것 같고 조사방법론이나 통계 수업도 현상들의 분석수준을 엄밀히 구분하고 인과관계를 캐묻는 사고를 하는 데는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사회학의 혁명 이론,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행 논쟁, 조직군 생태학 등등의 주제를 망라하며 미거시의 방법론 통합을 시도한 사례들을 명쾌하고 짧게, 또 분석적으로 잘 대별한다는 점에서 한국어로 쓰인 좋은 교과서 같다.

Ivan Szelenyi (2015). "The triple crisis of sociology." Contexts. https://contexts.org/blog/the-triple-crisis-of-sociology/


일부 번역 


앨빈 굴드너는 45년 전인 1970년에 <서양 사회학의 다가오는 위기>를 출판했다. 다른 대부분의 위대한 이론들처럼 그것은 황혼이 와서야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였다. 굴드너는 파슨스적인 (유사quasi)-실증주의적 기능주의의 몰락과 보다 성찰적인 사회학의 부상을 예견했다. 물론 1970년에 와서 파슨스주의 사회학은 죽음을 맞았고 사회학은 가장 신나는 시대에 돌입했다. 앨빈 굴드너, 젊은 마티 립셋, C. 라이트 밀즈, S.M. 밀러, 리 레인워터, 피에르 부르디외, 데이비드 록우드, 랄프 밀리반드, 클라우스 오페, 젊은 랄프 다렌도르프 (그 당시에는 경Lord이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다른 이들이 신선한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사회학을 제기했다(당시 사회주의였던 동유럽의 몇몇 인물들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레스체크 콜라코프스키, 유고슬라비아의 Praxis 그룹 등). 1960년대와 70년대의 작업들은 학부생들과 대학원생들을 매료시켰는데,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 우수한 학생들도 끌어들였다. 당시 굴드너가 사회학의 위기를 예고했을 때 위기는 끝난 것처럼 보였고, 사회학은 구조기능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사회학은 번성했으며 급진적인 학생들의 메카였다. 그리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급진적 경향이 있는 학생들은 보통 똑똑하기 마련이었다. 


사회학 입문 과목(Sociology 101)은 원래 이해할 수 없고 경험적으로 검증도 안 되는 개념들이 꽉 들어찬 전화번호부 같았으나 이제 그것은 정치적 동원의 장이 되었다. 갑자기 수강생이 확 늘은 것이다. 1950년과 1972년 사이 사회학 전공 수강생의 수는 거의 350%가 늘었다. 그것이 정점을 찍은 1971-72년, 100개의 학사 학위 당 사회학 학위 수는 4개 정도였다. 현재 수준보다 거의 두 배인 것이다. (도표를 보라).


세기의 전환기 즈음 위기는 도착했다. 경제학으로 시작해 그 뒤 정치학이 뒤따른 사회과학은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 신고전파 경제학, 합리적 선택 이론, 그리고 실험적 연구 디자인은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고 사회학자들은 여전히 그것에 응답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학생들은 급진적 이론에 관심을 잃었다. 많은 이들은 보수적으로 되었고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인지 연금은 어떻게 될지를 보다 더 걱정하게 되었다. 사회학 학과는 교수진의 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전공생을 받으려고 자주 분투했고, 또 충분한 수강생을 확보하기 위해 자주 "섹시한"—보통 별로 수강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은—강좌들을 열었는데 그 강좌들은 사회학의 중심적 문제였던 것들과 모호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 이슈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 사회학을 경제학이나 정치학과 비교한다면 사회학은 삼중의 위기를 겪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회학은 정치적 어필(그리고 급진적인 사명)을 잃었다. 경제학과 합리적 선택 이론으로부터의 방법론적 도전에 사회학은 아직까지 적절한 응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학은, 사회학이 공통의 이론적인 핵을 가지고 있는지(어떤 책이 모든 사회학자들이 친숙해야만 하는 "위대한 책"인지)에 대해 엄청난 혼란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며, 심지어는 그런 중심적 핵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지 논쟁하고 있다. 


정치적 위기 


1960년대 중후반기와 1970년대 초중반기 사회학은 급진적인 교수진과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만약 급진적 개혁이나 혁명에 관심이 있다면 사회학은 "해야 하는 것thing to do"이었다.


1976년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의 플린더스 대학교에서 사회학의 Foundation professor로 임용된 후, 개혁적 성향의 법무장관인 피터 던컨이 그의 오피스로 나에게 방문을 요청했다. 그는 포르투갈에서의 "혁명"을 상기시켰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대에 의해 수행된 혁명이었다. "음, 호주의 군대가 혁명군이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냥 잊어버려요", 그는 계속했다. "그러나 저는 국가의 공무원입니다. 저는 그들을 플린더스로 보내 사회학 전공을 하도록 시킬 것이고, 당신의 임무는 그들에게 혁명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은 일어났다. 나는 사회학 입문 강좌에 가장 큰 강의실에 앉을 수 있는 것보다 세 배는 많은 지원자를 받았고 실제로 첫 해에 많은 학생들은 급진적 개혁가였으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에 신념이 있었다. 음, 1977년 노동당은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선거에 졌고, 피터 던컨은 따로 로펌을 차렸으며 그것은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의 급진적 개혁의 끝이었다(그리고 플린더스에서 "카리스마적인 사회학의 리더"로서의 내 커리어의 끝이기도 했다). 


모든 사회학 교수들이(젊은 사람들조차도) 학생들의 급진적 변화와 발을 같이 할 수는 없다. 나는 165년 봄 버클리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았다. 마티 립셋과 같이 강좌를 수강했고, 내 지도 교수는 네이선 글레이저(참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이었는데, 둘 모두 학생들의 급진화에 대한 반응으로 보다 보수적이 된 전(前) "좌파lefties"들이었다. 간단히 말해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초반의 교수진들은, 학생들은 좌익 급진주의자였지만, (특히 나이가 든 사람들이라면) 상당히 보수적인 경향이 있었다(아니면 적어도 보수파 혹은 "신자유주의자"로 변했거나). 나는 플린더스에서 선배 동료들에 대해서 불만감을 학생들과 상당히 공유했는데, 이것이 내가 학장이나 부총장으로 승진하는 것을 막았고 내가 1981년 미국으로 가게 만들었다. 오늘날 상황은 정반대이다. 우리는 1960년대의 급진적인 교수진들을 상당히 많이 갖고 있으나, 학생들이 교수진보다 더 보수적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보수주의자라면 대체 왜 경제학이나 합리적 선택 정치학 말고 사회학을 전공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매우 급작스럽게 우리의 문제는 사회학을 전공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자리를 찾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닌, 강의실을 채울 학생들을 우리가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변했다. 이것이 내가 "정치적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양쪽에 적용된다. 우리는 충분한 수의 학생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고, 사회학은 점점 더 급진적인 사회 개혁의 시나리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