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e 함수

R에는 여러 문자열을 연결시킬 수 있는 함수로 paste()가 있다. paste() 함수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 paste(c("char1", "char2", ...), sep = "")
    • sep 안에는 단어 사이에 무엇이 구분자가 될지를 지정한다.
    • sep가 지정되지 않는다면 기본적으로 공백이 구분자가 된다.
  • paste0 함수는 문자 간 공백을 두지 않는다.

  • 아래에 예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 둘 이상의 벡터를 연결시킨다면 기본적으로 벡터의 원소 대 원소(element-wise)를 기준으로 하여 문자열이 연결된다.

paste(c("Statistics"), "R")
## [1] "Statistics R"
paste(c("a", "b", "c"), c("x", "y", "z")) # element-wise 
## [1] "a x" "b y" "c z"
paste(c("a", "b", "c"), c("x", "y", "z"), 100, sep = " or ")
## [1] "a or x or 100" "b or y or 100" "c or z or 100"
a <- c("Hello", "World")
b <- c(",", "!")
paste0(a, b) 
## [1] "Hello," "World!"


  • 서로 다른 길이의 벡터를 연결시킨다면, 길이가 짧은 벡터가 긴 벡터를 채우게 된다. 아래의 예제에서 확인해 보자.
  • collpase = "" argument는 합쳐진 벡터 문자열들 사이의 구분자를 지정하며, paste()로 생성된 벡터의 길이를 1로 만들어 준다. 예컨대 paste(c("a", "b"), c("x", "y"), sep = " and ")는 두 개의 문자열 "a and b", "b and y"를 출력하는데, paste(c("a", "b"), c("x", "y"), sep = " and ", collapse = " ")는 하나의 문자열 "a and x b and y"을 출력해 준다. 즉, paste()의 반환값이 문자열 한 개가 된다. 아래의 예제에서 확인해 보자.
paste(c("a", "b"), c("x", "y"), sep = " and ")
## [1] "a and x" "b and y"
length(paste(c("a", "b"), c("x", "y"), sep = " and "))
## [1] 2
paste(c("a", "b"), c("x", "y"), sep = " and ", collapse = " ")
## [1] "a and x b and y"
length(paste(c("a", "b"), c("x", "y"), sep = " and ", collapse = " "))
##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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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함수 만들기 기초

2018. 6. 3. 21:02
함수 만들기

R에서 함수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아래와 같이 만들 수 있다.

  • function_name = function(arg_1, arg_2, …) {expression}

보통 {} 안은 들여쓰기를 한다. 하지만 expression이 한 줄이라면 굳이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또 중괄호를 쓰지 않아도 코드는 잘 실행된다. 그래도 가독성을 위해서라면 중괄호와 들여쓰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처럼 return()을 사용해 반환값을 지정할 수 있다. 한데 여기서 유의할 것이 있다.

  1. return()이 없으면 함수의 가장 마지막 줄을 반환한다.
  2. return() 뒤의 내용은 실행되지 않는다.
quadratic <- function(x)
{
  print("이차 함수 y=x^2")
  y <- x^2
  return(y)
  print("y를 반환합니다")
}

quadratic(10) #맨 마지막 줄이 실행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 [1] "이차 함수 y=x^2"
## [1] 100

매클로린 급수를 사용해 자연상수를 근사하는 함수를 짜 볼 수 있다. 무한히 더할 수는 없으니까 적당히 200번 째 항 정도에서 끊어보자. (여기서는 반복분 for 문을 사용했다. 하지만 if문을 사용해서 코드를 짤 수도 있겠다.)

\[ \sum_{n=0}^{\infty}\frac{1}{n!} = e \]

emake <- function(){
  e <- 0
  for (n in 0:200){
    e <- e + 1/(factorial(n))
  }
  return(e)
}

함수에는 인자를 지정할 수 있다. 위의 자연상수를 근사하는 함수를 활용해, 입력 받은 숫자 k 항까지 자연상수를 근사하는 함수를 만들어 보자.

emake2 <- function(x)
{
  e <- 0
  for (x in 0:x)
  {
    e <- e + 1/factorial(x)
  }
  return(e)
}

e <- emake2(10) # 10차 항까지 자연상수를 근사 
R 배열

이 글에서는 R의 자료 객체(data objects) 중 배열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배열

  • 배열은 동일한 유형의 데이터로 구성된 2차원 이상의 데이터이다. R에서 행렬은 2차원 객체로 정의되는 데 비해, 배열은 그 이상의 차원을 가질 수 있다.
    • 예컨대 2 * 2 * 2 배열의 경우, 2 * 2 매트릭스가 두 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 배열의 차원은 dim() 함수로 확인 가능
  • 배열의 차원과 벡터의 길이가 맞지 않으면 오류가 출력된다. 이를테면 아래의 코드 확인.
z <- 1 : 1500
dim(z) <- c(3, 5, 100)
aa <- 1 : 24
dim(aa) < c(3, 4, 2)
## logical(0)
aa
##  [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 [24] 24
dim(aa)
## NULL
bb <- 1 : 22
# dim(bb) <- c(3, 4, 2) 에러 출력 
cc <- 1 : 26
# dim(cc) <- c(3, 4, 2) 에러 출력 
  • 배열 생성 방법: array(data = NA, dim = c(), dimnames = NULL)
    • dimnames는 배열의 행, 열 따위에 이름을 부여한다.
a <- array(data = 1 : 24, dim = c(3, 4, 2), 
      dimnames = list(c("r1", "r2", "r3"), c("c1", "c2", "c3", "c4"), c("o1", "o2")))
a # 배열 a 출력 
## , , o1
## 
##    c1 c2 c3 c4
## r1  1  4  7 10
## r2  2  5  8 11
## r3  3  6  9 12
## 
## , , o2
## 
##    c1 c2 c3 c4
## r1 13 16 19 22
## r2 14 17 20 23
## r3 15 18 21 24
b <- array(data = 1 : 22, dim = c(3, 4, 2)) # 앞의 예와는 다르게, array 명령어를 사용하면 차원(dim)과 데이터 길이가 맞지 않아도 에러가 없음 
b # 배열 b 출력 
## , , 1
## 
##      [,1] [,2] [,3] [,4]
## [1,]    1    4    7   10
## [2,]    2    5    8   11
## [3,]    3    6    9   12
## 
## , , 2
## 
##      [,1] [,2] [,3] [,4]
## [1,]   13   16   19   22
## [2,]   14   17   20    1
## [3,]   15   18   21    2

교외의 삶과 성장의 불가능성: 존 치버 읽기 


1950년대 이후 미국의 도시화는, 핵가족들이 낮은 밀도로 모여 사는 자동차에 기반을 둔 주거 단지인 교외(suburb)와 주로 산업 생산과 비즈니스, 엔터테인먼트를 담당하는 내부 도시(inner city)로 분화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 후 중산층들이 개인의 집을 소유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든 미국 경제의 호황과, 고속도로와 같은 인프라를 수반한 완전한 자동차화(complete motorization), 단독 주택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게끔 발전한 주방 시설과 세탁기, 현대적 부엌 같은 가정 인프라(household infra-structure)의 발달 등에 기인한다.[각주:1]

교외의 삶은 이전과 다르게 중산층 가정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집과 자동차, 마당, 차고의 소유, 그리고 대량 소비를 뒷받침할 수 있는 메가 쇼핑몰들. 평일,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자동차나 통근 열차로 한 시간을 달려 교외의 단독주택에 도착한다. 집에는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강아지들이 반겨주고 세탁기와 식기세척기, 현대화된 주방, 혹은 개인 가정부 덕에 가사노동의 부담은 그리 심하지 않다. 주말에는 자가용을 끌고 쇼핑 센터에 나가 원하는 물건을 사거나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으리라. 실제로 이러한 자유와 안락함이 그동안 미국 중산층들의 이상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교외는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동질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실제로 교외는 미국 백인 중산층들의 정치적 보수주의의 근원지로 지목되고는 한다. 휴버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매우 개인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교외의] 삶의 물질성을 볼 때-집 소유주가 자가용을 몰고 사기업으로 일을 하러 떠나는-교외화가 “적대적 개인주의”의 정치를 낳았음은 전혀 놀랍지 않다.” 도시 공간의 특별한 배치가 사람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나름의 방식으로 조형하는 것이다. 교외는 역동적인 도시 내부와 비교해 활발한 공적, 정치적 활동이 이뤄지지 않는 “적대적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이다.[각주:2]

사적 소유에 의해 보장된 자유는 폐쇄적이며 절연(絶緣)과 도피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외의 공간이 제공하는 자유는 예측하지 못한 관계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성장 서사는 자아와 외부 세계의 관계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의 분투를 다룬다. 이를테면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의 성장은 에바에 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일부 순응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성장,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관계의 실패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이러한 타인과의 상호작용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강제 자체가 사실은 성장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외부 세계 혹은 타자와의 관계맺음에 대한 실패에 대응해야만 하는 몸짓 자체가 성장인 것이다. 소비와 안락함의 공간인 교외는 노동과 상호작용의 공간인 도시와 대비되며, 우리는 이러한 교외의 폐쇄성이 성장을 어렵게 한다고 짐작할 수 있다. 존 치버의 소설은 교외와 내부 도시의 공간적 대조를 통해 교외에서의 ‘성장의 불가능성’, 즉 중산층 가장들의 실패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치버의 소설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일상을 교란하고 위협하는 존재들에 대해 도피하며 자신의 집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의 슬픔(The Sorrows of the Gin)」은 유능한 관찰자인 딸 에이미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지만 본질적으로는 화이트 칼라 가장 교외 거주민인 아버지의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새로운 요리사 로즈메리가 어린 소녀 에이미에게 로즈메리의 알콜중독 동생 이야기를 거론하며 “네 아버지 술병을 수채에다 비워버린다면”(68) 어떨까 넌지시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이미는 그녀 가족의 삶이 공허함을, 그것은 의례적인 사교 모임에서의 연기로도 채워질 수 없음을, 그리고 역설적으로도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단정해지고 더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79)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그 공허함의 중심에는 알코올이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제 아빠가 타고 다니는 특별 열차는 그에게 남은 생애의 허례허식과 단조로움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에이미가 술을 버렸기 때문으로 추측되는, 요리사 로즈마리의 음주와 해고 이후 “끔찍한 술”에 대한 직감은 확증이 된다. 아마 로즈마리는 교외가 아닌 도시 내부의 거처로 떠났을 것이다. 에이미는 그 뒤에도 술을 여러 차례 버리고, 이는 다른 요리사와 가정부의 해고를 낳는다. 이후 에이미는 보모 헨라인 부인이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술을 훔쳐 마셨다는 혐의를 제기받고 말다툼을 하게 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사건 후 그녀는 집을 떠날 준비를 한다. 

에이미는 그녀의 행위가 불러온 결과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녀는 “어른들 세계의 가련한 타락을 감지”할 뿐이다. 이는 어린 에이미의 위치가 교외 생활자인 부모보다는 교외의 ‘이방인’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미는 부모에게 묻는다. “그러면 나는 누가 봐주느냐고?”(74) 에이미의 감정적 유대는 중산층 부모보다는 교외 바깥의 (아마도 도시의 슬럼에서 출퇴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사 도우미들과 더 깊게 관련되어 있고, 그녀가 진을 개수대에 버리는 것의 동기는 아마도 떠난 로즈마리에 대한 감정이 강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말이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어른들 세계의 타락을 “감지”하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볼 때 에이미의 떠남이라는 사건은 자신의 부모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 알람이다. 그들의 교육은 실패했으며, 당신들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가출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기타 모험 소설의 가출과 닮아 있지 않다. 소설에 잠시 언급되는 동화 ‘푸른 수염’이 암시하듯이, 그녀는 어른들 세계의 장막을 들추어 보고 난 후 탈출을 결심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발신한 경고 메시지는 무사히 부모에게 도착하여 해독될 수 있을까? 발신의 측면에서, 역장은 소녀의 뉴욕행 편도 티켓 구매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부모에게 연락한다. 

그러나 에이미의 경고는 해독되지 못하는데, 나는 이것이 성장이 불가능한 교외의 삶을 예증하는 치버의 한 문학적 스케치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지막, 아버지는 아이와 여행에 대해 생각한다. 사실 아이는 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고, 그리고 실은 그도 여행이 매일매일 똑같은 소비의 연장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하고 있는 사람이다. 소설 말미의 탁월한 묘사처럼, 그는 뉴욕으로 떠나고자 하는 딸의 행동이 피부를 조여들게 하는 하나의 메시지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적어도 역사 안에 앉아 있는 그의 딸은 이렇게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하러 온 사도에 가깝다. 그는 딸의 말에 처음에는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딸의 경고는 일종의 계시처럼 “구렁소리, 북소리, 신호 폭죽들이 터지는 소리, 음계종이 울리는 소리”를 그로 하여금 듣게 하고, 잠시 해방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는 짐짓 딸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다고 생각하는 체한다. “그는 어떻게 해야 그 아이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90) 그는 자신의 안락한 주택으로 다시 돌아오는 셈이다. 

우리는 비슷한 회귀를 「다섯시 사십팔분」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블레이크는 그의 여비서인 덴트와 성관계를 맺은 후 그녀를 해고하고, 그 해고 때문에 교외 셰이디 힐 행 통근열차에서 그녀로부터 권총 위협을 받게 된다. 통근열차 속에서 그는 극도의 긴장을 겪게 되며, 거주지의 이웃들인 콤프턴 부인 등은 그에게 있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섯시 사십팔분」에서 교외와 도시의 공간적 특성은 비교적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외는 가정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고, 가장은 가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을 갖는다. 통근열차에서 내리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차는 일터에서 가정으로의 진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다. 일터가 있는 공간인 도시에서 가장은 이러한 안정의 책임으로부터 손쉽게 일탈할 수 있는데, 도시와 대비되는 거주 공간으로서의 교외는 일탈으로부터의 복귀를 쉽게 약속하는 셈이다. 

그들이 관계를 맺은 경위는 모호하지만 블레이크가 비서의 지위와 그녀의 불안하고 유약한 성격을 이용하여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하고 버리고자 한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덴트는 왜 블레이크와 관계를 맺고자 했을까? 이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도 그녀는 어떤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평생 원한 건 약간의 사랑뿐이었어요.”(183) 통근열차 안에서 이뤄지는 그녀의 고백을 감안할 때, 「다섯시 사십팔분」의 덴트는 「진의 슬픔」의 소녀 에이미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녀가 블레이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억측이지만, 그녀와 블레이크의 관계는 블레이크에게 있어 어떤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될 수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 쉽게 배반당했는데, 사실 하룻밤의 관계는 블레이크에게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는 ‘일탈’과 다를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그녀는 그녀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블레이크를 위협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죽일 생각은 없지만, 그를 잠시 인질로 삼으며 그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고지하고 싶어 한다. 그 메시지는 수수께끼 같아 쉽게 해석되지도 않고 수신인인 블레이크에게 쉽게 도착하지도 않는다. 그는 메시지를 해석하려 애쓰는 대신 자신에게 무심하게 다가오는 교외의 풍경, 열차 바깥의 플랫폼을 바라본다. “플랫폼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외로워 보였다.”(181) 덴트가 아닌 교외 집이 자신에게 어떤 구원이라도 될 수 있는 마냥. 

소설의 말미에서 덴트는 블레이크를 풀어 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애초에 그를 죽일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블레이크가 그의 삶에 침입한 이방인인 덴트라는 존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하지만 덴트가 그를 포기한 후 셰이디 힐에서 그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을 느낄 뿐이다. 

“당신은 셰이디 힐에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182) 물론 그는 셰이디 힐에서 도망칠 수 있으며, 그녀가 그를 풀어주었으니 어느 정도는 도망친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전해 보이는 도피처로서의 교외는 기실 그의 반성적 삶의 가능성을 좀먹는다. 문제는 셰이디 힐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아닐까?

  1. Herbert Gans. 1962. “Urbanism and Suburbanism as Ways of Life,” pp. 625-48 in A.M. Rose ed., Human Behavior and Social Processes. Boston: Houghton Mifflin. [본문으로]
  2. Matthew T. Huber. 2013. Lifeblood: Oil, Freedom, and the Forces of Capitalis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p. 92-95. [본문으로]

작년 과학기술사회학 수업 과제로 제출한 것. 




1. 들어가며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미셸 칼롱(Michel Callon) 등을 필두로 하여 개발된 행위자연결망이론(Actor Network Theory; ANT)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과 기호학, 그리고 쿤으로부터 시작된 영미권의 과학기술학에 영향을 받은 사회 이론이다(김환석, 2014). 행위자연결망이론은 기존의 과학기술학과는 다음과 같은 가지 지점에서 매우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행위자연결망이론은 종래의 학문들이 기반한 데카르트적 이분법을 폐기하려는 시도를 꾸준하게 전개한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행위성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묘사하려는일반화된 대칭성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이다(홍성욱, 2010; , 2010).  

    이렇게, 우리가 익숙한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포기하자는 야심찬 제안을 내세운 행위자연결망이론은 많은 비판에 직면해 왔다. 과학의 신정치사회학(NPSS)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은 행위자연결망이론이 간과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평등을 지적한 있다. , 행위자연결망이론은 행위자들의 자율성을 너무 강조하며, 과학이 자리잡은 이미 구성되어 있는 세계의 특성을 무시할 있다는 것이다(김동광, 2010: 329-30). 헤스(D. Hess) 역시, 행위자연결망이론이 인종·계급·젠더 등의 범주를 누락시키고, 행위자들이 행위에 부여하는 문화적 의미를 간과한다고 비판했다(헤스, 2004: 212). 한편으로는 라투르를 위시한 행위자연결망이론의 논자들이 명명하고 비판하는 서구의근대성이라는 대상이 과연 응집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한다(Joas and Knöbl, 2012: 550). 

    그러나 행위자연결망이론이 보다 근본적인 인식론적 수준에서 직면한 비판은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SSK) 진영의 문제제기일 것이다. 과학지식사회학과 행위자연결망이론은 넓은 맥락에서 모두 과학 지식과 기술의 구성을 강조하는 구성주의(constructionism) 해당하기 때문에, 사이에 논쟁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언뜻 의아하게 다가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구성주의적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비인간 행위자에게 행위성을 부여하는 것이 타당한지 혹은 지식의 구성을 온전히 사회만을 독립변수로 설정해 설명할 있는지 등에 있어 이론은 대립해 왔다.   진영은 기본적인 인식론과 방법론적 문제에 있어 대립해온 것이다(김환석, 2014: 140). 이들 사이의 논쟁은 차례에 걸쳐 벌어졌는데, 하나는 흔히바스 학파(Bath School)’ 불리는 콜린스와 이얼리(Collins and Yearly, 1992) 문제제기에 대한 행위자연결망이론 진영의 대표적 학자인 칼롱과 라투르(Callon and Latour, 1992) 응답이며, 다른 하나는스트롱 프로그램 제안한 학자인 블루어(Bloor, 1999a; 1999b) 라투르(Latour, 1999) 사이의 논쟁이다 

    보고서는 블루어와 라투르의 논쟁을 중심으로, 행위자연결망이론과 과학지식사회학이 갈등하고 있는 주체와 대상에 대한 이분법적 도식의 문제, 혹은 자연(사물) 사회(인간) 이분법에 대한 문제, 혹은 라투르의 표현을 빌자면, 과학기술학에 과연사회적 전환(social turn) 이후 한번의 전환”(Latour, 1992) 필요한지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들의 논쟁은 이론 사이의 서로 다른 이론적 목표나 전통, 혹은 감정적 갈등(?)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에서 과학지식사회학과 행위자연결망이론의 논쟁은 콜린스와 이얼리의 것들만이 소개되어 있고, 행위자연결망이론의 입장만이 주로 강조되고 있다 있다(김환석, 2001; 2010; 2014). 

     글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공평성(impartiality)’ 가지고 사이의 논쟁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연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과학지식사회학에 대한 라투르의 문제제기를 짧게 정리하고 이에 대한 블루어의 비판을 살펴볼 것이다. 3장에서는 라투르의 답변을 살펴볼 것이다. 4 초반부에서는 우선 둘의 논쟁이 평행선을 달렸음을 지적하고, 둘의 논쟁을 새롭게 이해할 있는 세겡(Seguin) 주장을 살필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투르가 제시하는 행위자연결망이론의 모호성을 지적하고, 근대적 이분법을 버려야만 폭주하는 과학기술에 정치적 비판을 행할 있는 것만은 아님을 지적할 것이다



2. 라투르의 ‘이론적 도전 대한 블루어의 비판 


라투르는 과학기술학에서 사회적 전환(social turn) 넘어선 한번의 전환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사회적 전환이란, 블루어를 위시한 에딘버러 학파(Edinburgh School) 행한 과학지식의 구성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기획—‘공인된 지식체계 생산하는 제도로서의 과학을 연구했던 머튼(R. Merton) 등의 사회학자들을 넘어선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한번의 전환 블루어 등의 과학지식사회학자(SSKer) 겨냥한 것이 된다. 이러한이론적 도전 블루어는 어떻게 응수하는가? 그는 논문反라투르”(Anti-Latour; Bloor, 1999a. 이하 Bloor 1999a 인용할 때에는 괄호 속에 페이지만 명기함)에서 라투르의 논변은 그가 제기한강한 프로그램(the Strong Program)’ 대해 오도된 이해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상의 전환은 불필요하다고 그의 주장을 기각한다 


    1) 주체-객체 도식과 사물의 행위성


블루어 본인의 주장에 앞서, 우선 근대의 주체와 객체 도식에 대한 라투르의 비판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블루어가 보기에, 과학지식사회학에 대한 라투르의 오류는 “‘주체와 객체의 도식이라 있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기인한다”(82) 있다. 기본적으로 인식론은 앎에 대해 주체와 객체라는 가지 존재가 서로 동일시될 있는지, 만약 한다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다룬다. 상이한 입장들에 따라 인식론은 선천주의(nativism) 혹은 경험주의(empirici-sm) 등으로 입장이 나뉠 있다(83). 도표 1에서 사회는 주체의 자리에 위치하고, 자연은 객체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라투르는 과학지식사회학이 주체의 자리에 있는, 따라서 자연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사회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주관주의적 이론(subjectivist theory)으로 간주한다. 스트롱 프로그램의대칭성(symmetry) 원리 이론의 주관주의성을 보여준다. 대칭성 원리는 진실으로 판명된 이론이든 거짓으로 판명된 이론이든 모두 동일한 사회적 원인이 존재한다고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설명은 대칭성 원리를 위반한 것이다: 맨델의 유전학이 성공한 이유는 그것이 실재를 정확히 반영했기 때문이고, 리센코의 생물학 이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이데올로기 영향 때문에 실패했다고 설명하는 . 대칭성 원리를 따를 , 객체(자연) 대한 상이한 진술들은 모두 사회라는 주체에 의해 설명된다(84).   

라투르는 이에 반대하는데, 그가 보기에 대칭성 원리는 사실 이름과는 다르게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 대칭성 원리는 설명의 힘을 사회에만 부여하고, (그가 보기에) 역시 우리의 사회를 구성하는 자연에게는 전혀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프랑스의 파스퇴르화(The Pasteurization of France)』에서 분석한 파스퇴르의 사례를 , 파스퇴르의 성공을 그의 보수주의, 가톨릭주의, 황제에 대한 충성과 같은 사회적 요인으로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다(84-85). 그렇다면 라투르의 대안은? 새로운 대칭성 원리를 제안하는 것이다. 라투르의 새로운 대칭성에서 행위성은 역시 사물들(things)에도 귀속된다. 라투르가 보기에 과학지식사회학에서 사물들의 행위성은 완전히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라투르가 제안한 새로운 대칭성 원리에서, 자연과 사회는 같은 기원에 속한다. 따라서 근본적인 수준에서는수직선 아래에서는자연과 사회는 차이가 없고, 오직 수직선의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때에만 자연과 사회는 분리되고 고정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인식들, 수직선 상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라투르는 이질적 연결망을 구성하고 이해관계를 끊임없이 번역하는 과학적혁신가들(innovators)” 역할을 강조한다. 이들의 활동 때문에 사물에는 역사와 행위성이 존재할 있다. 이렇게 라투르는 주체와 객관의 도식을 극복하고 사물에 행위성을 부여하고자 한다(86-87).  


    2) 과학지식사회학에 대한 변호와 라투르 비판 


과학지식사회학이 사물의 행위성을 무시하며 주관주의적이라는 이러한 라투르의 반대에, 블루어는 과학지식사회학의 목적은 “자연을 [오로지 사회의 관점에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연에 관한 공유된 믿음들(beliefs) 설명하는 것이다 응수한다(87). 라투르의 비판은 “스트롱 프로그램이 자연주의적이고 인과적인 활동(naturalistic and causal enterprise) 일부라는 것을 간과하며 시작한다 점에서 잘못되었다(87). 스트롱 프로그램이 보기에 자연과 사회는 모두 믿음의 형성에 개입한다. 따라서 라투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스트롱 프로그램은실재(the real)’에의 접근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트롱 프로그램은모든 문화는 동등하게 자연에 근접해 있다 슬로건으로 표현되는 것이 적절하다. , 맨델과 리센코,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등은 모두 각각의 시공간에서, “공유된 규약(conventions) 제도화된 개념(institutionalised concepts)” 가지고,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과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다(88-89). 블루어가 보기에도 파스퇴르의 연구를 오직 그의 보수주의나 황제에 대한 충성 따위의 신념으로만 환원하는 것은 가망없는 일이다; 좋은 사회학자가 설명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로베르트 코흐(R. Koch)와는 다른 식으로 파스퇴르가 문제를 프레임화하고, 불확실한 데이터들을 다루고, 질병 원인에 대한 가설을 수립할 있었는지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과학기술사회학이 사물의 행위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라투르의 주장 역시 기각될 있다. 파스퇴르와 코흐가 동물 사체의 섬유 조직에 망원경을 대고 동일한 작은 물체를 발견했듯이(88-90), “-사회적 사물들과 과정(non-social things and process-es)”들도 역시인과적 행위성(causal agency)”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91).  

    물론 블루어는 라투르가 본인의 이런 대답에 대해 차갑게 반응할 것임을 예상하고 있다. 스트롱 프로그램이 자연적인 것의 인과적 행위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주어진 자연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을 역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블루어는 이렇게 예상되는 라투르의 반응에는 옳은 점도 잘못된 점도 있다고 말한다. 라투르의 반론은,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전제 없이는 자연주의적인 설명을 진행할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옳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과연 스트롱 프로그램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가? 우리가 아무런 전제도 없이는 사안에 대해 입장을 형성할 없다는 사실은 스트롱 프로그램 뿐만이 아닌 라투르를 비롯한 다른 비판자들에게도 모두 적용되지 않는가(91-92)?

    라투르는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실재들이 결정화되는 [도표 2] ‘아래의단계에서 사건들을 묘사하는 기본적인 존재론과 철학적 범주들을 구성하려고 한다”(92).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극단적인 경험주의를 따를 필요가 있는가? 과연 순수한 데이터만을 묘사하는 언어란 존재할 있는가? 블루어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과학사회학의 연구에서 극단적 경험주의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종종 과학자들은 그들이 연구하는 것의 인과적인 영향이나 실체를 알지 못할 매우 경험주의적인 언어를 취하곤 한다. 이를테면 1850 생물학자 다벤느(Davaine) 탄저병이 걸린 양의 피에서 “적혈구의 길이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모양의 물체 보았다고 보고했다(92-93). 하지만 탄저병 원인균을 ‘탄저병 원인균이라고 부르는 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문제가 사라질까? 모든 분류 체계와 이름 붙이기 활동은 사회 세계의 제도 안에서 공유되고 집합적으로 행해지는 활동이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93-94).  

    다음의 사례를 생각해볼 주체의 설명과 설명의 대상이 되는 세계를 분리하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는 것을 있다밀리컨(Millikan) 그가 존재할 것이라고 가설을 세운전자(electron)’라는 실체를 발견했다. 물론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라면 밀리컨이전자를 발견했다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밀리컨의 반대자였던 에렌하프트(Ehrenhaft) 생각해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전자는, 전자의 존재를 믿지 않은 그에게도 역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를 인식할 우리는 전자에 대한 사람의 관측 뒤에 개의공통 요인(common factor)” 존재한다는 것을 있는 것이다. 과학지식사회학은 바로 사람의 상이한 관측—‘재현(representation)’—뒤에 숨어 있는 어떤 데이터에 주목하고자 한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유지할 때에만, 그리고 자연 자체와 지각하는 주체에 의해 제공된 기술(description) 사이에 쐐기를 박을 때에만, 우리는 그러한 기술들의 문제적인 성격들을 부각시킬 있다”(94). 

    규약에 기반한 ‘사회적인지식 체계는 사회학자들의 상대주의적 분석에 놓인다. “만약 어떤 것이 규약에 의거한(conventional) 것이라면, 원칙상 당연히 가능한 대안들이 있을 것이다”(104). 마치 우측통행을 하는 사회에서 원칙상 좌측통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듯이. 

    블루어는 라투르를 위시한 행위자연결망이론의 연구들에서, 위의 규약주의적 관점에 의해 반박되는 “소박실재론(naive realism)”, 각각의 지시체에 대한 자연의 대응물이 일대일로 존재한다는 관점이 발견된다는 혐의를 제기한다. 라투르는 분석가가 상대주의적일 필요도, 분석의 대상이 되는 행위자보다 많이 알아야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행위자연결망이론에 있어, 과학적 논쟁이 종료된 이상 분석가는 “실재론자 되면 된다는 것이다. “자연은 솔직하다. 사실은 사실이다. . 더할 것도 것도 없다”(106; 블루어가 인용한 라투르의 문장). 지점이 라투르와 블루어의 결정적인 차이인데, 왜냐하면 블루어가 보기에 행위자에게 나타나는 자연은 순수한 것이 아니며, 사회학자에 있어 자연이 행위자들의 의식에 나타나는 과정현상학’— 연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사물들에 대한 행위자들의 인식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없는 것이다. 이른바실재 과학자 사회의 상이한 규범과 제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에, 언제나 증거(evidence) 이론을 과소결정(underdeterminate) 수밖에 없다(Kuhn, 2012) 전통을 이어받은 과학지식사회학 학파의 블루어로서는, 과학자들이 생산한 지식을 실재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라투르를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근대적 기획에 대한 전적인 거부는 과연 생산적인가?


근대적 이분법을 뛰어넘고자 하는 라투르의 연구 프로그램은 블루어가 보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라투르의 연구는 과학과 사회의-생산(co-production)” 대한 명료한 설명을 보여주지 못한다(95). 라투르의 이론 프로그램은 행위자의 속성에 대한 모든 전제를 버리기를 요구한다. 파스퇴르를 연구할 우리는 미생물과 파스퇴르를 동일한 행위자로 취급하여야 한다. 이들은행위소(actants)’—라이프니츠적 색채가 강하게 묻어나는 호명된다. 행위자연결망이론은 행위소들의 연결망의 형태와 강도가 자체로 세계를 구성한다고 보는 것이다(97). 블루어는 이러한 새로운 형이상학적 틀이 모호하다고(obscure) 본다. 또한 블루어가 보기에 라투르가 행위성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그는 어떤 때에는 비인간 행위자의 행위성을 강조하다가 다른 때에는 행위성이라 함은 넓은기호학적(semiotic)’ 의미를 지칭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98).  

    블루어는 심지어 라투르의 기획이 반계몽적(obscurantism)이라고도 주장한다라투르는 그의 이론에서 개념들에 대해 말할 대개 소극적, 부정적 의미에서의 정의를 행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행위소를 객체로 대해서도되며, 주체로 대해서도되며, 둘의 혼합으로 간주해서도된다. 그런데 그가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정의할 (positively specify) 그는과학지식사회학의 익숙한 언어로 다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98) 이를테면 우리는 라투루의 글에서의사-객체(quasi-objects)”들이 새로운사회 연결(social link)” 구성한다는 진술을 읽을 있다(96). 하지만 사회 연결이란 것이 사회 뜻함이 아니고서는 무엇이겠는가? 블루어가 강조하는 것은 라투르가 구성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이상학 역시 기존의 근대적 유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계속 강조하는이해관계역시 특정한 사회 집단의 이해득실을 전제하는 기존의 사회과학적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99-100). 사실, 우리가 딛고 있는 기존의 근대적 유산을 전적으로 거부해서 얻을 있는 것이 불명확하다면 그것을 전부 폐기해야 이유는 무엇인가(98)? 우리는 우리가 실재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자연과 사회 위에서 탐구를 진행한다. 블루어 역시 근대주의적 도식에 한계가 존재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라투르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에 대해 “도매급의 반대”(82)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3. 라투르의 응수 


라투르는 블루어의 비판에 대해데이비드 블루어, 그리고 너머를 위해”(For David Bloor... and Beyond; Latour, 1999. 이하 Latour, 1999 인용할 때에는 괄호 속에 페이지만 명기함)라는 제목의 글로 응수한다. 블루어의 비판 사항의 세목을 짚기 전에, 그는 자신과 블루어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들—‘비대칭성’— 짚고자 한다. 그가 말하는 번째 차이는 자신은 프랑스의 인식론 학자들과 논쟁하는 데에 블루어에게 빚을 졌지만 블루어는 그렇지 않은 같다는 것이다. 번째는 본인(그리고 칼롱) 블루어의 책을 번역하는 동안 과학지식사회학을 공부하고 방어해 왔지만 블루어는 별로 자신 진영의 작업에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번째는 자신은 계속해서 주제와 입장, 연구 영역, 개념들을 바꿔 왔지만 블루어는 별로 변한 없다는 것이다. 번째는 자신은 과학학 연구의 최신의 연구 트렌드에 소속해 있지만 블루어는 그렇지 않고 구닥다리의 정전들(canons)에만 갇혀있는 같다는 것이다(114-116).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블루어의 반론에 재반론을 펼친다 번째로 그는 블루어가 사물의 행위성을 인정한다는 대목을 겨냥한다. “우리가 사물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사물들은 변화를 만들기를(make a difference) 허용받고 있는가?”(117) 블루어는 밀리컨은 전자의 존재를 믿었고 에렌하프트는 전자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므로, 둘은전자 대해 다르게 반응했으며 이러한전자 사이의 상이한 인식, 차이를 만들어낸공통 요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라투르가 보기에 여기서전자 자체 아무런 변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블루어의 설명에서 전자라는 자체는 과학자들의 인식에서 어떤역할 맡아 차이를 일으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라투르는 과학지식사회학이 사물의 행위성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답변을얼버무리는 으로 간주한다. 이는 칸트주의적이고 뒤르켐주의적인 이분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또한 라투르는 주체와 객체 이분법에 대한 블루어의 옹호를 다시 비판하고자 한다. 블루어는 과학지식사회학의 목표를 ‘자연 아닌, ‘자연에 대한 공유된 신념들 사회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행위자의 자연에 대한 기술들과 자연은 분리된다. 자연에 대한 각각의 행위자들의 기술을 서로 상이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 내지는 제도,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 게임이다. 이러한 상이한 규약들이 여러 형태의 기술들을 낳는다. 물론 여기서 제도나 규약 같은 사회적 실재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처럼 자체만으로는 정당화될 없기에 우리는 세계에 대한 행위자들의 상이한 믿음들이 세계에 동등하게 근접해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런데 과학자들이란 자연과 그들의 신념 사이의 골을 좁혀 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라투르가 보기에 과학적 활동(enterprise)이란 그들의 신념이 단지 자연에 대한 재현(representation)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여기서 우리의 차이가 기인하는 것이다. 25 동안의 과학학 연구에도 불구하고 블루어는 과학자들이 ‘외부의 세계 관측하거나 보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비인간이 하는 것보다 세계에 더욱 깊이 연루되어 있다. 과학적 실천은 객체/주체의 이분법이 작동하지 않는 하나의 영역이다”(123). 블루어는 말한다. “대칭성 원리에 대한 정확하고 자연주의적인 독해는 ‘자연 사회가 모두 믿음(belief) 형성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Bloor, 1999a: 88). 그러나 라투르가 보기에 블루어는 실험실 안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그림들은 블루어와 라투르의 방법론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것이다(모두 라투르가 그린 ). 라투르의 파스퇴르에 관한 연구를 예로 있다. 그는 파스퇴르가 어떻게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를 연결망에 가입시켜 “실험실로써 세상을 들어올렸는지”(라투르, 2003) 보여주었다. 여기서 연결망에 가입된 행위자들 실재를 구성하는 있어 “엄밀히 인과적인 것은 없다”(124). 대신 이들 모두가 거시세계의 변화에 기여했다고 해석할 있다이는 블루어의 관점과 대비된다. 블루어의 관점에서는 파스퇴르와 그의 경쟁자인 화학자 리비히가 똑같은 물체를 보았고 해석의 차이는 사회적인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할 있다. 하지만, 라투르는 본인이 직접 실험실에서 관찰한바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 만약 실험실에 들어가 보기라도 했다면, 데이비드는 당연한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누구든 이름값 하는 과학자라면 그는 그가 다루는 행위자들에 의해 완전히 재정의되는 것이다(thoroughly redefined). 이것은 나와 같은 과학 연구자에게도 동일하다”(126). 다시 말해 연결망은 자연관찰된다고 여겨지는 대상 사회관찰한다고 여겨지는 주체; 과학자를 포함해 모두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계는 연결망의 효과이고, 이러한 인식 틀을 채택함으로써 우리는 근대의 이분법적 시각을 벗어날 있다.   

 


    또한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이 제시한 새로운 인식론은 단순히 연구 영역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형이상학은 본성적으로는(at heart)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슈이다.”(126) 그는 기존의 대칭성 공준을 유지하며과학자들의 믿음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유지하는 블루어의 태도야말로 “정치적인으로 무심한태도의 전형이라고 비난한다(126). 블루어의 태도는 자신이 가진 것이 자연에 대한 해석일 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에 대항할 없으며 과학의 ‘블랙 박스 여는 데에 방해만 뿐이다. 라투르는 블루어의 낡은 프로그램으로는 시민사회를 자연과 과학의 절대주의적(absolutism) 폭거로부터 막아낼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4. 논평 결론


라투르의 응답에 대한 블루어의 짧은 답변(Bloor, 1999b)에서 있듯 논쟁의 결과는 서로의 차이만을 확인한 것이라 있겠다. 실제로, 블루어는 답변에서 그는 어떠한 새로운 적극적인 논변을 펼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다음의 기본적인 사항을 지적하고 그의 원래 입장(증거에 의한 이론의 과소결정성 옹호) 다시 짧게 요약할 뿐이다. 첫째 라투르가 자신과 과학지식사회학의 입장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사실 그는 과학지식사회학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 퍼뜨리고 있으며, 둘째 통계학자가 경험적 연구 없이 얻어진 데이터에 대해 비판할 있듯이, 자신이 현장 연구 경험이 없다고 해서 본인이 펼치는 비판이 부당하지는 않다는 것이다(Bloor, 1999b: 132).  

    세겡(Seguin, 2000) 사이의 논쟁이불화 아닌 서로의근본적인 오해로부터 기인했다고 본다. 과학지식사회학과 행위자연결망이론은 모두지식으로서의 과학 다루고자 한다. 과학지식사회학은 지식을 사회 성원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지지되는 신념의 집합으로 간주함으로써과학적 지식의 세속화 기여했다. 이것은 라투르 역시 그의 반론 논문에서 재차 블루어와 그의 동료들의 공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라투르가 블루어를 두고 옳다고 그의 평에서 반어법을 읽어서는 된다”(Seguin, 2000: 504). 문제는 라투르가 발짝 나아가고자 하는 데에 있다. 결정적으로 라투르와 블루어가 불화하는 지점은, 라투르는 실험실에서 생산되는 과학적 지식과 과정의 매우 독특한 속성에 주목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세겡의 주장을 잠시 길게 인용해 본다 


라투르의 접근은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결정론에서, 과학적 활동에 의해 수행되는 존재론적 노동으로의 변화를 뜻한다. 우리가 아래에서 보겠듯이, 그러한 과학적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것이며, 라투르는 과학에 정치철학을 부여하는 과업을 수행한 참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지점은 블루어가 [과학학 연구의] “(the field)”이라고 부르는 것의 경계가 과학의 내용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 있어서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학지식사회학과 라투르는 연구에 있어 같은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다. 과학지식사회학이 과학적 지식의 형성을 조건짓는 사회적 이해관계를 밝히고자 하는한, 과학지식사회학의 목표는과학 속의 사회(society in science)”이라 있다. 반대로, 라투르는 과학에 의해 행해지는 사회적 기능을 이론화하려 한다. 그의 목적은 따라서사회 속의 과학(science in society)”이다. 그와 칼롱이 말하듯 말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대한 사회적 설명을 제공하는 데에 관심이 없다. 다만 우리는 사회를 설명하고 싶을 뿐이다....”(Callon and Latour, 1992: 348). 

(Seguin, 2000: 504-505).  


이러한사회 속의 과학연구와과학 속의 사회연구 도식에 따라 세겡은 다양한 과학 연구에 대한 접근들을 구분한다. 우선 블루어 식의 과학지식사회학 연구만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환경주의적 접근은 모두과학 속의 사회카테고리에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어떤 사회적인 이데올로기가 과학 활동의 조건—“방법, 연구의 우선순위, 펀딩, 관료 기구, 이데올로기적 가정, 인사 훈련, 학제 구분 ”— 형성하는지 탐구한다. 다른 한편 라투르를 비롯해, 사회적 이해관계나 테크노크라시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은사회 속의 과학카테고리에 포함된다. 이들은 과학이 사회를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탐구하려고 한다. 남성주의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과학은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적 질서를 강화시키기 마련일 것이다. 테크노크라시를 비판하는 이들은 과학기술의 폐쇄성의 문제를 지적하고블랙박스 열어 그것을 민주화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한다. 이들은 모두 과학이 행하는 정치적 역할을 강조한다(Seguin, 2000: 505-507). 이러한 차이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도표는 세겡의 ). 


이러한 차이를 인지한다면 그토록 격렬하게 라투르가 블루어를 비롯한 과학지식사회학 진영에  실망과 반감을 표하는지를 있다. 라투르가 보기에 과학지식사회학은 과학지식 자체의 정치성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다. 반동성은 그저 실천적인,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실험실 안에서 일어나는 이질적 연결망들의 연합과 세계의 번역을 그저 과학자들의 일로 치부하고 그러한 활동들이 사회라는 실체에 의해 설명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다. 과학지식사회학의 기본적인 이분법적 인식론적 가정은 실험실 안에서 생산되는 지식들이 실재를 형성한다는 것을 은폐하고 과학기술의 블랙박스 열기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라투르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하더라도 그의 도전을 전적으로 수용하기에는 여전히 가지 문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첫째로, 앞에서 블루어의 주장을 검토하며 보았듯 라투르가 새롭게 제기하는 방법론과 형이상학은 모호하며 그것이 기존의 근대적 이분법을 얼마나 극복하고 있는지도 과연 의문인 것이다. 라투르는 그가 말하고 있는 행위소, 단자, 연결망이나 거시세계 같은 개념들이 종래의 이분법이 가정하고 있는 사회세계와 얼마나 다른지 해명할 필요가 있다. 블루어의 비판처럼 결국 그는 근대적 이분법의 전면적인 극복을 꾀하면서도 정작 현상들을 개념화하는 데에 있어서는 익숙한 근대의 속으로 다시 돌아오곤 하는 것이 아닐까? 라투르는 그의 이론이 정교하지 못하다는 비판에 대해 이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과학자들과 어깨를 맞부딪히며 행하는 경험 연구가 속성상 자신의 어휘와 개념들을 (정적이고 지루한 에딘버러 학파와는 다르게) 역동적이게 만든다고 대꾸할 뿐이다(Latour, 1999: 115). 

    둘째로는 우리가 근대적 이분법을 전면적으로 폐기해야만 과학의 블랙박스를 열고 과학의 정치성을 직접적으로 겨냥할 있는지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울리히 벡은 후기 근대 사회에서 감각 기관으로는 지각될 없고 지식에 의해 인지되는 것만이 가능한위험 문제를 지적하며, ‘위험 대한 종합적인 과학·지식사회학적 접근을 강조한다(Beck, 1992). 그런데 울리히 벡은 후기 근대의 특징인성찰성(reflexivity)” 거론하며 폭주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의 대응 능력을 조심스레 낙관한다. 울리히 벡에 따르면, “위험에 관한 진술은 과학화된 사회의 도덕적 진술이다”(Beck, 1992: 176). 근대 초기부터 과학은 객관성, 무오류성, 합리성을 내세웠지만 정작 과학적 활동들과 그것이 생산하는 지식들의 토대는 의심받지 않은 일종의성역으로 간주되었다. 벡은 후기 근대에서 과학이 객관성, 합리성 등의 성질을 재귀적으로, 성찰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을 전망한다. 과학이, 자신이 체계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 성찰하고, 그것의 사회적 파급에 대해 숙고함으로써(=“도덕적 진술”) 우리는새로운 근대성 향해 나아갈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근대적 이분법을 전부 폐기하자는 라투르의 야심찬 제안에 어느 정도 회의의 눈초리를 보내게 한다. 이를테면 울리히 벡의 성찰적 근대화와 위험 사회론은 익숙하고 편안한 근대주의적 이분법을 포기하지 않은 과학지식과 그것의 정치성을 사회적 논의의 해부대 위에 올릴 있는 방안을 제시해주지 않는가? 우리가 인식론적 전환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그것의 도덕적·정치적 중요성에 있다면 우리는 과학지식의 정치성을 강조하는 다른 이론이 아닌 행위자연결망이론을 선택해야 하는가? 진정으로 우리는 한번의 전환 필요로 하는가? 그것이 사물의 행위성을 포괄하는 급진적인 전환이어야 이유는 무엇인가? 입증의 책임은 라투르를 위시한 행위자연결망이론의 논자들에게 달려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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