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원인 
  • 3.5파이 이어폰 잭이 헐거워져, 약하게 이어폰 잭을 건드리기만 해도 이어폰이 자꾸 빠짐. 
  • 주로 3핀짜리 이어폰에서 문제 발생; 4핀 이어팟을 사용할 때에는 문제가 없었음. 
  • 독 커넥터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명. 

수리 관련 
  • 수리점: 에이플러스맥 (안암동5가 소재) 
  • 특이사항: MacBook, iMac 수리 전문점이며 아이폰 수리를 주로 하지는 않음. 다만 수리 대상 부품이 남아 있어 수리를 받음. 
  • 수리 소요 시간: 약 20분 
  • 수리비: 5만원 

기타 
  • 독 커넥터에는 이어폰 단자와 라이트닝 케이블 단자, 마이크가 같이 붙어 있음. 따라서 교체 후 마이크 테스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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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헛간을 태우다」에서 목도할 수 있는 것은 지독한 상실의 풍경이다. 그런데 주의 깊게 읽지 않는다면 독자는 「헛간을 태우다」에서 하루키가 대체 상실을 그리고 있는지 또는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짐작하기 어려울 수 있다. 거기에는 하루키의 트릭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상실은 중요한 테마로 쓰이지만 그의 소설은 상실을 애써 부정하려는 척한다. 여기서 부정의 제스처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대개 그는 정경(情景)의 구체적 묘사로 상실의 서정을 해소해 버리거나, 선문답과도 같은 비유 같은 장치를 사용해 소설의 향방을 이리저리 바꿔 가며 상실의 서정을 애써 감춘다. 바로 여기에 하루키 소설의 중요한 한 특징—흔히 ‘쿨하다’라고 칭하는—이 있다. 그런데 단순히 ‘쿨하다’고 그의 소설의 특징을 정리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상실을 짐짓 대수롭지 않게 외면해 보이는 그의 소설은 사실 능숙하고 정교한 기교로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헛간을 태우다」의 구성은 A-B-B’-A’의 형태다. 이를 액자식 구성이라고 불러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A라는 바탕이 되는 서사체는 B를 경유해 종국에 있어 어떠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 변화라 함은 상실의 자각이다. A는 ‘나’와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기혼 남성이지만 팬터마임(무언극)을 배우는 여자아이와 진솔한 대화를 함께 하는 모종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도,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 관계는 ‘모종의’ 긴밀한 관계라 칭할 수 있는데, 그러한 긴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장치는 ‘귤껍질 까기’이다. 귤껍질 까기는 그녀의 단순함이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특정한 상황을 칭한다. 그리고 그녀에 따르면, 그러한 귤껍질 까기는, 모순이지만,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54쪽)버림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 
    여자아이가 즉흥적으로 북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고 남자 애인을 일본에 데려옴으로써 서사는 A에서 B의 국면으로 전환된다. 이따금 ‘나’는 병적으로 사과가 먹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그런 10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와 즉흥적으로 여자아이 커플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여자아이는 마리화나와 취기 탓에 일찍 잠들고 남은 ‘나’와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A에서 중심적 인물은 나-여자아이였다면, B에서 중심적 인물은 나-남자가 된다. ‘나’는 슈트라우스를 듣다가 갑자기 초등학교 학예회 때의 새끼 여우 연극을 생각하는데, 이때 불쑥 남자가 자기는 헛간을 태운다며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자는 종종 헛간을 태우곤 한다. 여기서 헛간을 태우는 것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일단은 무의미하다(남자는 헛간을 태우는 것이 도덕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말장난에 불과하다). 헛간을 태우는 것이나 귤껍질을 까는 것은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확정하기 어려운 선문답 같은 상징이라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고, 또한 플롯에서 수행하는 기능도 유사하다. 헛간을 태우는 것은 소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어떤 기능만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내부가 텅 빈 상징이라 할 수 있다(반면 귤껍질 까기 상징은 소설의 전체적 내용을 암시한다—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물론 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이것을 하루키 소설의 일종의 트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남자가 헛간을 태운다는 얘기를 들은 후 ‘나’는 집 주변에 있는 헛간을 모조리 찾아 헛간이 불탔는지 체크하는 겸 매일 아침 조깅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 달이 넘도록 불탄 헛간은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는 남자를 만난다(B’ 국면). 사실 헛간은 이미 타올랐다. ‘나’는 못 봤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분명 놓치셨어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죠. 너무 가까워서 놓쳐버리는 거예요”(78쪽). 여기서 화제는 여자아이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 화제는 남자가 꺼낸 것이다. ‘나’는 여자아이를 그후(마리화나를 피운 날) 본 적이 있냐는 물음에 못 만났다고 대답한다. 이에 남자는 ‘나’가 그녀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잊혔던 ‘나’와 여자아이의 관계가 다시 의식 위로 부상하게 된다(A’). 물론 여자아이는 찾을 수 없다. 
    남자가 태운 헛간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가 의식할 수 없었다.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남자기 때문에 결국 헛간은 여자아이의 존재에 대한 은유로 읽어도 타당할 것이다. 마리화나 연기가 자욱한 방에서 남자가 헛간을 태운다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종국에는 여자아이가 사라져 버린 상황은 환상적이기도 하고 어쩐지 섬뜩해 보이기도 하지만, 일단 그런 상상은 접어두고 귤껍질 까기와 헛간 태우기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앞서 보았듯이 귤껍질 까기는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음으로써 수행 가능해진다. 실제로 귤은 존재하지 않는다. 헛간 태우기는 소설 플롯 상 귤껍질 까기의 방법론을 수행하게끔 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헛간 태우기에서도 실제로 태워진 헛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나’가 헛간에 대해 골몰함으로써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 소설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독자들도 소설의 말미에 와서야 ‘나’와 독자가 그녀의 부재를 망각했음을 깨닫는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망각의 흐름이 이미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나’는 새끼 여우 연극을 생각한 바 있다. ‘나’는 남자가 헛간을 태우는 얘기를 듣고 난 후 잠을 자고 일어나서야 새끼 여우에 대한 생각을 했음을 기억해 낸다. 새끼 여우 연극의 뒷부분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여자아이는 어디로 간 것인가? 남자가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암시하듯이 ‘나’와 그녀의 관계는 어딘가 각별한 것이었다. 그녀의 정식 남자친구가 ‘나’를 질투하기도 했다는 진술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가 헛간 태우기라는 주제에 골몰했기 때문에 ‘나’와 여자아이의 구체적인 관계의 변화는 소설에서 결락된 부분으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여자아이의 부재는 결국 ‘나’-여자 사이의 관계맺음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계맺기의 미숙함에 대해서는 여자아이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단순함이라는 매력에 의지해 남자들을 매혹한다. 그러한 매력의 발현은 귤껍질 까기라는 비유로 상징된다. 귤껍질 까기는 지극히 얄팍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주관이 비존재(귤-없음)의 존재(귤-있음)를 가정하거나 의식하는 것이 아닌 주관이 비존재의 비존재성을 그저 잊어버림으로써 이뤄진다. 
    중요한 것은 ‘나’ 또한 단순하게도 헛간 태우기에 대한 생각을 거치며, 귤껍질 까기의 메커니즘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녀를 잊었다는 데에 있다. 그녀의 없음을 망각한 것은 결국 남자가 그녀의 존재를 귀띔할 때 비로소 자각된다. “주로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 놀러가지 않겠느냐고 권했다”(54쪽). 이러한 적극적인(?) 나의 태도가 남자와 헛간 일화를 거친 후 달라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와 여자아이의 구체적인 관계 변화는 소설에서 결락된 부분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독자들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나’와 여자아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제3자인 독자들은 무언가 두 사람의 관계에 어떤 삐걱거림이나 실패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뿐이다. 혹은 헛간에 대한 몰두 그 자체가 관계의 실패로의 귀결일 수 있다.
    남자에게 있어 도덕의 유지는 ‘동시 존재의 균형을 인정’함으로써 이뤄진다. 그 동시 존재의 균형이란 풀어 말하자면 내 속의 서로 충돌하는 여러 자아들을 의식하는 행위이다. 내 속에는 헛간을 불태우고 싶은 자아도 존재하며 그것을 꾸짖고자 하는 자아도 존재한다. 남자는 헛간을 태움으로써 그 균형을 이루고자 한다. 여기서 실제로 헛간 태우기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남자가 헛간을 태움으로써 자기의 평형을 유지하고 자기가 무너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리화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은 실정법상 명백한 범죄 행위지만, 동시 존재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용인될 수 있다. 그래서 남자의 도덕은 실은 매우 유아(唯我)적이다. 헛간을 태운다는 것은 사실 자신의 이중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헛간 태우기에 대한 골몰도 결국에는 여자아이의 망각에 대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 서술자는 ‘나’이기 때문에 여자아이와의 관계에 있었던 실패는 은폐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마지막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는 서술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는 (실패한) 관계의 대상인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 실패(여자아이의 부재를 잊기)를 망각하게 해 준 헛간에 대해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헛간을 태우다」가 단순한 환상소설이 아니며, 제3자인 독자가 ‘나’와 여자아이 사이 관계의 실패를 추론할 때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지독한 상실의 풍경으로 비친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오후의 마지막 잔디」, 『중국행 슬로보트』 141쪽).


이번에 출간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를 모두—로저 페더러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읽었다. 그의 에세이는 정말로 훌륭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선 그는 청탁받은 글의 주제와 상관없는 것을 말한다. 혹은 더 나아가서 말하면 안 될 것에 대해 말한다. 이를테면 한 미식 잡지에서 돈을 받고 미국 플로리다의 랍스터 축제에 대해 취재한 글(“랍스터를 생각해봐”) 에서 동물의 고통과 육식의 윤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예시 하나에 불과한데, 어쨌든 이것은 아주 대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보통 편집자가 누군가에게 잡지에 실을 글을 청탁할 때 그는 내심 자기가 받았으면 하는 글의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할 말을 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작가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덕목이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한 미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월리스를 훌륭하다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청탁받은 글을 아주 장황하게 써 낸다. 일례로 (역시 돈을 받고 간) 크루저 여행에 대해 쓴 글은 국문으로 180여 페이지가 넘는다. 다른 예로는 미국 영어 용법(usage) 사전에 대해 쓴 글이 국문으로 100여 페이지가 넘는다. 이것도 역시 대담한 일이다. 왜냐하면 잡지에 글을 실을 때에는 분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분량을 맞추는 일에 대해서만 편집자들이 상당한 정력을 소모하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많은 학술 저널들은 정해진 분량을 넘겨 원고를 투고할 때 투고자에게 돈을 엑스트라로 더 받는다. 어쨌든 그는 이중의 의미에서 편집자에게 성가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좋은 글들은 본질적으로 잡지에 실리기 애매한 종류의 것들이다. 기본적으로 잡지란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내서 존속해야 하는데, 좋은 글들은 필연적으로 잡지의 수익성과 배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글들은 잡지의 정해진 분량(이를테면 200자 원고지 40매)으로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제한된 지면에서 말해야 할 것들을 모두 말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여기서 (청탁을 받는) 작가들은 두 가지 선택지에 직면한다. 그냥 그런 글을 써냄으로써 잡지와 공생하거나 뚝심 있게 밀고 나가거나. 생계 등의 여러 문제 때문에 후자를 선택하는 작가들은 드물다. 어쨌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드문 작가라 할 수 있겠다. 


어제 그의 글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을 읽으며 감탄했다. 이것은 사실 한 용법 사전에 대한 서평이지만 글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월리스에게 글을 청탁한 잡지는 이 글의 게재를 거부했다. 어쨌거나 따로 번역출간된 글을 읽는 입장에서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고 대단한 것은 월리스가 이 방대한 글에서 서평의 목적(독자들로 하여금 “당신은 이 책을 사겠습니까?” 하고 묻기)을 뛰어넘는 다양한,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주제들을 건든다는 것이다. 몇 가지만 들자면 그는 일단 이 글에서 오웰의 글 “정치와 영어(Politics and English Language)”에서의 통찰들이 여전히 유효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언어 사용에는 사실 (그것으로 인해 얻어질 공적 이익과는 별개인) 자기 표현의 욕구와 구별짓기의 동기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함과 동시에, 민주적 사회에서 전문가가 가져야 할 윤리 내지는 덕목을 근사하게 예증한다. 이 글만이 아니라 여기 실린 거의 모든 글이 다 중요하지만 서로 이질적인 주제를 하나의 중심 소재를 바탕으로 섬세하게 엮어낸다는 점에서 글을 읽으면 압도적 감탄이 들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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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함께 웃기

2018. 5. 8. 08:26

월리스의 「카프카의 웃김에 관한 몇 가지 말」과 카프카의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를 읽고 쓴 글 



# 개인적 고백 혹은 TMI 


잠시 개인적 변화를 이야기하며 글을 시작할까 한다. 무엇이냐면 바로 내가 최근 들어 웃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나 드라마, 영화를 볼 때, 그리고 심지어는 수업을 들을 때나. 중요한 것은 남들이 따라 웃지 않는 지점에서도 혼자 웃는다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는 최근 영화관에서 홍상수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를 본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웃긴 장면들이 많아 끅끅거리며 자주 웃었으나 주변의 관객들은 전혀 웃지 않은 것 같아 영화가 끝나고 나갈 때 혹시 방해가 되지는 않았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측면에 한정할 때 아주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유년기와 청소년기 때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항상 꽁해 있고 삐딱한 생각만 한다고 자주 지적을 들었기 때문이다.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는 없다는 속담을 감안할 때, 나는 이제 자주 웃음으로써 비로소 세상과 화해하기 시작한 셈이고, 또한 생리학적으로 볼 때 웃음은 건강에 좋다고 하니 이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신변잡기가 카프카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 혹시 웃기지도 않은 카프카의 텍스트를 웃기다고 애써 변호하기 위해 원래 나는 잘 웃는다는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서일까? 그런 의도가 없지는 않다. 카프카의 텍스트를 읽으며 웃을 때 주변에 같이 웃어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원래 이게 웃긴 것인지 내가 잘 웃게 된 것이 원인인지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카프카의 텍스트가 사실 정말로 웃기다는 것을 지적하는 몇몇 작가들이 있었고, 바로 이것으로부터 내가 전적으로 이상한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작가들 중 한 명이 이번에 소개한 에세이의 저자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이다. 



# 월리스의 말 (1) - 자아와 유머 


월리스가 지적하는 바의 핵심은 “농담을 오락으로 여기고 오락을 안심되는 것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자란 학생들에게는 카프카의 위트가 접근 불가능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179쪽). 이것은 물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월리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카프카의 유머는 우리를 ‘달래 주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신경을 긁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이것은 카프카 소설의 핵심을 놓친다면 음미하기 어렵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자아(self)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자아를 그저 ‘가지고’ 있다고 (“that a self is something you just have”)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아, 혹은 비유하자면 ‘집’을 향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여정을 밟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사실은 우리의 집이라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그 자체로 개별적인 존재라고 생각을 한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개별적인 존재인데 아직 내면의 ‘진정한 나’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거나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두 경우 모두가 월리스가 각주 3번에서 지적하는 ‘도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생각, 즉 개인이 그저 그 자체로 개별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비극일 수도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막막함 내지는 절박함 자체에 대해 그다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카프카의 유머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 월리스의 말 (2) - 집요함과 비극


“우리는 정확히 그 절박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문으로 꼭 들어가야 한다는 필사적인 절박함을 느끼고 있고”(월리스, 181쪽) ... 카프카의 작품들의 특징 중 중요한 것 하나는 어떤 목표(가치/자아/목표 등 무엇으로 생각해도 좋다)를 향한 도정이다. 카프카의 두 가지 유명한 장편 소설 『소송』과 『성』에서 그러한 목표는 각각 ‘자신이 고발당한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소송으로부터 승리하는 것/혹은 벗어나는 것’, ‘성에 가는 것’이다. 물론 이 목표들은 철저히 배반당하는데, 조금만 거꾸로 생각해볼 때 이 배반보다 중요한 것은 동기가 모호한, 인물들의 어떠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이지 카프카의 작품 속 인물들은 이상하리만치 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집요함은 서사적으로 볼 때 비극을 극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집요한 서술 자체가 만들어내는 유머에 대해서는 나중에 부연할 기회가 있다면...) 그런데 월리스는 “카프카의 희극이 또한 늘 비극이고 그 비극이 또한 늘 크고 경건한 기쁨이 된다는 더 깊은 차원의 연금술”(178쪽)을 지적한다. 


이 연금술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답하기 이전에 우선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를 살펴보자. 이는 ‘유럽인의 평균 교양’ 수준에 도달한 원숭이 ‘빨간 피터’의 고백록이다. 그는 서두에서 학술원이 요청하는 바에 자신이 모두 부응할 수 없음을 먼저 이야기하는데, 왜냐하면 “지난 5년간의 세월”이 자신을 “과거 원숭이 상태에서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거쳐온 훈련이랄지 학습의 과정 이후 그는 이전의 그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이고, 그 둘 사이에는 인식상의 심연이 있어 인간처럼 된 ‘빨간 피터’ 입장에서 이전의 원숭이로서의 삶을 회고하는 데에는 많은 부정확성이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각고의 인내를 거쳐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소설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단어인 ‘출구’에 있다. 그는 출구를 찾아야만 했고, 그 단 하나뿐인 출구의 바깥에는 바로 인간의 삶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출구를 찾는 것이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출구를 거쳐 인간이 되었지만 그것은 “원숭이로 머무는 것을 그만두”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149쪽). 즉 출구를 찾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느 정도 강요된 행위였으며 출구로의 도정 역시 인간이라는 도달 목표를 상정하고 계획을 착실히 실행하는 것이 아닌 그저 현재의 존재로 머무르기를 ‘그만두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은 소설에서도 계속해 언급하듯이 자유라는 상태와는 상반된다. 자유를 명확히 정의내리기는 어렵지만, 피터는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자유의 한 종류로 인식하고 있다. 사실 이는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유의 개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에서 벗어나 망망대해로 질주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빨간 피터가 자유를 “아마 제가 원숭이 시절에나 알았던 감정일 것”이라고 회고하는 것이다. 피터는 동시에 곡예사들의 움직임을 보고 자연을 거스르는 조직된 행동 역시 인간의 자유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이 인식으로부터 자유란 것이 모호한 감정이며, 인간들이 “자유를 가지고 서로 기만하는 경우도 허다”하며(150쪽), 자신의 출구를 향한 몸부림을 자유라고 하기 어려움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결국 출구를 향한 몸부림은 목적 없는 ‘문을 두드리는 행위’ 그 자체였을 뿐이다. 



# 월리스의 말 (3) - 카프카의 연금술 


인간이 되어 출구를 연다는 것은 애당초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된다고 우리의 창살을 열어준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행 불가능한 약속이다. 그런데 어쨌거나 (웃긴 일이지만) 출구를 향한 문은 열리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의 모순 혹은 난점들이다. 원숭이를 부자유의 상태로 내몬 것은 인간이다. 이 부자유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a) 원숭이로서의 자유를 최대한 활용하거나, b) 혹은 원숭이가 되지 않는 것이다. b는 원숭이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지만 창살을 벗어나게 해 준다. 창살을 벗어나 인간이 되는 것은 자유일까 자유가 아닐까? 자유 대신 탈주(출구)를 택한 행동이 과연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일까? 원숭이의 자유와 구분되는 인간의 자유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렇게 인간이 된 피터의 회고에는 감탄과 절망이 혼재한다. 감탄은 어찌 되었건 훈련을 거쳐 “예술가로서 술병을 내던”지게 된 그 결과 자체에 대한 것이고, 절망은 인간들에게 있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의미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며, 그것은 사실 기만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그의 원숭이 시절을 일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그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자유를 택하는 대신 출구를 향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출구는 열리었으나  출구의 바깥에 역시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강요된 상황에 처해 있다는 피터의 실존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글의 마지막은 씁쓸한 웃음의 절정을 장식한다고 할 수 있다. “제가 밤늦게 연회나 학회, 흥겨운 모임에서 집에 돌아오면, 반쯤 조련된 작은 암컷 침팬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원숭이 식으로 그녀 곁에서 쾌락을 얻습니다. 저는 낮에는 그녀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시선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조련된 동물의 착란 증세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은 저만 알아차릴 수 있으며, 저는 이를 견딜 수 없습니다.”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카프카적인 것의 세계에서 코믹한 것은 … 가벼운 어조를 통해 비극적인 것을 조금이라도 견딜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 (진실이든 가정된 것이든) 비극의 장엄함에서 아직까지는 찾아질 수 있는 위안을 희생자들에게 빼앗아 버림으로써 비극적인 것을 알(egg)의 상태에서 깨뜨려 버리는 것이다.”(Kundera, The Art of the Novel) 여기서 “카프카의 희극이 또한 늘 비극이고 그 비극이 또한 늘 크고 경건한 기쁨이 된다는 더 깊은 차원의 연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영웅의 좌절이 우리에게 눈물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 (영웅의) 실패 자체에 대해 우리가 함께 슬퍼하고 위안삼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비극은 전혀 장엄하지 않다. 피터는 인간의 삶에 대해 어떠한 가치평가를 내리지 않지만(“저는 한탄하지도 않고 만족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견뎌할 수 없는 것은 엉뚱하게도 쇼의 막이 내린 뒤 집에서의 ‘암컷 침팬지’와 원숭이 식으로 교미를 나누는 상황에서이다. 이런 상황 자체가 일반적 비극에서 느낄 수 있는 슬픔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독자로부터 하여금 웃지 않을 수 없게 (큰 소리로 웃든 쓴웃음을 짓든) 만드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드물게라도 가끔 관광객이 되어보는 것은 정말로 영혼에 유익할 수 있다. 하지만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방식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 좀 울적하고 착잡한 눈길로 ‘그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어떻게든 그것을 다룰 길을 찾자’ 하는 방식으로 유익하다. 내 경험상, 국내 여행은 시야를 넓혀주거나 긴장을 풀어주는 경험이 아니었다. 장소와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정신에 이로운 효과를 발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행은 나를 극단적으로 위축시키는 경험이었고,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겸손함을 일깨우는 경험이었다. 내가 어엿한 개인이라는 환상을, 내가 어떻게든 이 현실을 벗어나거나 초월해서 살고 있다는 환상을 위협하는 경험이었다. ... 내가 단체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곧 어엿한 현대 미국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고, 무지하고,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늘 욕심을 내고,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늘 실망하고 마는 미국인이. 그것은 내가 애초에 경험하겠다고 찾아갔던 훼손되지 않은 무언가를 얄궂게도 그런 내 존재로 훼손하는 일이다. 내가 없다면 경제적 측면 이외의 모든 면에서 오히려 더 좋고 더 진실된 장소가 될 곳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는 일이다. 기나긴 줄, 답답한 정체, 반복되는 흥정을 겪으면서,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없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직시하는 일이다. 관광객으로서 나는 경제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 실존적으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시체에 들러붙은 벌레 같은 존재가 된다. 


「랍스터를 생각해봐 Consider the Lobster」 313쪽 각주 7번.



요컨대, “고전으로 추앙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정말로 낯선 요소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장애물을 처치해야 한다. 생소한 요소들이 더 이상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것을 충분히 공부하든, 아니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우리가 다른 19세기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종주의적/성차별적 요소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처럼) 잠깐 찡그린 뒤 계속 읽어나가든.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그리고 이 점은 틀림없이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어떤 예술은 온갖 장애물을 넘는 추가의 노력을 들이고서라도 감상할 가치가 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단연코 그런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서구 고전문학을 압도하는 거물이라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과 필수 교과로 추앙됨으로써 오히려 가려지는 사실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할뿐더러 재미있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의 소설에는 거의 늘 좋은 플롯이 있다. 강렬하고 복잡하고 철저하게 극적인 플롯이 있다. 살인과 살인 미수와 경찰과 문제 있는 집안의 반목과 스파이가 나오고, 터프 가이와 아름답고 타락한 여인과 간지러운 사기꾼과 소모성 질환과 뜻밖의 유산과 반드르르한 악당과 흉계와 창녀가 나온다. (352쪽)


요컨대, 도스토옙스키는 정말로 중요한 것들에 관해서 소설을 썼다. 그는 정체성, 도덕적 가치, 죽음, 의지, 성적인 사랑 대 영적인 사랑, 탐욕, 자유, 집착, 이성, 믿음, 자살에 관해서 소설을 썼다. 게다가 자신의 인물들을 대변인으로 격하시키거나 자신의 책들을 팸플릿으로 격하시키지 않고서도 그 일을 해냈다. 도스토옙스키의 관심은 늘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즉, 어떻게 진짜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저 유달리 약삭빠른 능력으로 자신을 보전할 줄 아는 동물이 아니라, 가치와 원칙에 영향 받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355쪽) 


프랭크의 전기를 다 읽은 미국의 진지한 독자/작가는, 왜 현재 우리의 소설가들이 고골이나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 주제 면에서도 얕고 가벼우며 도덕적으로 빈곤한지를 골똘히 생각해보게 도리 것이라고. 프랭크의 전기를 읽은 우리는 절로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왜 우리는 우리의 예술이 심오한 신념이나 절실한 질문으로부터 늘 어느 정도 아이러니한 거리를 두도록 만들까? 그래서 오늘날의 작가들은 그런 신념이나 질문을 우스개 취급한다. 설령 다루더라도 텍스트간 인용이나 부조화스러운 병치 따위의 형식적 장난으로 위장하여, 진짜 절박한 내용은 무슨 다면적 낯설게 하기 전략 따위의 쓸데없는 짓으로 별표 사이에 가둬두곤 한다. (365쪽) 


「조지프 프랭크의 도스토옙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