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od, Sweat & Tears - 어린이는 인류의 아버지Child is Father to the Man. 

 

왜 이 앨범을 지금 접했을까? 최근 올맨 브라더스의 라이브 연주와 존 메이욜의 블루스브레이커스를 듣다가 우연히 앨 쿠퍼 등이 참여한 [Super Sessions] 앨범을 알게 되어 그 음반에 꽂혔는데, 그러나보니 쿠퍼가 (처음에) 주도했다던 이 그룹의 데뷔 앨범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앨범 정말 굉장하다. 

 

블루스 록과 포크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관악기와 현악기 섹션을 추가해 정말 다채로운 장르들을 커버한 명반이다. 끈적한 오르간으로 시작하는 두 번째 트랙 "I love you more than you'll ever know"는 앨 쿠퍼의 앙칼진 보컬이 돋보이고, 혼 섹션은 곡에 웅장한 멋을 더해 준다. 세 번째 트랙 Morning Glory의 경우 시작에서는 밴드가 가지고 있는 재즈적 지향을 넌지시 보여주다가, 금세 블루스로 돌아가 버리는 귀여운 맛이 있다. 다섯 번째 트랙 Without Her에서는 심지어 보사노바가 시도된다. 그런데 악기들의 배킹 연주가 중단된 사이 루 리드 풍으로 낮게 읊조리는 앨 쿠퍼의 (조금은 음산한) 보컬은 다른 보사노바와는 차별화되는 느낌을 제공한다. "I Can't Quit Her"는 제일 팝적이고 호소력 짙은 블루스 넘버이다. "Somethin' Goin' On"의 즉흥연주도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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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코닥은] 젊은 여성들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독려함으로써 사진의 주제가 새로워졌다. 사진이 성인들의, 특히 여성들의 유쾌한 순간들을 포착하게 된 것이다. 코닥은 젊은 여성들에게 소풍갈 때 코닥을 가져가서 꼭 대단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그저 친구들과 재미있었던 때와 같은 개인적으로 특별했던 순간들을 담으라고 독려했다. 1903년의 한 광고는 “코닥 없는 휴가는 낭비된 휴가”라고 말했다. 즉흥적인 스냅사진들은 공식화되고 양식화된 사진을 찍는 전문가들로서는 잡아낼 수 없는 개인들의 진실한 순간들을 포착할 터였고,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이상화되거나 정형화된 지위, 나이, 성 역할 등으로 환원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개인의 ‘진정한 모습’은 여가나 휴식을 취하는 비공식적인 순간들에서 가장 잘 드러날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경향을 보여주는데, 자기표현이라는 개념과 여가를 도덕적인 필수 사항(거의 의무 사항)으로 보는 개념을 담고 있는 것이다. (게리 크로스, 로버트 프록터 著,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 병, 캔, 상자에 담긴 쾌락], 김승진 譯, 동녘, 2016: 278쪽)

낸시 웨스트가 설명한 변화의 두 번째 측면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아마도 이 열망을 가졌던 사람들은 1890년대에 카메라를 들고 낭만적인 휴가를 갔던, 그리고 1900년대에는 어머니가 된, ‘해방된’ 깁슨걸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전문 사진가에게 죽은 아이를 찍어 달라고 하는 대신, 직접 행복하고 활기 넘치는 아이의 모습을 스냅사진에 담았다. 어린 시절을 예찬하는 이 새로운 경향은 천사 같은 아기라든가 가엾은 부랑아 아이 등과 같은 옛 이미지를 몰아내고 ‘귀여운 아이’의 컬트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는 즐거워하고 즐거움을 주는 아이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가 부상했다. 영아사망률이 낮아지면서 부모들이 아이의 생존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게 된 것도 이런 현상에 기여했다. 귀여움을 담은 이런 사진들을 통해서, 성인들도 행복과 쾌락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을 ‘경이로운’ 아이의 모습에 투사했다. (279)

빅토리아인들이 시간의 공포에 대항하기 위한 성채로 “영원한” 이미지를 사진에 사용했다면, 코닥은 변화의 공포를 새로운 방식으로 완화시켰다. 코닥은 “시의성 있는” 이미지를 사진으로 포착해서 그 이미지가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었다. 포착된 이미지는 동결된 상징이라기보다는 즐거운 순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진이 보편성의 상징세계인 내세와 교신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이제 새로운 시대의 이상은 즐거움과 사랑이 넘치는 특정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이는 현대 특유의 두 가지 가치로 드러났는데, 하나는 데이트의 낭만적 감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의 경이로운 순수함이었다. ‘코닥하기[사진찍기]’도 초창기의 사진이나 초상화 그림과 마찬가지로 괴로운 기억들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행복한 장면들만이 사진에 담길 것이었다. 사진은 죽음을 무시하기 위한, 혹은 죽음을 초월하고 부인하기 위한 정교한 노력의 일부가 되었다. 점점 더 탈종교적으로 변해가던 세계에서, 사진은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안식을 제공했다. (282-83)



Garland, David. 2001. The Culture of Control: Crime and Social Order in Contemporary Socie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7장 요약. 

 

Ch. 7 “The New Culture of Crime Control.” 

 

167-168쪽

  • Field(장)에 대한 설명: 20세기 중반의 형벌-복지주의 필드와 현대의 (형벌) 필드는 어떠한가? 하지만 필드의 특성을 분석하는 데에는 두 가지 분석적으로 염두에 둘 쟁점이 있음: (1) field의 극단적이고 핵심적인 특성만을 고려해 간단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형벌 필드의 극단적인 특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장점이 있으나 단점 역시 있음. 현대의 형벌 필드도 ‘삼진아웃제’ 같은 극단적인 케이스로만 설명될 수 없음. (2) 역사를 단절로 볼 것인가? 하지만 역사는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을 대체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새롭게 발생하는 것과 기존에 있었던 것 사이의 얽힘, 상호작용을 관찰할 필요가.

  • 이번 장의 질문: 지난 30년 동안 범죄 통제와 사법 제도(criminal justice)는 어떻게 자리를 잡아 왔는가? 그것을 조직하는 원칙은 뭐고, 전략적 원리는 무엇이고, 모순은 무엇인지. 그리고 영국 미국의 지난 30년간 범죄 통제 기구가 다른 사회적 발전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특히 개혁된reformed welfare state와 후기 근대의 사회 조직들과 관련해).

 

The crime control apparatus 

  • Penal modernity의 institutional architecture는 크게 바뀌지 않았음. 대신 바뀐 것은 그것의 배치deployment, 전략적 기능, 사회적 의미다. 물론 형벌의 크기, 무엇을 강조하는지에 대해서는 변화 있었음. 1980년대 이후, 미국 영국에서 징역형의 길이는 늘어났고, 구류형(custodial sentences)이 좀 더 많은 사건들에서 쓰이게 되었음. 감옥을 짓는 사업도 더욱 성장했고, 감옥 인구의 인종적 구성도 더 편향적이어짐. 하지만 이것은 형벌 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배치(deployment)에 변화가 있어서.(168-169쪽).

  • ‘Policing sector’(치안 섹터)의 변화: 911 전화 식의 ‘반응적reactive’ policing으로부터, 좀더 능동적proactive인 community policing efforts 지향적으로 변해 갔다. 치안은 더 스마트해졌으며, 좀더 로컬 커뮤니티에 적응하도록 조정되었다. 그리고 다른 치안 파트너 조직과 유연하게 연합하였다(관료제적이 아니라). / 하지만 경찰력의 daily practice는 30년 전과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 신기한 것은 penal-welfarism과 연관된 교정 기구들이 아직도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무기징역은 덜 흔해졌고, 소년법원(juvenile court)와 보호관찰 서비스(probation service)는 여전히 범위와 활동을 늘려가고 있다. 또한 사회적 관계 전문가, 정신치료 전문가들 역시 더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치료 프로그램 역시 상당히 늘어나고 있다. 

 

The third sector: policing, penalty—and prevention

  •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crime control field의 경계선이 경찰이나 법원 같은 criminal justice state의 기관들로 확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행위자, 에이전시들이 crime control practice에 굉장히 많이 참여하고 있게 되었다! 범죄를 관리하는 것은 전문가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와 경제 분야 행위자들의 책임으로 여겨지고 있다. (170쪽)

  • 이런 섹터의 출현-확장은, crime control field의 지향이 ‘응보 retribution, 억제deterrence, 개혁reform’이 아닌 보다 ‘예방, 피해-줄이기harm-reduction, risk management’ 쪽으로 옮겨가게 하고 있음. (171쪽)

 

The declining autonomy of criminal justice

  • Declining autonomy: 왜냐하면 형벌정책의 ‘소비자’와 대중(public)에게 보다 responsive해야 하기 때문에. “Criminal justice is now more vulnerable to shifts of public mood and political reaction.”(172) 형벌제도 전문가들의 설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 => 1990년대의 흔한 패턴: high visibility crime (e.g. 마약남용, 성범죄, 강력범죄)가 미디어와 대중들의 관심 및 분노의 초점이 되며, 이것은 뭐라도 빨리 대책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urgent demands 불러들임. 삼진아웃제, 어린이 교도소의 재도입 등등(173쪽 참고)이 이런 긴급한 요구에 의한 대책들의 주된 예시. 이것은 형벌학적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고 대중을 안심시키고, 형벌 시스템의 ‘신뢰성’을 회복하려는 시도.

 

The extent and nature of structural change

  • 이제 정부만이 criminal justice system 독점하지 않음; 국가는 자신의 능력이 한정적일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형벌 제도는 mixed economy of security provision and crime control로 작동하고, 지난 30년 동안 성장한 프라이빗 시큐리티 회사들을 다양한 기관들이 활용하기 시작. 

  • 형벌제도의 변화는 복지국가의 변화와 비슷하다. 즉 사람들은 ‘복지의 종말’, ‘사회적인 것의 종말’을 말하지만 이것은 수사에 불과한 것처럼(=복지국가 제도는 여전히 남아 있고 완전히 폐지되지 않은 것처럼, 형벌-복지적 정책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음. 대신 형벌정책은 지난 형벌정책의 문제에 대응하고자 애썼음. (이런 점에서도 복지국가와 비슷 - 복지국가가 자신이 만들어낸 문제에 대응하고자 변화했듯이). (174쪽)

 

The new culture of crime control

  • 지금까지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 가능하다: 비록 control의 구조 자체는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변화는 “문화”의 수준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통제의 문화는 다음 세 가지 측면을 둘러싸고 일어남: (1) a re-coded penal welfarism, (2) a criminoloy of control, (3) an economic style of reasoning. 

 

The transformation of penal-welfarism

 

  • 재활/갱생(rehabilitation)이라는 말뜻은 사뭇 다른 특성을 띰. 개인의 복지보다는 범죄 통제의 관점에서 더 강조된다. 재활은 그 자체로 목적인 복지가 아닌, 리스크 매니징에 필요한 수단 중 하나가 되었음. (176쪽) 

  • 보호관찰(probation)은 한때 형벌-복지적 관점의 대표적 정책이었으나 이제는 사회적인 성격을 잃고 공동체가 가하는 형벌의 일종처럼 됨. 또한 보호관찰 역시 재범의 리스크가 큰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새로운 게이트키핑 룰이 되었다. (177쪽) 

  • 감옥 역시 새롭게 됨. 형벌-복지 시스템에서 감옥은 갱생이 불가한 이들을 다루는, 교정 섹터의 밑바닥이었음. 오늘날 이것은 배제와 통제의 메커니즘으로 더 확연히 작동. 지금 미국에서 감옥은 소련 굴락과 비슷하게 작동한다; 200만의 수감자들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지는 집단, 인종 출신. 이런 감옥의 변화는 노동의 변화와 관련이 있음. ‘최하층underclass’ 남성에게 가능한 entry-level 일자리가 실종되었고, 또 범죄하기 쉽고 가난한 가족, 동네의 사회자본이 감소했다는 것은 한때 수감자들이 다시 주류 사회로 통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 (178)

  • 새로운 개인화: 형벌-복지 시대, ‘개인화’라는 것은 범죄자의 기존의 삶의 경력, 범죄자의 사회적 관계, 병리적 특성 등을 고려해 형벌을 내리는 것이었음. 형벌-복지 시대에 개개인 피해자는 잘 조명받지 않았다(오히려 피해자는 추상적인 인격체로 다뤄짐).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이것은 완전히 역전됨. 개인 피해자가 형사절차 관련 정보를 잘 받고 있어야 하는(be kept informed) 사람이 되었고, 범죄에 의해 피해자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피해자 진술권이 도입되었다. (179-80)

  • 국가와 가해자 사이 관계도 바뀌었다. 형벌-복지 접근은 가해자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같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가해자의 재활, 범죄의 근본원인을 다루는 것은 모두의 이익으로 생각됐다. 오늘날 가해자의 이익은 공중public의 이익과 대비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 관계에도 비슷하다—둘의 이익은 제로섬으로 여겨진다. (가해자의 권리를 덜 respect하고, 공공의 안전에 절대적 우선권을 부여하는 대표적 사례: 아동성범죄자알림서비스.) 

    • penal-welfarism에서 범죄자의 스티그마(낙인)은, 사법절차의 해롭고 불필요한 부산물로 여겨졌다. 특히 소년부 재판은 낙인을 줄일 수 있게 섬세히 디자인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스티그마는 범죄자들을 벌하는 데 유용한 것이 되었다. 

    • 가해자의 가치가 0으로 줄어들면서, 피해자의 이익은 그 사이를 매꾸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된 태도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 ‘피해자 없는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

 

The criminology of control

  • 범죄학적 사고에도 지난 20년간 다음의 두 접근이 새로 생겨났음: (1) ‘일상생활의 범죄학’,  그리고 (2) ‘타자의 범죄학’. 

  • ‘일상생활의 범죄학’과 penal-welfare practice를 Social integration and system integration라는 구분으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penal welfare practice는 범죄자들을 사회로 통합하고자 했음; 사회적 질서는, 가치의 합의의 문제이고 탈선한 이들은 다시 그 일반적 도덕으로 통합되어야 했음. 한편, ‘일상생활’의 범죄학은 체계통합적 - 인간이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가 서로 통합되어야 하는 것. 어떻게 사회적 환경, 시스템(교통체계, 학교, 상점, 레저, 하우징 등)이 더욱 security하고 리스크가 적도록 설계할 수 있는지. (183)

  • ‘타자의 범죄학’은 특성상 ‘반근대적anti-modern’하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만약 ‘일상생활의 범죄학’이 범죄를 대단치 않은 것(de-dramatize)으로 여기고 그것을 마치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타자의 범죄학’은 범죄를 다시 극적인 것(re-dramatize)으로 만든다. ‘타자의 범죄학’은 기존의 형벌-복지적 접근이 응당한 인과응보와 일반인의 감각을 무시하고, 형벌을 진보 엘리트들과 사회학적 이데올로기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 / 원래 범죄학의 관심사는 논의를 누가 책임이 있는지 도덕적 질문을 하는 것으로부터, 범죄의 원인과 예방에 대한 과학적 질문을 하는 것이었는데 ‘타자의 범죄학’은 정확히 반대로 가고자 함. (184)

  • 위의 두 관점은 모두 ‘통제control’에 초점을 둠. 즉, ‘범죄는 일반적인 사회적 사실’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penal-welfarism의 범죄학적 사고와 형벌정책에 대한 반동’. 일상생활의 범죄학은 후기 근대적이고, 타자의 범죄학은 반근대적. 둘다 접근방법은 다르지만 모두 “사회적, 범죄 이슈에 대한 공공 담론에 점점 자리잡고 있는 통제의 문화에 대한 반응이다.”(185)

  • The shifting emphasis of criminology and crime control: 왜 20세기 중반의 범죄학자들은 마이너한 범죄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까? 그들은 억지(deterrence), 범죄를 법으로 위협하는 것(legal threat)의 효과에 회의적이었다. 억제적 정책은 사실 응보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인식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이유가 있었다. 리버럴한 그들은, 보통 터프하고 억제적인 페널티를 옹호하는 쪽이 보수적이다보니 그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더 깊은 인식론적 이유도 있는데 즉 억제적 형벌의 효용성 자체에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범죄가 사회 심층의 병리적인 것들의 징후에 불과하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조건지어지는 것이라면 즉각적인 응보정책이나 위협, disincentives에 범죄가 바로 줄어들리는 없는 것이다. 형벌복지적 접근에서, 사실 사회 병리가 원인인 범죄들이 많이 다뤄졌지, 일반적이고 합리적인 범죄자는 관심의 주변부에 있었다. 최근의 범죄학 사고는 이와 정반대—평범한, 기회주의적 범죄자가 범죄학 연구의 주된 대상이 되고 있다. (187)

  • From a social to an economic style of reasoning: 어떤 institutional setting이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게 있다. 20세기 형벌복지적 시스템은, ‘사회적 스타일의 사고’를 했다. 최근의 사고는 ‘경제적’. (188) 사회적 원인이라는 오래된 언어는, 리스크 팩터, 인센티브 구조, 수요와 공급 등의 새로운 어휘들로 대체됨. 이유는 무엇일까? -> 사법제도의 감사 프로세스(auditing processes)와 경영과정 및 이런 범죄학 아이디어의 긴밀한 친화성 (189). 범죄의 비용을 줄이고 리스크를 줄인다는 사고는 우선 사적 영역에서 처음 시작됨=보험회사, 사설 보안회사 등. (190)

 

The political limits of economic reasoning

  • 경제적 사고는 지배적이지만, 하지만 ‘비용이 어쨌든’ 공중public을 지키고 범죄자를 벌하겠다는 아주 다른 사고방식에서 그런 경제적 사고는 사라진다. 이것은 목적합리적이라기보다는 ‘가치합리적’ 사고방식이다. 경제적 사고방식은, 경영적, 상대주의적, 비용-의식적이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도덕주의적이고 타협적이지 않다. (예: 마약과의 전쟁The War on Drugs) 제로톨레랑스 정책 역시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고, 효과도 의심스럽다.

  • 이런 두 가지 충돌하는 합리성 사이를 오가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과정이다. 범죄학의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닌, 여러 여건과 정치적 행위자들의 이해 충돌에 의한 것이다. 물론 ‘prison works’, 제로 톨레랑스, 마약과의 전쟁 정책을 펼 때 이것이 장기적으로는 리스크 관리에 비용이 최적화된 것이라고 선전하지만 사실 그런 계산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The motivating mind-set here is not actuarial prediction or careful risk-management. It is a hard, self-righteous intolerance produced by stereotypical images of danger and negative evaluations of moral worth.” 

[‘개별 학습 시간’] 이름만 보면 시간 사용자의 쓰임에 맞게 내용을 정할 수 없을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 수업이 없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청소년이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걸 못 견뎌 하는 교사들이 있다. 교사 문지혜는 이것을 “선생님 병”이라고 부른다. 교사는 20-30분이 지나도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 청소년에게 “책이라도 읽을래?”, “이거 해 보는 게 어때?” 하면서 ‘생산적인 일’을 하도록 재촉한다. 그러면 청소년은 어느새 교사가 없는 곳으로 도망가 있고, 싫어하는 반응을 보인다. … 그래서 ‘플랜비’는 청소년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시시때때로 개입하지 않았다.” 자립하는 삶에서 자신의 시간 사용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중요한 연습이기 때문이다. (121)

어른들이 물어보면 미술로 먹고살 거라고 뻥치긴 했어요. 아무래도 학교 밖 청소년들은 뭐라도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거든요. “너는 일반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까 뭘 할 거냐? 학교를 안 다니는 대신 뭘 하면서 살 거냐?” 하면 답할 게 딱 있어야 돼요. 아니면 학교를 나올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돼요. 없으면 되게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 봐요. (131)

그녀는 “나랏돈을 안 받는 곳”이라는 친구들의 소개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정해진 기상-취침-식사 시간, 허락 후 외박, 이미 짜인 공부 등 쉼터에 “빡센 규칙”이 있는 이유는 나랏돈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쉼터에서는 자신의 삶이 “로봇처럼” 느껴졌다. (225) 

마틴 라이언스, 『책, 그 살아 있는 역사: 종이의 탄생부터 전자책까지』, 21세기북스, 2011 읽는 중. 도판이 많아서 옛날 책들 인쇄는 어땠고 편집 디자인은 어땠는지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논문 출판하는 Elsevier 출판사가 원래 네덜란드에서 17세기부터 출판업을 했던 엘제비어(Elzevir) 가문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정보도 알게 됐다. Elsevier에서 나온 논문에는 나무 아래 노인이 서 있는 마크가 붙어 있는데, 이게 1600년도 때부터 엘제비어 가문이 써왔던 것이라고. (비슷하게, Routledge 출판사도 사람 성에서 따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