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동아시아, 2017.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지음, 동아시아, 2017.
(인용 및 색인; 숫자는 페이지 수)
25 울주 아동학대 사망사건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 남인순 위원 위원장. <이서현 보고서>로 작성되어 나옴. 체벌 관련 문제제기.
88 “우리 사회엔 가족을 운명공동체로 바라보고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박이 지나치게 뿌리 깊다. … 자신과 자녀의 자아를 분리하지 못하고 내 아이들의 인생이 따로 있다고 바라보는 인식이 희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을 끝낼 때 자녀를 거두는 것이 끝까지 책임을 지는 부모의 태도라고 생각해버리기 십상이다.”
89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한국의 가족은 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온갖 부작용의 해결사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 의료는 사회적 복지의 영역으로 많이 옮겨 가고 있지만 여전히 양육 부양의 책임은 오롯이 가족의 몫이다.
96-111쪽 친권은 권리가 아니다
99 “짚고 넘어갈 문제는 계부모의 아동학대는 실제로 꽤 빈번하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 캐나다의 진화심리학 사례; 국내의 것은 아직 없음.)
100 “내가 보기에 아동학대는 가족의 형태보다 사회적 환경과 더 깊숙이 연관돼 있다.”
101 “문제는 계부모냐 친부모냐가 아니라 친권이다. 계부모도 입양절차를 거치면 아이의 친권자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친권을 앞세워 개입을 거부하면 밖에서 개입할 권한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
105 2014.09 <아동학대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경찰이나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아이가 위험하다고 판단할 경우 부모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이를 격리하고 긴급보호를 위해 친권을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도 가능해졌다.
105 친권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칠 ‘의무’지 자녀에 대한 처분 ‘권리’가 아니다.
109 과거 친권은 사람의 물건에 대한 지배권처럼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일종의 지배권이었다. … 그렇게 친권을 ‘권리’라고만 표현하다가 ‘자녀를 보호, 교양할 권리·의무’라고 정의한 <민법> 조항처럼 ‘권리이자 의무’로 부르게 된 것도 과거에 비하면 큰 진전이다.
115 한국의 가족주의는 소위 ‘정상가족’인 가부장적 가족만 인정하는 일조의 이데올로기다. 법적 혼인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인정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119 미혼모지원네트워크의 2016년 연구에 따르면 미혼모가 미혼부와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경우가 78%이고, 미혼부로부터 양육비를 지원받는 경우는 9.4%에 불과하다고 한다.
119 친자확인소송을 하고 양육비 청구를 하면 받아낼 수는 있겠지만 아이를 빼앗길까 봐 미혼모가 지레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이 있지만 미혼부의 양육비 지급을 강제하는 수단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123 입양을 보낼 경우 입양가정은 입양수수료 270만 원을 지원받고 매달 15만원(만 14세 전)의 양육수당과 20만원의 심리치료비, 100% 의료지원을 받는다. 또는 위탁가정이나 시설에 보낸다고 해보자. 2015년 보건복지부의 <대안양육제도 양육비 실태조사연구>에 따르면 위탁가정은 월 66만 7000원, 공동생활가정은 128만여 원, 양육시설은 166만여 원의 지원금을 정부에게서 받는다.
138 민간이 책임지는 입양 절차
한국이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하면서 오랫동안 채택을 유보해 … 비판받던 항목이 있다.
21조 (a)항: 책임 있는 공적 기관, 즉 정부가 입양을 결정하라는 것
143 민간입양에는 아예 사후관리가 없다. 해외입양도 허술하다.
163 당시 ‘개인’을 중시하는 트렌드의 중심에 섰다고 주목받은 X세대. 그들은 정말 개인주의자들로 살아가고 있을까? / X세대의 주역인 1975년생 50명을 심층 면접한 사회학자 김혜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연구: 김혜경, 2013. “부계 가족주의의 실패?” 한국사회학 47(2): 101-41.)
비혼 집단에서도 개인주의적 성향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으며 가족주의와 큰 갈등이 없었다. 연구자가 개인주의화가 가장 뚜렷하리라 예상했던 대졸 비혼집단에게도 가족은 탈피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을 대신할 피난처였다.
167 그나마 공공의 사회적 보호제도가 도입된 것은 1987년 민주화 대항쟁 이후의 일이다. … <모자복지법>(1989년), <영유아보육법>(1991년)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법안들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247 그러나 사적인 부모-자녀의 권력 관계는 언제나 법에 반영되어왔다. 예컨대 과거에 법원은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남편이자 아버지인 가장에게 친권 행사의 전권을 줬다. 그 시대의 지배적 가족 관념이 그랬기 248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친권자인 아버지만 동의하면 어머니에게 묻지도 않고 해외로 입양을 보내버리는 무자비한 행위가 ‘적법’했던 시절이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다. / 그 이후로는 점차 부모의 권리가 동등해져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휘두르던 친권을 어머니에게도 평등하게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오늘날에는 <가사소송법> 개정안에서도 보듯 부모의 이혼이나 양육권 결정 과정에서 ‘아동 최선의 이익’을 판단할 때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의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에는 늘 미래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성인이 보기에 좋으면 그게 아이들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성인 중심주의적 시각이 공적 제도에 배어 있었다면, 요즘은 아이들이 현재 겪는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는 쪽으로 인식의 전환이 서서히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248 그러나 가족 안에서 부모의 친권이 아이의 인권을 침해했을 때, 이 경우에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이 부모의 권리보다 우월하고 정당하다. 이게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이자 약자의 편을 들어줘야 할 공공의 역할이다.
249 학대예방과 아동보호를 위한 공공의 역할으 ㄹ늘려야 한다. 지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아동보호전문기관이 공공기관인줄 아는 사람들이 꽤 많다. 현재 국내의 아동보호전문기관들은 서울과 부산 한 곳씩을 제외하고 전부 비영리 민간단체들이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학대에서 아이를 보호하는 일은 부모의 친권을 제한하고 개입하며 법이 정한 범죄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고도의 공공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국내에서는 공공서비스의 성격을 지닌 학대 신고, 조사를 민간단체가 전담하고 있어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상담원들은 경찰이 동행하지 않을 경우 현장조사 때 필요한 공권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학대 행위자가 서비스를 거부할 경우 이를 강제할 권한이 없다.
250 [아동보호기관의 상담원들은] 학대 행위자 처벌과 가족 보존 지원이라는, 매우 상반된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늘 ‘가치의 갈등’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심각한 학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 반면 이와 반대로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시행 이후로는 신고 대응과 조사의 부담이 커져 가족 보전을 위한 서비스 제공이 위축될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친권에 개입해야 하는 신고 조사의 영역은 공공기관이 맡고, 아동보호전문기관들은 가족보전과 치료, 재결합을 위한 전문적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체계를 이원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아이가 부모의 돌봄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가정위탁, 시설 입소, 입양 등의 여러 대안적 양육방식 중에서 어떤 방식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지를 공적 권력이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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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마이클 부러보이가 사회학과 작업장에 대해 이야기하다
팟캐스트 Social Science Bites (사회과학 맛보기)
https://methods.sagepub.com/podcast/michael-burawoy-on-sociology-and-the-workplace
마이클 부러보이가 사회학과 작업장에 대해 이야기하다 (Michael Burawoy on Sociology and the Workplace)
전문全文 번역
데이비드 에드먼즈: 현재 연구하고 수업하는 사회학자 중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인 마이클 부라보이는 학자로서는 매우 비상(非常)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을 하셨는데, 구리 광산에서부터 가구 공장까지 일을 했고 기계 작동자(machine operator)이자 철강 노동자기도 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죽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들의 행위와 경험을 가까운 거리에서 밀착해 관찰함으로써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사회학과 작업장(workplace)입니다. 연구 주제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마이클 부러보이: 네. 산업사회학자로서의 제 경력은, 저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데요, 1968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잠비아의 구리 산업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잠비아에서 시카고 남부로 와서 사실 미숙련이지만 공식적으로는 반숙련 기계 작동자(machine operator)로 일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헝가리에서 철강 노동자로 일을 했습니다. 그 후 러시아로 가서 가구 공장에서 일을 했죠. 그리고, 제가 연구를 하면 보통 일어나고는 하는 일인데, 러시아가 붕괴했습니다. 붕괴 당시에는 소비에트 연방이었으니 그렇게 불러야 하겠네요. 그리고는 10년 혹은 12년 간을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따라 다녔습니다.
에드먼즈: 한 번에 하나씩 다뤄 봅시다(Let’s take those one at a time). 잠비아 구리 광산에서 무엇을 했죠?
부러보이: 좋은 질문입니다. 68년에서 1972년까지 잠비아에 있었죠. 잠비아 독립 4년 후였고요, 광산 산업의 경영 직종에 일자리를 얻었어요. 그때 구리 산업이 두 개의 거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는데 산업이 어떻게 잠비아의 갓 독립한(post-colonial) 정부에 반응하는지 살펴보고자 했었죠. 인사 연구 부(Personnel Research Unit)에 자리잡아서 운이 좋았고, 저는 캠브리지 석사 학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흑인과 백인의 임금구조를 통합하려는 단일 임금구조의 형성하는 데에 저는 필수적인 기술자였습니다. 은연중에(covertly) 그 문제에 상당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윤리적이지 않은 프로젝트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그것은 후기식민 상황의 잠비아에서 인종 차별(color bar)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독립 이전, 인종 차별은 잠비아는 물론 다른 아프리카 나라의 작업장을 규율하던 규칙이었고 그에 따르면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어떤 지시도 받지 않았죠. 후기 식민 상황의 잠비아 구리 산업에 인종 질서상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에드먼즈: 말하자면 비밀경찰(undercover)처럼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네요. 공식 학문 연구를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죠?
부라보이: 물론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기술자 자격으로 일을 했고요. 일을 하며 동료들은 저를 유능하다고 느끼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답례로 저는 이 비밀스런 프로젝트(covert project)에 관한 모든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죠.
에드먼즈: 책으로 써낸 것이 그것이죠?
부라보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걸 출판해야 할지 말지 문제가 있었어요. 제 말은 제가 분노했다는 것인데 왜냐면 물론 제 연구 성과가 잠비아의 인종 차별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인종 차별이 어떤 방식으로 유지됐냐면 잠비아인들이 주재원(expatriate)이나 기존 백인의 포지션으로 승진된다 할 때 왕년의(erstwhile) 백인 종업원들은 새로 만들어진 포지션으로 승진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써, 인종 차별을 유지시키던 온갖 조직적인 수법들(organizational manipulations)이 유지되었던 것이죠.
그것이 제가 쓴 것들이고, 저는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이것을 설명하고자 했어요. 기업들의 이해관계, 매니저(그때는 백인 매니저였고)들의 이해관계, 후기 식민 상황의 잠비아 정부의 이해관계,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있었죠. 노동자들은 잠비아화(Zambian-ization)이나 잠비아의 새로운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형성에 특히 관심이 있진 않았어요. 그들은 노동조건을 개선시키거나 임금을 올리는 데에 관심이 있었죠. 백인 매니저들은 그들의 일자리를 계속 지키고 싶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핵심 행위자는 정부였습니다. 정부는 마치 이런 식이었어요. “긁어 부스럼은 만들지 말고(let sleeping dogs lie), 어쨌든 돈을 벌고 있으니 좋다.” 당시 95%의 해외 세입(foreign revenue)은 구리 산업에서 나왔죠. 정부 사람들은 마치 “그래, 잠비아인들이 승진하는 이상, 인종 차별에 대해 염려할 필요는 없겠군.”
에드먼즈: 잠비아에서 시카고로 왔을 때는 어떤 일이 있었죠?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인종분리가 심한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부러보이: 네. 음, 저는 박사 학위를 하러 미국에 갔는데 왜냐하면 제가 첫 사회인류학 학위를 받은 잠비아에서 배웠을 때 발전에 관한 사회학 이론은 미국에서 온 것이고 그것은 사실 제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는 분석틀은 아니었어요. 제가 착수하고 있었던 계급 분석을 사람들은 놓치고 있었죠. 그래서 저는 보수주의적 사회학의 고향인 시카고로 갔습니다. 그런 보수주의 사회학자들로 하여금 그때에 “제3세계”, 지금은 “남부(Global South)”라고 부르는 문제의 속성에 대해 참여시키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요.
그런데 제가, 당시의 [시카고 대학의] 새로운 나라들에 대한 위원회(Committee on New Nations)에 접근했을 때, 그 위원회는 막 해산한 직후였죠. 아무도 이제 아프리카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뭐, 그럼 이제 시카고의 뒷마당에서 녀석들을 제압하는 수밖에 없겠군.” 작업 현장(shop floor)의 노동자들의 경험을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심산으로 남부 시카고 공장에서 반숙련 기계 조작공으로 일자리를 잡았습니다.
에드먼즈: 그때에는 연구자로서 일을 한다는 것이 명확했죠? 숨기는 것은 없었고, 동료들은 모두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았고요.
부러보이: 정확합니다. 경영진과 동료 노동자들에게 말을 했어요. 작업장을 연구하러 왔고, 그들의 경험을 이해하려 왔다고. 그런데 그들은 제가 여기 온 목적에 대해 아주 조금의 관심도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를 말썽꾸러기로 봤습니다. 왜냐면 제가 일에 무능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목숨에 위협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제가 죽거나 다른 사람들이 죽을 수 있었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에드먼즈: 그곳에서 인종과 계급에 관심이 있었죠? 인종과 계급은 그곳에서 중첩되어 나타났나요?
부러보이: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제가 노동 현장에 진입하자마자 발견해 낸 것이 있는데 무엇이냐면 여기 사람들은 왜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냐는 겁니다. 그것이 주된 관심이었습니다. 무언가 좋은 이유랄 게 보이지 않았어요. 산업사회학은 당시까지 왜 노동자들이 게으른가, 왜 그들은 생산량을 제한하는가(restrict output)에 대해서만 질문했습니다. 저는 거꾸로 생각했고 사실 노동자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보상을 아주 적게 받음에도 매우 많은 노력을 투여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노동 현장에서 합의(consent)가 조직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부터 나온 책이 “합의를 제조하다(Manufacturing Consent)”입니다. 저는 항상 교대 근무자였는데 2교대조에서 노동자 절반은 아프리칸-아메리칸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백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에 관해 제가 무언가를 주장할 때 사실 노동환경에서 인종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는 했어요.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 노동 현장에서 정치가 조직되는 방식, 작업장 내부에서 노동 협상이 조직되는 방식은 사실 인종이라는 것을 제쳐두고 개인들을 권리와 의무를 보유한 산업적 시민(industrial citizens)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모두들 인종에 관한 농담을 많이 날리곤 했는데, 그 농담의 요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봐, 인종은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런데 작업장 바깥에서는 중요하지.”
에드몬즈: 남부 시카고에서 동부 유럽으로 떠났죠. 거기서는 또 헝가리에 있다가 러시아로 가셨고요!
부러보이: 그렇습니다. 제가 구상하고 있었던 논증은 특히 노동조합이 강성한 지역에서 후기 자본주의에 특유한 노동의 헤게모니적 조직(hegemonic organization of work)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란 사람들을 열심히 노동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를 조직해내는 것이죠.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마이클, 당신은 틀렸어. 그것은 자본주의의 기능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기능인 것이겠지.” 저는 그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알겠어. 그러면 남부 시카고에서 일어난 일과 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비교한다면 알 수 있겠군.”
당시 연대(Solidarity) 운동이 1980-81년 폴란드에서 일어났고, 많은 사회학자들은 모두 그 노동계급의 운동을 놀라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transfixed). 폴란드에 가기 위해 폴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그런데 학자들이란 본래 항상 시대에 뒤처지는 존재들이기 마련이라 공부는 늘어지기만 했고 제가 폴란드에 갈 채비를 마쳤을 때에는 이미 연대 운동이 끝날 즈음이었습니다. 제 친구 중 한 명이 그래서 저에게 “헝가리에 오는 것은 어때?”라고 묻더군요. 그는 5년에서 6년 동안 망명 중이었습니다. “나랑 같이 돌아가는 건 어때?”라고 말한 것이죠.
그래서 저는 헝가리에 갔고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흘 동안이었습니다. 1982년이었죠. 헝가리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고, 사회학자들은 제가 흥미를 가지는 것들과 매우 비슷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죠. 노동시장이나 작업 조직(organization of work) 등이요. 그리고 저는 헝가리가 연구에 아주 좋은 장소일 것이라 느꼈습니다. 그때는 헝가리의 역사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열린 시기였고, 그래서 1988-89년 저는 거기서 몇 개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샴페인 공장에서 시작해, 그 후에는 시골 지역의 작은 직물공장에서 일했죠. 1984년 여름 저는 기계 작업장(machine shop)에서 어찌저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카고와 헝가리의 기계 작업장을 비교할 수 있었어요.
에드먼즈: 시카고와 유사점이 있었나요?
부러보이: 유사점이 참 많았어요. 놀랍게도 기계장치들이 서로 참 비슷했고 두 나라의 기계 작업장(machine shops)들은 모두 생산 당 단가제(piece rate payment system)에 기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부 시카고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그곳에 모종의 고용안전망(employment security)이 있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을 해고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임금에 대한 안전망(income security)이 있었다는 겁니다. 남부 시카고에는 항상 최저임금이 있어서 얼마나 적게 일하든지 간에 보장된 급여가 있었는데 반해 헝가리에서 노동자들은 그저 일한 만큼에 따라 임금을 지급받았지요. 물론 일자리 안전망은 남부 시카고보다 헝가리가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헝가리에서 임금에 대한 안전망은 확실히 더 불안정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더 열심히 하게 했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화는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열심히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사실 저는 그런 것을 경험해 보진 않았습니다.
에드먼즈: 그리고 헝가리에서도 역시 철강 산업에서 일하셨죠? 그렇나요?
부러보이: 맞습니다. 저는 운이 참 좋았어요. 저는 제강소에 취직하기를 바라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헝가리 에게르(Eger)에 위치한 기계 작업장(machine shop)으로 출근할 때 저는 미슈콜츠(Miskolc)라는 지역을 지나쳐야 했는데 그곳은 바로 레닌 철강소(Lenin Steel Works)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어찌 됐든, 여러 까다로운 일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헤치고 용광로 관리인으로 취직했습니다. 철강업의 핵심이라 할 만한 직종인데요, 저는 항상 이런 일자리를 얻는 것을 꿈꿨습니다. 왜냐하면 철강 노동자야말로 사회주의적 노동자의 원형(prototypical)이라 할 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발견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철강 노동자들의 의식이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반대 방향으로 작업장에 의해 형성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장은 즉 국가사회주의가 평등하고(egalitarian) 정의롭고 효율적이라는 사회를 낳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노동자들은 그것에 그냥 고개를 젓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회는 부정의하고, 평등하지도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주 비효율적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당 국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지역의 대표자들을 제대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곤 했죠. 즉 거기에는 사회학에서 부르는 “내재적 비판”, 즉 당 국가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게 있었죠.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가 사회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의식이 사회주의적이었던 것입니다.
에드먼즈: 이것은 당신이 교대하며 점심을 먹을 때 사람들과 나누던 대화에서 알아챈 것인가요?
부러보이: 대화도 그렇지만, 실천에서도 물론 느꼈지요. 철강소에서 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총리가 왔습니다. 총리가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고 저는 10월 혁명 사회주의 여단(October Revolution Socialist Brigade)에 속해 있었어요. 우리 조는 토요일에 교대근무를 했는데 비유하자면 이것은 사회주의에서는 세금 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때의 과업은 철강소를 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철강소에 페인트칠을 한다는 게 어이없는 아이디어 아닙니까.
동료들과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저는 새 페인트 붓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동료들은 슬래그 문(slag doors)을 파랗고 노랗게 칠하고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짓이었죠. 페인트 붓 하나를 잡고 나서 검은 페인트 통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삽을 칠했습니다. 삽은 용광로 관리인에게 매우 중요한 작업 도구죠. 저는 그걸 검게 칠한 겁니다. 그러자 관리인이 와서, “대체 뭘 하는 거야 미쉬?”라고 물었습니다. “으음, 저는 지금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모두 폭소를 터뜨렸죠.
10월 혁명 사회주의 여단이 가진 위트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미쉬, 미쉬, 너는 지금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게 아냐. 그게 아니라 너는 사회주의를 페인트칠하고 있는 거고 사회주의에 검은 칠을 하고 있구만.” 사회주의를 페인트칠한다는 이 생각은 사람들이 그냥 말하곤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실천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가정된 종류의 사회주의가 현실에 존재하는 극락인 체하는 집단적 의례를 다들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는 동시에 노동자들은 이것이 우스꽝스러운 가면극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에드먼즈: 여정의 끝은 러시아, 당시 소련이었고요.
부러보이: 네. 저는 헝가리에 1988년에서 89년까지 있었고 점차로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하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finally it dawned on me that this is coming to an end). 이 종언이 국가사회주의로부터 민주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연대(Solidarity) 운동이 그려왔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가능성의 희망은 잠깐 반짝이다 사라져 버렸고 이행은 국가사회주의로부터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로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죠. 저는 그 이행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러시아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소련이 아직 존재했고 지금이 아니라면 저는 더는 노동 현장에서 일할 수 없겠다고 느꼈습니다. 1991년 초였죠. 1991년 8월 즈음, 실패한 반-쿠데타가 있었습니다. 옐친이 탱크에 올랐고, 그리고 1991년의 말 소련은 사라졌죠.
그런데 그 6, 7개월 간 저는 모스크바의 고무 공장에서 무엇보다도 소련의 구질서와 계획경제를 대표하는 이들과, 소련으로부터의 러시아 독립과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치기 어린 젊은이들 사이 내전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살면서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경영 부서에서 매일매일 전쟁이 일어났고 모든 노동자들이 여기에 참전했습니다. 이후 저는 북쪽으로 이동해 코미 공화국(the Republic of Komi) 근처 북극권(Arctic Circle)의 가구 공장에서 반숙련 기계 작동자로 일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진정한 사회주의적 작업장을 목도했습니다. 헝가리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셈이었어요. 저는 사실 남부 시카고의 공장보다 헝가리 공장이 더 효율적이었다고 종종 주장하곤 합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완전히 사정이 달랐던 거죠. 결핍(the shortages)이 굉장히 극심했어요. 결핍이 상당하다는 것은 그곳에 노력영웅(shock work)이 많았음을 의미합니다. 한 달의 상당 부분에는 일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사흘이나 나흘, 일하지 않은 시간을 벌충할 만큼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에드먼즈: 정말 놀라운 경력입니다. 여러 작업장에서의 경험담 역시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그런 작업장에 갈 때 중립적인 시각을 가지고 일터를 바라보시지는 않을 텐데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작업장에서 일하시지 않나요? 저는 그런 시각이 당신께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부러보이: 저는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저의 관찰에 영향을 끼치죠.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진다는 것이 꼭 제가 실제 무엇을 보는지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끼치진 않습니다. 일해 왔던 모든 작업장에서 저는 자주 놀라움에 빠지곤 합니다. 저는 남부 시카고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발견할지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잠비아에서 인종차별이 재생산될 줄도 물론 예상하지 못했고요. 헝가리의 작업장이 효율적인 작업장일 것이라고는 분명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물론 특정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 관점에 따라 기대와 예상을 합니다. 그러나 매우 많은 경우 그러한 예상들은 무너지게 되고 저는 이론을 다시 구성해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작업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이 그것이 실재와 충돌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분석틀에 도전을 제기하는 이상 사례(anomalies)들을 마주쳤을 때 발전해 온 과정입니다.
에드먼즈: 그런데 그러다보면 그 분석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지 않나요?
부러보이: 참 재밌는 질문이네요. 제가 가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도전은, 소련이 붕괴한 러시아에서의 경험이었는데요. 그때 저는 1990년대 러시아의 엄청난 불황 시기에 실직한 제 동료들을 추적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러시아에는 일자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생산관계에 기반을 둔 제가 발전시킨 마르스크주의 관점은 사실 상황이 돌아가는 바에 대해 충분한 통찰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의 동학(dynamics)는 실제로는 시장과 시장 관계, 교환 관계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생산 관계가 아니라요. 그래서 저는 제 분석틀을 수정해야만 했고, 그 지점에서 저는 생산보다는 상품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굉장히 매혹되었습니다(entranced).
에드먼즈: 당신의 프로젝트에 대해, 너무 거창한 단어가 아니라면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데요(if that’s not too grand a word for it), 그것이 본질적으로 기술적인(descriptive) 것이라 보시나요 아니면 규범적 의제를 갖고 있나요? 노동자들을 위해 무언가 개선하고 바꾸고 싶은 것이 있나요?
부러보이: 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제가 가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틀은 노동자들이 가진 착취의 경험에 관심을 가집니다. 여기서 착취는 노동에 의한 생산물이 노동자들로부터 빼앗겨 전유된다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해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생계 유지를 위한 임금만을 받기도 하고, 가끔은 그보다도 없거나 어떤 임금도 받지 못하곤 하고요.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은 일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규범적 틀 없이 사회학을 할 수는 없지요. 우리가 이론적 틀, 그것이 뒤르켐주의자든 베버주의자든 마르크스주의자든 간에, 그것을 갖도록 추동하는 것은 바로 규범적 틀입니다.
에드먼즈: 그럼에도 선생님은 활동가는 아니시죠. 그렇다면 선생님의 작업이 선생님이 희망하는 변화를 어떻게 촉진할 수 있을까요?
부러보이: 물론 저는 활동가가 아니죠. 확실히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남부 시카고에서 저는 사회학을 대체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만들고자 했어요. 당시 아카데미아에서 재부흥을 겪은 사회학 분과 내 마르크스주의는 주류 사회학을 대체하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저는 우리가 참 대단한 전진(make a amazing headway)을 이룬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발상 자체는 매우 순진했죠. 주류 사회학을 대체하겠다는 그 발상은 어쨌든 나름대로의 결과를 냈었을 것입니다.
에드먼즈: 작업장 내에서 완전히 자신을 몰입시킨(you’ve totally immersed yourself) 선생님의 사례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분명히 동료 노동자들이 당신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작업장에서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타 노동자들의 행위의 본질을 바꾸었나요?
부러보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완전한 몰입”이라고 불렀는데 제가 에스노그라피를 수행한 방식은… 완전한 몰입이었지만, 상당히 개입주의적인 방식으로 참여를 하고자(quite an interventionist mode of engagement)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업장으로 들어가, 실제로 혼란을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것들요.
제가 남부 시카고에 있을 때 저는 작업장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는 했어요. “왜 이리 열심히 일해요?” 그렇게 물으면 사람들은 굉장히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인들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를 않거든요. 이것은 경영진의(on the part of management) 굉장히 교묘한 술수인데요. 그렇게 그들이 짜증내면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헝가리에서도 비슷하게 제가 이방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동료들을 자극하는 요소였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실제로 작업장이 굴러가는 방식을 만들거나 바꾸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작업장 현장은 상당히 완고하여(obduracy) 제가 개입한다 해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는 작업장을 연구하며 무언가 변화를 시도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일으킨 혼란들은 특성상 매우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하고자 했던 과정들의 이해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죠. 당신이 사회 시스템을 묶어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살짝 뒤흔들어 보아야 합니다.
에드먼즈: 선생님은 당신의 작업을 에스노그라퍼나 인류학자처럼 묘사하는 것 같은데, 스스로를 사회학자라고 부르시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어느 정도 간학제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부러보이: 제가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로 훈련을 받았을 때 항상 연구를 할 때 에스노그라피적 접근을 하고자 했습니다. 각자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연구하고자 할 때 저는 다른 학문의 성과를 끌어오는 데에 개방적인 편입니다. 인류학이 됐든 인문지리학이 됐든 경제학이 됐든 저는 간학제적 접근을 항상 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회학적 쇼비니스트(a sociological chauvinist)입니다. 학제로서 사회학이 가지는 특수성에 신뢰를 보냅니다. 저는 이것이 특히 이 시대에 중요하다고 보는데, 저는 이 시대를 ‘제3차 시장화’의 시대라고 부르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지만, 이 시대는 국가와 시장이 연합해 시민사회, 시장이나 국가에 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제도(institutions)와 조직들, 사회 운동에 대해 적대하는 때입니다. 저는 사회학자의 입장이란 정확히 시민사회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물론 경제를 연구하지요. 국가도 연구하지요. 그런데 경제와 국가가 시민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의 입장에서 그것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은 경제학과 매우 다르죠. 경제학은 시장을 촉진하는 데에 이해가 걸려 있으니까요. 정치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에 이해가 걸려 있는 정치학과도 다릅니다. 중요한 점 하나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주류와 불화하는 경제학자와 정치학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학문의 주류적 성격에 도전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죠. 하지만 사회학의 중심적 특징은 시장과 국가의 도 넘음(overextension)에 도전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회학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에드먼즈: 확실히 당신의 작업이 갈 수 있는 영역은 그곳이겠군요. 산업 노동자 계급을 연구해 오셨으니까요. 발전된 국가들에서 산업 노동자 계급은, 멸종한 종은 아니더라도 사멸 위기에 처한 종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작업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가 싶은데요.
부러보이: 물론입니다. 제 작업은 지나간 과거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이미 사라진 것이 명백한 산업들로 옮겨다니는 것을 보고 웃곤 했어요. 그러나 제가 발전시킨 많은 아이디어와 원리들(principles), 산업을 연구할 때 쓰이는 방법론들은 현대의 작업장에도 적용 가능합니다. 예컨대 작업장을 연구할 때 노동과정을 생산과정의 집합으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작업장을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즉 관계들이 조율되고 규제되는 장소로 봐야 한다는 아이디어 말입니다. 작업장에서의 관계들은 때때로 강압적으로 규제되기도 하고, 때로는 합의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규제됩니다. 그리고 작업장을 에스노그라피 방법을 사용해, 그러니까 사람들과 함께 있는 방법을 사용해 연구한다는 아이디어는 역시 현대의 작업장에서도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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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가토 노리히로, 가라타니 고진
<백낙청, 가토 노리히로,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도서출판b, 2008의 제4장 “비평의 노년—가라타니 고진과 백낙청”의 6, 7절(각각 ‘비평의 충돌 A: ‘문학’을 둘러싸고’, ‘비평의 충돌 B: ‘민족(nation)’을 둘러싸고’)에서는 영향력 있는 비평가이자 지식인, 운동가였던 백낙청과 일본 지성계의 관계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아래는 책을 따라 관련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우선 가라타니 고진은 1997년 제4차 한일문학심포지엄 참가에 겸해 창작과비평사에서 우카이 사토시와 백낙청, 그리고 최원식과 토의를 했다고 한다(114). 이것은 단순히 심포지엄을 겸해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지적 관심사가 통해 의도적으로 기획된 만남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생산적이지 못했다고 한다(115).
그 모임에 대한 평가가 6절에서 이루어진다. 가라타니는 우카이, 백낙청, 최원식과의 토의에서(백낙청, 최원식, 우카이 사토시, 가라타니 고진, 「韓国の批評空間」, 『批評空間』(II-17), 1998) 본인의 관심사인 ‘문학의 종언’과 ‘비평’ 운동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다. 즉 “소설과 시에 창작하는 비평이 아니라 그로부터 자립한 비평이” 문예 잡지에서 나타나지 않냐는 것이다(122). 그런데 이에 대해 백낙청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123). 그러다가 다른 얘기를 좀 하게 되는데, 그러고 나서 가라타니는 다시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문학가의 위상 차이와 문학의 종언에 대해 최원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124). 최원식은 오히려 문학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쪽은 민족문학 진영을 공격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80년대 문학과 90년대 문학은 형식의 차이는 있어도 근본적 정신이나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126-7). (조영일은 이에 대해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으니 누가 옳았다고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2000년대 후반의 상황을 다시 음미해보자고 제안한다. 단순하게 말해 80년대 이후 한국의 문학에도 어떤 근본적 변화가 일고 있다는 가라타니의 감각은 옳았다는 것인데, 요약보다는 본문을 참조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책 128-31쪽을 참고.)
문학의 임무 등의 주제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민족(네이션)이라는 문제가 대담에서 언급되는데 이 쪽도 흥미롭다. 가라타니는 백낙청의 ‘민족’ 단어 옹호론을 두고 그것은 다케우치 요시미와 비슷한데 그 논의는 “그[다케우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매우 위험하고 양의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졌다고 비판”한다(132). 책에서 이 내용이 자세히 다루어지지는 않으니, 나중에 참고를 해야겠다. 아무튼, 백낙청의 ‘민족’ 옹호론은 쉽게 말해 민족 개념이 갖는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고 그 개념을 우익 국가주의자들이 오용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백낙청은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내가 운한 것은 오히려 기시 수상으로 대표되는 우파 민족주의자든 공산당과 같은 좌파 민족주의자든 그들의 입장에 단순히 반대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일정한 민족적 특성과 민족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대다수 대중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대안을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주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韓国の批評空間」, 15頁,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133쪽에서 재인용.)
가라타니는 이에 대해 바로 비평하지는 않지만,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에서 제기된 주장을 비판하며 우회적으로 백낙청과의 입장 차이를 표명했다고 한다. 가토 노리히로는 일본인의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 먼저 일본 전사자를 애도해야 한다고 했는데, 가라타니는 이에 대해 “나는 [일본인이] 분열상태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이런 분열감정에서 오히려 장래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아메리카인도 베트남전쟁 후에는 분열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걸프전쟁으로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그것이 ‘보통 국가’라고 한다면, 나는 일본은 ‘보통’이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韓国の批評空間」, 22頁,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134쪽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가토 노리히로의 주장은 일본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헌법 제9조(평화헌법)을 일본인이 스스로 재선택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고 한다(평화헌법은 강요된 것인지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쪽은 이토 나리히코,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 강동완 옮김, 행복한책읽기, 2005; 다른 비평적 맥락으로는 가라타니 고진, 「죽음과 내셔널리즘」, 『네이션과 미학』을 참고). 가토를 비판한 다른 지식인으로는 “다카하시 데츠야, 고모리 요이치, 우에노 치즈코, 이효덕, 오코시 아이코, 요네야마 리사 등이 있으며 이들의 글을 모두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137쪽, 각주 55번). 고모리 요이치, 다카하시 데츠야 엮음, 『국가주의를 넘어서』, 이규수 옮김, 삼인, 1999; 우에노 치즈코, 『내셔널리즘과 젠더』, 이선이 옮김, 박종철출판사, 1999; 다카하시 데츠야, 『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이규수 옮김, 역사비평사, 2000. (다른 맥락이지만, 우에노 치즈코의 내셔널리즘 넘어서기 주장은 서경식과 다카하시 데츠야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도 한다. 이 부분은 또 찾아봐야 할 문제.)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백낙청은 왜 가토의 편을 들었을까? 「韓国の批評空間」, 22-23頁에 백낙청의 답변이 실려 있는데, 백낙청의 문제의식 핵심은 앞으로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 더 나은 공동체(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이며, 거기에는 네이션이라는 구체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39). “사실 바로 이런 네이션(역사주체)에 대한 집착이 백낙청으로 하여금 가토에게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토 역시 네이션이 없으면 사죄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139).
백낙청의 호의적 평가는 이후 창작과비평사에서의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 한국어판 출간으로도 이어졌다. 가토 역시 그 책 한국어판 서문에서 백낙청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누가 옳은지를 따지기 이전에, 조영일은 이러한 의견 차이가 “가라타니와 백낙청, 또는 『비평공간』과 『창작과비평』 사이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평한다(140). 그리고는 더 나아가 “한국비평은 자신의 시야를 네이션 바깥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회고한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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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속패전론 永續敗戰論』(시라이 사토시) 짤막 독서 후기
최근에 웹상에서 종종 보이는 책이어서,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우리 대학 도서관에 보니 대출 횟수가 다섯 회이던데 그렇게 널리 읽히는 책은 또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동아시아에 대해 이제 막 공부해가는 입장이니 책의 주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할 깜냥은 안 된다. ‘영속패전’이라는 수사는 충격적이고 신선할 수 있지만, 그 주장의 핵심인 동아시아에서의 패전의 부인과 전승국 미국에의 복종이라는 모순의 공존 자체는 새로운 것인가?
한편 “바꿔 말해 우파의 정체성 지탱을 위해 타국의 힘으로 내셔널리즘의 바탕을 이루는 매우 기괴한 구조가 정착됐다”(43)라는 구절을 읽고는 (반북/반중) 친미라는 깃발 아래서 서로 공모하는 한국과 일본 극우파들을 잠시 생각했다. 성급한 화해를 강조하는 이들이 당위로 내세우는 것 중 하나가 한미일의 협력 및 공조이고 또 그들이 조장하는 공포는 중국과 북한의 안보 위협이다. 그 문제의 기원, 뿌리는 반공주의로 소급될 수 있는 것인가? (+ 여기서 日 극우파는 미국에의 종속(표면적으로는 긴밀한 공조라는 단어를 쓰지만)과 재무장을 동시에 옹호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일본의 북한 납북자 문제와 북한 미사일 발사를 내세우는 것이겠다.)
문제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면 언제나 ‘대미 종속’ 구조로 귀결된다. 러시아를 포함한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향해 일본이 배타적 내셔널리즘을 행사하는 것은 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주일 미군의 압도적 존재감에 기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동양의 고아’ 일본이 앞으로의 아시아를 전혀 개의치 않는 응석받이 의식을 깊이 새길수록 일본을 두둔하는 미국과의 관계는 밀접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의 요구라면 부조리해도 반드시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게 대미 종속이 아시아에서 일본의 고립을 부채질하고, 그 고립이 다시 대미 종속을 강화하는 악순환이 이뤄진다. 또 이런 구조를 바탕으로 애국주의를 표방하는 우파가 ‘친미 우익’이나 ‘친미 보수’를 자임하는, 바꿔 말해 우파의 정체성 지탱을 위해 타국의 힘으로 내셔널리즘의 바탕을 이루는 매우 기괴한 구조가 정착됐다.(43쪽; 강조 본인)
패전 후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의미에서 직접적인 대미 종속 구조가 영속화한 한편, 패전 인식을 교묘하게 은폐(부인)하는 대부분 일본인의 역사 인식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패전은 이중 구조로 이뤄져 계속되고 있다. 물론 두 측면은 서로 보완하고 있다. 패전을 부인하므로 미국에 끝없이 종속되며, 대미 종속이 깊이 이어지는 한 패전의 부인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영속패전’이다. (61쪽)
그리고 그들은 이런 의무를 이행하기보다는 거짓과 기만의 공중누각을 쌓아올리는 쪽을 택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겐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패전의 책임을 회피해온 무리와 후계자들이 국방의 책임을 운운할 리도 업고 애초에 자격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공중누각을 지탱하기 위해 국민의 마음에 각인된 ‘핵무기는 너무나 잔혹해서 싫다’는 감정을 지렛대로 삼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속패전 체제 핵심 세력과 평화주의자 사이에 형성된 기묘한 공범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167쪽; 강조 본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도 이런 관점에서 그 의미를 해독해야 한다. 당시 요나이 미쓰마사(米内光政) 해군대신은 원폭 투하 소식을 접하고 ‘하늘이 도왔다’고 했거니와, 원폭 충격이 본토 결전 회피를 재촉하고 나아가 혁명 가능성을 버섯구름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하늘의 도움’이었다. … 이런 의미에서 일미 공범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전후의 국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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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장(場; field) 이론들: Kluttz and Fligstein (2016)
'장 이론(field theory)'에 대한 개괄적 소개입니다. 부르디외와 신제도주의 학파의 장 이론,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발전된 Fligstein 플릭스틴과 McAdam 맥아담의 SAF 전략적 행위 장 이론이 다루어집니다.
field theory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음의 다른 개설적 문헌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 Fligstein, Neil. 2001. “Social Skill and the Theory of Fields.” Sociological Theory 19(2): 105–125. [장을 local social order로 정의; 주로 pragmatic action theory의 관점에서, 다른 비교적 장 변동에 보수적인 이론들과 달리 social action이 장의 변화를 이끌 가능성이 어떤 것이 있을지 가설들을 세우고 논구하는 글임.]
- Martin, John Levi. 2003. "What is Field Theory?"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109(1). [아직 안 읽어봄. 같은 저자의 단행본 The explanation of social action에도 field theory에 대한 챕터가 있는데 같은 내용인지는 모르겠네요.]
아래는 Kluttz and Fligstein (2016)을 텍스트로, 사회학과 대학원 수업에서 쓴 발제문입니다.
Kluttz, Daniel N. and Neil Fligstein. 2016. “Varieties of Sociological Field Theory.” Pp. 185-204 in Handbook of Contemporary Sociological Theory, edited by S. Abrutyn. Springer.
들어가며: 장(場; field)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일상 생활에서나 보다 덜 엄밀한 학술적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종종 ‘장’이라는 은유를 사용하곤 합니다. 아마도 ‘구조’라는 막연한 단어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사회 세계의 다양한 영역들을 살피기 위해 ‘영역’과 ‘경쟁’의 뉘앙스가 배어 있는 ‘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표현이 주는 적절한 함의 때문인지 다양한 사회학 이론에서도 장 개념을 보다 엄밀히 정의해 미시/거시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며 나름대로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주장처럼 장 이론은 미시/거시 분석을 넘어 “사회 세계를 보는 대안적 시각을 제공합니다”(185).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사회학 이론에서 말하는 장은 과연 무엇일까요? 명시적으로 ‘장’을 쓰지 않아도 장 이론과 비슷한 개념을 갖는 이론도 있지만(e.g. 제도적 논리 관점[institutional logics perspective] 혹은 네트워크 분석. 185쪽의 각주 1번 참조), 이 글의 목적은 다음 세 가지 이론에 초점을 맞춰 거기에서 사용된 ‘장’ 개념을 명료화하는 것입니다: 1) 부르디외(Bourdieu)의 장 이론; 2) 신제도주의 접근에서의 장 이론; 3) 플릭스타인과 맥아담(Fligstein and McAdam)에 의해 제안된 전략 행위 장(strategic action fields; 이후 SAF로 표기) 이론.
장 이론은 막스 베버와 쿠르트 레빈(Kurt Lewin), 현상학과 상징적 상호작용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된 지적 뿌리가 있고, 모두 1) 어떻게 장이 출현하고 재생산하고 변하는지 2) 행위성과 행위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라는 두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세 이론은 역시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글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 가지 장 이론의 차이점을 명료화해, 다양한 사회적 상황 속의 상호작용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장 이론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동시에 어떤 장 이론이 “중범위 수준의 사회적 질서”를 이해하는 데에 더 많은 도움을 주는지를 찾아 내고 장 이론이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지의 조건들(scope conditions)을 특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186).
글은 우선 장 이론의 공통적 주제와 영향을 받은 고전적 이론들을 다룹니다. 이후 각 세 가지 이론 별로 장의 정의, 장 이론에서의 행위성과 행위자, 장의 출현과 안정화와 변화라는 주제를 차례대로 다루는데, 발제 구성 역시 글 구성에 따라가겠습니다.
장 이론들의 공통적 주제들 [pp.186-87]
중범위, 상호작용 장 이론의 기본 아이디어는, 경험적으로 정의 가능한 경쟁의 장소(arena)에서 행위자들이 다른 행위자들을 염두에 두고(take into account) 행위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고려한 상호작용은 무언가 내기물이 걸려 있기(something is at stake) 때문에 일어나는데, 물론 장은 역시 안정적 질서를 전제합니다. 중요한 것은 장 이론에서 분석 단위가 거시적 사회 과정이나 미시적인 개인의 행위 동기가 아닌, 장 내에서 일어나는 개인 혹은 집단의 행위라는 것입니다(186).
공간성, 관계성 장 이론은 공간적, 관계적 접근을 취합니다. 공간성이라는 것은 장 내의 행위자가 장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관습, 제도, 이슈, 목표”에 맞추어 행위한다는 것을 뜻하고, 관계적 접근이라는 것은 행위자가 장 내의 다른 행위자와 공유된 의미를 가지며 행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장이 행위자로 하여금 장의 규칙과 기대에 맞게 행위하게끔 구조화하는 동시에 행위자 역시 다른 행위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원을 쌓고 이득을 취할 수 있는 행위 능력(agentic capacity)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187).
처음에 장 이론가들은 질서의 재생산에 관심을 가졌으나, 장의 출현과 변형에도 관심을 갖게 되자, 행위성과 인식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나 프레이밍, 정체성, 습관, 사회화 등을 다루는 현상학이나 상징적 상호작용주의에서 이론적 자원을 많이 끌어 왔습니다. 다음으로는 현대 사회학 장 이론의 토대가 되어 온 고전 이론들을 아주 간략히 리뷰하고자 합니다.
현대의 사회학 장 이론의 고전적 뿌리 [pp.187-88]
베버, 레빈 장 이론에 주된 영향을 끼친 고전 학자들은 막스 베버와 쿠르트 레빈(Kurt Lewin; 커트 르윈)입니다. 행위는 의미에 기반해서 이루어지고, (법, 종교, 정치, 경제 등 각 영역의) 사회적 질서 형태 역시 의미의 복합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베버는 장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경쟁의 장소로 본 이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자 레빈은 인간 인식(perception) 단순히 자극의 총합이 아니라 인간의 동기나 사회적 상황, 감각 자극이 인간 인식의 총체와 맺는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고 보았습니다. 레빈은 직접적으로 장(field)이라는 은유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장이라는 것이 행위자의 인식을 구성하는 한편 행위자 역시 장을 구성한다는 그의 강조와 함께 이후의 이론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현상학, 상호작용주의 “장 이론가들은 그들의 행위자 모델을 만드는 데에 다른 이론적 소스를 끌어 왔습니다”(188). 첫째로 부르디외는 습관, 몸을 사용하는 기술(bodily skills), 취향 등 성향의 복합체인 하비투스(habitus)를 개념화하는 데에 있어 철학자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같은 현상학자들, 그리고 마르셀 모스(Mauss)나 노베르트 엘리아스(Elias) 같은 현상학에 깊이 영향을 받은 학자들의 이론을 이용했습니다. 둘째로 신제도주의자들은 버거와 루크만(Berger and Luckmann)의 현상학적 사회학(『실재의 사회적 구성』)의 주장, 즉 외부 사회 세계는 제도화, 정당화(legitimation), 사회화 과정을 통해 개인들에게 내면화된다는 주장에 크게 기댔습니다. 마지막으로, 플릭스타인과 맥아담의 SAF는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주의의 이론적 자원에 크게 의존하여, 사회적 행위가 즉 역시 세계를 형태짓고(shape) 창조하는 행위라는 아이디어를 강조합니다.
사회학 장 이론의 현대적 세련화 [pp.188-92]
이 절에서는 부르디외의 이론, 신제도주의 이론, SAF 이론의 순서대로 각자가 개념화한 장의 특징을 개괄합니다. 그 이후로는 각 이론이 행위성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장의 출현과 안정성, 변동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다룹니다.
부르디외의 장 이론 부르디외의 복잡한 이론 틀에서 장은 자본과 하비투스라는 다른 두 중요 개념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먼저 장에 대해 말하자면, 장은 “역사와 자신의 논리(“게임의 규칙”)를 가지고 있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공간입니다(189). 부르디외는 “게임”의 은유를 장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은 장 내에 (참여자들이 스스로 어느 정도 정당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내기물(what is at stake)이 걸려 있으며 행위자들은 이를 둘러싸고 경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디외에게 있어 장은 위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이 중요한데, 장 내 권력 행사의 주요 원천은 바로 자본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 부르디외는 자본을 경제적 자본, 인적 자본, 문화 자본으로 분류했는데 이런 자본을 가지고 행위자들은 장 내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상대적 위치를 재생산 및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본들로 행위자는 장 내에서 무엇이 정당한(legitimate) 것인지 판단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상징 권력(symbolic power)을 행사합니다. 하비투스는 주로 어릴 때에 습득하게 되는 인식, 판단, 취향 등의 성향 체계이며 행위자가 행위할 수 있게 해주는 “전략을 만들어 내는 원칙(strategy-generating principle)”이 됩니다. 하비투스가 실천을 이끌기 때문에 이는 자본의 분배와 장의 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신제도주의 장 이론 우선 신제도주의라는 이름 아래 상당히 다양한 접근들이 있지만 저자들은 범위를 좁혀 주로 디마지오와 파웰(DiMaggio and Powell)의 고전적인 신제도주의 이론을 주로 논의하고자 합니다. 비슷한 다른 개념들도 있지만 그들은 1983년의 매우 유명한 논문 “The Iron Cage Revisited”에서 “조직장(organizational field)”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이는 “합해졌을 때 제도적 삶의 공인된(recognized) 영역을 이루는 조직들”을 뜻합니다. 조직장은 왜 같은 장에 속하는 조직들이 서로 비슷해 보이는가, 라는 조직과 환경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인데, 신제도주의자들은 동형화가 발생하는 이유를 조직이 한번 조직장에 속하면 경쟁보다는 정당성(legitimacy)과 같은 제도적인 관심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제도주의 이론에서 정당성이란 어떤 행위가 적절하고 지향할 만한 것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혹은 가정을 의미하는데, 장 안에서 조직들이 정당성을 추구하게끔 하는 메커니즘은 강제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을 모두 포괄합니다. 그래서 장 안에서 정당성은 조직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 되는 필수 요건(imperative) 혹은 규칙 구실을 합니다.
전략적 행위 장 저자들은 SAF 이론을 부르디외와 신제도주의자들의 시도를 종합한 최신의 이론이라고 소개합니다. 우선 SAF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중범위 수준의 질서로 정의됩니다. SAF 안에서 행위자들은 각자를 염두에 두고 상호작용하고, 이들은 무엇이 정당한지를 관장하는 장의 논리와 다른 이들과의 관계 그리고 장의 목적에 대한 공유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SAF는 주로 구성원들의 공유된 이해에 따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저자들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공유된 이해란 (1) 내기물에 대한 것, (2) 상대방의 장 내 위치에 대한 것, (3) 정당성 있는 행동에 대한 규칙, (4) 해석틀(interpretative frames)에 대한 것입니다.
플릭스타인과 맥아담은, 신제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제도화된 당연한 “실재”를 가정해 장을 잘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고, 장의 자리잡힘 정도(settleness)에 따라 장의 안정성이 크게 좌우된다고 보았습니다. 장이 새롭게 출현하거나 아니면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장 내의 불화(contention)는 커지고 합의(consensus)는 줄어듭니다.
부르디외의 갈등적 시각과 유사하게, SAF는 장 내 멤버십을 기득권/도전자(incumbent/challenger)로 구분하고자 합니다. 기득권자는 장 내 자원에 대한 불균등한 분배에 이득을 얻는 이들이며 그들의 이해관계나 관점은 불균등에 대한 장 내 규칙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전자는 이것을 순응하거나 규칙을 바꿀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주로 위계에 초점을 둔 부르디외 이론과 다르게 SAF에서는 협력이나 연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SAF 이론은 몇 개의 새로운 개념을 제안합니다. 첫째는 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행위자인 “내부 거버넌스 단위(internal governance units)”입니다. 경험적으로 예를 들자면 세계은행(the World Bank)이 있는데 이런 조직들은 장 내의 기득권들의 위치를 강화시키고, 장을 안정화하고, 때때로 연락책(liaison)의 역할을 합니다.
다른 개념 하나는 “사회적인 것의 실존적 기능(existential function of the social)”이라는 것인데 이 개념은 SAF 이론에서 “집합적 의미 형성과 소속감에 기반한 미시적 행위의 기초”가 됩니다. 즉 인간은 모두 사회 세계에 대한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고 소속감을 느껴야 하는 실존적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을 형성하고 정치적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행위자들은 “사회성의 기술(social skill)”을 사용하는데, 이로써 다른 사람들을 집합 행동에 참여하도록 설득할 수 있습니다. 플릭스타인과 맥아담의 사회성의 기술이라는 개념은 나중에 행위성을 설명하는 데에서도 요긴하게 쓰입니다.
또한 SAF는 장의 내부적 동학(dynamics)만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장 사이(inter-field) 관계에 대해 개념화했습니다. 플릭스타인과 맥아담은 장을 “다른 장과의 복합적인, 다층적인 의존의 연결망들에 배태된” 것으로 이해했고, “그런 접합점(linkages)은 대부분 자원 의존이나 법적·관료적 권위에 의해 발생합니다”(192).
행위성(agency)과 행위자 [pp.192-96]
이 절에서 저자들은 주로 SAF를 옹호하고 SAF를 기준으로 부르디외와 신제도주의자들의 이론에서 덜 부각된 행위성의 측면을 비판합니다.
부르디외의 장 이론 저자들은 부르디외의 이론이 사실 많이 결정론적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부르디외가 행위자들을 자본의 담지자로 간주하고 자본을 사수할지 혹은 장 내 자본의 분배 논리에 도전할지 전략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부르디외 이론의 행위자가 그렇게 성찰적이지도, 장의 구조에 도전할 만큼 행위성이 있지도 않다고 봅니다. 장 내 행위자들은 게임의 규칙(일루지오illusio)을 공유하고 있고, 그들의 이해가 장 안에서의 위치에 의해 주로 결정되기 때문에 장의 행위자들은 규칙·질서를 바꾸기보다는 서로 경쟁하곤 합니다. 하비투스 개념을 생각해보면 결정론적 시각은 더 명확해지는데 전승된 성향의 체계인 하비투스는 (여러 장에서) 개인의 장 내 위치를 결정하고, 그것을 재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신제도주의 장 이론 “배태된 행위성의 역설”, 즉 행위자가 그들이 배태되어 있는 장 안에서 미리 제시된 규칙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장의 규칙에 대항하거나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는 이론 논의가 활발했던 초기에 제기되었고 많은 학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초기에 제출되고 또 다른 학자들에 의해 다른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개념은 디마지오의 제도적 혁신주의(institutional entrepreneurship) 개념인데, 제도의 변화를 이끌고 참여하는 행위자들이 제도 혁신가라는 것입니다. 디마지오는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내는 방식을 만들고 다른 이들을 설득할 때 제도적 혁신주의가 일어난다고 보았고, 이것은 조직 장이 형성되는 초기에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한 경험 연구는 많이 있으나 저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제도적 혁신주의라는 개념이 사실 아무거나 다 포괄하는 외연이 매우 넓은 개념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신제도주의 이론 안에서 행위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는, ‘과잉 사회화’된 행위자를 새로운 비전을 갖고 있는 행위자로 그저 대체하려는 시도가 많았으며, 또 이것은 행위성과 장 수준의 변화를 그냥 섞어 버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보통 전략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새로운 장이 생기거나 그것이 변화된다는 것에 한해서 행위자들이 행위성이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것” 역시 행위성에 대한 이상한 개념입니다(194).
저자들은 신제도주의의 행위성을 비판하며, 필요한 것은 구조적 수준에서 행위성을 설명할 수 있는 “장에 대한 이론화”라는 것을 시사합니다(194).
전략적 행위 장 전략적 행위란 “타인과의 협력을 보장함으로써, 안정적인 사회적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사회적 행위자들의 시도”를 뜻하는데 이것은 앞서 제시된 “사회성의 기술”과 접합됨으로써 행위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장이 생성되고 유지되는 미시적인 기초는 사람들이 의미를 틀짓고(framing) 동원할 수 있는 인지적 능력인 사회성의 기술에 의존합니다. 이런 사회성의 기술이 장의 형성의 메커니즘이라면, 플릭스타인과 맥아담은 집합 행위의 동기를 진화심리학에 기반해 정체성과 의미형성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정의합니다(“사회적인 것의 실존적 기능”). 이는 갈등론적이고 약간 물질주의적 경향이 있었던 부르디외 이론, 그리고 행위자를 반성적이지 않은 정당성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던 신제도주의와 다른 관점을 제공합니다.
SAF 이론은 행위자가 장 내의 규칙을 따라 비교적 응집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것이 신제도주의적 이론에서 보는 정당성의 추구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사회성에 대한 욕구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신제도주의를 괴롭힌 “배태된 행위성의 역설”에 대한 답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SAF의 시각에서 본다면 제도 혁신가 개념 역시 사회성이 능숙한 행위자들이 미조직된 사회 세계에서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연대하여 장의 형성을 돕는다는 식으로 재개념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SAF 이론은 부르디외의 이론이 주는 갈등론적 시각을 받아들이는데 그 동시에 행위자들이 공유된 의미, 정체성을 가지고 집합 행동을 추구할 수 있는 미시적 행위의 여지를 열어 놓고자 합니다.
한편 행위의 수준에 대해, 신제도주의 이론에서 행위자는 거의 조직 단위였고 부르디외 이론에서 행위자는 대부분 개인이었는데 반해 SAF 이론은 장의 행위자의 수준에 대해 보다 탄력적인 시각을 제공합니다.
장의 출현, 안정성, 그리고 변화 [pp.196-200]
부르디외의 장 이론 첫째로 장의 안정성과 관련해, 부르디외 장 이론은 장을 경쟁과 지배의 공간으로 봄에도 그 질서가 끝내는 재생산된다고 간주합니다. 둘째로 장의 변화와 관련해 부르디외는, 검토되지 않은 사회 세계에 대한 ‘주어진(taken-for-granted)’ 생각을 독사(doxa)라고 부르는데, 만약 이 독사의 자의성이 폭로된다면 장의 게임의 규칙 내지는 논리가 바뀔 가능성이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부르디외는 그런 독사의 자의성이 폭로되는 위기의 순간이 언제인지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바가 없으며, 더 나아가 그는 예술 장의 경험 연구를 통해 장의 도전자들의 혁명 역시 부분적인 것, 즉 장의 규칙을 재생산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197).
신제도주의 장 이론 디마지오와 파웰의 “The Iron Cage Revisited”는 일단 조직 장이 생긴 후 동형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다루지만 어떻게 장이 변화하고 장이 생기는지 체계적인 이론화는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봤듯 제도 혁신가라는 개념도 장의 상황, 조건과 혁신가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를 체계적으로 잇지는 못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위 논문에서 디마지오와 파웰은 “구조화”(기든스)의 과정을 거쳐 조직군이 장이 되는지를 말하지만 매우 짧고 논문의 다른 부분은 동형화 설명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후 신제도주의를 다룬 연구 문헌은 장의 출현을 더 다루긴 하는데 아무튼 저자들은 동형화에 대한 논의에 비해 매우 미발달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유망한 방법으로 부상한 것은 바로 신제도주의 이론과 사회운동이론의 접합입니다. 매카시와 졸드(McCarthy and Zald)의 “사회운동산업(social movement industries; 한 이슈에 대한 여러 사회운동조직의 집합)” 개념이 보여주는 다층성(multi-levelness)은 장 개념의 출현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모릴(Morrill)의 대안적 분쟁 해결에 대한 “틈새에서의 출현(interstitial emergence)” 분석은 중첩되는 장에서 자원의 동원과 아이디어의 주장 등이 대안 분쟁 해결의 제도화에 있어 매우 중요했음을 시사합니다. 장의 중첩 혹은 연결이 장의 형성에서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SAF 이론에서 더욱 발전되게 됩니다.
전략적 행위 장 저자들이 말하는 SAF 이론의 강점은 장 내 행위자들의 더 나은 위치를 위한 싸움만을 초점으로 보는 것이 아닌 전체 장의 구조를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체론적인 시각은 장의 변화를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장의 출현과 관련해, SAF는 사회 운동이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게 출현한다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출현하고 있는 장은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경쟁의 장소(arena)지만 아직 루틴화된 관계 패턴이나 안정적 행위 규칙이 없는 때로 정의됩니다. SAF는 대개 장 주변의 외생적인 사회 변동에 의해, “발현적 동원(emergent mobilization)”이라는 과정을 거쳐 형성이 됩니다. 발현적 동원은 굉장히 사회 운동의 동원 과정과 유사한 것으로 행위자들이 (1) 어떤 위협이나 기회를 집합적으로 정의하고 (2) 조직적 자원을 전유하고 (3) 미조직된 사회 세계를 조직된 행위로 이끌 혁신적 행위에 집합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상호작용과 공유된 이해를 만들고자 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동원에서 사회성의 기술은 매우 중요합니다. 행위자들은 협력과 연대에서 갈등과 경쟁에까지 이르는 스펙트럼 사이에서 장을 조직하는데 이후 장의 안정성은 이런 장 조직 논리가 비교적 일관적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SAF의 안정성은 행위자들이 장의 규범, 그리고 규칙에 대해 합의를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잘 자리잡힌 장에서는 도전자 역시도 규칙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가지고 있어, 장의 변화를 가져올 도전을 제기할 가능성이 덜합니다. 그러나 SAF는 역시 변화할 수 있는데, “(1) 단편적인 변화의 연속 … 혹은 (2) 혁명적 변화라는 두 종류의 장 차원 변화에 영향을 받습니다”(199). (1)에 대해, SAF 안에서 행위자들은 끊임없이 위치를 차지하려 다투기 때문에 점진적 변화가 누적되고, 비록 단편적으로는 장의 규칙, 질서가 재생산될 수 있지만 이런 누적은 질서가 변화할 수 있는 “티핑 포인트”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장의 변화는 주로 장 외부로부터 온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1) 첫째로 장 외부의, 게임의 규칙과 관습에 덜 이해가 있고 구속 받는 ‘아웃사이더’에 의해 일어날 수 있고, 이런 외부적 변화의 효과성, 정도는 외부자가 속한 장의 인접성이나 사회성의 기술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2) 레짐의 변화, 불황, 전쟁 등의 거시 수준 사건도 수많은 장 접합점(linkages)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3) 장 사이의 접합점에 의해, 다른 장의 변화에 따라 또 다른 장이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은 장 이론에서 덜 이론화된 부분입니다. 플릭스타인과 맥아담은 “잔잔한 연못에 던져진 돌처럼 모든 인접 장으로 물결이 퍼져나가”듯이 한 장에서 안정성이 크게 줄어들면 다른 장에 영향을 준다고 비유합니다(200). 특히, 어떤 장이 다른 장과 위계적 관계에 있다면 지배적 위치의 장의 변화에 더욱 취약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위계적 관계가 아닌 상호의존적 관계의 장들은 오히려 변화의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장들이 서로 상호적으로 공유하는 자원과 혜택 등이 변화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e.g. 부르디외의 『국가 귀족The state nobility』).
결론 및 논의 [pp.201-202]
저자들은 우선 앞에서 다룬 장 이론들의 차이가 이론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부각되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장 이론들을 구별되는 학파로 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경험 연구와 연결지으며 검토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의 장 이론은 보통 추상적인 수준에서 전개되었고, 장 이론 사이 개념적 불일치(conceptual disagreement)를 찾아내기 위한 측정이나 비교가능성 같은 경험적 문제는 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부르디외의 『구별짓기Distinction』에 관해, 이후 연구들은 문화 생산의 장이 존재하는 정도, 혹은 그것이 시공간을 가로질러 얼마나 안정적일 수 있는지 따위의 일반적 장 이론 수준의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합니다(201). 또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장 이론들 사이의 차이가 장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scope condition)의 차이의 문제인지, 아니면 장 이론들 사이 근본적인 양립 불가능성에 대한 것인지 명확히 할 필요도 있습니다.
장 이론은 역시 모호한 인식론적 지위를 안고 있습니다. 장은 실재하기 때문에 실증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공통된 구조 및 메커니즘을 식별할 수 있는지? 혹은 장은 역사적, 질적 분석을 돕는 이념형 혹은 개념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물론 저자들은 SAF 이론이 어떤 인식론적 입장에서든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경험 연구에 있어 장 이론은 굉장히 일반적인 주장을 내놓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어떤 경험적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장 이론의 일반화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법은 장 이론을 조직군 생태학 등 장 개념을 참조하지 않는 다른 중범위 이론과 견주어 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장 이론이 다른 이론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다른 이론의 아이디어가 장 이론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인지 저자들은 SAF 이론이 다른 장 이론 위에서 구축됐을 뿐만 아니라 사회심리학, 사회운동이론, 정체성 이론 등등을 통합시켜 유용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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