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이 취하고 있는, 그루비하고 클래식 록적인 접근은 버먼(Berman)의 오랜 친구이자 실버 주스의 원년 멤버인 스티븐 맬크무스(Stephen Malkmus)가 돌아온 것과 관련이 깊다. 밴드 페이브먼트의 리더로서 겪어야 하는 머리아픈 일들은 잠시 제쳐둔 채, 맬크무스는 페이브먼트가 가지고 있었던 팝적인 호소력을 앨범 『아메리칸 워터』에 불어 넣으며 실버 주스의 리드 기타리스트가 된다는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대부분의 청중들은 『아메리칸 워터』의 가벼운 접근을 반겼는데, ‘실버 주스 순수주의자’인 팬들은 이 앨범에 강하게 느껴지는 말크머스의 잔향을 비난하고는 했다. 물론, 몇 곡들은 페이브먼트를 다시 조리한 것처럼 들리는데(특별히, “Blue Arrangements”), 이 앨범은 전체적으로 보면, 작사가 및 보컬리스트로서의 버먼과 음악감독 및 기타리스트로서의 말크머스의 성공적인 콜라보레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새로운 배킹 밴드가 추가된 점도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의 파트너십은 —아마도 현존하는 유일한 위대한 인디 디스코 록 음악이라고 할 수도 있는— “People”에서 절정을 이룬다. “People”에서 버먼의 시적인 위트는 만개하는 것이다. (애플 뮤직 에디터의 글 번역)

 

데이비드 버만은 "American Water Spaniels"라는 견종(犬種)을 다루는 수의사 사무실의 포스터를 보고 이 앨범의 제목을 따 왔다. [American Water] 앨범은, 실버 주스의 최고의 편곡과 연주라고 할 수 있는, 자랑할 만한 몇 곡을 가지고 있다. 플루트와 브라스로 채색된 "Random Rules"와, 드라이브가 걸려 있지만 우아한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Night Society"에서, 와와 페달(wah-wah)이 어울리는 70년대 스타일의 팝인 "People" 등. (Allmusic 앨범 리뷰 일부 번역: https://www.allmusic.com/album/american-water-mw0000600935)

 

데이비드 버먼--지금은 고인이 된--의 1인 밴드 퍼플 마운틴을 접하고 거꾸로 실버 주스를 듣게 되었다. 몇몇 로킹한 곡들도 있고, 위에서 애플 뮤직 에디터가 쓴 것처럼 페이브먼트 느낌이 강하게 나는 곡도 있지만, "Random Rules"와 "We Are Real"에서 느껴지는 처연하면서도 나긋한 버먼의 보컬이 좋다. 깔끔한 클린 톤 일렉트릭 기타는 위안이 된다. "Honk If You Are Lonely Tonight"은 확실히 퍼플 마운틴의 앨범 속 수록곡들과 결이 비슷하다. 가사는 스트레이트하고, 박자는 통통 튀고, 보컬은 적당히 흥겹고 이것이 그의 절망에 동참하게끔 한다. 

 

특히 로킹한 느낌이 많이 드는 곡일수록 더 심한데 앨범 전체적으로 플랫하고 건조한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단순한 밴드 구성에서 수록곡들이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또 믹싱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서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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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소셜 미디어 사용을 중단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면 자기통제력을 갖기 어려워지고, 민주사회에서 좋은 시민으로 성장하기 어려워지는데, 문제는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이러한 악영향을 어느 정도 의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 한국어로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글은 재런 러니어의 [지금 당장 당신의 SNS 계정을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이다. 아래의 글에서 이 글에 대해 요약정리했다. joonynlp.tistory.com/352

 

재런 러니어, 『지금 당장 당신의 SNS 계정을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

재런 러니어, 『지금 당장 당신의 SNS 계정을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 신동숙 옮김, 글항아리, 2019. 제목 그대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 그런데 10가지 이유라고 한다면 각 ��

joonynlp.tistory.com

그런데 아무래도 글만 읽어서 SNS를 끊기는 쉽지는 않다. 나 역시도 저 책을 읽고 나서 바로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정리하지는 못했다. 지금은 둘 다 완전히 삭제했지만. 그런 점에서 소셜 미디어 사용을 중단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다큐멘터리는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소셜 딜레마'(2020)이다. 소셜 딜레마는 다큐멘터리와 픽션 중간에 걸쳐 진행이 되는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들이 끼치는 문제점에 대해 전문가들이(페이스북이나 핀터레스트, 트위터 등에서 일했던 기획자들이 주로 나오는데, 재런 러니어 그리고 [대량살상수학무기]의 저자 캐시 오닐도 나온다])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의 연출 방식 속에서 진술하는 한편 SNS에 중독된 가상의 한 고등학생이 소셜 네트워크 때문에 어떻게 나쁜 삶을 살아가는지가 다뤄진다. 

 

대부분의 내용들은 위의 재런 러니어 책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인데, 이 다큐멘터리의 미덕은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정신을 탈취하는 한 국면을 영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그 점에서만 해도 이 다큐멘터리는 소기의 성취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공짜라는 것에 그다지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공짜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광고를 보는 것)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모두 광고에 취약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광고는 성가시지만 그냥 보지 않으면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그런 무생물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 우리는 무료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단지 광고를 보는 방식으로만 급부하지 않는다. 아래에서 부연하겠지만, 우리가 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우리가 소셜 미디어 서비스 제공 기업 측에 있어 일종의 상품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재런 러니어의 말). 즉,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과정은, 동등한 주체인 페이스북과 내가, 페이스북은 무료로 소셜 네트워킹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우리는 그에 대해 우리의 개인정보 몇 가지나 광고를 봐 주는 것을 대가로 지급한다는 식의 '평등한 계약 모델'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비유하자면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차라리 우리의 사적 공간을 침입하는 불쾌한 외판원에 가까운데, 소셜 미디어 서비스는 우리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노예화한다는 점에서(자극적인 표현이지만) 외판원보다 더 나쁘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외판원들은 사적인 주거라든지 평온한 생활을 할 이익 정도를 침해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우리가 공론장에서 다른 시민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개인적 숙고와 의견 형성이 일어날 수 있는 사적(private) 공간을 침식하고 파괴한다. 자기만의 방이 있어도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중독되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 어려워진다. 아무튼 그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계기로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무료 서비스를 이용하게 된다. 일단 서비스에 가입해 이용하면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소셜 미디어 회사들은 사회학과 심리학의 빛나는 성과를 차용한 여러 가지 알고리즘을 사용해, 우리로 하여금 소셜 미디어 서비스에 더 머물게 하고, 우리의 정보를 수집하며 우리가 어떠한 정보나 광고에 더 취약할지를 평가한다. 그리고 그 가공된 정보들은 광고회사들이나, (음모론 같지만) 실체를 모르는 어둠의 정치적 그룹(캠브리지 애널리티카 같은)에 팔려 나간다. 실상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의 수익 모델은 사실 우리에게 어떤 컨텐츠를 끊임없이 들이민다기보다는 유혹받기 쉬운 우리의 정신적 자원을 몰래 탈취한 뒤에 그것을 광고주들에게 팔아 넘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개인적 시간과 정신을 탈취당하고, 또 그것들은 어딘가로 밀수되고 있는 셈이다. 음모론 같지만 실상이 이렇다.

 

우리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것이고, 단지 과도하게 이용한다 하더라도 이건 우리의 주의력과 의지력이 약간 불충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는 약간 어려운, 미묘한 사기(詐欺)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점을 '소셜 딜레마'는 시각적으로 충분히 스트레이트하게 설명한다. 추천하는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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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2017)

2020. 8. 10. 08:53

우연히 왓챠(예전의 이름은 왓챠플레이였는데 바뀌었다)에서 <소공녀>라는 영화를 보았다.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해서 볼까 말까 했는데 여자친구가 보자고도 했고 또 <족구왕>의 감독이었던 전고운의 영화이길래 우선 보기로 했다.

 

(1) 우선 든 생각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왜 좋아할까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영화가 특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미소라는 주인공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이 상당히 얄팍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고, 그 점이 영화를 특색 없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월세가 몇 만원 비싸지자 미소는 짐을 싸서 집을 나오고 과거 밴드 활동을 같이 했던—이 밴드가 아마추어 밴드였는지 아니면 진지한 밴드였는지는 영화에서 언급이 없다—친구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영화는 그런 식으로 전형적인 회고의 구도를 취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미소가 잠을 자고 거처를 구하기 위해 과거의 친구들을 순례하여도, 영화는 미소라는 사람은 (자주 인용하는 영화 속 대사에 따르면)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위스키와 담배(=‘생각과 취향’?)를 지출절감을 위해 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만을 보여주는데에 그칠 뿐이었던 것 같다. 중심이 되는 인물의 내력이라든지 성격에 대해 크게 생각할 거리가 없다보니 영화가 보여주는 풍경들이 특별히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고, (깊이는 없는) 주인공의 매력이나 개성에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 영화가 힘을 잃었다고 생각되었다. 미소는 몇 차례 이동하며 2010년대 서울의 풍경과 청년들의 초상을 그리는데, 인물 자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때문인지 그 시선이 뻔한 것만을 비춘다고 느껴진 것. 예컨대 회사에서 링거를 맞으면서 일하는 과거 베이스 친구, 대출 끼고 집을 샀기 때문에 이혼 위기를 맞아 집이 집 같지 않음에도 집을 버릴 수 없는 밴드 동료 동생 등등과 같은 이미지들은 미소의 시선에 여과되었을지라도 전형적인 것들에 불과해서 특별히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마도 미소라는 캐릭터에서 자기 취향이라는 것이 있는, 타협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굳센 개인을 보는 것 같다.(그것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되는 위스키와 담배라는 소재가 상당히 도식적이고 전형적인 점은 내 불만에 한몫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상당히 호평을 보내는 것 같고. 그런데 과연 위스키와 담배가 ‘취향이나 생각’이 될 수 있는지는 재고가 필요한 것 같다. 기호(嗜好)가 신념이 될 수 있는가. 당연히, 기호는 존중받아야 할 것이나, 嗜好가 확실한 것이, 즉 자신만의 ‘리스트’가 있는 것이 곧 줏대 있는 개인이 되는 데에 필요한 요소인 것인지. 좀 더 많은 고민을 요하는 주제이긴 한데, 나중으로 미룬다. 물론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은, 비록 그것이 위스키와 궐련담배에 불과할지언정, 그 자체로 매력적이기는 할 것이고, 미소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지지를 얻는 것은 배우와 연출의 성취일 것이다. 위스키와 담배에 탐닉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알콜중독자나 니코틴중독자로부터 풍기는 부정적인 분위기를 전혀 암시하지 않는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래도 길거리나 포차에서 소주가 아니라 정상적인 바bar에서 위스키를 주문해 마시고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우며 침을 뱉지는 않는다.(영화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 휴대용 재떨이를 소지하고 다닐 것 같다.) 

 

(2) 미소가 차례대로 만나는 밴드 멤버들이, 미소의 대학 졸업(중퇴?) 이후 삶의 가능성들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회사에서 노예처럼 일할 수도 있고,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하여 홀로 외롭게 살 수도 있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수 있고, 혹은 부모의 압박에 못 이겨 구혼의 노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서울(혹은 경기도)에서 ‘보통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꿔 말하면 서울에서 어찌어찌 살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처럼 읽혔다. 결혼을 하든, 일을 하든, 일을 하지 않는 대신 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든, 아니면 서울에서 살지 않는 식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왓차피디아(구 왓차)의 코멘트를 보는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쓴 게 인상이 깊었다. 집도 포기하고 다른 것 다 포기해도 서울에서 사는 것은 포기를 못 한다고.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영화의 끝에서 미소는 한강둔치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장면이 나오는데, 감독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에게 그것은 주인공 미소의 최종적인 결단처럼 느껴졌다.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서울에 사는 것은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 서울 거주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데, 그것은 영화에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여러 가지로 짐작을 해 볼 뿐이다.

 

이것은 나에게 이 영화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삶을 대하는 굳건한 태도 하나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 점이 마음에 들었고, 생각할 거리가 됐다. 미소의 옛 밴드 동료들이 그녀와 비교되면서 ‘생각과 취향 없이’ 일상적인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만 그려지는 경향이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미소란 캐릭터가 역설적으로 개성이 없어 보이는데(일반적 삶의 트랙을 벗어난다는 점으로만 인격이 정의되기 때문),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게 해 주는 실마리가 된다고 해야 할까.

 

1. 

최근 소설을 읽을 시간이 전혀 없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두 개를 읽었다. 단편이다보니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권남희 옮김, 문학동네, 2014)의 “비를 피하다”와 “야구장”. 

2. 

“비를 피하다”에서 여자는 불륜 관계에 있던 前 직장의 남자와 헤어진 후 우연히 바에서 만난 중년의 수의사와 돈을 받고 섹스를 하게 된다. 여자는 혼자 간 바에서 우연히 중년의 수의사와 합석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그 수의사는 (그런 일이 종종 있듯이) 소설의 여자와 술을 한 잔 한 후 자신의 집에서 시간을 보낼 것을 제안했는데, 그때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비싸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이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요 며칠 계속해서 그녀의 내부에 응어리져 있던 형언할 수 없는 초조함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닫는다(152쪽). 초조함이 사라진 이유를 서두에서의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과 나란히 놓고 볼 때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나름대로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는 인생 전반에 대해서 좀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즉 우리의 존재 혹은 실재는 다양한 종류의 측면을 긁어모아 성립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분리 불가능한 총체라는 견해다. 즉 우리가 일해서 돈을 버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선거에 투표를 하고, 프로야구 야간경기를 보러 가고, 여자와 자는 각각의 작업은 하나하나가 독립되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것이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생활의 경제적 측면이 경제 생활의 성적 측면이라는 견해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 우리는 실로 여러 가지를 일상적으로 사고 팔고 교환하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무엇을 팔아 무엇을 샀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다니던 직장은 대형 출판사였는데, 여자가 편집자로서 맡던 잡지가 폐간된 후 여자는 총무과로 사실상 좌천을 받게 된다. 여자는 별다른 기회 없이 총무과에서 잡일을 하다가는 편집자로서의 커리어가 무너질 수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불륜 관계인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남자는 적당한 핑계를 대어 도와주지 않았다. 그녀는 배신당한 느낌이 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남자와의 관계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여자는 일이 없어 책을 읽거나 레코드를 들었지만 한없는 고독감을 느끼게 되는데(그녀는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었지만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지인들은 약속을 미루며 만나주지 않았다), 그 고독감은 알 수 없는 계기로 갖게 된 남자와의 돈을 받고 하는 섹스로 해소됐다. 우연히 돈을 받고 남자와 자게 된 사건으로 인해, 여자는 사실 전 직장에서의 남자와의 관계도 대가가 오갔던 관계임을 직감한 셈이다. 적어도 그녀는 무엇을 팔아 무엇을 샀는지의 사슬의 고리들 각각을 파악할 수는 없어도 직장의 남자와의 관계도 그러한 연쇄의 일부분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결국 그녀의 경제적이지 않은 생활의 여러 측면들(=직장에서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기, 일을 그만둔 후 친구들에게 전화하기)에 역시 경제적 측면(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대가관계를 기대한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 모종의 계기로 드러난 셈이고, 이로써 그녀의 이유 모를 응어리짐은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이다. 좀 추상적이지만, 분리 불가능한 총체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3.
“비를 피하다”는 과연 섹스는 공짜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이 yes or no의 형태로 대답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더 흥미로웠던 것은 화자가 다음과 같이 소설을 끝맺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옛날, 섹스가 산불처럼 공짜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정말로 그것은 산불처럼 공짜였는데”(157쪽). 이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일종의 추억처럼 읽힌다. 아닌 게 아니라 서두에서 화자는 이런 이야기도 한다. “물론 훨씬 젊었을 때는 … 나는 아주 단순하게 섹스라는 것은 공짜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호의와 호의(좀더 다른 표현도 있겠지만)가 만나면, 거기서 극히 자연스레 자연발화하듯 섹스가 생겨난다는 생각이다. 젊었을 때는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사고만으로 통했고, 무엇보다 돈 자체가 없었다. 나한테도 없고, 상대에게도 없다. 낯선 여자의 방에서 자고, 아침이 되어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면서 차가운 빵을 나눠먹는 생활만으로도 즐거웠다”(136쪽).

회의적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과연 ‘젊었을 때’에도 섹스가 공짜였을까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소설 속 화자가 ‘실제로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느낀 점이 나에게는 흥미롭게 다가왔다(실제로 소설 말미에서 화자는 섹스에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 좀 떨떠름하다고” 생각한다). 낯선 사람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차가운 빵’을 먹는 풍경은 어떤 사회적 조건들이 합류해야 가능하고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다.

자연발화하듯 감정이 교류해 관계를 맺는 그림 자체는 낭만적이며 또 소박하고, 우리에 있어서 어떤 연애 관계의 이상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아침이 되어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면서 차가운 빵을 나눠먹는 생활’은 (본 적은 없지만) ‘몽상가들’과 같은 서구 60년대의 대학생 젊은이들의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대학이라는 공간에 모여 있었던) 자유분방함을 떠올리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 나이대의 세대들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어도 나에게 이 풍경은 현재의 한국의 (20대들이 속한) 풍경과는 매우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한국의 대학생들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고(돈이 많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적 자유화가 완수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호의와 호의가 맞부딪히면 섹스를 나눴던 좋은 때를 이야기하지만, 지금 있어서 남녀의 성관계란 ‘호의와 호의’라기보다는 욕망과 욕망이 맞부딪히는 것으로 이해되고, (특히 남성의) 성적 욕망은 순치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 자발성과 성적 동의가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따라서 섹스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위험이 항상 내재한 것이며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아무래도 섹스는 자연발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된 느낌이다.

‘산불처럼 섹스가 공짜’였던 시절을 회상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낭만적 제스처는 이해가 되면서도(그런 시절이 있었을 테고, 또 좋은 시절이었겠지), 또 거리감이 느껴진다.

 

4.

“야구장”이라는 소설은 은행원을 직업으로 하는 한 아마추어 소설가와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자신의 습작 소설을 읽어 달라는 어떤 사람의 투고를 받게 되는데, 그 원고에 첨부된 편지가 “예의바르고 간결하고 솔직”해서 투고에 대해 짧은 감상을 남기게 되고, 그에 대해 아마추어 소설가 은행원이 화답해 자신이 살 테니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수락했고, 작가는 은행원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의 소설의 기이한 소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은행원은 실제로 자신이 체험한 이상한 것들을 소설에 그대로 쓸 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작가는 흥미가 동해 그 ‘이상한 체험’ 중 하나를 이야기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은행원은 그리하여 야구장에 관한 ‘이상한 체험’ 하나를 들려주게 된다.

 

은행원은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에 속한 어떤 여자에게 푹 빠졌는데, 직접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녀의 뒤를 캐다가 그녀가 사는 아파트를 찾게 되는데, 그 아파트는 강을 면해 있고, 그 강 건너에는 한 야구장이 있었다. 은행원은 야구장의 ‘3루석 근처에 있는 낡은 아파트’를 발견하고 여자가 사는 아파트가 정면으로 보이는 낡은 아파트의 방으로 짐을 옮기고, 아버지의 카메라와 망원렌즈 그리고 삼각대를 빌려 그녀의 방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주일 정도 염탐을 하다가 그만둘 작정이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사태는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 야구장 건너편 아파트를 엿보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어 학교 생활마저 불가능해졌고, 씻지도 않고 이발소도 가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염탐은 여름방학이 찾아옴으로써 끝이 나는데, 왜냐하면 여자가 짐을 싸 고향 홋카이도로 떠났기 때문이다.

 

“[…] 저는 그녀가 떠나고 며칠 동안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며칠이 지나자 저는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목욕을 하고 이발소에 가고, 방을 치우고 빨래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점점 원래의 저 자신으로 돌아갔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원래대로 돌아왔기 때문에 스스로를 신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진정한 나는 대체 무엇인가 하고요.

 

여자를 염탐하기를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입안에서 혀가 점점 부풀어올라, 결국에는 질식하고 마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마치 액체처럼 제 안의 폭력성이 모공을 비집고 나오는 듯한 그런 느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원은 이상하게, ‘스스로를 신용할 수 없을’만큼 여자가 홋카이도로 떠났다는 간단한 사정만으로 일상 속으로 되돌아간다. 은행원은 “테니스, 오토바이, 음악” 등의 취미에도 냉담해지고 동아리 및 학교 수업에도 나가지 않고, 만약 염탐이 들통나 사회로부터 경멸과 비난을 받아 매장되는 것이 아닌지 매일매일 악몽을 꾸는 등, 염탐 생활에 깊게 사로잡혀 있었음에도, 여자가 홋카이도로 떠난 이후에는 일상을 회복하게 된다. “여름 내내 공부를 했습니다. 학교는 별로 가지 않았던 탓에 학점이 아슬아슬했죠. […] 저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시험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차츰 그녀를 잊어갔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도 거의 끝날 무렵 돌아보니, 전 예전처럼 그녀에게 몰두해 있지 않더군요.” 여자를 훔쳐본다는 것부터가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실행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염탐 생활의 해소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소박한 감상이지만 적어 둔다. 일상으로의 복귀는 은행원 자신도 알 수 없이, ‘너무나도 쉽게’ 다가온 것인데, 바로 그 점이 흥미롭다. 사람들은 종종 고백을 한다. 이러한 고백은 흔히 (우연한 기회에 책을 읽었든,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든, 운이 나쁘게 불쾌한 일을 경험했든)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배웠고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진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은행원의 술회는 그러한 구조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있다. 그는 염탐하는 자의 삶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것은 여자가 고향으로 떠난 후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시험공부를 하고’ 차츰 잊어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염탐으로 인한 폐인 생활의 종료 과정은 ‘시험 공부를 한다’, ‘그러면서 차츰 여자를 잊었다’는 두 문장으로 압축되어버린 셈인데, 변화에 대한 이러한 고백 방식은 이야기 속에서 여자의 방을 훔쳐보는 것에 대해 별다른 윤리적 반성이 없는 것만큼이나 낯선데, 그런 식의 묘사가 아주 이상한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과거의 어떤 경험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험은 고백의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전형적인 고백이 갖는 이러한 구조는 우리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은행원의 이야기가 암시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모종의 계기를 의식하고 그에 따라 반성하며 생활의 경로를 바꾸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에는 반성적 태도가 유용하고 또 요구된다는 것과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지즈 안사리, <모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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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로맨스

최신의 사회학 연구와 번뜩이는 유머가 만나 새로운 연애 지형도가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탐험해 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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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오브 제로 Master of None>으로 유명한 아지즈 안사리가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폭염사회>의 저자라고 한다)와 협업해서 펴낸 책. 우선 첫 번째로 위 TV 시리즈를 재미있게 본 터라 우선 이 책에 흥미가 갔다. 그의 코미디 쇼를 본 적은 없지만 그가 감독한 짧은 시리즈에서 짐작하건대, 아지즈는 대도시의 젊은 남녀들이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공통의 경험들을(해당 시트콤의 에피소드 주제로 생각이 나는 것은, 원나잇스탠드, 데이팅앱, 장거리연애, 피임실패 ... 어쩐지 다 섹스와 관련된 것들이긴 한데) 언어화하는 코미디언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장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았다(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코미디언들이 많지 않고, 그런 코미디언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 역시 많지 않다). 논평가나 연구자들이 할 수 없는 코미디언의 일이 이러한 연구서의 색채도 띠고 있는 책에서 어떻게 드러날지 궁금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인 ‘모던 로맨스’라는 주제에도 흥미가 갔다. 한국어판의 부제는 ‘SNS 시대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이다. 분명히, 더 멀리는 낭만적 사랑의 출현이라든가 최근으로는 성 해방이나 여성들의 지위 향상, 변화한 통신 기술 같은 굵직한 흐름들이 사랑의 실천 양식에 변화를 주었겠지만 최근 10년 사이 소셜미디어와 문자메시지의 대중화가 가져다 준 미묘한 영향에도 주목을 하고 싶었다. 변화한 시대의 변화한 사랑에 대해 논한 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당장은 기든스의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생각나고, 최근에 읽으려고 한 책으로는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 등이 있다), 그런 책들은 문자 메시지의 출현이 첫 데이트 신청 같은 것들에 있어 우리의 사고 회로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보통 사람의 시선에서 납득이 가는 재미있는 설명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요컨대 나는 학자들의 탐색이 닿지 않는 가장자리에 위치한 변화한 현상들에 대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조금 민감한 사람(=코미디언)의 통찰력 있는 논평을 기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 내용은 어느 정도 만족스럽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책에서 아지즈 안사리는 스마트폰 출현 이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류의 몇 가지 새로운 공통 경험들에 대한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책의 문장은 시종일관 구어체로 작성 내지는 번역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는 “문자 메시지가 우리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독특”한데, “그저 상대방이 요만한 전화기를 들어서 시시껄렁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미치광이처럼 몇 분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혼돈과 상처와 분노의 폭풍을 겪는 모습”을 한 세대 전만 해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한다(99쪽). 틴더와 같은 데이트앱이 데이트할 수 있는 싱글을 무제한 공급했다고 논평하고, 오늘날 스마트폰을 가진 것은 “24시간 연중무휴로 운영하는 싱글 전용 클럽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정리한다(55쪽). 현대의 로맨스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대처하는 모습들은 저자가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와 공동 수행한 초점집단인터뷰 및 레딧 등 인터넷 사이트에서의 설문에 의해 생생하게 뒷받침된다. 

이처럼 이 책의 현대 사회에서의 로맨스에 대한 간단한 조망과 비유는 적절하고 또 읽는 재미를 주지만, 한편 이에 대한 그의 논평이 무디고 가볍다는 점은 아쉽게 다가온다. 데이트앱의 발달이라거나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 등에서 남성들의 성희롱이 늘어난 조건들(누군가에게 자신의 성기 사진을 보여줬을 때 감당해야 할 리스크도 줄어들고 그걸 불특정다수에게 보내기까지의 비용도 매우 줄어들었다는 것) 등의 문제에 대해 저자는 그것들을 단순히 소개할 뿐이고, 다큐멘터리 진행자나 기자가 할 법한 뻔한 논평들을 한다. (책을 읽으며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마주칠 때 "아무리 스마트폰 화면에 많은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맞은편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다른 사람이 또 누가 있을지, 스마트폰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는 대신, 우리는 실제의 누군가를 만나 좋은 시간을 더 많이 보내려고 고심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417쪽]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저널리스트가 쓴 것 같다는 인상을 풍긴다. 물론 코미디언이 이 책을 썼다는 인상을 계속 남기기 위해 저자 아지즈 안사리는 책 내에서 시종일관 말장난 수준의 농담을 하는데, 아예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번역자께서도 능숙하게 미국식 유머를 옮기셨다), 한국어라는 맥락과 스탠딩코미디가 아니라 독자가 책을 읽는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별로 그런 농담들이 재밌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코미디언과 사회학자의 협업. 나름대로 기대를 가졌으나 어느 정도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온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돈된 방법으로 정확한 데이터를 모으고 거기서 어떤 통찰을 얻어내는 사회학자의 지혜와 일상 속의 경험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통찰들을 재치 있는 몇 마디 언어로 표현하는 코미디언의 능력을 기대했는데, 책의 내용은 성실하게 초점집단인터뷰와 인터넷게시판 취재로 얻어 낸 (평범한) 자료를 통해 스케치한 (그리 놀랍지는 않은) 현대 사회의 풍경을 입담 좋은 재담꾼이 묘사해 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