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에이펙스 트윈의 음악을 다시 들어보며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앰비언트의 효시(?)라고들 이야기하는 이노의 앨범을 찾아 들어 보았다. 이노의 음악은 몇 년 전 <Another Green World> 앨범을 들은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2. 네 트랙 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에 드는 것은 맨 마지막 트랙인 "2/2"인데, 무리 없이 공간을 유영하는 신디사이저 소리가 전면에 등장하고, 피아노나 기타 같은 어쿠스틱 악기의 소리나 인간의 목소리가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트랙들과 구별된다. 내 입장에서는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 주는 트랙은 마지막 쪽인 것 같다. 때론 엄격하고 강박적인 비트의 반복도 안정을 주지만, 이 트랙에서처럼 (그들 개개의 음을 규율하는 박자가 부재해 보여도) 신디사이저 음들이 파도와 같이 부드럽게 밀고 빠지는 모양도 안정을 준다. 

 

3. 두 번째 트랙 "2/1"과 "1/2"에서의 배경의 코러스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질감'이 있으나 그것이 인간의 목소리와 닮아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긴장감을 더한다. 요컨대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들을 수만은 없는 트랙이라는 것이다. 단일한 음을 가지는 개개의 목소리들이 각자 등장하며 서로 화음을 이루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는 점을 볼 때 여기에는 단지 편안하게 배경음악으로 위 두 트랙을 즐기지만은 말고 각자의 보컬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며 만들어 내는 구성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라는 이노의 의중이 개입한 것이 아닌가 싶다("as interesting as it is ignorable"!). "1/2" 트랙의 구성에 관한 이노의 언급이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인용되어 있는데, 흥미롭다: en.wikipedia.org/wiki/Ambient_1:_Music_for_Airports 

 

Ambient 1: Music for Airports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1978 studio album by Brian Eno Ambient 1: Music for Airports is the sixth studio album by English musician Brian Eno, released in 1978 by Polydor Records. The album consists of four co

en.wikipedia.org

 

피치포크 사이트에 게시된 "50개의 베스트 앰비언트 앨범"에서 이노의 위 앨범에 대한 꼭지를 번역해 보았다.

 

브라이언 이노가 배경을 흐르는 사운드(atmospheric sound)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만들어 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노는 그것에 앰비언트 뮤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에릭 사티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이 이 글[앰비언트 뮤직 앨범 50선]을 읽고 있는 이유가 브라이언 이노 때문이 아닌가.) 1970년대의 가장 교활하고도 가장 사색적인 팝스타이자 철학자였던 브라이언 이노는 특정한 분위기에 맞추어, 공간을 채색할 수 있는 기능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음향의 영역에서 향수나 공기청정기와 상응하는 어떤 것을 말이다. 당시 대부분의 환경 음악(environmental music)은 팝 히트들을 오케스트라 용으로 편곡한 이지 리스닝이나 “엘리베이터 뮤직”의 형식을 취했는데, 이노는 이를 “피상적이고 새로울 것이 없다”고 여겼으며, 그는 당시의 이러한 지배적인 형식에 반대해 목표를 세웠다. 앰비언트 뮤직은 그 초창기부터 우월의식(snobbery)을 내재한 셈이다. 이노는 그저 그런 분위기(atmospheres)를 창조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미감이 있는 것을 창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노는 [그의 생각을] 강요하기보다는 부드럽게 제안하고 싶었다. 주어진 환경을 “덮어 버리는” 것보다는, 그는 어떤 공간의 감정적인 반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사운드를 상상했다. 그는 차분함과 사색을 선호하는 만큼이나 의심과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키는 사운드를 선호했다. 달리 말하자면 이노는 외톨이들, 무신론자들, 그리고 내향적인 사람들을 위한 배경음악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고, 이노가 『Ambient 1: Music for Airports』로 이루고 싶은 것이야말로 정확히 그런 것이었다. 이 앨범의 피아노와 신디사이저 멜로디는 부드럽게 움직이고, 겉보기에 어떤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바람 없는 공기에 머무는 모빌처럼. 이 앨범은 비통한 감정과 지고의 행복을 표현함과 동시에, 감정적으로 열려 있으며, 분위기를 돋우는 이상적인 음악이다(적어도 성찰적인 리스너들에게는 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공항이라도 이와 같다면, 그 공항이 불러오는 이미지는—알루미늄과 유리의 번쩍이는 표면 너머로 태양이 지며, 침착하고 낙관적인 여행자들이 통로를 아무 소음 없이 유영하는—아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 테다. 미래로 가는 이 열차는 그 역을 떠난 지 오래이다(그리고 끔찍하게 탈선해 버렸다[derailed in a fiery heap]). 무엇부터 들어야할지 모르는, 앰비언트 뮤직이 궁금한 리스너들에게는, 이만한 좋은 입문작이 정말로 없을 것이다.

https://pitchfork.com/features/lists-and-guides/9948-the-50-best-ambient-albums-of-all-time/?page
 

The 50 Best Ambient Albums of All Time - Page 5

Wallpaper music? None here. These are the albums that have shifted moods and created new worlds

pitchf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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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 Estate, 『Atlas』

2020. 6. 28. 20:15

친구가 소개해줘서 몇 년 전에 듣게 된 앨범. 이런 유의 음악을 '드림팝 Dream Pop'이라고 한다고 한다. 종종 드림팝은 슈게이징과 비슷한 느낌으로 사용되는 말 같은데, 슈게이징이라고 지칭되는 다른 밴드들과 다르게 드럼, 베이스, 클린 톤 기타 몇 대로 이렇게 또랑또랑하고 몽환적인 사운드를 낼 수 있는 것은 경이로운 일 같다. "Talking Backwards"(, "April's Song"(코러스 이펙터가 들어간 건지? 리드 기타가 아름답다)이 마음에 든다. 아직도 자주 듣는다. 

 

몇몇 예술 형식들은 기만적이라고 할만큼 간단하다. 캘리그라피가 있고, 정물화가 있고, 또 드림팝이 있다. 후자의 경우, 라이드 심벌의 일렁임이나 클린 톤 기타의 정확한 톤과 같은 디테일들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다. 뉴저지 출신의 밴드 리얼 이스테이트의 정교하게 프로듀싱된 세 번째 앨범 『Atlas』를 듣는다는 것은, 드림팝을 조각하는 대가들의 4중주를 듣는 것과 같다. 과장 없이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정확하게 구성된 이 앨범은 무드가 있으면서도 애절하지는 않으며, 활기차지만 감상적이지는 않다. Luna, Heavenly, The Sundays 같은 밴드들의 계보와 발맞추어, 앨범 『Atlas』의 곡들은 몇 개 남짓의 코드나 구성부들이나 가사의 소재들만(교외나 아버지에 대한 소재들) 담고 있는데, 그럼에도 모든 것들은 완벽하게 잘 맞아 떨어진다. Matt Mondanile의 리드 기타는 과시적이지 않으면서도 흥미롭고, Martin Courtney가 평범하게 읊조리는 보컬을 훌륭하게도 잘 보충하는데, 그러면서도 나른한 보컬은 부드러운 소음들을 뚫고 솟아오른다. 스네어 드럼은 기름에 끓으며 튀겨지는 듯하고, 베이스라인은 우아하게 포고(pogo) 댄스를 추는 듯하며, 분위기는 우수에 젖어 있으면서도 경쾌하다. “Talking Backwards”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타 리프는 청자에게 The Smiths를 떠오르게 할 것이며, 한편 “Horizon”의 카우펑크(cowpunk)적 스윙은 이 밴드가 얼마나 많은 트릭을 숨기고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Apple Music Editor의 글 번역)

원문: socialsciencespace.com/2015/05/steven-lukes-on-durkheim/

 

Steven Lukes on Durkheim

LISTEN TO STEVEN LUKES NOW! If anyone can lay claim to be the father of sociology, it’s Émile Durkheim. By the time of the French academic’s death in 1917, he’d produced an extraordinary body of work on an eclectic range of topics, and had become a

socialsciencespace.com

 

데이비드 에드먼즈: 본인이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다면 에밀 뒤르켐이 그럴 수 있겠지요. 1917년 그가 사망했을 무렵 뒤르켐은 굉장히 폭넓은(eclectic) 주제에 대한 독특한 저작들을 남겨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지식계의 주된 기여자(contributor)가 되었지요. 무엇보다도, 그의 야망은 사회학을 정당한 과학(a legitimate)의 수준으로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븐 룩스는 학적 커리어 초창기부터 뒤르켐을 연구해 왔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뒤르켐 학자가 되었습니다. 

나이젤 워버튼: 소셜 사이언스 바이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스티븐 룩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버튼: 우리가 다룰 주제는 뒤르켐입니다. 이제 그는 19세기의 위대한 사회학 사상가로 여겨지고 있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까요? 

룩스: 뒤르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였습니다. 사실, 종종 사회학의 프랑스 학파(the French school of sociology)라고도 불리는 학파의 창시자입니다. 뒤르켐은 보르도 대학(University of Bordeaux)에서 많은 해를 보냈고, 그 뒤에는 파리에서 살았습니다. 뒤르켐의 저작은 매우 광범위한 것을 다룹니다. 첫 저작은 분업에 대한 것이고 마지막 위대한 저작은 종교에 대한 것이었죠. 그리고 그는 『l’Année Sociologique』라는 저널을 창간했고, 뒤르켐의 젊은 동료들이 14년간 저널 발간에 힘썼습니다. 저널은 12호가 발행되었는데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 찬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습니다. 뒤르켐은 그 저널을 편집했고, 당시 소르본에서 학교 교사들을 교육시켰고, 프랑스에서 매우 권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워버튼: 그가 작업한 여러 영역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분업에서 시작해서… 그리고 뒤르켐은 역시 가족, 법 등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룩스: 확실히 그렇습니다. 뒤르켐 작업 전반을 지배하는 아이디어(the overarching idea)이자 저변에 깔려 있는 모티프(motif)는 사회적 결정(social determination)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탐구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역할, 사회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인지 질문에 매혹되었고 사로잡혔습니다.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국내에서는 새물결 출판사의 영어판 중역본을 찾아볼 수 있다—역주]이라는 책의 첫 번째 장 이름은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의 저작을 관통하는 공통된 테마는 우리가 실제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저술한 광범위한 대상들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입니다. 

워버튼: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에 대해 우선 살펴봅시다. 뒤르켐에 따르면 사회적 사실이란 무엇이죠?

룩스: 제가 말한대로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의 첫 장이 바로 그 문제를 다룹니다. 그의 답은 이런 것입니다. 사회적 사실은 개인에게 외재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사실은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와는 독립해 떨어져 있습니다. 종종 이것은 창발 이론(the theory of emergence)이라고도 불리는데요, 사회적 사실들은 창발합니다(emerge). 뒤르켐을 두고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그가 방법론적 개인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라고 불리는 것, 즉 설명을 개인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에 관한 사실들로 환원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거세게 반발했다는 것입니다. 뒤르켐은 사회학이 초점을 맞춰야 할 사회적 실재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워버튼: 그러면 사회적 사실은 인간이 내리는 선택과 관련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개인으로서 저는 선택을 내리죠. 제 친구들과 가족들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같이 협력할 때도 있고요. 그러면 마치 우리가 현실을 만들어 낸다고 느낄 만하지 않나요? 어떤 사회적 실재가 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요. 

룩스: 네. 뒤르켐은 사회적 실재가 우리를 만드는 방식들에 대해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는 다른 몇 사회학자들과는 다르게 사회적 상호작용의 수준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심리학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죠. 한때(at one point) 뒤르켐은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에서 어떤 사회적 현상이 심리학적 요인에 의해 설명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죠. 그는 그런 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매우 신랄했어요. 그리고 뒤르켐은 사회학이 굉장히 광범위한 것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워버튼: 뒤르켐의 가장 유명한 저작에 대해 말하자면… 제가 아는 한 자살에 대한 연구가 있는데요. 자살은 사회적 사실과 어떤 관련이 있죠?

룩스: 으음, 이것은 참 이상한데요, 저는 그 주제에 대해 강의할 때 사실 뒤르켐의 자살에 관한 책은 자살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곤 합니다. 즉 그 책은 개인이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 하나하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살률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것이라는 거죠. 이 책의 요점은 자살률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경험 사회학자로서(as an empirical sociologist) 뒤르켐은 다른 시간과 장소에 따라 자살률이 놀랍게 변하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예컨대 전쟁 시기에는 자살률이 내려간다는 것을 뒤르켐은 관측했죠. 경제가 위기일 때, 그것이 활황이든 슬럼프든, 자살률은 올라갑니다. 이런 사실들이 그를 사로잡은 거예요. 왜 그럴까? 왜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과 다른 사회적 공동체들이 각기 다른 자살률을 보이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회적 요인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워버튼: 그리고 뒤르켐은 말하자면 사회적 본성(social nature)에 대한 몇몇 일반이론을 찾고자 했죠?

룩스: 그는 사회적 수준(social level)에서 설명변인(explanatory factors)을 찾고자 했습니다. 『자살론』은, 뒤르켐의 말로는 ‘자살을 유발하는(sucidogenic)’ 흐름이 있다는 이론을 전개합니다. 즉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제반 조건들의 본질이 되는 사회적 요인(social causes)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결국에는 두 가지 아이디어로 이어집니다(came down to). 첫째는 사람들이 더 큰 사회적 단위(unities) 혹은 집단(communities) 등으로 통합되는(integrated) 수준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규범에 의해 규제되는 수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통합과 규제라는 핵심 아이디어가 뒤르켐의 이론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만약 사회적 규제가 무너진다면, 즉 사회적 규범이 약화된다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대—말하자면 그들이 받을 임금이나 수당에 대한 기대가 있겠죠—가 점점 불확실해지는데, 이런 것이 규범의 붕괴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통합에 관련해, 뒤르켐의 아이디어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해 특정한 종류의 애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종종, 사실은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을 뜻하는 것인데, 에고이즘(egoism)의 사회적 조건에 대해 논하기도 했죠. 그리고 규제에 대한 다른 개념, 규범적 규제의 붕괴라는 개념을 뒤르켐은 아노미(anomie)라고 불렀어요.

워버튼: 선생님이 먼저 언급하신 다른 책은 분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마르크스가 쓴 것 같은 느낌인데요. 

룩스: 당시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죠. 하지만 뒤르켐의 관심 대상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막스 베버는 확실히 마르크스와의 논쟁에 깊게 참여했습니다. 뒤르켐은 그 정도가 훨씬 덜했습니다. 그가 사회주의에 대한 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요. 정치경제학과 경제학 일반은 뒤르켐의 관심사 밖이었습니다. 뒤르켐은 분업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말인즉슨 사회적 분화나 사회의 상호의존성의 정도, 사람들의 활동과 역할과 기능들의 상호의존성 등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르켐 저작 전반을 관통하는 질문은 바로 다음이었습니다. 사회적 연대(social solidarity)란 무엇인가? 그는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살에 대한 책에서 보이듯이 규범에 관심이 있었죠. 지금 우리는 규범을 가치(values)라고 일컫지만요. 즉 사람들이 타인에 기대하는 바와 그들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등등 말입니다. 그래서, 분업에 대한 책은 사실 근대 사회의 발전에 대한 책입니다. 근대 사회가 자신을 표출하는 방식에 대한 책인 거죠. 이것을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름을 붙임으로써 뒤르켐은 근대 사회가 서로 상호의존적인, 분화되어 있는 역할들에 의해 묶인다고(held together) 생각했죠. 사람들이 각기 다른 활동을 하고 서로 이질적인(heterogenous) 삶을 사는, 전례 없이 복잡해진 사회에서 그것은 어떤지, 그들이 한데 서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뒤르켐이 몰두한 주제였습니다.

워버튼: 선생님이 연대라는 단어를 쓰실 때, 사회적 응집성(social cohesion)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요. 연대(solidarity)는 ‘우리는 당신 편이야’ 하는 식의 정치적 연대의 뜻을 품고 있는 듯해요. 그런 뜻보다 좀 더 느슨한 개념인가요?

룩스: 그렇습니다. 그런 정치적 함의는 없어요. 사회적 유대감(social bonds)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인 것이죠. 사회적 유대감이라는 질문에 바로 뒤르켐은 매혹되었던 것입니다. 분업에 대한 내용으로 돌아가자면, 뒤르켐은 진화론적 용어(evolutionary terms)로 근대 사회가 전근대 사회에서 성장해 나온다고 했고 근대 사회는 전근대 사회와 달리 다른 방식의 연대로 특징지어진다고 했는데요. 이런 구분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사회분업론』을 읽는 좀 더 유익한 방식은, 뒤르켐은 사람들이 연대할 수 있는, 즉 보다 큰 사회로 통합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한 분석적 구분을 나누었다고 보는 것 같아요. 

한편에는, 뒤르켐이 정체성(identity)이라고 불렀던 것—신념, 규범, 가치의 측면에서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의 측면에서 통합되는 개념이 있죠. 그런 것을 두고 뒤르켐은 기계적 연대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기계적 연대가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뒤르켐이 보기에 근대의 사회적 연대는 사람들 간에 서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묶어 주는 기제입니다. 뒤르켐은 근대 사회의 점증하는 이질성(heterogeneity)을 매우 잘 알아차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에 비추어 봤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질서 잡힌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매혹되었고요.

워버튼: 으음,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럼 뒤르켐의 해결책은 뭐였죠? 거칠게라도?

룩스: 그 책에서 뒤르켐은 그렇게 만족스러운 해법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뒤르켐은 계약과 법에 대해 말합니다. 뒤르켐은 법이 근대 사회의 외부적 표상(external representation)이라고, 혹은 도덕성의 외적 지표(external index)라고 봤어요. 그러고 나서 그는 근대성에 특유한 공통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뒤르켐은, 그가 칭하기를, 개인주의 종교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즉 개인의 권리, 인권, 혹은 사상의 자유라든지 그런 것들이 어떤 측면에서는 신성시화되고 어떤 신조(committments)나 사상들의 묶음이 되는 것 자체가 근대 사회에 공통된 것이라는 거죠. 이런 측면에서 뒤르켐은 차라리 19세기 말의 낙관주의자였습니다.

워버튼: 표현의 자유에 관해 마지막에 짚어주신 지점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는데요. 표현의 자유는 확실히 개인주의와 관련이 있죠. 하지만 그것이 사회 분업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룩스: 『사회분업론』은 증가하는 이질성이라는 사회적 조건 아래서 근대적인 형태의 연대가 성장하는 것에 대한 책입니다. 그는 그 책을 1890년대 초반에 썼는데, 그러고 나서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죠. 그는 드레퓌스를 정말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회당 당수인 장 조레스(Jean Jaurès)의 친한 친구였어요. 이에 대해 그는 ‘개인주의와 지식인’이라는 아주 유명한 에세이를 썼습니다("개인주의와 지성인"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논문DB에서 검색하여 번역본을 열람할 수 있다--역주). 그 에세이에서 그는 드레퓌스에 대해 반대편에 선 이들이 주장했던, 지금 우리가 국가 안보라고 부르는 것의 중요성을 위해 교회나 군대의 결정에 의문을 가져셔는 안 된다는 사상을 비판했습니다. 그에 대한 뒤르켐의 응답은, 이 사안을 완전히 거꾸로 생각하게 하는 것인데(to turn this on its head), 그러한 시대착오적인 관념들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사회의 응집성이나 연대성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고, 근대 사회는 특정한 가치들에 대한 헌신 내지는 충실함(commitment)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고, 그 가치들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근대 시민권과 관련된 다른 권리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적 통합에 대한 위험은 그러한 가치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데에서 온다는 것이죠. 법이 그러한 가치들의 침해를 처벌해야 한다고 뒤르켐은 생각했습니다. 뒤르켐의 형벌과 법 이론은 굉장히 흥미로워요. 뒤르켐은 형벌과 법이 지향하는 바가 응보(retribution)나 억제(deterrence)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형벌과 법은 바로 옳음(the righteous)이라는 것의 공통된 감정(common sentiments)와 가치들을 재확인하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처벌은 사회적 유대를 강화시킬 수 있는 한 방식인 것이죠. 처벌을 수행함으로써 규칙이 강화되는(reinforce)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인데요, 왜냐하면 이 이론에서 형벌은 마치 희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론에는 어떤 깊은 진실(deep truth)이 있습니다. 현대의 범죄학이 이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다루는 것을 볼 수 있죠.

워버튼: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뒤르켐은 종교에 거의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죠. 저는 그렇게 읽힙니다.

룩스: 네. 종교에 관한 뒤르켐의 명저는, 제가 뒤르켐을 공부할 때 정말로 그를 진지하게 다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는데요, 저는 그 책이 정말로 대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책은 1912년에 쓰였고요. 그리고 맞습니다. 과학적이죠. 뒤르켐은 사회과학자였고, 그는 자신이 사회과학을 수행하고, 사람들을 규합하고(inaugurating), 사회과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사실은 굉장히 많은 공헌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학을 실제로 현실화시키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는, 사회학적 설명에 가장 저항하는[=사회학적 설명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주제들을 탐구하는 것이었는데, 자살에 관한 연구는 그 방법을 가장 잘 예시하죠.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물론 굉장히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뒤르켐의 그 책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The Elementary Forms of Religious Life>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élémentaire'이라는 프랑스 단어는 기본적인(elemental)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 책은 실제로 종교의 요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뒤르켐은, 아주 기초적인, 초창기의 사회가 종교적인 실천을 하는 바들을 탐구함으로써 (이런 방법은 지금은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사유하고자 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는 인류학자들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북서 아메리카의 부족사회나 씨족들을 연구한 바를 살펴본 것이죠. 그 책은 부족사회의 종교에 대한 연구이고, 뒤르켐은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웠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종교를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종교가 일반적으로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고 종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죠.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는, 당시 선교사들과 여행자들에 의해 조사되고 기록된 부족사회의 종교들을 탐구함으로써 종교가 무엇이고 종교의 요소들은 무엇인지 종교의 일반이론을 수립하고자 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워버튼: 그렇다면 뒤르켐은 종교생활의 요소들이 화학적 요소처럼 서로 조합되고 화합물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인가요? [...]

 

 

몇 달 전 쯤에 갑자기 오르간 연주가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애플뮤직에서 organ 등의 키워드를 넣어서 막 검색을 해봤다. 오르간을 잘 알지는 못하고 오르간 연주를 듣고 싶은 데에 어떤 큰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몇몇 센티멘털한 재즈 곡이나 하드록, 블루스에서 감정이 고조될 때 뒤에서 깔리는 살짝 떨리는 키보드 반주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예를 들자면 롤랜드 커크의 The Return of the 5000 Lb. Man 앨범에서의 I'll Be Seeing You처럼. 그런데 그런 연주를 듣고 싶으면 오르간 독주를 검색하면 안됐던 것 같다. 아무튼) Jimmy Smith 와 Larry Young의 앨범을 들었다. Jack McDuff 같은 이름들이 올라가 있는 플레이리스트도 좀 들었다. 그러다 말았다.

 

그리고 한 달 전 쯤에 갑자기 오르간 곡들이 또 듣고 싶어져서 애플뮤직에서 다시 키워드를 넣어 검색을 했는데 위 앨범이 나왔다. 그런데 일단 앨범 커버부터가 너무 충격이었다. 정말... 뭐라고 해야하지, 열대숲에 대한 전형을 박아넣었다고 해야 하나. 뭐 이렇게 세일즈를... 헛웃음이 났다. 문외한의 단순한 인상이라 미안하긴 한데 부리가 울긋불긋한 열대 새(??), 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각상에 앨범 커버는 녹색 단일 배경이고 위에는 "브라질의 일등 오르가니스트"라니... 

 

앨범은 나쁘지 않다. 곡들의 길이는 대개 짧고, 대단한 기교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익숙한 보사노바나 삼바 곡들의 멜로디를 그대로 따라간다. 앨범 커버처럼 솔직한 연주들이다. 재밌게 들었다. 


아래는 allmusic의 리뷰를 옮겨본 것 

 

 

이 [재발매] CD에 담긴 노트는, "브라질의 열대우림보다 더 화젯거리(topical)가 될 이슈[issue]는 뭐가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재발매 앨범[reissue]이 Walter Wanderley의 Rain Forest보다 더 화젯거리가 되겠는가?"라고 묻는다.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그것은 맞는 말일 수 있겠지만, 음악적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 이 음반은 화젯거리와는 전연 딴판이다. 첫 곡인 "Summer Samba"(굉장한 히트곡이다)에서부터 감상자는 미국에 보사노바가 처음 상륙하고 모두가 보사노바를 원했던 60년대로 돌아가게 된다. 오르가니스트인 Wanderley는 이 CD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이 CD는 2년 만에 플래티넘 판매량을 기록했다--이 CD는 "수영 풀장"과 "아이스 스케이팅 링크" 같은 그런 물과 관련된 강렬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대부분의 곡들이 3분이 채 넘지 않고 특별히 뭔가 풀어 놓을 공간을 마련하지를 않기 때문에 연주자들은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예외라고 하자면, 귀여운 Ferreira/Marconi의 발라드 "Rain"인데, 여기서 Wanderley는 오르간이 아닌 피아노를 연주하고 Urbie Green은 트롬본으로 정교한 솔로 연주를 뽐낸다. "Beach Samba"에서 Green은 어느 정도 즉흥연주를 하는데(gets to noodle a bit) Bucky Pizarelli는 멜로디 외 다른 어떤 것을 들려주지 않는다. 노래 제목들이 함축하는 슬픈 감정들에도 불구하고 이 CD는 경쾌한 느낌을 주고, 지나간 시대의 팬들에게 가장 큰 즐길거리가 될 것이다.
www.allmusic.com/album/rain-forest-mw0000192639

 


(2020. 06. 22.)

 

- 내일은 로스쿨 첫 시험. 가본 적도 없는 강의실에서 1학기 기말고사 시험을 치른다. 이제 5학기 남았다. (1/6) 

 

- 최근에는 공부 집중이 너무 안 되어서 나름대로 집중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궁리해 보았다. 특별히 차도는 없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에이펙스 트윈을 듣는 것이다. 뭔가 집중이 될까 싶어서 들어 보았다.

- Aphex Twin은 고등학생 때 처음 들었다. 고2 때인가. 어디서 접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어쩌다가 듣게 되었고 내가 아는 음악 중에 그나마 조용하게 집중하는 데에 도움될 수 있는 음악이 에이펙스 트윈의 초기 앨범밖에 없어서 듣게 되었다. 

 

(리처드 D. James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에이펙스 트윈은 페이크 모션을 취하며 데뷔했다. 1992년 발매된 『85~92년도의 정선된 앰비언트 작업물들(Selected Ambient Works 85-92)』이라는 그의 데뷔 앨범의 타이틀을 보건대 이 앨범은 마치 신인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인 베스트 콜렉션 같았던 것이다. 2년 후의 앨범도 비슷한 꾀를 계속 썼다. 20개 남짓의 트랙들(나라마다, 포맷마다 정확한 트랙 개수는 다 다르다) 중 어떤 것도(“Blue Calx”라는 제목의 트랙을 제외하고는) 이전에 발매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Selected Ambient Works Vol. 2』는 전작(前作)보다 다음의 결정적인 측면에서 더욱 솔직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에이펙스 트윈의 데뷔 앨범이 대개 여린 테크노 및 브레이크비트 하우스를 보여주었다면, 『Selected Ambient Works Vol. 2』는, 브라이언 이노가 16년 전 이룩했던 것처럼, 앰비언트 뮤직의 가장 순수한 정수, 비트가 없고(beatless), 신비롭고, 태양 광선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느낌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언제나 수수께끼 같은 그이지만, 제임스[에이펙스 트윈]는 이 앨범[SAW 2]을 루시드 드림을 꾸면서 작업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기본적으로는 반의식적(半意識的) 상태에서 음악을 만드는 것인데, 수록곡들의 안개끼고(hazy) 내세를 지향하는 것 같은 톤을 감안하면 믿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튠이 나간 신디사이저들은 녹아내리는 풍경(風磬)처럼 쨍그랑거린다. 무언의 목소리는 시들은 꽃처럼 자장가와 한숨 사이 어딘가에서 푹 꺼진다. 90년대 말의 에이펙스 트윈의 앨범들이 갖는 순진한 특성은 으스스한 멜랑콜리로 자신을 드러낸다. 사람이 아주 아주 오랫동안 살지 않은 거미줄 낀 집의 다락방의 유령이 사는 인형집을 암시하면서. 파티가 끝난 방들(chillout rooms)의 사운드트랙을 채웠던 대부분의 동시대 앰비언트 뮤직과는 다르게, 『Selected Ambient Works Vol. 2』는 키치적이거나, 이국적이거나, 미래주의적인 판타지들이나, 아니면 사실상 어느 종류의 공통된 경험(communal experience)들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앨범은 어떤 종류의 인간적 접촉과는 거리가 먼, 우주에서 유영하는 느낌을 주는 프라이빗 뮤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냉기(chilliness), 그 고립의 감각, 바로 그 불가지성이야말로 수십 년간 팬들을 사로잡은 것들인 것이다.

(애플뮤직의 Editor의 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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