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Theory 11장 중 pp.290-307. 

앤서니 기든스의 magnum opus, The Constitution of Society. 
행위이론의 관점에서 다음의 여섯 가지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 

1) 그는 행위를 분석할 때 단위 행위unit act를 기준점으로 삼는 것을 비판했다. 기든스는 현상학적, 프래그머티즘적 인사이트를 받아들여 행위를 전체론적인 흐름(durée)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보았다. Durée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생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 독립된 사고의 연결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이 마치 음표들이 서로 합쳐져 음악을 이루듯이 서로 섞여들고 녹아드는 경험의 흐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기든스는 의식에 대한 이러한 사고를 행위에도 적용시킨 것이다. 오직 회고적으로 볼 때에만 우리는 분리된 행위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는 행위가, 목표 설정에 뒤따른다는 생각을 깼다. 이는 파슨스의 행위의 준거틀과 상반되는 것이다. 행위의 지향성(intentionality)은 행위 외적인 것--즉 행위자가 행위 전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이 아니라, 그것은 행위를 하는 중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의 지향(의도)은 행위 중에 계속되어 수정된다. 기든스는 이를 “행위에 대한 성찰적 관리reflexive monitoring of action”라고 불렀다. (비판, 문제점 존재) 

3) 그는 행위자가 행위를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적인 개념에서 벗어난다. 일상의 행위는 대개 routine에 의해 움직인다. 그런데 그는 routine적 행위와 autonomous한, deliberate한 행위의 이분법을 깨고 싶어했다. 그가 지적한 Concentration camp의 수용자들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행위에서 루틴과 autonomy는 뗄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routine이 행위의 잠재력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그는 역시 행위의 육체성(corporeality)에 주목한다. 행위와 몸에 대한 전의식적인(preconcious) 통제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 (e.g. 자전거를 타는 것)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는 건강한 사람은 행위시 몸을 도구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위는 routinized physical movements의 기반 위에서 진행된다. 

5) 앞의 지점에서 따라나오는 것인데, 그는 다른 이론가들과 달리 인간의 상호작용에 있어 몸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예컨대 제스처, 표정, 기타 표현 등은 체면을 지키거나 체면을 잃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이러한 통찰은 Goffman에게 많이 빌려옴). 이는 간접적으로 하버마스에 대한 비판인데, 왜냐하면 인간의 상호작용이란 단순히 특정 타당성 주장을 던지는 intelligent machines들의 상호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cf. 공현전Copresence)

6) 기든스는 행위의 인지된acknowledged, 그리고 인지되지 않은 조건을 구분한다 (“knowledgable actor”, Ethnomethodology에 영향받음). 그리고 그는 또한 인간 행위의 의도되지 않은 여러 결과들을 구분한다. 하지만 머튼 같은 기능주의자와는 달리 그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를 기능주의적 논변에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side effect들의 결과들이 안정적 구조나 체계를 지탱한다는 개념이 매우 문제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식별할 수는 있지만, 구조는 사실 끊임없는 변화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구조의 이원성the duality of structure” 구조는 처음에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 행위자들에 의해 단순히 재생산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꾸준히 행위자들에 의해 변형된다. 


기든스의 사회 질서에 대한 이론
A) 기든스는 근본적으로 반-기능주의자이다. 인식론적으로 우선 그는 기능주의가 인과를 뒤섞고 존재하지 않는 원인을 만든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한 그는 기능주의적 사회질서론에서, 사회적 관계가 고정적이고 행위자가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틀렸음을 지적한다. 그의 구조화 개념은 행위자들이 구조를 재생산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고 변화시킨다는 관찰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는 기든스가 체계라는 개념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세계에는 매우 고정적인 패턴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사회 구조가 매우 안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체계에 대해 emprical understanding을 시도한다. 즉 동일한 종류의 행위가 계속해 시도되고 그것을 유발하는 피드백의 루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야 우리는 체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든스의 트레이드마크는 그가 그의 행위이론에서 사회 질서 이론을 도출해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B) 기든스는 권력power 개념을 행위에 곧바로 연결시킨다. 개인의 행위를 이해할 때 권력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여러 행위자들은 권력으로 통합되어 있거나integrated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대단히 추상적이기에 단계적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기든스는 우선 베버의 권력 개념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베버는 권력이 제로섬 게임이라고 보았는데, 사회학의 역사에서 볼 때 그런 식으로 작업한다면 권력의 분배에만 관심을 쏟게 되기 마련이고 이는 비판에 직면하기 쉽다는 것이다. 파슨스는 권력이 돈처럼 매개체medium로 이해되어야 하고, 권력은 축적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든스는 이런 파슨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 (이는 아렌트Arendt의 폭력의 대하여On Violence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특히 권력의 생산에 관심을 집중한다. 어원적으로 볼 때 권력power/pouvoir은 행위할 수 있음to be able, 능력ability를 나타낸다. 즉 기든스는 권력과 행위함 모두가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권력이 부재한 행위란 있을 수 없다. 디드로의 『자크와 그의 주인』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제시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생각해본다면, 피통치자 역시 권력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는 권력을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이 아닌, 다면적으로 인식한다. 권력은 경제적인 것일 수도, 정치적인 것일 수도, 군사적인 것일 수도, 지식에 기반을 둔 것(푸코)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기든스는 행위와 권력을 연결시킴으로써 하버마스나 록우드의 ‘사회 통합’ vs. ‘체계 통합’에서 사용된 이론적 이원론(전자에는 행위이론을 전개하고 후자에서는 기능주의 이론을 전개하는)을 타개하고자 한다. 그는 민속방법론자나 고프먼, 상징적 상호작용론 이론을 빌려, Social integration을 행위자들이 공현전하고 서로를 관찰할 수 있는 연결상태로 정의한다. 그런데 행위가 공간적-시간적 떨어짐distance을 넘어 연결될 수 있는데, 기든스는 이때 ‘system integration’의 문제가 생긴다고 보았다. 상호작용론자나 민속방법론자는 이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내놓은 적은 없다. 

그는 체계의 통합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기능주의적 논변에 기대기보다는 어떻게 시공간의 원격화distanciation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되었고 이 측면에서 다양한 문화에서 어떻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발전되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거시적인 주제를 설명할 때 행위와 권력의 개념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C) 기든스의 이러한 사회 질서 이론은 파슨스 류의 규범주의적 기능주의 비판으로 연결된다. 파슨스는 규범과 가치 등으로 이해관계의 충돌이 조정되고 거시적 질서가 유지되는 평화주의적인 질서를 상정했다. 기든스에게 있어 질서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규범이나 가치는 이차적인 문제인데,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과 이동의 수단이 기술적으로 확보되어야--즉 특정한 권력의 기제들이 확보되어야--확산될 수 있다. 

이는 마이클 만도 지적한 사회학에서의 ‘사회’ 개념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사회학에서 사회는 흔히 검토 없이 국민국가 단위로 상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회’를 연구할 때 우리는 권력의 네트워크가 중첩되고 사회 구조가 경계로 확정될 수 있는 것이 형성되었는지 경험적으로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맑시즘과 같은, 거시적 구조에 적용된다고 가정되는 단일한 논리를 거부한다. 대신 기든스는 근대성과 근대 국민국가가 다양한 제도적 복합체로 형성되는 긴장의 장field에 의해 대표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러 가지 힘들에 의해 형성되는 자본주의의 복합체와 산업주의적industirialism 복합체, 국가 체제의 복합체를 구분한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동학dynamics은 근대 사회를 추동한 중요한 것이지만, 이것 말고도 기술의 동학 또한 산업적industrial 근대성을 추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국민국가 체제가 앞의 두 dynamics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신만의 이중적 동학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본다: 1) military dynamic. 2) 감시의 테크닉과 같은 행정 기구. 

기든스 행위이론의 난점: 그는 민주주의 운동을 근대 국민국가의 행정력이 사회적 관계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의 결과로 보았는데 이것은 민주주의, 인권 등의 문화적 뿌리를 간과한 것이 아닌가. 

기든스의 사회 변동에 관한 이론
이전 장들에서 기능주의적 사회 변동 이론은 진화론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기능주의를 근본적 수준에서 깬 기든스는 사회 체계가 내생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진화하고 움직인다는 관념과 별 관련이 없다. “knowledgeable actors”들의 resource 동원 능력과 그들 행위의 여러 부작용side-effects들을 고려할 때 역사와 사회 변동은 episodic할 수밖에 없다. 









로버트 퍼트넘. 2006 [1994].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Making Democracy Work)』. 안청시 외 역. 박영사.  





이탈리아는 제도의 성취를 연구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는 역사적으로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19세기의 통합 이후로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이러한 중앙집권제는 1970년대 이후로 깨지게 되고 지방정부체제가 자리잡게 되는데, 각 지역별 정치의 효율과 정치에 대한 효능감은 큰 차이를 나타낸다. 마치 다른 기후에서 자라나는 생물 종들을 구하는 것이 유용한 것처럼, 서로 다른 역사적·문화적 전통을 가진 지역들이 다시 새롭게 자치적인 지방정부를 가지게 된 이탈리아의 환경은 제도 연구에 적합한 ‘실험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퍼트넘은 이 책에서 제도가 역사의 경로에 의해 많은 부분 형성되고, 그런 제도가 정치를 틀지운다는 제도주의의 전제를 받아들인다(8-9). 하지만 이러한 전제를 부분 수정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제도주의는 제도의 개혁이 정치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잘 관찰할 통제된 경험적 대상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26-27). 따라서 그는 실질적인 제도의 성취는 그것이 자리잡은 사회적 맥락에 의해 규정된다는, “제도 연구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진” 전제를 추가해(8), 1970-90년대 이탈리아의 지역정치를 연구 대상으로 “강하고, 반응성 있고, 효율적인 대의 기구를 창출하는 조건”을 탐구하고자 한다(6).  

    구체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제도의 변화는 정치 행태에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가? 2장은 이러한 질문을 탐구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탈리아 지방은 강한 지역적 정체성을 가졌다(27). 1860년대 이탈리아를 통일한 민족주의자들의 과업은 새로운 통일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강력한 중앙정부가 만들어졌고,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정치는 이탈리아에 특유한 “정치적 타협주의”와 지방의 엘리트들의 존재라는 조건들 때문에 “타협적이고 분화된 중앙통치체제”를 파시스트 레짐 내내 유지되었다(28-29).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상황은 변화를 겪는데, 지역자치에 대한 요구--주로 민주주의·분권화에 대한 열망과 중앙정부의 비효율에 대한 비판으로 촉발된--가 증대하여 제도가 변화한 것이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방정부의 권한과 예산은 매우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36-37). 이러한 새로운 지역정치제도는 이전까지는 매우 이념적이었고 분극화되었던(polarized) 의원들의 정치 스펙트럼을, 관용적이고 협력적이고 실용주의를 지향하는 쪽으로 중도화시킨 것으로 보인다(50-53). 또한 이러한 새 정치제도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양가적인 결과를 불러왔는데 첫째는 새 제도가 시민들에게 더욱 잘 다가갈 수 있는 긍정적인 정치 문화를 만들고 것이고 둘째와 셋째는 새 제도가 행정적 효율을 낳지는 않았다는, 그리고 새 제도가 남북 지역의 불균형을 악화시켰다는 부정적인 것들이다(82-83). 이탈리아의 경험은 (제도주의의) 도식적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데, 앞선 남부와 북부의 성취의 차이라는 부정적인 결과와,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지방자치의 실제 성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나 지역개혁 원칙을 지지하는 “동조적 비판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그러하다(77). 

    이탈리아 지역의 역사를 비교하고,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때 우리는 기존 제도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2장의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재 이탈리아 북부는 활기찬 시민의 참여의욕이 있지만, 남부는 수직적인 정치, 파편화된 공동체와 불신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 초기 이탈리아 남부지역에는 하나의 강력한 군주제가, 중북부지역에는 “몇 개의 독특한 공동체적 공화국들”이 수립되어 있었다. 토크빌의 고전 『미국의 민주주의』의 설명처럼, “능동적이고 공익 지향적인 시민상, 평등주의적 정치 관계, 신뢰와 협조의 사회적 구조로 특징지워진” 시민 공동체는 제도 성취를 설명하는 핵심적 요인임을 볼 때(20), 이러한 이탈리아 남북부 지역의 역사적 차이가 지역의 시민성의 질 차이를 불러왔고, 그렇게 각 지역의 다른 시민적 공동체가 제도의 성취의 영향을 주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시민성이라는 것이 효과적이고 반응적인 정부를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 것인가. 그리고 시민적 전통은 어떻게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가. 합리적 선택 이론(rational choice theory)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은 상호 이익을 위한 협력에 자주 실패하며, 특히 죄수의 딜레마 같은 예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기적인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그룹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는 행동이 아닌 차선의(suboptimal) 이익을 보장하는 행동을 선택한다. 그런데 합리적 선택 이론의 비관주의적 시선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협력이 꽤 자주 일어나는데(278), 이는 거래비용 등을 감소시키는 제도의 존재 때문이다(279). 그렇다면 제도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신제도주의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해소시키는 공식적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는지 썩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사회적 자본, 즉 공동체와 신뢰라는 개념을 도입할 때 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1]

    “자발적 협력은 호혜성의 규범과 시민적 참여의 네트워크 등의 사회적 자본이 충분히 축적된 공동체에서 더 쉽게 달성된다”(281). 왜냐하면 자발적 협력 자체가 사회적 자본에 의해 촉진되기 때문이다. 계(rotating credit association)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사회적 자본이 풍부할 때 개개인은 자신의 신뢰 자산을 “담보”로 맡김으로써 계(=협력)에 새로이 참여할 수 있다(284). 또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자본은 선순환과 악순환의 고리 중 하나를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운명에 처한 자본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자본은 기본적으로 공공재이며 신뢰는 “자기충족적”(285)이기 때문이다.[각주:2] 그런데 계는 대면적 관계가 지배적인 작은 공동체에서의 신뢰에 기반하고 있는데 그러한 신뢰가 비대면적이고 간접적인 큰 사회로 전이될 수 있을까? 퍼트넘은 사회적 행위는 외부성(externalities)을 발생시켜 규범을 만들고 포괄적인 호혜성을 낳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본다.[각주:3] 포괄적인 호혜성을 낳는 규범은 수직적 네트워크보다는 느슨한(weak) 수평적 네트워크가 역사적으로 지배적이어진 사회에서 형성되고 지속되기 쉽다. 성공적인 협력을 경험하지 못한 공동체는 시장이나 권위적 정부와 같은 “수직적 대안”을 찾기 마련인데 의무는 비대칭적이고 관계성은 종속적인 수직적 관계에서 서로의 책임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렇게 협력은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수평적 관계에서 정보의 전달과 의사소통은 원활해질 수 있고, 그리하여 상호신뢰가 증가될 수 있고, 신뢰의 배신자가 지불할 비용(즉 제재)은 또한 증가될 것이다.[각주:4][각주:5] 즉 사회에서 참여자들의 상호이익을 최대로 증진시킬 수 있는 방안은 협력이고, 이런 자발적 협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회적 자본이다. 사회적 규범과 네트워크는 사회 속에 배태된 개인의 행동을 맥락지우고 협력 쪽으로 유도할 것이다.[각주:6]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지방자치제도의 실험은 남북부의 부정적 격차와 여전히 비효율적인 행정이라는 부정적 효과를 낳았지만 탈분극화된 정치 문화에 기여했으며 지방분권화 경향 자체에는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했다(2장). 새로이 생긴 지방자치제도들을 공간적으로 비교할 때 역사적으로 시민적 참여 전통이 강한 북부가 더욱 효율적인 지방자치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3-5장). 이론적으로 탐구할 때, 역사적으로 형성된 북부와 남부의 서로 다른 집합행동의 딜레마 해결 방식--북부는 보다 평등적이고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남부는 홉스적인 수직적 권위와 통제로--이 제도가 잘 기능할 수 있을지 조건짓는 토양인 사회적 맥락을 형성했다.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북부와 그렇지 못한 남부. 전자에서 제도는 효과적으로 기능했고 후자는 비효율적으로 기능한 것이다(6장). 



  1. 이렇게 사회적 자본의 개념을 사용해 합리적 선택 이론과 역사주의를 결합해 제도의 성취에 대한 더 나은 제도주의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 목표이다. [본문으로]
  2. 신뢰는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에 이를 경제적 자본에 비유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이르는 것은 적절하다. 경제적 자본의 경우와 똑같이 사회적 자본은 더 축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규범의 발생의 필요조건이 외부성(externalities)이라는 테제는 J. Coleman, Foundations of Social theory에서 정식화된 것이다. [본문으로]
  4. 이에 따라 시민사회가 잘 조직된 사회에서 국가의 능력은 약화될 것이라는 맨슈어 올슨(Mancur Olson) 같은 일부 합리적 선택론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295쪽. [본문으로]
  5. 이러한 문화와 구조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닭과 달걀의 문제와 같다는 반박에 대한 퍼트넘의 응답은 301ff. 참조 [본문으로]
  6. 이론적 맥락을 고려해 다시 정리하면 사회적 자본의 존재는 왜 협력이 자주 일어나고, 협력 자체가 자기강화적인 속성을 갖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한계를 가졌던 합리적 선택 이론을 극복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Joas and Knöbl, Social Theory, CUP. ch.10 “Habermas’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pp.222-248. 요약번역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 (ch. 10)

도입 

하버마스는 헤겔주의적, 맑스주의적 유산과 결별하며 1970년대에 중요한 전환을 이룩해 낸다.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 그는 그의 사상에 새로운 이론적 요소를 도입해 낸다. 이를 통해 그는 그만의 이론적 종합을 이룩하게 된다. 

1) 유적 존재(the human species)의 역사관 탈피 
- 즉 단일한 주체로의 인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는 정당화되기 어려운 이상화임. 
- 하버마스는 유적 존재인 인류가 역사로부터 배운다기보다는, '개인'이 역사와 선조로부터 배우는 것으로 간주함. 이는 사회 변동을 해석할 때 헤겔주의적, 맑스주의적 역사 개념을 쓰기 어렵다는 것을 함축함. (하버마스는 집합적 learning process를 부정하지 않지만, 이것이 개인의 학습 과정의 집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입장임.)
- 이 문제에 관해 하버마스는 개인의 학습 과정을 다룬 심리학 이론가들을 참조: 장 피아제와 로렌스 콜버그. 

- ontogeny: 개인의 학습 발전 단계 / phylogeny: 공동체나 인류의 역사. 이 둘 간에는 유사함이 있는가? 이것은 1970년대 하버마스의 주된 관심사였으나, 그의 저작에서 이것이 만족스럽게 답변된 적은 없다. 
- 하버마스는 인류 역사 발전 단계의 logic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causal factor를 식별하는 것(즉 메커니즘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223). 즉, 이론가는 역사의 발전 논리를 오직 회고적 형태로만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 이는 생산력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사회 관계의 조직 원리의 변화(=도덕적인 진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사적 유물론과 결별한 것이다.) 

2) 상위의 주체 개념 거부 
- 이는 앞의 것과 연관된 것으로, 하버마스는 이상화된 상급 주체(idealized superordinate subject) 개념을 거부한다. 이는 루카치의 역사 이론을 전면적으로 배격한 것이다. 

- 맑스주의 이론가 죄르지 루카치(Lukacs)의 [역사와 계급의식]. 루카치는 레닌주의적 전위정당에 희망을 걸었다. 그는 객관적인, 진실된 계급의식의 담지자가 있다고 믿었고 레닌주의 정당이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 하버마스는 역사 발전의 분석이 변증법적 도식이 아닌 경험적 분석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p.204 참조: 그는 프롤레타리아가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라고 가정하는 맑시즘과 입장을 달리 했다. 계급이나 집단의 행위력은 가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경험적으로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 이는 하버마스가 좌파든 우파든 전체주의의 위험을 거부하고자 한 것과 관련이 있다. 

3) 체계(system) 개념 도입
- 그는 상급 주체나 집합적 행위자를 이상화하는 이론을 거부하는 한편, 이론적으로 루만을 일부 받아들여 기능주의적 체계 개념을 도입한다.
- 여기서 체계(조직, 제도 등)는 미리 정해진 합리적인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체계는 개인들의 목적과는 다르게, 그것에 고유한 내적인 기능적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 (ch. 11 루만 참고) 

- 하지만 하버마스는 또한 "체계는 주체로 나타나지 않는다"(Legitimation Crisis)고 말한다. 왜냐하면 집합적 체계의 기능은 개개인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체계 개념은 전체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27). 
- 하버마스의 체계 개념은 사회의 질서를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프래그머티즘이나 상징적 상호작용주의의 관점과는 다르다(227). 
- 해석학과 기능주의, 행위이론과 체계이론의 결합


[의사소통행위이론] 

- 그의 주저이자 대작은 의사소통행위이론(1981)이다. 
- 책의 토픽은 다음과 같이 분할될 수 있다: (1) 합리성에 관한 이론; (2) 행위이론; (3) 사회 질서에 관한 이론; (4) 현대에 대한 진단.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러한 주제들은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하버마스와 파슨스 작업의 유사성) 
- 하버마스의 작업은 이론적 종합을 이룩해내는 것이다. (파슨스와 비슷하게.) 
- 그러나 하버마스는 파슨스가 다루지 않은 미드를 중요하게 여겼고, 그는 또한 파슨스가 참고한 마셜이나 파레토와 같은 저자를 무시한다. 

- 하버마스가 해석하기에, 사회학의 고전적 저자들은 목적합리적행위(purposive-rational action)을 중심에 두는 것의 약점을 점점 인식하게 되었고 다른 행위모델을 차용하게 되었다. 

- 이하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다뤄진 토픽들의 자세한 설명 

1) 하버마스의 합리성 개념 
- 하버마스는 합리성에 대한 두 가지의 영향력 있는 개념들을 검토한다: 하나는 합리적 선택 이론적(공리주의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이다. 
- 그는 첫째로 공리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이는 왜 사람들이 (어떤 목적ends에 대한) 특정한 수단means을 선택하는지 설명할 수 있지만, 왜 그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향하는 목적은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 하지만 그는 파이어아벤트 류의 포스트모더니스트 합리성 개념 또한 비판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 또한 공리주의자들처럼 좁은 의미에서의 합리성을 겨냥해 비판한다는 것이다. 
- 하버마스는 '언어'의 특징에 집중함으로써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합리적인 합의에 도달한다. 담화를 통한 이성은, 공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합리성보다는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 여기서 그가 참고하는 것이 존 설Searle이다(분석철학 전통). 하버마스는 설의 논의에 의존해, 모든 발화행위가 세 가지의 타당성 주장validity claims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a) a validity claim to truth. 진리에 관한 타당성 주장. 이는 세계가 어떠한가에 대한 진술이다. 예컨대 과학을 들 수 있다. 모든 도구적 행위는 이러한 진리에 관한 타당성 주장을 수반한다. 하지만 합리적 논증을 이러한 타당성 주장에 국한시켜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이러한 타당성 주장의 reference는 외부 세계의 facts). 
b) a validity claim to normative correctness. 규범적 옳음에 대한 타당성 주장. 이는 어떤 행위가 사회적으로 옳거나 적합한지에 대한 진술이다. 사회의 규범은 합의에 따라 변할 수 있다(지배관계의 변화). 우리가 어떤 규칙이나 규범, 지배관계에 대해 반박을 제기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우리는 규범적 옳음에 대한 타당성 주장을 행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c) a validity claim to truthfulness. 진실성에 대한 타당성 주장. 개인이 욕망하는 것이나 느끼는 것이 진정성 있는지에 관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이러한 타당성 주장의 reference는 authenticity). 

이러한 식으로 합리성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넓은 의미의 합리성은 위의 세 가지의 타당성 주장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위의 세 합리성은 모두 외적, 내적 구속이 부재한 이상적인 상태에서의 합리적인 논증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 또한 세 가지 타당성 주장에 대해 우리는 논쟁을 하기 때문에, learning process는 세 가지 영역에서 모두 일어날 수 있다. 

2) 하버마스의 행위이론
- 하버마스의 행위 이론은 위의 합리성 개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a) 행위이론이 합리성 이론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다면, 합리성과 잘 맞지 않는 행위들은 무시되는 것이 아닌가? b) 사고와 행위를 나누는 이론은 프래그머티즘의 입장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 그런데 하버마스는 위에서 언급한 합리성들에 준거해 행위이론을 세우지 않는다. 물론 그는 다음의 세 가지 행위를 구분하기는 한다: 목적론적 행위teleological action; 규범적으로 조정된 행위normatively regualted action; 연극적 행위dramaturgical action. 하지만 이것이 하버마스의 행위이론의 기초가 되지는 않는다. 

- 하버마스의 행위 분류 체계는 (공리주의의) 좁게 이해된 합리성과 (위에서 언급된) 넓게 이해된 합리성 사이에 기초한다. 전자에 기반을 둔 행위는 목적합리적 행위purposive-rational action과 전략적 행위strategic action으로 또 나뉜다. 한편, 후자에 기반을 둔 행위는 의사소통행위communicative action이다.
목적합리적 행위는 무엇인가. 외부의 물질적 객체를 원하는 대로, 적절한 방식에 따라 다루는 행위가 목적합리적 행위이다. (233쪽 인용 참고). 전략적 행위는 외부 물질적 객체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수단-행위 도식에 따라 지도되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게임 이론에서의 행위 같은 것이다. 
의사소통행위란 위의 행위들과 다른데, 왜냐하면 의사소통행위에서 목적은 진정한 이해(understanding)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의사소통행위는 규범적으로 조정된 행위 및 연극적 행위와 다르다. 규범적으로 조정된 행위는 이미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규범에 기반을 둔다. 연극적 행위는 자기표현의 관습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오직 의사소통행위에서만, 이전에는 의심에 부쳐지지 않았던 행위의 기반이 되는 상황의 특성과 전제들이 논의되게 된다. 다른 행위들과는 다르게 의사소통행위는 목적론적이지 않다not teleological. 

이렇게 본다면 왜 의사소통행위가, 도구적 행위와 전략적 행위에 반대되는 개념인지 명확해진다. 의사소통행위는 목적론적이지 않은 동시에 필연적으로 다른 행위자들과의 논쟁에의 참여를 요구하는 행위이다. 


성공 지향이해 지향
비사회적도구적 행위-
사회적전략적 행위의사소통행위

- 이러한 행위 도식은 종합적이라고 평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합리성 개념은 막스 베버와, 베버의 합리성 개념 위에서 작업한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것을 넘는 통합적인 개념이다. 또한 그는 미드와 뒤르켐과 같은 고전적 사회학 저자들이 인지한 언어와 상징적인 행위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고 그런 고전적 저자들이 의사소통행위를 강조하는 행위이론으로 서서히 이행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파슨스와 유사하다. 

- 비판점 
a) 하버마스의 행위 도식에서 목적론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 않은 행위 양식은 비어 있다. 그는 물질적 객체와 관계맺는 활동이 오직 합리적인 수단-목적 도식 하에서 이뤄진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물에 대한 미학적 상호작용이나 놀이 활동 등을 무시한다고 프래그머티즘적 관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b) 그는 모든 행위에 공통되는 점을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동물과 구분지어주는 인간의 고유한 행위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것. (이는 기든스, 부르디외, 네오 프래그머티즘을 다룬 장에서 더 언급될 것임.) 

3) 두 단계 사회 이론 (생활세계life-world[Lebenswelt]와 체계system) 

하버마스는 사회 질서의 두 타입을 구분한다: 하나는 systems, 다른 하나는 life-world. 이는 어느정도 그의 행위도식에 근거해 구분되는 것이다(전자: 전략적 형태의 행위, 후자에서는 의사소통행위). 본서의 2-4장에서 파슨스의 factual order와 normative order를 설명했다. 전자는 예컨대 시장에서의 가격 균형이나 교통 체증처럼, 개인의 의도치 않은, 규범적으로 지도되지 않는 행위들이 어떤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경우이다. 후자는 규범적으로 조정된 개인의 행동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경우이다. 하버마스의 체계와 생활세계 구분은 위와 어느 정도 상응한다. 그는 생활세계를 공통의 이해, 규범, 문화 아래서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질서 잡힌 상황ordered context 으로 이해했고, 반면 체계는 개인들의 특정한 의도와는 관련 없는 질서의 패턴 ordered patterns으로 이해했다. 체계에서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은 행위의 결과이다. 따라서 체계는 기능적 분석에 의해 접근되어야 한다. 

앞선 체계, 생활세계의 구분은 행위지향의 강조냐 행위결과의 강조냐에 따라 이뤄졌다. 하버마스는 또한 다른 두 가지의 구분을 더 제시한다. a) 하버마스는, 상호작용하는 집단들이 공현전co-present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체계와 생활세계를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시장질서에서 상호작용은 익명으로, 추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생활세계에서 통합은 행위자들이 어느 정도, 구체적인 행위 상황에서 대면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 b) 생활세계와 체계의 통합성은, 인지적 접근성의 정도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과학자는 외부에서 기능적 분석을 통해 체계의 통합성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생활세계는, 슈츠의 말처럼 “의심의 나위 없는 매 경험의 근거”이다. 따라서 이는 체계에 대한 것처럼 기능적 분석으로 알아낼 수 없다. 
(비판: 239쪽 마지막 문단 참조) 

- uncoupling of system and life-world: 원시적 부족 사회에서는 체계와 생활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음. 근대에 들어와 사회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uncoupling 경험. 여기서 사회 체계는 생활세계의 지평을 침범. 

4) 현대 사회 진단 

- 체계와 생활세계의 개념을 가지고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행할 수 있음. 하버마스는 사회 진화의 단계를 체계와 생활세계의 결합이 끊어지는 것으로 본다. 즉 시장과 국가라는 특화된 체계가 어떻게 단순 사회(그자체로 생활세계인)에서 분화되어 나왔는지. 그는 사회가 진화의 단계를 거침에 따라 오직 정치와 경제가 사회의 대면 접촉의 영역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일상생활의 의사소통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게 되었다고 본다. 체계와 생활세계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체계의 논리가 생활세계에 침투하는 것을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 부른다. 
- 그런데 그의 체계와 생활세계 구분은 체계의 필요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근대 사회에서 생활세계와 체계의 분리가 필요할 수 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높은 수준의 효율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체계에 고삐가 풀려 생활세계를 너무 깊숙이 침투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244쪽 첫 번째 문단 참조)
하버마스는 시장만이 아닌 국가도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고 생각했다. 복지국가는 사회관계들을 법적으로 규제하고 관료화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즉 여기서 생활세계는, 일상의 의사소통이 국가권력에 뒷받침된 개입으로 교체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 이론에 대한 비판 

a) 하버마스는 체계 수준에서 그것의 기능부전malfunction의 문제를 간과한다. e.g. 경제적 독점, 공황, 복지국가의 실패. b)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개념적 도구로 어떻게 사회 운동이나 집합적 행위자를 설명할 수 있는가? + 하버마스의 이론적 틀 안에서 집합적 행위자가 가질 수 있는 중요성이 어떠한지 불분명함. c) 그의 합리성 이론의 틀 위에서 어떻게 경험적으로 체계와 생활세계간의 올바른 관계를 찾을 수 있을지 하는 논의를 더 발전시키지 못함. 


하버마스의 후기 저작 

은퇴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하버마스지만 이 책에서는 두 가지 저작만 꼽아서 소개하기로 한다. 

1)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이성을 지배(domination)의 기획으로 보고 비판하는 후기 구조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판하는 책. Habermas’ book ‘protects the flanks’ of his theory of communicativerationality and of communicative action against postmodern scepticismabout reason.

2) Between Facts and Norms: Contributions to a Discourse Theory of Law and Democracy 

저작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풀지 못한 문제들에 집중. 법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집중한 논고. 생활세계에서의 합의라는 게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닐 텐데, 어떻게 인종적, 문화적으로 분화된 현대 사회는 통합될 수 있는가? 그리고 체계와 생활세계가 어떻게 fit together 할 수 있는가?

그는 법이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법은 체계와 생활세계 사이 전략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고, 또한 ‘Because law is just as intermeshed with moneyand administrative power as it is with solidarity, its own integrating achievementsassimilate imperatives of diverse origin’ (Facts and Norms. p. 40).


책 추천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 [Communicative Action: Essays on Jürgen Habermas’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edited by Axel Honneth and Hans Joas.

좋은 입문: chapters 7 to 9 of Axel Honneth’s [The Critique of Power: Reflective Stages in a Critical Social Theory].
그리고 Thomas McCarthy’s highly detailed book [The Critical Theory of Jürgen Habermas].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레이먼드 카버 읽기



1. 레모네이드[각주:1]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것을 우연에 맡긴다는 것은 너무도 부조리한 일일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09b: 24.


시는 화자의 집 책꽂이를 재러 온 목공수 짐 시어즈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활기가 넘치고 확신이 있는, 손 마디를 뚝뚝 꺾는 짐 시어즈. 그는 하나 뿐인 아들을 잃은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화자가 짐 시어즈의 아버지 하워드 시어즈에게 간단한 안부를 물어보며 짐의 전사(前事)를 들을 때 시제는 현재형으로 바뀐다. 시어즈 씨는 말한다. “신은 당신만의 알 수 없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이 하는 일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어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나는 신이 그 아이를 데려갔다는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의 의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그의 행위를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짐은 생각한다—혹은 우리는 이 부분을 화자의 생각으로 읽을 수도 있다. 우리는 알고 싶어한다. 무수한 사건의 더미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재구성하고 책임을 부여하고자 한다. 만일 그날 아침 레모네이드를 아이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꼭 레몬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왜 레몬이어야 했을까? 레몬에 얽힌 기나긴 인과의 고리. 누군가는 레몬을 심고 물을 댔고 노동자는 그것을 박스에 싣고 철도와 트럭은 그것을 옮겼다. 짐의 아이 또래들은 레몬을 가공했을 것이고. “짐 시어즈의 생각이 계속되며, 그것은 맨 처음의 원인으로 되돌아간다, 지구상 최초의 레몬을 경작했을 그때로.” 


“맞다, 모두의 마음은 찢어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는 다시 현재 시제로, 화자가 하워드의 넋두리를 듣는 시점으로 돌아온다. 짐은 그의 선반이나 조각칼을 볼 때 그의 아들의 마지막을 회상한다고 한다. 그가 헬기에 의해 물에서 건져올려져 너무도 우아하게 짐의 발 앞에 내려지는 그 순간. 그 순간 때문에 짐은 도무지 목공 일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결국 이것만이 하워드, 짐, 그리고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인과관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신의 목적에 물음을 던질 수 없고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이상 이 인과는 아무런 의미를 제공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현재에 대해 진술할 수밖에 없다. “But dying is for the sweetest ones. And he remembers sweetness, when life was sweet, and sweetly he was given that other lifetime.” 



2. 뚱보 


“루디, 저 사람은 뚱뚱해. 그렇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15) 화자와 뚱뚱한 남자 사이에는 모종의 연결이 존재한다. 뚱뚱한 남자는 혼자지만 그는 주문할 때 ‘저(I)’라는 대명사가 아닌 ‘우리(we)’라는 대명사를 쓴다. “정말이지 우린 늘 이렇게 먹지는 않는답니다.”(12) “우린 코트를 벗어야겠어요.”(13) 


물론 화자를 제외한 주변인들은 뚱뚱한 남자와 화자 사이의 어떤 연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뚱보와 화자, 애인인 루디와 직장 동료인 조앤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깊은 이해의 심연이 가로막고 있다. 루디는 웃는다. “이 여자, 뚱땡이를 좋아한다는 얘기 같군.”(15) 조앤은 루디에게 “조심”하라고 말한다. 루디는 지나가는 말로 화자에게 학창 시절의 뚱뚱한 녀석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은 화자도 뚱뚱한 남자와의 유대를 알아채고 있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루디와의 섹스 도중 너무나도 뚱뚱해져 버린 자신을 상상한다. “어떤 감정이 엄습하는 거야.”(15) 화자가 리타와 대화를 하며 그날의 일들을 재구성할 때, 뚱보가 지칭하는 ‘우리’라는 대명사는 시차를 두고, 그 의미를 온전히 불행히도 이러한 의미의 수신인은 화자에게만으로 제한되는 것 같다. 리타는 말한다.[각주:2] “말도 안 돼.”(17) 리타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화자는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8월이다”라는 텍스트 상의 급격한 단절, 그리고 곧이은 “내 인생은 변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는 진술에 주목한다면. 



3. 제리와 몰리와 샘 


“그는 출발점을 찾아야 했다—얽힌 일들을 정리하고 이 모든 것의 질서를 잡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할 때, 변화를 꾀하기 위해 생각을 똑바로 해야 할 때였다.”(260) 앨(Al)은 일하는 회사의 정리 해고와 외도 중인 여자 질, 쓸데없이 이사를 하게 만든 아내 베티, 그리고 처제 샌디와 골칫덩이 개 수지 때문에 삶의 방향을 잃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위한 그의 첫 번째 시도는 수지를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주변 상황을 제어”(258)하는 것이자 “집안의 질서를 바로잡는 첫 조치”(260)인 것이다. 


개를 유기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심하던 그는 “전에 살던 동네” 욜로 카운티(Yolo County)라는 좋은 대안을 생각해 낸다. 그곳에서 그는 어릴 적의 사냥개 ‘샘’—아이리시 세터로 추정되는—과의 따뜻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는 잠시 어머니의 집으로 회귀하고 싶어한다. 유기를 마치고, 앨은 처음 보는 술집 듀피스에서 여자 몰리를 유혹하고자 한다(그가 술집에서 현재 외도하는 여자 질을 꼬셨던 것처럼).  몰리와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비용이 또(one more expense)” 들었다는 것, 그리고 “제리가 [돈도 받지 않고] 물건을 아주 잘 고”친다는 것. 


추가적 비용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위로를 받기 위해 방문한 질의 집에서 앨은 졸지에 여드름을 짜인다(272). 수지가 없어진 집은 눈물바다이고, 혼란 그 자체다. 또한 앨은 아내의 비난을 받는다. 그는 거울에서 부도덕한(immoral) 자신을 발견한다. “이번엔 정말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I believe I have made the gravest mistake this time).” 수지를 버리겠다는 것. 그것은 실로 완전한 실수가 아니었을까? 그는 처제가 데려온 개가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개를 버림으로써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는 수지를 찾았지만 수지는 다시 돌아오기를 거부한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았다.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세상은 개로 가득 차 있다. 온통 개 천지다. 그중엔 어찌해볼 수 없는 녀석들도 있는 법이다.”(282) 


그렇다. 그는 분명 주변 상황을 제어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번번이 실패했다. 몰리를 꼬시려 했지만 그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개를 버린다 해도 상황이 정상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악화될 뿐이었고, 아내의 신뢰마저 잃어 버렸다. 제목 “제리와 몰리와 샘”은 자못 상징적이다. 적어도 이들은 무언가를 통제하거나 변화할 수 있는 사람 혹은 동물이지 않은가? 샘은 말을 잘 듣고 제리는 물건을 잘 고치고(fix) 몰리는 적어도 앨과 같은 하류 인간의 구애에 흔들리지 않는다. 앨은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일까? 그는 “샤워도 하지 않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는데(276).[각주:3]



4.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랠프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데, 문제는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아내에 대한 추궁이,[각주:4] 아내가 미첼과 잤다는 사실을 확증해버렸다는 것이다. 의심이 사실이 되었을 때 랠프는 집 밖으로 뛰쳐나오고 상징의 세계를 배회하게 된다. 


    거리에서의 광경은 랠프의 상상 속 불안과 조응한다. 랠프는 여자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것을 보았다.”(398) 이는 그가 불안을 느끼는 매리언의 이미지와 연결된다(381). 거리에서 마주치는 성적인 이미지들(400, 403). “우리 한 번 할까(Shall we have a go at it)?”(399) “그 사람이 우리 한번 할까요, 그러더라구요.”(393) 그에게 두 번째 기회는 있는 것일까? 그는 육 년 전 들른 “중고 서점(secondhand shop)”이 있는 “2번가(Second Street)”에서 방황한다(400).  그는 도박을 마치고 2달러만을 남긴다(409). 


    그는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할까(404)? 묘하게도 아내를 때리려고 했던 그의 충동(386)은 노상에서 흑인 청년에게 강도를 당함으로써 되돌아온다(411). 강도의 계기는 그를 상상의 세계인 밤거리에서 아침의 집으로 복귀시킨다. 아침은 모든 것이 정돈되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일어나 세수를 하고 출근을 한다. 아이들은 다친 아빠에게 무슨 이상이 있는지 묻는다. 그는 욕실로 들어간다. 옷을 정돈하고 몸을 씻을 수 있는 공간. 욕조에서 아이들에게 “제발 조용히 좀” 하라는 그의 외침은, 잠시 모든 것을 되돌릴 시간을 달라는 절규로 들린다. 그는 거울을 보고 몸을 씻으며 다시 일상의 세계로 복귀한다. “자신에게 닥쳐오고 있다고 느껴지는 믿을 수 없는 변화에 놀라면서.”(417)






  1. 출전: Carver, Raymond. Short Cuts: Selected Stories. Ed. Robert Altman. New York: Vintage, 1993. [본문으로]
  2. (노트: 리타의 “우아한 손가락(dainty fingers)”과 뚱보의 “길고, 두껍고, 말랑말랑한 손가락(long, thick, creamy fingers)”의 대비) [본문으로]
  3. (노트: 바꿔 생각해 본다면, 그는 알지 못하지만, 정말로 ‘개’와 같은 존재는 앨 본인이 아닐까? 개들 중에서 어찌해볼 수 없는 녀석이라 함은 바로 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앨은 무언가를 움직여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만 애초에 통제권은 그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지 않을까?) [본문으로]
  4. “그것은 한참 전, 이번 겨울로부터 이 년 전의 일이었다.”(382) “벌써 사 년 전 일이니 …”(388) [본문으로]

메도루마 슌의 『오키나와의 눈물』(원제는 오키나와 '전후' 제로년) 어제 읽기 시작해서 오늘 읽었다. 책은 메도루마의 부모와 조부모의 전쟁 체험에 대한 기록, 그리고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와의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에 남는 부분을 하나 기록해 둔다. 대담에서 오키나와 문학과 언어를 주제로 부분. 


비평가나 연구자는 실험성을 좋아합니다. 보다 실험적이고 과격한 표현을 선호하죠. 그들의 입장에서는 연구대상으로서 재미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러한 소설이 독자나 편집자로부터 이해를 얻지 못해 필자가 이상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 나의 『물방울』이라는 작품은 일본적인 표현에 동조해 실험성이 약하다는 비평을 받았습니다. 내가 정말로 설명이나 지문까지 오키나와어를 집어넣어 실험적으로 쓰려했다면 못했겠습니까. 다만 그런 실험적인 작품을 당신은 읽을 있겠냐고 묻고 싶어요. 오키나와 사람이건 야마톤츄건 나키진 말을 아느냐고. 나키진말과 공통어를 섞어서 의식의 흐름을 표현한다고 한들 과연 명이나 읽을 있을까요? … 이것[아테지나 후리가나를 사용해 오키나와어의 음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표현]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키나와가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갖지 못하고 일본의 근대화 속에 편입되서야 소설표현이 가능해졌다는 역사적 한계이자 숙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