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효과 13장에 수록된 자크 동즐로 Jacques Donzelot 의 노동 안에서의 즐거움 Pleasure in Work 을 요약함 

 
지난 10년간[1970-80년]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담론이 출현했다. 바로 “노동을 통한 기쁨”이 아닌 “노동 안에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새로운 담론. 이는 파시즘적 담론이 아닌, “생산성의 추구가 야기한 부작용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구성되어, 노동체제 안에서의 국지적인 향상을 통해 결국 사회 구성원들과 노동체제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일련의 개혁·실험의 산물이다.”(367) 이러한 담론이 추구하는 혁신은 생산관계나 생산조직의 변혁이 아니며, “개인이 생산적 노동과 맺는 관계의 변화”이다(368). 
    이전에 그러한 계획은 (현대적) 회사 경영진이 맡았으나, 이제는 국가--평생교육청이나 노동조건개선청--가 그 업무를 맡는다. 평생교육청은 노동자의 법적/지위적 인식을 부수고, 변화하는 사회에 맞선, 노동에서 만족과 몰입을 얻을 수 있는 개인의 자율성과 적응력을 강조한다. 한편, 노동조건개선청은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구분을 파괴해 “노동을 확장”하고자 한다. “자주관리적 팀제”의 도입이나 “생산의 재조직”에 노동자를 참여시킴으로써 그것은 가능해진다. 즉, 새로운 담론은 “노동을 사회적인 것의 영역, 즉 사회적 욕구가 충족되는 특권적 공간으로” 만들어 문제를 돌파하고자 한다(368-70). 
    이러한 담론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고, 이 담론을 형성시킨 “기저의 합리성”은 무엇일까? 동즐로는 우선 “작금의 계획들이 없애려 하는 노동과 노동 주체의 배치”--즉 노동자의 법적 지위가 보장되고,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분리된--가 언제 형성된 것인지를 짚는다. 우선 노동자는 언제부터 단순한 사용자-노동자 간의 계약을 맺은 주체가 아닌, 법적으로 그 지위를 보장받는 주체가 되었을까? “19세기 3/4분기 전까지는 의존성과 자율성이라는 용어로만 노동자가 생산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표현됐다.” 즉, 노동자는 자율적으로 계약을 맺으나 그가 공장에 들어간다면 그는 의존(종속)하게 된다. 따라서 이때의 노동운동은 작업장에서의 계약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이러한 “지배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한데, 이러한 운동은 노동자들이 아직까지 ‘장인’ 내지는 ‘수공업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말에 갈수록 변화한다--첫째로 노동에서의 수공업적 요소가 감소하고, 둘째로 노동권이 법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노동자는 이제 장인·숙련공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대신 법적 지위와 권리를 통해 노동의 가치를 평가받고, 그럼으로써 노동은 자율성을 회복할 터였다(370-71). 물론 이러한 법적 변화는 노동 계약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cf. 테일러리즘) 
    노동의 법적 지위 보장--자율화의 과정--은 ‘규율에서 과학적 관리로’와 같은 테일러리즘의 귀결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은 “안전과 생산성을 동시에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과학의 핵심 대상”이 될 수 있었다(373). 이 ‘새로운 과학’은--텍스트에서는 20세기 전반 프랑스의 저널 『인간노동』이 사례로 제시된다--비정상적 인구를 가려내고 최적의 인구를 사업장에 들이기 위해 직무적성검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노동 현장에서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 과학적 기법으로 최적의 업무량을 산출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해도 산재의 수준은 증가했다. 어떻게 해야 재해를 감소시킬 수 있을까? 재해를 일으키는 것에 숨겨진 요인은 없을까? “따라서 재해 성향을 정확히 진단할 수 없는데도, … [관련한 요인을] 가진 개인들은 최소한 덜 위험한 직무로 배치됐다.” 즉 노동에 대한 과학은 인구를 다루고자 하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20세기 전반 이곳에서 “노동 문제를 관통했던 두 가지 담론”, 법적 담론과 의료-심리학적 담론이 탄생한다. 두 담론은 “권리의 주체로서의 노동자와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노동을 분리했다.” 또한 이 두 담론은 “생산을 비교적 상이한 두 가지 실체, 즉 사회적인 것[권리, 법적 지위 보장, 노동자의 연대, 임금과 여가를 통한 만족]과 경제적인 것[생산성을 위한 힘의 분배, 직무 합리화 등]으로 분할한다.” 이러한 대립쌍이 “생산의 조직화에 대한 사회정치적 쟁점을 규정해왔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사민주의 정당은 이 대립쌍이 함께 가는 것으로, 즉 “두 과정을 잘 조절해 연대가 합리성의 증진에서 편익을 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편 공산당 진영은 노동의 합리성이 노동자를 “테일러화된 프롤레타리아”로 만들고, 경제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에 종속될 터라고 보았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목표는 “사회적인 것을 동원해 경제적인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전간기에 등장한 신코포라티즘은 “공산주의 전략이 제기한 이런 위협에 대한 대응이었다.”(375-76). 이들이 보기에 공산주의는 “미국 모델의 인과관계적 귀결” 즉 테일러주의로 인한 노동자들의 원자화와 고립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이들의 처방전은 노동자와 노동의 화해였으며, 그것은 노동공동체를 재창조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들은 첫째 “중세 시대 직능조합의 가치를 새로운 노동기술에 투사”하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기업 내부의 기능적 맥락에 재통합”하고자 했다(377-78). 
    그렇다면 전후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파시즘의 경험은 민족주의, 코포라티즘, 노동의 노고에 대한 군사적 찬양 같은 주제에 오명을 씌었다.” 이제 사회는 민족 같은 배타적인 관념과 대립되는 관념이 되었고, 사회의 의무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구성원의 만족을 증진하는 것”,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을 가로막는 장벽을 없애고”, 배제보다는 통합을 하는 것이 되었다(378). 승전한 민주 국가는 파시즘과는 달리 노동자를 “완전한 시민”으로 대하고, 부적격자를 지원해야 하는 임무를 갖게 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로 상징되는 이러한 변화는 “‘복지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제 복지국가에서는 ‘생산성의 사회적 비용’과 ‘사회적인 것의 경제적 비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양자를 결합해야 했는데, “이 두 경향이 수렴하는 지점이 ‘노동 안에서의 즐거움’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출현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380)
    생산성의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절감할 것인가? 전쟁 중 인력난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이들까지 노동 현장에 배치해야 했던 영국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노동의 정신병리학은 “전후 개혁의 요구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 볼 수 있다(381). 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노동과학과는 달리 노동에 부적합한 자들을 재활하고 재통합하는 것이 효과적인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노동에 적합/부적합하다는 개념이 상대화되고, 이제는 노동이 노동자에게 의미 있냐는 변수가 노동자의 건강을 결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재해의 예방에 대한 관념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노동, 노동관계의 가치를 회복하지 않으면 이제 재해를 질적으로 예방할 수도 없고, 장애인을 재통합할 수도 없고, 노동자의 상습 결근을 근절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 안에서의 즐거움’을 확보하는 것이 확실한 해법이 될 터이다(381-86).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기업의 재해율’과 ‘결근율’을 생산력 측정의 도구로 삼고, 여러 관리 기술로 그것을 줄이고자 하였다[‘사회적 감사’] 한편 경영학의 발달은--‘사회기술체계 학파’에서--노동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동자의 욕구 충족, 즉 사회적 욕구 충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자율적 팀제의 구성은 노동자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노동자의 노동과의 “왜곡된 관계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사회적 욕구’](386-90). 
    사회적인 것의 경제적 비용은 어떻게 절감할 수 있을까? 1960년대에 복지국가의 기본 도식은 붕괴의 징후를 보였다. 이에 따라 두 가지 비판이 제기됐다. 첫째, 복지국가의 사회보장은 부의 사회적 재분배를 과연 가능케 한 것인가? 사회적 보상체계의 발달은 실제로 “인구학적으로 유리한 사회직업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훨씬 유리한 보호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도왔”고, 이에 따라 복지 지출의 증가는 가속화될 것이었다. 둘째로, 사회보장제도가 단일한 리스크 개념에 근거하는 것은 조화로운 사회정책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노동자의 책임감을 동원하거나 노동자의 자율적 자원에 기대는 등 변화는 노동자의 엄격한 법적 지위 탓에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변화는 노동자들의 자율성과 집합적 책임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뤄졌고, 새로운 신자유주의 철학의 “배양”은 이와 맥을 같이 한다(393). 
    사회적인 것의 경제적 비용 절감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이뤄진다. 여기서 두 핵심 요인은 “생산과 사회지출의 격차 증가”(노조의 실업 우려, 기업의 숙련 노동력 부족 등의 맥락이 있음)와 “질병보험의 비용 증가”이다. 전자는 주로 평생교육 제도를 통해 해결된다. 그것은 한번 획득한 일자리에 안주하고 자신의 입맛에 들지 않는 일자리는 거부하는 노동자들의 “패악”에 대해, “개인의 유연한 자율성에 호소함으로써 주체에 대한 법적/지위적 개념의 값비싼 비용을 청산하고, 사회적 급부와 생산의 점증하는 괴리를 해결하는 것”이다. 후자에 있어, 원칙상 건강 복지 비용은 삭감될 수 없었지만, “예방과 관련해 전체 경제에 끼칠 질병의 비용을 염두에 둔 선택과 우선순위에 집중할” 수는 있다. 그것은 “건강 캠페인을 인구 전체에게 실시”하고(이는 무책임함을 퇴치할 수 있다) 리스크가 높고 비용을 많이 끼치는 특정 사회 집단에 대한 “선별적 행동 프로그램”의 실시로 가능할 것이다(391-94). 
    생산성의 사회적 비용 절감, 그리고 사회적인 것의 경제적 비용 절감이라는 두 개의 노선은, “상호교차하며 두 개의 변별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대응을 낳았다.” “첫 번째 층위에서 평생교육은 노동자의 생산적 역량을 ‘해방’시킴으로써 생산의 논리와 대립하던 노동자의 탄력적인 법적/지위적 태도를 붕괴시켰다.” 한편 “두 번째 층위에서 새로운 보건정책은 건강보험의 비용을 절감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들로부터] 협력을 구하기 위해, 기업에 대한 사회적 감사를 사회적으로 개인들을 동원하는 도구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전략은 코포라티즘의 전략과 다소 다른데, 코포타리즘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경제적인 것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두지 않고 “더 큰 효율과 더 적은 비용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둘을 결합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402-3). 즉 이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심리학적 기술과 담론 유통의 확산, 그리고 질병과 건강의 구분의 사라짐은 “동원”(mobilization)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이제부터 국가는 그 협상에서 논의를 주재하고 독려하는 역할만을 수행할 것이다.”(404) 


* 『푸코 효과』에 실린, 이언 해킹의 "통계학의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와 프랑수아 에발드의 "보험과 리스크"를 요약함. 



9장 “통계학의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해킹은 우선 통계학이 인문과학과 국가의 통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탐구한다. 통계는 우선 “근대 국가의 권력테크놀로지의 일부”이다(270).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사실은 단순히 통계적 특성을 갖는 사실로 변화해갔다.”(271) 통계 수집 과정은 새로운 분류 체계를 고안하고 이것은 심지어는 ‘정상성’과 같은 메타-개념을 발명하기까지 이른다. 또한 통계학은 보험테크놀로지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271-74). 그 다음 해킹은 어떻게 “결정론의 약화”와 “우연을 길들이는 것”(276), “숫자에 대한 열정”(277)에 통계학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탐구한다. 19세기 중후반 이전까지는 뉴턴식 결정론이 득세했는데, 해킹이 스케치한 일련의 사건들(279-83) 이후 ‘통계적 확률은 우리의 무지의 소산이다’는 관념, 즉 더 많은 관측과 과학적 일반화는 그 확률적 우연을 설명할 것이라는 관념은 우연론(퍼스)이나 비결정론으로 대체되어 간다. 통계학의 출현으로 “데이터를 수집함으로써 실용적 문제를 해결하는 특정한 방식이 등장했다.”(287) 이러한 방식은 보건 향상과 같은 인구의 통치와 관련이 있는데(289), 재미있는 것은 “통계학을 통해 결정론이 약화되고 우연이 길들여졌지만, 그것이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290). 

    분류 체계를 생산하고 확률을 측정하는 통계학은 보험테크놀로지의 발달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296). 10장 “보험과 리스크”에서 에발드는 통치기술로의 보험과 리스크의 주요한 특징을 지적한다. (11장 “‘대중의 생명’과 보험테크놀로지”에서 르페르는 주로 제2제정기 프랑스의 사례를 들어, a) 종신연금이 어떻게 생명보험의 형태로 변화하고 인구를 ‘인적자원’으로 대하게 되었는지, b) 보험이 어떻게 상호부조적인 노동자 조합 혹은 박애주의적 고용주 조합을 파괴시키고 c) 손해배상에 대한 자유주의적 프레임을 변형시켰는지 다루고 있다.) 에발드에 따르면 아주 다양한 양태를 취하고 있는 보험을 간단히 정의하기란 매우 모호한데, 왜냐하면 보험테크놀로지가 취하는 다양한 형태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보험테크놀로지가 어떠한 대상을 두고 어떻게 이윤을 창출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291-92). 따라서 보험은 언제나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며 끊임없이 점검되고 재조정되는 통치실천의 효과이다(293). 보험은 리스크 테크놀로지에 근거한다. 그런데 여기서 리스크는 단순한 위험이 아니며, 그것은 어떤 인구 집단이 “대표하고 소유한 가치 또는 자본에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건을 다루는 특정한 방식을 지칭한다.”(294) 이는 선험적인 개념이 아니며, 보험업자가 현실의 요소들을 어떻게 “분해하고 재배열하고 질서짓는”(293)지에 따라 생산된다. 이 지점에서 보험을 “특정한 유형의 합리성, 확률 계산에 따라 정식화된 합리성의 실천”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294). 이를 다소 쉽게 바꿔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보험업자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불의의 운명에 내맡길 수밖에 없다고 느꼈던 것에서 리스크를 생산해낸다.”(295)

    상술했듯이 통계학과 보험은 밀접하다. 통계학은 우연(확률)을 계산 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개인의 책임에 기반을 둔 사법적-도덕적 사고방식의 토대와는 완전히 다른 합리성을 가능케 하고 사고(事故)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만들어 낸다. 리스크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며 비교를 해볼 수 있다. a) 확률을 통한 계산 가능성.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판사는 과실과 책임소재를 따지나 보험업자는 “의지의 작용과 상관없이 사고의 객관적 확률에 근거”해 계산한다(298). b) 집합성. 법적 합리성에서 사고는 언제까지나 연루된 당사자들의 특별한 일이다. 그리고 사고는 “개인적 과실·경솔함·부주의에 의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리스크에게 있어 사고는 어떤 특정한 인구 집단이 피할 수 없는, 계산된 확률에 따라 일어난다. 따라서 보험은 리스크가 계산 가능한 특정 인구집단 내의 사람들과의 ‘추상적 상호성’을 구축하여 개인들의 위험 부담을 분산시킨다. c) 리스크는 하나의 자본이라는 점. 보험의 대상은 특정 시점에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보험의 대상은 보상해줄 자본이다. 인적자본에 대한 보험의 발달로 인해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는 고용주와 법적 다툼을 통해 인간다움을 보장받을 투쟁의 문제가 아닌 전문가로부터 “개인의 위치”를 배정받고 내 부상으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는 문제로 전환된다(302). 

    따라서 위의 특징으로부터 보험의 정의를 정리하자면 “통계 법칙에 따라 조직된 상호성을 통해 우연의 효과를 보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에발드는 여기서 간과된 문제인 보험의 핵심 요소인 정의(正義)를 더 짚어야 한다고 한다. 보험의 특별한 점은 집단의 위험 부담이 “정의의 원칙, 권리의 규칙에 따라 이뤄질 수 있게 만든다는 점이다.”(303) 보험적 합리성과 자유주의적 사유는 다르다. 후자에서 운의 분배는 정당한 것(혹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대비는 개인의 몫이다. 반대로 보험은 자유주의 사법 원리와는 다른 합리성 원리를 제공한다. 보험에서, 집단은 자연적 불운을 집합적으로 부담하고, 그 부담의 액수는 규정에 따라 정해진다(생각해보면, 바로 이 점이 “사회적 불평등이 가진 불의를 분명히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프루동은 보험이 “부자의 새로운 특권”(304쪽; 또한 321-22쪽 참고)이라고 했지만, 사실 보험의 혜택을 전 사회집단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것은 보험은 “사회적 재분배라는 관념을 함축”하는 것이 아닌가(304).

    에발드는 보험이 만들어 낸 인식론적 변화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307). 보험의 세 가지 기술의 차원--경제적·금융적 기술이라는 것; 도덕적 테크놀로지라는 것; 손해 보상의 기술이라는 것--은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불가해한 자연의 섭리를 세속화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보험은 시간의 인식조차 변화시켰는데, 보험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의 영속성을 가정하게 된다(309). 앞서 집합성을 논의할 때 살펴보았듯이 또한 보험은 사회적 연대를 변화시킨다. “[조합이나 가족의 상호성과는 달리] 보험의 상호성은 개인을 자유롭게 놔둔다. 보험은 최대한의 사회화와 최대한의 개별화를 결합한 연합형태를 제공한다.”(300) 그런데 이러한 연합은 애정이나 상호 감시, 부조의 원리가 아닌 전적으로 통계적이고 수학적인 계산을 통한 사회적 혜택과 부담의 분담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 덕택에 보험은 빈곤과 노동계급의 불안정성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다(306). 보험은 노동권, 노동법의 출발점이기도 하다(308). 

발터 벤야민,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 신우승 옮김, 전기가오리, 2016.


매우 유명한 논문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이하 「기술복제」)에서 벤야민의 논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제1절에서 천명하건대, 그것은 바로 “파시즘의 목적에는 전혀 쓸모없”는 혁명적인 예술 테제를 정식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변증법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생산 조건에서 전개되는 변증법은 경제(토대; 하부 구조)뿐만이 아닌 상부 구조(국가, 이념, 예술, etc.)에서도 전개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예술에서 변증법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술작품에는 제식 가치와 전시 가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진정한(authentic)’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언제나 제의에 기초를 둔다.” 하지만 기술복제로 인해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파괴되고, 그것은 제의의 기능과 전통이라는 맥락으로부터 떨어지게 된다. 또한 전시가치가 제식가치보다 양적으로 매우 우월하게 된다. 이러한 양적 변화는 예술작품의 질적 측면의 전화를 이끈다(변증법: 양질 전화의 법칙). 예술의 실천은 이제 제의가 아닌 정치에 기초해야 한다. 예술작품의 새로운 가능성을 벤야민은 영화를 통해 일부 고찰하고 있다(cf. 6절 ‘기계 장치와 통각’, 12절 ‘대중에 의한 영화의 통제’, 13절 ‘영화에서 생산자와 대중의 일치’, 16절, 18절 ‘영화와 지각의 산만’ 등) 

    그렇다면 파시즘과 자본은 어떤 목적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에 벤야민은 그것들에 사용되는 개념을 “파기”하고자 한 것일까? 마지막 절에서 요약되어 제시하듯이 파시즘은 정치를 심미화하고자 한다. 이는 무슨 뜻일까.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대중정치의 시대에 대중을 동원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체제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경우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파시즘은 정작 중산층을 비롯한 광범위한 대중들을 지지기반으로 삼지만 “이 대중이 폐지하고자 하는 소유관계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파시즘은 대중 동원이 가능한 예술(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예술)을 사용해 “대중이 자신을 표현하게” 하지만, 정작 그 예술을 통해 얻어져야 할 것과 예술의 측면에서도 변혁되어야 할 소유관계는 은폐한다. 따라서 파시즘의 귀결은, 영화와 사진에서 그 진보적 함의를 소거한 채 그것을 오직 대중 동원에만 이용하고 자신들의 선전을 낭만화하는 ‘정치의 심미화’일 수밖에 없다(미주 17 참고). 물론 전통과 아우라가 파괴된 시기 영화나 사진에서 제식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 같은 예술주의적·낭만주의적 요소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기묘하게도 예술 영역에서 기술의 발전은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유익할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으나 그것은 파시즘 국가 체제를 위해 동원되고 있다. 이는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설명을 떠올리게 한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독점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극에 치달은 생산력의 발전은 곧 생산의 사회화의 가능성을 의미하고, 다만 이뤄야 할 과제는 전반적인 소유·생산관계의 변혁이기 때문이다. 즉, 제국주의는 더 높은 사회경제적 질서[사회주의]로의 과도기이다. 한데,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세계의 완전한 분할이 달성된 시점에서 금융자본의 이익 추구는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즉 “식민지 분할과 금융자본의 세력권 간의 불균형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자본주의하에서 전쟁 이외”의 방법은 없다. 이러한 맑스주의적 분석에서 벤야민은 기술이라는 또 하나의 변수를 기입하고자 한다. 생산력의 발전을 소유 관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니 기술의 발전 역시 “생산력을 부자연스럽게 활용하는 쪽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전쟁만이 소유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현재의 모든 기술 수단을 동원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파시즘은 전쟁을 미학적으로 정당화하기에 이를 수밖에 없다. 

    벤야민이 제시한 테제의 혁명적 가능성을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변화한 테크놀로지와 예술 형식에서 예술의 실천은 정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그의 테제는 파시즘의 목적을 쓸모없게 한다. 물론 여기서 예술의 정치화를 ‘정치적 목적의 선전에 예술 작품을 동원한다’는 식으로 일면적으로 읽는다면 곤란할 것이다. 새로운 예술 형식은 예술의 대한 대중의 참여 방식과 인간의 지각체계에 변화를 불러오고(18절), 대중에 의한 예술 형식의 직접적 통제를 가능하게 하고(8절), 예술의 소유관계와 생산관계의 민주화를 불러오고(13절), 시각의 무의식을 일깨우고(16절), 즐거움과 비평적 태도가 결합하고(15절), 정치적 변혁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일깨워 준다는 점(미주 4)에서 의미가 있다. 즉 새로운 예술 형식의 혁명적 가능성은 말 그대로 그 형식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푸코 효과 1부 1장 요약

2017. 11. 12. 00:03

푸코 효과 1부 1장, 콜린 고든, “통치합리성에 관한 소개.”


아래의 문장들은 대부분 책에서 발췌한 것임. 그러나, 따로 인용 부호를 붙이지 않았음. 



요약


통치는 대체로 ‘품행의 인도’라는 의미로 정의된다(15). 통치술, 혹은 통치합리성은 통치실천의 성질에 관한 사유방식 혹은 사유체계인데, 푸코의 분석은 주로 정치 영역을 향하고, 그리고 네 가지의 역사적 영역에 적용된다: (a) 고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의 통치 성격 그리고 사목권력의 형태로서의 통치; (b) 국가이성, 내치국가의 관념과 결부된 근대 초기 유럽에서의 통치 원리들; (c) 하나의 통치술로서의 18세기 자유주의의 등장; (d) 전후의 신자유주의 사상(16). 푸코의 통치성 분석은 통치실천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즉 통치실천의 조건과 한계는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고전적 정치철학과 구분된다(23). 또한, 통치실천은 ‘인구’--개인들이 생명존재로 이해되는 방식--에 대해 개입한다는 점에서 푸코에게 중요한 관심사이다(19, 23). 

    푸코는 16세기 유럽에서 국가이성이 등장한 것을 자율적 합리성으로서의 근대적 통치성의 출발점으로 꼽는데, 왜냐하면 통치의 원칙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25). 그런데 마키아벨리주의에는 한계점이 있는데,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자신의 공국을 보존하고 자신의 주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26, 138). 유럽의 국가이성을 마키아벨리즘의 한계를 넘어 국력에 관한 지식으로 만든 정치적 사유양식은 관방학[내치학] 아래 등장한 일련의 이론 등에서 잘 나타난다(27, 140-46). 관방학에서 내치는 ‘전체적[그리스의 정치 기예]인 동시에 개별적[교회의 사목]’이다(24-25, 30쪽 참조). 

    근대 초기 국가이성과 내치학의 결합은 인식론적 의미(통치행위가 그자체로 환원불가능한 합리성을 띤 기예가 됐다는 점에서)그리고 윤리적 의미(통치활동이 개인의 품행의 지도와 연결됐다고 여겨졌다는 점에서)에서 독특했다. 그런데 자유주의에 들어와 통치술은 변화하게 된다. 내치학[관방학]에서 학문들은 ‘리바이어던의 감각 기관들’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했으나, 정치경제학에 이르러는 국가의 한계가 명확히 인식된다(34-36). 그런데 자유주의에는 어떤 문제가 존재한다. 자유방임은 행동하지 않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38). 스튜어트와 스미스의 대립, 즉 국가가 어디까지에 개입하여 자유방임의 질서가 실현되도록 만들 것인가? 자유주의에서는 이것이 핵심 문제가 된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맑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훨씬 상호적으로 응집되지 않은 프로젝트이다(40). 

    그런데 자유주의는 내치학과 겹쳐지는데, 왜냐하면 모두의 관심은 바로 안전의 보장이었기 때문이다(41; 즉 여기서 푸코는 자유주의에 대한 법률적 접근[주권의 정당성의 원천은 법치이다 운운]과 경제적 접근[자유방임이 경제적 번영을 보장한다 운운]을 비판하는 것이다). 자유는 안전의 조건이다. 즉, 개인들의 자유로운 운동은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온전히 파악되기 어렵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운동의 취약성에--그리고 그것을 원활히 할 안전 메커니즘의 확립에--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43). 즉 최소화된 비용으로 최적의 (자유시장) 규범을 보호하는 것이 안전의 확보인데, 자유주의의 국가에 대한 사법적 규제도 이런 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40, 48). 

    한편 자유주의에서는 법적 주체와 경제적 주체 간의 모순이 존재한다. 이러한 양립 불가능성을 통합할 수 있는 복합적인 통치적 공간을 고안해 내는 것이 필요해지는데, 여기서 시민사회에 대한 자유주의만의 독특한 이론이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44-45). 푸코의 『광기의 역사』의 공공 의료제도 변화에 대한 분석에서 시민사회의 안전 메커니즘 정교화가 잘 드러난다(47-48). “즉 시민사회는 상호간의 감정적 유대와 도덕적 의무 같은 원리들에 근거한, 비사법적인 동시에 비경제적인 사회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458쪽, 옮긴이 후기). 또한 시민사회라는 관점은 인구에 대한 새로운 통치적 분석--즉 경제적 통치--을 낳았다. 이 방식에는 두 가지 조류가 존재한다: 통치기능 자체를 경제적으로 규제되는 구조나 제도로 대체하려는 시도(벤담), 그리고 현존 경제구조나 제도에 통치의 하부구조의 기능을 부여하려는 시도(49-52). 

    그런데 앞서 본 자유주의의 초기 기획에는 모순과 이중성이 존재했다(54-55). 이러한 모순들이 프랑스 1848 혁명과 공화주의 운동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시민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회적 권리와 시민사회의 의미를 둘러싼 갈등은 국가의 역할에 관한 의견차이였는데, 이것은 [통상 관념과는 다르게] 자유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주의는 자신이 가진 비일관성을 잘 알고 있다(58). 프랑스 제3공화국은 자유주의의 재정비 과정을 보여준다(60-63). 법은 사회의 역사적, 상대적 산물이자 표현으로 간주되고, 대혁명 당시 파괴되었던 매개 조직들의 법적 지위를 되살리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국가와 개인은 상대화되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역시 경계가 모호해진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으로 통합되고, 시민사회에 대한 특정한 관념[맑스적 관념] 역시 소멸되기 시작한다. 

    푸코의 관점은 국가가 사회가 서로 대립한다는, 이러한 개념적 경계를 상대화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근대 통치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범위에 대해 이루어진다. 그러한 통치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새로운 [인구의] 통치 과제의 조사와 확정에서 사적 개인과 조직이 행하는 주도적 역할, 전문가들과 행위자들 사이 교류로 이뤄지는 상호작용, 지방자치의 민영화, 자원활동의 동원 등(66-67). 즉 국가는 단일성, 개체성, 엄밀한 기능성을 지닌 적이 없었다(155). 

    푸코에 따르면 국가의 통치화는 유난히 뒤틀린 현상이다. 왜냐하면 통치의 전술이 국가에 속해야 할 것과 속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의하기 때문이다(155). 통제와 규율의 사회에 상응하는 행정국가[물론 여기서 통치가 없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36-37쪽 참조]가 자유주의 이념과 정치경제학의 탄생이라는 정치-인식론적 혁명(34)으로 인구에 대한 통치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이 푸코의 관심이라고 볼 수 있다. 



Diane Vaughan. 1997. “The Trickle-Down Effect: Policy Decisions, Risky Work, and the Challenger Tragedy.” California Management Review 39(2): 80-102. 


본(Vaughan, 1997)의 글은 챌린저 호 사고 10년 후에 발표되었으며, 사고에 대한 원본 문서들과 아카이브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기존의 통념적 해석들에 반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내놓고 있다. 본은 사고의 문제를 그저 화상 회의의 커뮤니케이션 상 문제로 돌리는 접근이나, 나사 경영진들의 엔지니어들에 대한 압력으로 돌리는 접근—따라서 챌린저 호 사고를 비정상적 사례(anomaly)으로 환원시키는—에 반대한다. 본은 다음의 네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통념을 수정하고자 한다: (1) 단순 발사 결정 이전의 정책 결정들이 챌린저 호 사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최고 우주산업 관리자들의 의사결정이 조직의 문화에 마치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를 일으키고, 그것은 조직의 구조와 문화를 바꾸고 공학적 위험평가에 영향을 끼친다; (3) 조직 문화는 세 가지 측면—생산성에 대한 염려, 관료적 책임, 기존의 기술 문화—에서 의해 좌우되었다; (4) 복잡한 문화가 매니저, 엔지니어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위의 사항들을 고려했을 때, 어떤 의사결정들과 복잡한 문화가 챌린저 호 사고의 (인과적) 원인인 고체 로켓 추진 연료 팀의 ‘위험을 수용하고(accept risk)’ 비행을 허가한 반복된 결정을 가능케 했을까? 본은 정치적 거래(political bargains)과, 조직 엘리트들의 목표설정이 생산성에 대한 압박을 불러왔고, 생산성에 대한 압박이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한 결정들이 세 가지 차원의 문화를 낳았다고 더 나아가 주장한다. 

    (1) 기존 기술 문화(the original technical culture): 아폴로 시대 수 차례의 성공을 낳은 공학에 대한 기준은 나사의 기존 기술 문화를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직접 일을 하고 숙련된 기술 전문가들에 대한 의지 및 존중—즉 “손을 더럽히는(dirty hands)” 접근방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정량적이고 원칙적인 것이 중시되며, 주관적이고 직감적인 것은 중요한 결정에 반영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기존의 기술 문화는 다음의 두 문화 사이에서 수난을 겪게 된다.

    (2) 정치적 책임(political accountability): 아폴로 시대에, 정부는 나사에 백지 수표를 위임했다. 하지만 최고 관리자들은 의회에 우주 왕복선을 마치 수익사업처럼 홍보했고, 우주 왕복선을 마치 “버스”처럼 만들고자 했다. 즉 생산성과 비용절감의 압박이 생기게 되었고, 또한 이는 일정에 대한 압박도 불러왔다. 이것은 조직의 기존 기술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3) 관료적 책임(bureaucratic accountability): 아폴로 시대 이후, 국제 우주 경쟁과 우주 왕복선의 다중 부품 디자인, 복잡한 목표 탓에 최고 관리자들은 “하청을 주는(contracting out)” 관행을 제도화시켰다. 이런 하청 탓에, 나사와 하청기업에는 협업을 위한 더 많은 규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더러운 손” 접근 문화도 이제는 약화되었다. 많은 나사 엔지니어들은 손을 더럽게(=직접) 만들기보다는, 하청업체를 감독하는 책임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사무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되었다.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은 다음과 같이 챌린저 호 발사 과정에서 발견된 비정상성들을 정상화시켰다(normalization of deviance). 상부에서의 우주 왕복선을 경제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겠다는 결정들은, 엔지니어들이 발견된 위험—비록 수용 가능한 것일지라도—들을 좀 더 면밀하고 꼼꼼하게 테스트하기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문제인 것은 일정에 관한 것으로, 빡빡한 일정 때문에, 데이터가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양적으로 나타내지 않는 한 일정을 딜레이하기가 어려웠다. 관료적 책임의 문화 때문에 엔지니어들은 ‘나는 규정을 잘 준수했다’는 것으로 안심을 받기 쉬웠다. 규정을 지켰다면,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낙수 효과들 때문에, 엔지니어들은 지속적으로 발견된 위험의 신호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혹은 신호를 받아들어더라도 위험의 증거를 예견된 것이나 수용 가능한 것으로 재해석한 것이다[normalization of deviance]. 

    본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세 가지의 제언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엘리트들의 결정에 대한 것이다. 최고 관리자들은, 그들의 의사결정이 위험한 작업을 하는 조직 밑바닥의 구성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또한 조직의 구조를 바꾸는 결정은, 그것이 안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고 난 후 진행되어야 한다. 조직을 감축하는(downsize)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 안전성을 강화할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에러가 생길 가능성을 늘릴 수 있다. 

    두 번째는 문화에 대한 것이다. 조직은 규칙을 만들지만, 그 규칙들 자체가 추가적 위험을 생산할 수 있다. 규칙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작업 환경에서 어떻게 규칙이 위반되고 준수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조직은 왜, 어떻게 규칙이 위반되는지에 관해 배울 수 있다. 또한 위험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는 일터에서 다양성(diversity)가 안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인종, 성, 경험의 차이 등의 다양성은 어떤 결과를 낳는지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신호(signals)에 대한 것이다. 의사결정이나 회의에 있어, 모든 유관한 정보들이 고려될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 그렇기에, 당연하지만 하급자나 신참, 혹은 조직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인정할(acknowledge) 필요가 있다. 이들은 유용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나 표현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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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March, 1991)는 조직에서 탐험(exploration)과 활용(exploitation)을 구분한다. 탐험은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고, 대안들을 실험하는 과정이다. 챌린저 호 사고에서도, 엔지니어들은 기존의 알려진 지식을 활용하는 것보다는 미지의 영역인 우주 왕복선 개발을 해온 셈이니 그들의 프로젝트를 크게 보아 탐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는 탐험과 활용이 서로 균형(trade-off)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탐험은 장기간에 걸친 결과를 낳고, 불확실하며 리스크가 많다. 한편 활용은 조직이 보유한 지식을 써 단기간에 확실한 이익을 준다. 

    마치의 조직학습 이론의 관점에서 챌린저 호 사고와 위의 세 가지 제언을 해석할 수 있다. 본의 엘리트 의사 결정에 대한 제언 중 하나는 조직의 구조를 바꿀 때에 그 안전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단기적 관점에서 조직이 보유한 지식의 양을 줄이기 때문에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이는 탐험을 유리하게 한다. 챌린저 호 사건의 경우, 하청업체 계약을 하는 등 조직의 구조를 변경했으나 챌린저 호 발사 일정이 타이트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short run) 위험의 발생 가능성은 더더욱 커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본은 또한 조직의 규칙의 작동을 잘 보기 위해서는 그 규칙의 위반과 준수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의 시뮬레이션은, 조직의 규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구성원으로 참여할 때 조직 전체의 평균 지식이 향상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규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새로운 조직의 규범이 개선될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학습의 빠르기가 다른 이종적인(異種; heterogenous) 조직 구성원들이 있을 때 조직의 평균 지식이 높아진다는 마치의 시뮬레이션 결과와도 상통한다. 조직 내에서 규범을 느리게 학습하는 구성원들은 조직 안에서 발언권이 세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하급자나 신참, 조직의 주변부에 있는 구성원의 의견을 꼼꼼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본의 마지막 제언은 역시 위와 같은 사항을 고려할 때 적실하다고 볼 수 있다.